줘도 불만이야(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어머니.
그야 내게도 어머니가 있겠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왜 이제야 새삼스럽게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지금까지는 엄마, 어머니, 그런 단어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가 이제 와서야 아란 어미란 말에…
쿵쿵쿵쿵쿵쿵.
뱃속에서 누군가 다듬이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소리뿐 아니라 진동이, 내장을 훑고 피부를 오스스 일으켜 세웠다.
아란 어미. 어머니.
마음속으로 되뇌어 볼 때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감정들이 밀물처럼 달려들었다. 가족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없을 뿐이지 예전에도 없었을 리 없고, 지금 기억 못 할뿐 기억해야 할 과거는 있을 게 아닌가. 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김서방, 정말로 괜찮은 게요?”
물레 도깨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 노래. 한 번 더 들을 수 있을까?”
걱정해주는 상대에게 돌려줘야 하는 당연한 말들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괜찮다든가 별 일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듣고 싶어서. 수련이 아니니까 작은 목소리로 들려줬으면 좋겠는데.”
물레 도깨비는 내 말에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까처럼 곧게 서는 대신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까딱이며 소리를 뽑아냈다.
해오름 가나 아란님아 달오름 가나 오로님아
금은지천 도화지천 망리산에 노니실제
여섯 아들 여섯 따님 배를 띄어 청풍명월
천월명주 깔아놓고 복사꽃잎 뿌려놓고
하늘에는 태평이요 땅으로는 무사일세
천지간에 화목하고 동기간에 우애로다
다섯 음계로 엮은 단순한 가락이, 늘였다 당기며 쥐었다 푸는 목소리에 실려 굼실굼실 이어졌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가만 토해내는 노래는 어쩐지 애조가 깃들어, 내용이 행복하고 평화로운데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리소사 나리소사 에허라 데 나리소사”라고 후렴을 넣어가며 노래는 아란 어미와 오로 아비의 일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옛날이야기 속의 왕과 왕비처럼 그들은 고귀하게 태어나 아름답게 성장하여 운명의 연인을 만났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자녀들을 낳고 지극한 행복 속에서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함께 늙어가며 누구나 닿는 마지막 길에 섰다. 세계의 지엄한 규칙에 따라, 늙은 그들은 죽은 자의 땅으로 떠나야 했다.
어매 어매 아란 어매 아배 아배 오로 아배
북망산천 황천길이 굽이굽이 첩첩인데
우리 어매 무릎이야 우리 아배 발목이야
업고 지고 가고지고 어이 홀로 보내질고
원수로다 원수로다 검은 머리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검은 머리 원수로다
부모를 보내는 자녀들의 곡이 처연히 울렸다. 노래하던 물레 도깨비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소.”
노래가 끝났지만 나는 잠시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몸이 붕 떠서 느린 물결에 실려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고 연처럼 실에 매달려 파닥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계수나무로부터 시작된 이 노래가 어째서 나를 이렇게 자극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섯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을 가진 부부. 그들을 생각하자 노래로 들은 이야기가 동화책을 보는 것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아름답고 찬란한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란 어미의 웃는 얼굴이, 오로 아배의 흔들림 없는 모습이, 열두 남매의 어울리는 정경이 그림폭에 담겨 흔들렸다.
그립고도 아련한 기분이었다.
아란 어미와 오로 아배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었다. 더 알아야 했다. 뭔가가 잡히려고 하고 있었다. 물레 도깨비에게 부탁하자 그녀는 최대한 빨리 그 개구리를 찾아내 보겠다는 대답을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노래가 그리도 마음에 드오?”
그녀의 질문에는 억지로 지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물레 도깨비가 개구리를 찾아내려고 분주한 동안, 나 역시 놀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가 부른 노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려고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고 도서관의 책을 뒤졌다. 도서관 쪽은 수호 녀석에게 부탁했다. 유하에게는 어쩐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수리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거의 종일 노래의 조사에 매달린 셈이지만 사흘이 되도록 드러나는 것은 없었다. 전에 없이 집중해서 독서한 덕분에 고대 설화와 전설과 민담에 밝아졌다는 의외의 성과가 생겼을 뿐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아란 어미나 오로 아배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노래를 들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뭘 했는지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물레 도깨비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딘지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 밤 진기한 낚시를 하게 될 터이니 준비를 단단히 하시오.”
낚시?
물레 도깨비는 의문이 담긴 내 눈길을 받아넘기며 샐쭉 웃었다.
“두꺼비를 낚는 낚시요. 도령이 준비할 것이 있소.”
두꺼비를 낚는 낚시? 설마, 달에서 두꺼비를 낚아오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물레 도깨비가 알려준 준비물은 그다지 낚시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주안상을 푸짐히 차리고 긴 줄 끝에 동전을 매달아 두라니.
시키는 대로 준비하기는 했지만 뭘 할 셈인지 모르겠다.
밤이 깊어지자 유하가 작업장에 술상을 차려놓기 시작했다. 나는 물레 도깨비가 시키는 대로 줄의 끝을 잡고 있었다. 물레 도깨비는 동전이 매달린 줄의 반대편을 잡고 밖으로 나가더니 돌돌 말아놓은 긴 줄이 거의 다 풀려나갈 때까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이윽고 줄이 약간 당겨졌다가 다시 바닥에 늘어졌다. 손에 두어 바퀴 감아놓은 줄을 꽉 쥐고 나는 신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으면 이 줄이 팽팽히 당겨질 거라고 한다. 그러면 그때 줄을 놓치지 않고 슬슬 감아야 했다. 너무 급해도 안 되고 너무 느려도 안 된다. 걷는 듯한 속도로, 라고 물레 도깨비는 말했다.
걷는 듯한 속도로 줄을 감는 게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후 손을 휙 당기며 줄이 팽팽해졌다. 누군가 반대편에서 줄을 잡고 낚아채는 것 같았다. 이건 내가 낚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몸이 쏠렸지만 버티자 당기는 힘이 조금 약해진다.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물레 도깨비의 말을 기억하며 천천히 줄을 감았다. 손바닥으로 파도처럼 굴곡 심한 반항이 느껴졌지만 어쨌든 줄은 점점 감겼다. 손 안의 타래가 꽤 굵어졌다 싶은 때가 오자 조금 열린 문 밖으로 뭔가 소리가 들려왔다.
털썩, 털썩, 하고 바닥을 치는 소리였다. 줄을 감을 때마다 한 번씩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가 다가오자 털썩 하고 부딪친 후에 “꾸륵”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한 번 더 줄을 감아 당기자 문이 뭔가에 텅 부딪쳐 활짝 열렸다.
문밖의 가로등 빛을 가로막으며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풀쩍 뛰어 들었다. 생각보다 컸다. 주먹 만한 크기의 평범한 두꺼비를 상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건 거의 불독 만한 크기인데.
줄을 감자 두꺼비는 펄쩍 뛰어 이쪽으로 왔다. 한 번에 작업장 절반을 가로질렀다. 뭐 달까지 뛰어갈 수 있다는 대단한 두꺼비니까 이정도로 놀라서는 안 되겠지.
두꺼비는 작업장의 약한 조명 아래에서 황금빛으로 번쩍거렸다. 개구리처럼 보이지만 우둘투둘한 피부, 볼록하니 부푼 배와 튼튼해 뵈는 세 개의 다리…세 개의 다리?
세 개의 다리만으로도 안정감 있게 몸을 움츠리고 있던 두꺼비가 가로로 누운 까만 홍채를 도로록 굴렸다. 내 뒤에 푸짐하게 차려진 술상을 본 것 같았다.
“오오!”
두꺼비가 낼 것 같지 않은 감탄사가 커다란 입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는 입을 헤벌리며 좋아하는데 그 바람에 물고 있던 줄이 빠져나오며 그 끝에 매달렸던 동전이 바닥을 쳤다.
금속이 대리석과 부딪쳐 내는 날카로운 소리를 듣자 두꺼비의 눈길이 잠시 동전에 닿았다. 그러나 이내 펄쩍 뛰어서 술상 옆에 철썩 앉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사람 목소리로 물었다.
“이 술 향기는 뉘 것이오? 향기란 도통 담을 수 없는 것이라 허공을 떠도니 내 것은 아니나 댁의 것도 아니겠지. 허니 술 향기를 조금 마셔도 탓할 일은 아닐 게요.”
물어 놓고 스스로 엉뚱한 답을 한 다음 술상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넓적한 머리가 술 향기를 쫓아 청자 술병의 주둥이까지 슬금슬금 다가간다.
“오오, 참으로 귀한 향일세. 백가지 꽃이 춤을 추는구나. 꽃향기를 맡았으면 꽃을 꺾어야 하는 법. 이 꽃이 술에 담겼으니 술 한 잔을 꺾어볼까.”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더니 낼름, 긴 혀를 술병 안으로 집어넣었다. 실로 잽싼 속도였다. 혓바닥이 술병의 주둥이 안에 쑥 들어갔다 나오자 그 끝에서 술방울이 튀었다. 두꺼비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이것은 항아님의 은로주(銀露酒)에 못지않구나. 내가 은로주에도 이미 취해보았으니 백화주에 취하지 못할 손가.”
그리고는 아예 술병을 들어 입구를 물더니 꼴깍 꼴깍 물마시듯 마셨다.
뭐 이런 낯 두꺼운 두꺼비가 다 있어. 그래서 두꺼비인가.
두꺼비는 술 한 병을 앉은 자리에서 꿀꺽 비우더니 “크어~”하고 감탄 섞인 숨을 내쉬었다.
“이 한 병에 극락을 보는구나. 천계의 구름을 넘었으니 천계의 노래가 옳지 않으랴.”
약간 꼬부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리고 두꺼비는 노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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