와룡촉대(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내 연락을 받은 손님은 퇴근 후 세 시간 걸리는 거리를 달려 밤늦게 작업장에 도착했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나와 함께 행희와 물레 도깨비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정 설명을 하는 동안 남자의 반응이 꽤 신경 쓰였는데 물레 도깨비가 행희의 옆에 딱 서서는 친정언니 같은 포스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성미 급한 그녀라면 남자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순간 무슨 도깨비장난을 벌일지 몰랐다.
남자, 범식은 잔뜩 긴장해서 들어와서는 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도사라든가 서낭신이나 호부 같은 낯선 이야기를 현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눈앞에서 바람도 없이 촛불이 꺼지는 몇 번이나 보기는 했다지만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귀신 정도. 그런데 촛대에 서낭신이 봉인되어 있다든가, 자신의 집안에서 남의 마을 서낭신을 거의 백 년 동안이나 빼앗아 가지고 있던 셈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생각도 못한 이야기라서…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의 첫 번째 반응에 물레 도깨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한 것도, 그보다 더한 것도 세상에는 가능하고 이미 있어왔지만 중요한 것은 내 이야기를 믿는가, 아닌가겠지요.”
그의 앞에서 촛대에 초를 꽂아놓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행희에게 미리 부탁을 해뒀기 때문에 초에 붙은 불은 흔들림도 없이 노랗게 타올랐다. 촛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고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촛불을 보고 있다가 이윽고 물었다.
“망석중이…그건 나무로 만든 겁니까?”
“그럴 걸요.”
망석중이란 줄을 매달아 움직이는 인형, 말하자면 마리오네트라고 할 수 있다.
내 말에 그는 시선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열심히 기억해보는 얼굴이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방에, 오래된 반닫이가 있습니다. 거기에 계절이 지난 옷을 보관하는데 그 가장 깊은 바닥에 보자기로 싼 상자를 넣어두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 상자를 화장대 아래에 두셨습니다. 한 번은 보자기를 풀고 상자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혼이 났지요. 그렇게 무서운 어머니는 그때도 그 후에도 처음 뵈었던 것 같습니다.”
“안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나요?”
“어렸을 때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무토막에 줄이 묶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와 행희, 물레 도깨비의 시선이 서로 부딪쳤다. 찾았다.
“그걸 가져올 수 있겠어요?”
물레 도깨비가 내 말에 “있겠어요가 뭐요? 반드시 가져오라고 해야지!”라고 성을 냈다.
“먼저…어머니께 여쭤보고…”
범식이 약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물레 도깨비가 “무어라? 저 빙충이 같은 놈이!”라며 그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행희가 매달려 막았다. 아놔, 저 성질머리 진짜…
“여쭤보고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하시면 결혼은 포기하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약혼한 여자가 좋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워낙에 어머니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거라…일단 제가 말씀을 드려보고 아니, 설득을 해 볼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하는데 못내 자신 없는 표정이다. 행희가 길길이 날뛰는 물레 도깨비를 놓치기 전에 서둘러 남자를 내보내야 했다. 아무래도 물레 도깨비가 친정 언니 역할을 제대로 해줄 것 같았다.
그를 호위하듯이 물레 도깨비로부터 가로막고 데려갔다. 출입문을 앞에 두고 나는 문득 물었다.
“결혼을 앞둔 기분, 어때요?”
내 질문이 뜬금없다는 건 안다. 남자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온 세상이 다함께 뜯어말리는 기분입니다.”
그 말리는 온 세상에 나도 포함되는 거 같다. 어머니가 아끼는 물건을 가져와서 집안을 지키고 있는 호부를 망가뜨려야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한 셈이니까. 그런 주제에 위로랍시고 한 마디 했다.
“온 세상을 상대로 싸우고 있군요. 용감하네요.”
그가 피식 웃고 문을 열었다. 나는 문 뒤에 숨어 그를 배웅했다.
“왜 그냥 보내는 게요! 단단히 약조를 받았어야지! 가서 어머니에게 물어본답시고 말만 걸었다가 안 된다는 소리에 그냥 돌아오면 그 때는 어쩌란 말이오? 행희 낭자를 다시 그 집으로 돌려보낼 셈이오?”
범식이 나가기 무섭게 물레 도깨비가 달려와서 내게 쏟아 부었다. 행희가 그녀의 팔에 달랑달랑 매달려 끌려왔다가 어쩔 줄 모르며 나와 물레 도깨비를 번갈아 보았다.
물론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기회를 준 거야. 어쨌든 그는 모르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가문에서 생긴 일을 스스로 풀 수 있게 기회 정도는 줘도 괜찮잖아?”
“그랬다가 안 된다면서 촛대를 도로 가져간다면 그때는 어쩔 거요?”
“그 때는…”
히죽, 웃음이 나왔다.
“보쌈이라도 할까?”
과부는 아니지만…. 아냐. 신랑이 인형이면 청상과부나 다름없는 몸이잖아?
“뭐요?”
물레 도깨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입을 벌리고 행희가 빨개진 얼굴을 나를 쳐다보았다.
“목신 매매도 하는데 목신 보쌈이라고 못할까. 어쨌든 그때 가서 보자고.”
어쩐지 태평하게 말해버렸다.
“허 참.”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물레 도깨비는 더 이상 뭐라고 나무라지 않았다. 행희를 토닥이며 한 마디 했을 뿐이다.
“김서방이 저렇게 큰소리를 치니 어디 우리도 두고 봅시다.”
음, 괜히 큰소리 쳤나. 하지만 흰소리는 아니었다.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내게는 없었다. 고향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남의 집 호부 노릇이나 하다니. 마치 노예 같잖아? 그리고 남겨진 마을도 걱정이 되고.
“그러고 보니 마애도라고 했지? 어디에 있는 섬이야?”
섬 이름을 듣고 이미 검색을 해봤지만 나오지 않았었다. 서낭신을 잃어 벌써 섬은 폐허가 되어버린 걸까.
내 물음에 행희는 물레 도깨비를 통해 “바다 한 가운데 오도카니 있어 사방이 오로지 푸르다.”고 말했다. 어딘지 본인도 모르는 것 같다. 섬의 풍경은 어떠냐고 묻자 “바닷물이 파랗게 예쁘고 모래는 금빛이고 바위는 둥글둥글하니 깎였으며 산이 온화하고 물이 깨끗하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걸로 어디인지 어떻게 알아. 산의 이름이라든가 특이한 바위라든가 뭐 그런 거 없나? 좀 더 물어봤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 이야기만 듣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 봐야 백 년 전 사람들이니 지금은 살아있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섬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행희의 얼굴은 그립고도 다정한 마음이 넘치듯이 표정으로 드러난다. 물레 도깨비를 통하는 복잡한 대화를 하면서도 좀처럼 말을 멈추지 못했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과 뒷산 산신령과 우물의 용신과 나무 밑으로 놀러 오는 마을 아이들이며 평생에 단 한 번 먼빛으로 본 적 있다는 동해 용왕자의 이야기며.
지금까지와 비교하면 수다스러울 정도로 말이 많아졌다.
정말로 그리운가 보다. 고향이. 하지만 그곳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것이다. 아니 마을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리고 말심이라는 여자애가, 여섯 살인데 어찌나 똑똑한지 하루 만에 한글을 익히고 제 이름을 스스로 쓰더라는구려. 형제가 다섯인데 둘은 큰 애라 매일 일하러 가고 하나는 엄마가 매일 등에 업고 다니고 손아랫 동생을 말심이가 데리고 다녔다오. 기특해서 가끔 산열매도 따다 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했다는구려.”
가만? 방금 뭘 들은 것 같은데….
물레 도깨비가 전해주는 그녀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고 있다가 문득 뭔지 걸리는 게 있었다. 방금 뭘 들었지? 그거…말심이.
“이말심?”
나도모르게 말하자 행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아이가 이씨인 건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오.”
물레 도깨비도 흥미가 동한 얼굴로 말을 전한다.
“잠깐, 잠깐만.”
계단을 올라가려다 말고 멈춰서 나는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아니, 같이 가자. 가서 보여줄 게 있어.”
두 여자가 눈을 깜박이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나를 따라왔다.
이말심. 그 이름 말인데. 기억이 난다고. 바로 어제 봤으니까 당연하지. 보면서 하여간 옛날 사람들은 왜 딸 이름을 이렇게 지었담 하고 생각했던 것까지 기억난다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고려여자, 은행나무’란 키워드로 다시 한 번 검색했다. 어제 들어갔던 블로그를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섬의 사진에서,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루어진 해변, 커다란 은행나무와 그 옆의 사당이 있는 사진이 나타나자 내 뒤에 있던 행희가 불쑥 모니터 앞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아…”
은행나무와 사당의 풍경을 매만지는 손끝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스크롤을 내려 벽화 사진 아래, 마을 풍경을 찍은 사진으로 이동했다. 노인정 앞 평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동네 어르신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 중 할머니 한 분을 다시 단독으로 찍어 놓고 그 밑에 설명하고 있었다.
[이 마을의 최고령 어르신 이말심 여사. 올해 104세이신데 아직까지 정정하시다. 매일 아침 사당에 나와 자녀들을 위해 기원하신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다.]
“말심이…”
주글주글 늘어진 얼굴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행희가 이름을 불렀다. 그 옆의 노인들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부른다.
“용원이, 병근이, 삼례. 셋 다 그때는 말도 못하는 아가들이었고 막둥이. 막둥이는 나 있을 때 갓난쟁이였는데…”
키보드 위로 물방울이 툭…투둑…떨어졌다.
행희는 모니터를 쓰다듬던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숨소리같은 흐느낌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왔다.
“다행……정말로…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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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촉대(6)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블로그를 뒤져보고 섬의 이름이 지금은 우면도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름을 알고 나니 검색을 통해 조금씩 정보를 더 모을 수 있었다.
우면도는 울릉도에서 북서쪽으로 30km 떨어진 작은 섬인데 예전에는 백여 가구 되었던 사람들이 거의 떠나고 이제는 이십여 가구만 남았다고 한다. 그마나 젊은 사람은 없었다.
물레 도깨비의 말대로 쇠락하여 곧 사라질 위기인 셈이었다. 다행이라면, 살기 어려워지자 사람들이 뭍으로 떠나갔을 뿐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나쁜 일이 생긴 것 같지는 않다는 정도일까.
행희는 크게 걱정하고 있었는지 마을에 변이 없었다는 말을 듣자 기껏 멈췄던 눈물을 다시 글썽거리다 물레 도깨비에게 야단을 맞았다.
나도 한시름 놨다. 막상 촛대에서 풀려나도 마을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어. 지금은 초라해졌을망정 그래도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행희에게도 돌아갈 고향이 있는 셈이다.
문제는 망석중이를 가져와야 할 범식이었다.
기회를 줘 보자고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정말로 가져올 수 있을지 사실 나도 자신이 없었다. 틀림없이 가져오겠다며 큰소리를 쳐도 못미더울 판에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던 걸 생각하면….
하지만 이미 사람은 떠났고, 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그가 잘 해내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힘내라, 마마보이. 들릴 리가 없는 응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범식이 다녀간 뒤로, 우리는 그의 연락이 올 때까지 의식적으로 망석중이에 대한 이야기를 삼갔다. 행희는 원래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었지만 나는 물론 물레 도깨비조차도 궁금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작업장에서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날씨 이야기를 하고 도깨비들과 어울렸다. 어쩌면 우리는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틀 후 범식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우리의 짐작은 그의 약한 목소리로부터 맞아 들어갔다.
“저…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는데…”
그의 말인즉, 내가 한 이야기들을 어머니에게 전해드렸더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집안을 지켜주는 소중한 호부를 망가뜨릴 수는 없다며 당장 촛대를 되찾아 오라고 하셨단다. 뿐만 아니었다. 새 사람이 들어오려는데 동티가 난 걸 보니 그 여자는 아무래도 이 집안에 올 사람이 아닌 것 같다며 약혼녀도 싸잡아 욕을 먹는 중이라는 것이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답답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그가 내게 하소연하는데 나는 더 답답했다.
이 눈치 없는 인간아, 그걸 곧이곧대로 어머니께 말씀드렸단 말이야? 아니 사실대로 말씀 드렸으면 설득이라도 제대로 하든지.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잘라보든가. 어머니 한마디에 꼬리 말고 도망쳐놓고 징징대지 말란 말이다.
이 남자와 결혼할 여자에게 충고해주고 싶었다. 아가씨, 그냥 헤어져. 결혼하면 분명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눈치 없이 굴다가 아내만 두 배로 고생시킬 타입이야. 나중에 애 낳고 나서 속 썩다 썩다 인터넷 게시판에 사연 올려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고.
“촛대는 내일 찾으러 가겠습니다.”
범석은 힘없이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이거 큰일이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조금은 더 남자답게 용기를 내줄 거라고 믿었는데. 게다가 촛대를 가지러 내일 온다니 시간은 하루가 남았을 뿐이다. 이 사실을 알리면 물레 도깨비가 화내겠지? 또 얼굴에 멍들게 되는 거 아닐까. 행희는 엄청나게 실망할 텐데. 울면 어쩌지.
아니, 이런 걸로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말 보쌈을 해서라도 빼내겠다는 생각이지만 그 전에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백은호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전화를 걸어 행희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백은호는 잠시 미묘한 침묵을 지켰다.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지 또 쓸데없는 일에 휘말렸다며 한숨을 쉬기 위해 폐 안에 공기를 모으는 중인지.
“왜? 너도 방법이 없는 거야?”
아무래도 금방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재촉하듯 물었다.
“방법은 있으나 도령이 할 수 있을지…”
대답하는 백은호는 어딘지 즐거워 보였다. 맛있는 먹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우같았다. 불길하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뭔데?”
“도사가 해랑신을 속여 봉인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는 망석중이를 골메기신으로 위장했으나, 이번에는 누군가를 망석중이로 위장하면 될 뿐이지요. 이혼을 하기 위해서는 자의를 가지고 동의해야 하니 인형 대신 사람이 망석중이의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라는 거냐?
“별로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
망석중이의 역할을 대신하기만 하면 될 테니까. 내 말에 전화기 안에서 여우의 웃음 섞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어렵지 않습니다. 도령을 망석중이로 속이기 위한 부적을 붙이고 행희와 신방에 들었다 나와서 부부인 것을 확인한 다음 다시 이혼의 절차를 밟으면 될 뿐입니다. 할급휴서(割給休書). 옷자락을 조금 잘라서 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예? 뭘 해요? 나 방금 뭔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도령이 하시겠다면 부적 정도는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만.”
잠깐, 백은호. 너 그 말 한 다음 “좋은 구경거리의 대가로 그 정도쯤이야…”라고 중얼거린 거 들었거든? 대체 뭘 구경하겠다는 거냐, 지금.
“못 하시겠습니까?”
여우 요괴가 놀리듯이 물었다.
“기다려 봐. 시, 신방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소리야. 혼례식은 백 년도 전의 일이라고.”
“그 혼례식에서 쓰인 망석중이를 대신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부라면 한 이불을 덮어야 하는 법이지요. 그 정도도 없이 어떻게 속임수를 쓰겠습니까. 그러니 필히 함께 이불을 덮고 눕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그냥 그것뿐인 거지? 은유나 비유나 함축이 아니고 그냥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거지?
“잠시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 함께 자는 시늉을 하면 될 뿐입니다. 뭘 기대하시는 겁니까, 도령.”
백은호가 태연히 물었다. 없어! 아무것도 기대한 적 없거든!
“그 망석중이 역할 말이야. 나 말고 다른 사람…아니, 도깨비가 해도 상관없는 거 아냐?”
시늉뿐이라지만 난처하기도 하고, 물레 도깨비가 대신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물었으나 백은호의 대답은 냉정했다.
“도깨비는 거짓말을 못하는 족속이라 속임수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참, 그렇지.
백은호는 준비에 하룻밤이 걸린다며 내일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이 여우요괴 왠지 신난 것 같다.
막상 방법은 생겼으나 이것을 행희와 물레 도깨비에게 말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물레 도깨비는 분명 화낼 것 같은데. 행희는 엄청 곤란해 할 테고. 울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작업장으로 내려가, 마침 거기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둘에게 범식과 한 통화 내용을 전했다. 물레 도깨비는 예상대로 불같이 화를 냈고 행희는 창백하니 근심어린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백은호가 알려준 방법을 전하자 물레 도깨비는 대번에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좋아하고 행희는 이마까지 새빨개지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되지 않았소? 그 여우요괴라면 실력은 좋으니 낭자도 안심할 수 있겠소.”
도깨비라서 그런가, 감 잡을 수 없게 화통한 데가 있다. 아무튼 화를 내지 않아서 내게는 다행이었다. 비록 행희는 얼굴이 익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발갛게 열이 올라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백은호는 아침 일찍 와서 작업장에 멍석을 하나 깔더니 둘레에 금줄을 치고 수상한 제상을 차려놓기 시작했다.
준비를 끝내고 나자 그는 촛대 한 쌍을 금줄 안에 두고 내 눈과 귀와 입술 위에 먹으로 한자 같은 한자 아닌 기묘한 무늬를 그려 놓았다. 그리고 이마에 부적을 떡 하니 붙인다. 나와 행희가 금줄 안에 자리를 잡는 동안 결계 바깥에서는 물레 도깨비를 비롯한 창고의 도깨비들이 우글우글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뭐야 저 구경꾼들은. 그렇지 않아도 부끄러워하다 못해 땅속으로 파고들 지경인 행희 때문에 신경 쓰이는 참이라 도깨비 녀석들을 노려보았더니 물레 도깨비가 오히려
“신방을 차렸으면 구경꾼이 있어야 하지 않소?”
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이봐요, 이건 신방이 아니라…아니 그걸 흉내 낸 건 맞는데. 아무튼 아무 의미 없는 거라고! 뭔가 항의하고 싶었지만 금줄 안에 있는 동안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말라는 백은호의 경고를 들은 참이어서 볼만 실룩거리고 말았다.
백은호는 꽤 즐거워하면서도 행동은 재빨랐다. 금줄의 네 귀퉁이에서 부적을 태워 부정을 쫓고 글월을 올려 하늘에 고했다. 마에도 골매기 신과 해랑 아씨 행희 부부가 아뢰니…. 그렇게 시작하여 제법 길게 이어지는 글월을 백은호가 천천히 읽는 동안 나와 행희는 멍석 위에 대충 만들어 놓은 잠자리로 올라가 누워야 했다.
하나의 이불을 함께 덮고 나란히 누워 부부임을 알리는 것이다. 시늉뿐이면 되니까 기껏해야 10초, 아니 5초. 까짓, 눈 딱 감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결계 밖에서 남자 도깨비들이 껄껄 웃고 “신랑이 기절했나 보오. 큰일일세.”라거나 “뭘 하오? 김서방. 신부를 번쩍 들어서 갖다 눕히지 않고. 이제 보니 영 못 써먹을 사내일세.”라며 놀려댔다.
여자 도깨비들도 만만치 않아 “신랑이 술이 부족한가? 신부 입술이 부족한가.”라거나 “저 망석중이는 정말로 망석중이일세”라는 말이 들리는가 하면 “에잇! 행희 낭자! 그냥 끌고 가버려!”라는 물레 도깨비의 과격한 코치가 날아들었다.
이 도깨비들이 진짜…
행희를 힐끗 보자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어서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수리와는 상관없이 촛대에 봉인된 그녀를 반드시 풀어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난장판은 그러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몸이 안 움직이는 것은 부끄러워서인가. 아니면…아주 잠시지만 거짓으로나마 ‘부부’가 된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인가.
차라리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망석중이를 훔쳐오는 편이 낫겠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무거운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잘도 이런 기분을 견디면서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거네.
백은호가 글 읽는 속도를 더욱 천천히 끌면서 내게 눈짓을 보냈다. 글월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행희가 문득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아무래도 나는 거짓말로조차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역시 안 되겠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출입문이 다소 난폭하게 열리면서 누군가 뛰어들었다.
“저…사장님! 이거…”
범식이었다. 그의 양손에 보자기로 단단히 감싼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최대한 빨리…저녁이 되기 전에 집에 도로 갖다 놔야 합니다. 그 안에 가능하겠습니까?”
“그거, 망석중이인가요?”
결계 안에서는 말하지 말라던 백은호의 충고도 잊어버리고 내가 물었다. 범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생이 부모님 모시고 외출한 사이에…”
훔쳐 왔어? 어머니 몰래?
백은호가 김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도깨비들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범식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내게 상자를 내밀었다. 보자기를 풀고 상자를 열자 조잡하게 깎은 나무 인형이 사지와 몸통에 줄이 걸린 채로 누워있었다.
“해랑 아씨를 돌려보내면 이것들은 보통 나무에 불과합니다. 알고 있겠지요?”
다짐하여 묻자 범식은 한 번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은호에게 망석중이를 주면서 부탁하자 시시하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그는 다시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행희와 망석중이가 이혼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나와 범식은 도깨비들과 함께 구경꾼이 되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밖에서 구경하니 이혼이라는 건 별로 재미없는 것 같다. 도깨비들도 아까와 달리 조용히 보고 있었다. 백은호가 망석중이를 움직여 옷자락을 대신한 종이를 찢는 것이 보였다. 저 종잇조각을 행희에게 주면, 그것으로 이혼은 완료.
“어머니가 여전히 반대하고 계시다면 이제 와서 해랑 아씨를 돌려보내도 결혼식에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요.”
문득 생각나 묻자
“그건 그렇습니다만…”
쓴웃음을 지으며 범식이 대답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려고 생각하니 예전에는 신경 쓴 적 없는 것들이 눈에 보이더군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싸워서라도 함께 살고 싶은 여자와 결혼하는 겁니다. 그 시작을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으로 하기는 싫어서요.”
어제 한 생각은 모두 취소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약혼녀 아가씨, 남자 잘 만났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종잇조각을 받은 행희가 환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촛대로부터 벗어난 그녀는 나이 많은 은행나무에 깃든 목신, 한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으로의 위엄을 회복하고 신령한 기운을 퍼뜨리고 있었다.
행희가 손을 모으고 우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곱게 절하는 그녀의 모습이 점점 사라졌다. 바다 건너 작은 섬 그녀의 고향으로 이제야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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