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72화 (72/218)

줘도 불만이야(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내일 밤에도 두꺼비를 위한 술상이 필요하다는 말에 유하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가벼운 고갯짓으로 알았다는 시늉을 할 줄 알았던 나는 좀처럼 끄덕이지 않는 그녀의 뒷머리를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못 들었나?

다시 한 번 말하려는데 유하가 내 쪽으로 돌아섰다.

“내일, 날이 흐릴 테니 같이 시장에 가주겠어요? 전에…말했었죠.”

아, 장보러 가는 걸 도와달라는 그 이야기인가? 하지만 내일은…

“내일은 맑을 텐데?”

일기예보라면 날마다 확인하고 있으니까. 내일뿐 아니라 주말까지는 구름 낄 일도 없이 맑았다.

“낮에 잠시, 흐릴 거예요.”

유하는 그런 말로 기상청에 들어가는 일 년 안전예산금 수백억을 아깝게 만들어버리고 나서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차피 두꺼비가 오는 건 밤이고, 낮 동안 할 일은 없으니 날씨만 흐리다면 외출하는 거야 어렵지 않다.

“그래. 짐꾼 노릇 확실히 해줄 테니까 이참에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사버리자고.”

유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정오 무렵 나는 작업장 안에서 건물 위로, 그러니까 내 위로 구름이 모이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몰아 온 구름으로 차곡차곡 하늘을 덮는 그런 기분이었다. 출입문을 열고 바깥을 보자 과연, 하얀 구름 뭉치가 하늘을 빽빽이 가리고 있었다.

평범한 구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정상적으로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의 작용으로 기상이 변하는 것을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 보았다. 그런 때 느껴지는 위화감이 이번에도 있었다.

누구의 힘일까. 바람을 일으키고 구름을 모으는 능력이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도깨비들조차도 하늘은 다스리지 못한다고 했었다. 아니, 누구의 힘인지보다 궁금한 것은 그녀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갈까요?”

유하의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들려왔다. 반쯤 내려오다 말고 서서 그녀가 내게 묻고 있었다.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지만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잠시라고 해도 3초 정도밖에는 안 된다.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서 보았다 라고 변명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정도가 한계였다. 가자고 말하면 그녀는 곧 걸음을 옮길 테고 나는 옆이나 뒤에서 걷게 된다. 그러니까 그 전에 아주 잠깐이라도 더 정면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내 눈에 들어온 그녀는 예뻤다.

정말로 예쁘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처음부터 미인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매일 보게 되자 익숙해져서 그런지 어느새 의식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쪽을 보는 까만 눈망울도, 뭔가 말할 듯이 오물거리는 붉은 입술도, 녹색 원피스와 베이지색 레이스 카디건으로 감싸인 호리호리한 몸도, 노란색 샌들을 신은 작은 발도 지금은 한 눈에 보였다.

가을을 부르는 것 같은 색깔의 옷이네. 나뭇잎은 짙게 물들었다가 단풍이 지고, 빛이 바래고, 바람은 점점 시원해지고…

가자고 말하기가 싫었다. 어쩐지 싫었다. 여름이 끝나는 것도 싫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싫었다. 가을이 오는 것이

“싫……”

“해명.”

유하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서야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아, 바보같이 보였겠다.

“가자.”

싫은 말이 나왔다.

유하가 계단을 마저 내려와서 내 옆으로 나란히 섰다. 작은 지갑과 접혀 있는 천 바구니 하나뿐으로 단출했다. 뭘 잔뜩 살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는 5분 거리의 정류장까지 나란히 걸었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 햇빛은 충분히 강해서 구름을 지나며 수없이 난반사 된 미광만으로도 땅위를 밝혔다. 그림자만 조금 흐릴 뿐, 맑은 날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모처럼 주변이 제 색으로 보이는 것을 나는 어느새 기분 좋게 즐겼다. 늘 흐린 날에만 외출해서 침침하게 변한 나무나 사람들을 보아왔던 터다.

천변에 일부러 심어놓은 금관화의 붉은 꽃잎이라든가 짙푸른 버드나무 잎, 풍선을 들고 뛰어가는 어린 계집아이의 까만 격자무늬 원피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처녀들의 하얀 얼굴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였다.

보고, 듣고, 향기 맡으면서 주변을 즐기는 동안 나도 모르게 정류장을 지나칠 뻔했다. 유하가 손목을 잡고 당기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길을 따라 쭉 어디까지든 가버렸을지 모르겠다.

“또 엉뚱한 곳으로 가는군요.”

내 손목을 당기며 유하가 나무라듯 말했다. 갈 뻔한 건 맞는데, 또는 뭐야. 내가 언제 또 엉뚱한 데서 헤맨 적 있어?

하긴, 내가 기억하는 거라고는 잠에서 깨어난 후의 몇 개월뿐이니까. 작년이라든가 재작년이라든가 어쩌면 매년 주위에 한 눈 팔다 이상한 데로 가버리거나 길을 잃었을지도 몰라. …이 가설을 부정할 수 없다니 슬프네.

정말로 그런지, 유하는 버스가 올 때까지 내 손목을 놓지 않고 있다가 내가 버스에 타고 나서야 손목 대신 손잡이를 잡았다.

우리가 탈 때만 해도 서 있는 사람이 거의 없던 버스는 양동시장에 가까워지자 점점 복잡해졌다. 사람들의 팔이나 어깨가 닿았다 떨어지고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함께 이리저리 밀렸다. 가까운 곳에서 낯선 사람들의 서로 다른 냄새가 났다. 얼굴과 함께 냄새도 하나씩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 냄새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것처럼 아주 가까운 곳에서 향기가 뭉클 피어올랐다. 아주 가까운, 품 안에서. 유하의 몸이 약간 기울어져서 내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손잡이를 놓쳤어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버스가 신호를 받아 속도를 늦추자 사람들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나도 모르게 내민 팔이 유하의 허리에 감겼다. 팔에 실렸던 무게가 어깨 안쪽을 돌아 도로 가슴을 밀었다.

이 여자는 뭘 이렇게 무방비로 기대버리는 거야. 겁도 없이.

내가 경계의 대상이 아닌 건 다행인데 이성으로서의 긴장감조차도 없어 보이니 약간은 서운하다. 내 쪽은 닿아있는 그녀의 등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당황하고 있는데.

손잡이를 놓친 김에 내게 무임승차하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난처한 채로 버스는 한 정거장을 더 가서 양동시장에 닿았다.

버스 안에 가득했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한꺼번에 내렸다.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는 사람의 물결에 휩쓸려 우리도 버스에서 내렸다. 시장 입구에 서자 안에서부터 건어물의 짭짤한 냄새와 비린내가 풍겨왔다.

지나가는 우리를 보며 손짓과 말로 불러 세우는 장사치들을 지나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좁은 길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어물전의 행렬이 끝나자 닭과 돼지와 소고기를 진열해 놓은 정육점들이 줄줄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자 나뉜 길 양쪽에서 야채와 과일을 파는 것이 보였다.

유하는 그 사이를 타박타박 걸을 뿐 무엇도 사지 않았다. 처음에는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던 나도 눈만 마주치면 끌어들이려고 하는 상점의 주인들을 몇 번이나 겪고 나자 앞만 보고 걷는 것이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자재는 안 사는 거야?”

야채 가게들을 다 지나도록 아무 것도 눈여겨보지 않는 유하에게 내가 슬쩍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대답 대신 유하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러고 보니 출발한 게 정오 무렵이어서 지금이 식사시간이기는 했다. 그녀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근처의 가게로 쏙 들어갔다. 식탁이 두 개에 의자도 네 개 뿐인 허름한 식당이었다. 우리가 들어가는 것만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 앞에 넓적한 대접이 턱 놓였다. 안에는 붉은 팥죽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혼자서 다 먹을 수 있나 싶게 많은 양이었다.

“여기 메뉴는 팥죽뿐이에요.”

유하가 알려주었다. 전에도 온 적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그녀가 장보는 시간은 보통 15분 내외니까, 어쩌면 나는 작년에도 그녀와 함께 여기에 왔던 게 아닐까? 혹은 재작년에도, 그 전에도.

“맛있고, 안 뜨거워요.”

숟가락으로 야무지게 죽을 푹 뜨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래? 좋네. 뭐 내가 용마 위에 앉은 나무꾼은 아니지만. 한 숟갈 떠서 먹어보자 과연 뜨겁지 않았다. 맛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유하는 말없이 죽 그릇을 싹싹 비웠다. 팥죽을 좋아하는 줄 몰랐다. 하긴, 뭘 먹는 모습을 아예 본적이 없었다. 식사는 언제나 나 혼자서 하니까. 이슬만 먹고 산다거나 할 리는 없겠지만 음식을 먹기는 하는구나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버렸다.

“입에 안 맞아요?”

그녀가 먹는 모습을 훔쳐보느라 반도 못 먹고 있던 내게 유하가 물었다.

“응. 네가 만든 게 아니라서.”

얼떨결에 대꾸해 놓고서야, 커다란 주걱으로 죽을 쑤는 두꺼운 팔뚝의 사장님 앞에서 음식이 맛없다고 말한 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힐끗 사장님의 눈치를 보자 역시 나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픽 웃어버린다. 주걱이 날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뭐예요.”

유하가 나무라듯 말했지만 눈이 웃고 있었다. 이정도라면 사장님의 비웃음과 바꿀만하다.

팥죽으로 배를 채운 다음 우리는 한결 느긋이 시장을 돌아다녔다.

여러 가지 그릇들이 가득 진열된 상점들이 한 블록, 그곳을 지나자 커튼이나 이불을 파는 곳, 이어서 옷감을 파는 곳과 한복점이 늘어서 있었다.

옷걸이에 주르륵 걸린 알록달록한 한복과 천을 보며 유하가 눈을 반짝거렸다. 갖고 싶으냐고 물으면 고개를 저었지만 새로운 가게가 나올 때마다 사탕을 쳐다보는 아이처럼 옷감을 보고 있었다. 여자의 말은 어디까지 믿어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한복점 옆에는 여러 가지 실을 파는 가게가 모여 있었고 유하는 그 중 한 곳에 들러 수실처럼 보이는 것을 몇 타래 샀다. 선명한 붉은 색이어서 설마 나에게 줬던 ‘맺은 사람만 풀 수 있는 붉은 실’이 이건 아니겠지 하고 슬쩍 당겨봤더니 툭 끊어져 버린다. 역시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대신 유하의 눈총을 받았다.

그 외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당과를 약간, 그리고 말린 대추와 들깨 가루를 샀을 뿐이다.

“이것뿐이야?”

돌아가자는 그녀의 말에 가벼운 장바구니를 보며 내가 물었다. 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은 다 샀어요.”

이러면 짐꾼이 의미가 없잖아. 게다가 어차피 장바구니도 그녀가 들고 있었다.

“날이 개기 전에 돌아가야 하고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저 구름은 누군가의 힘으로 모아놓은 거였지. 한계가 있기는 할 터였다. 덕분에 외출할 수 있게 되어서 고맙기는 한데 누구의 신통한 힘인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바람을 부르고 구름을 모으는 능력.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도깨비들도 하늘을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었다. 내가 아는 자라면 산신에 가까운 존재가 된 용아 정도.

“어…잠깐 기다려.”

용아를 떠올렸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와룡촉대. 그것 때문에 외출하려고 했던 거잖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

“예?”

돌아가자는데 기다리라는 내 말에 유하가 뭐라 할 틈도 없이

“금방 갔다 올게!”

그녀를 두고 시장 안으로 뛰었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갈린 내부였지만 길은 기억하고 있다. 어물점이 있는 블록, 식육점이 있는 블록, 야채가게 블록, 팥죽집, 그 다음이었다. 그릇가게들이 모여 있는 블록이다.

어떤 곳은 유리그릇만, 어떤 곳은 사기그릇만, 스테인리스나 냄비만 취급하는 곳도 있고, 그리고 어떤 곳은 제기 전문이었다. 유기와 목기가 나란히 진열된 가게 안에서 와룡촉대를 닮은 나무 촛대를 찾아냈다. 목신이 깃들어 있던 촛대에 비하면 새김은 훨씬 정교하지만 어쩐지 가벼워 보였다.

이런 거라도 괜찮을까?

검은 비닐봉투에 담아준 촛대를 들고 유하에게 돌아가자 초조하게 하늘을 보고 있던 그녀가 오늘 두 번이나 본 나무라는 얼굴을 했다.

“빨리 가요. 늦으면 안 되니까 갈 때는 택시를 타고…”

또 딴 데 정신 팔다가 어디론가 가버릴까 두려운 것처럼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잰걸음으로 시장을 떠났다. 시장 앞의 도로는 혼잡했다. 좀처럼 택시가 지나가지 않았고, 가끔 보여도 앞에서 누군가 잽싸게 가로채고는 했다. 힘들게 택시를 잡고 나서는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까는 어디를 다녀온 거예요?”

뒷좌석에 나란히 앉고 나자 한숨 돌리고 나서 유하는 세 번째 나무라는 말을 했다.

“이거.”

포장이라도 한 다음에 줄 걸. 비닐봉투째로 촛대를 준 다음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정 비닐봉투가 뭐야. 없어보이게.

유하는 없어 보이는 봉투 안에서 촛대를 꺼내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냥 오다 주웠다고 할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내 앞에서 한 번 본 적 있는 꽃이 활짝 피었다.

유하가 웃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눈을 휘며 웃는 그녀의 모습에, 포장하는 것도 건너뛰고 촛대를 건네준 이유가 조금이라도 빨리 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에게 반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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