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73화 (73/218)

줘도 불만이야(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수리점으로 돌아온 다음 하늘은 거짓말같이 개었다. 방에 들어서자 연한 갈색이던 롤스크린이 강한 햇빛을 받아 베이지색에 가깝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수개월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의 내 방이다. 황량한 것도 같고 바깥이 보이지 않게 꽁꽁 막아놓은 것도 같고 할 일이 없는 것도 같고 혼자인 것도 같아서, 유하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먼 일이거나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멍하니 그 기억을 되쫓아 가다보니 복잡한 시내버스 안에서 몸이 부딪치던 거라든가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목덜미를 내려다보던 거나 치마를 팔락이며 걷던 모습 같은 것이 차례로 떠올랐다.

어쩐지 백일몽 같은 몇 시간을 보낸 듯하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어제 만났던 두꺼비나 두꺼비가 부른 노래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아, 어지간히 정신줄 놓고 있었구나.

어젯밤의 기억이 갑자기 밀려들어왔다. 끝없이 되풀이 되는 짧고 단조로운 가락을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감았다 풀며 구성지게 이어가던 두꺼비가, 아란 어미와 오로 아배의 길고 아련한 이야기가 안에서 넘실넘실 차올랐다.

어떻게 잊어버리고 있었지. 몇 개월 만에 만난 중요한 힌트인데.

분명 두꺼비의 목소리를 귀로 들었는데 내 머릿속에서 팔랑팔랑 그림이 넘어가며 눈으로 노래를 보고 있었다. 그 광경이 아직 선했다.

아란 어미. 오로 아배. 상여를 따라가며 울던 열두 남매. 첫째가 입은 도포와 검은 갓이 선연하다. 둘째가 입은 옥색 저고리 붉은 치마가 고왔다. 셋째의 머리에 산호 뒤꽂이, 넷째의 허리춤에 남색 세조대. 어째서 상복을 입지 않았을까. 그들은.

궁금했다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그림을 보면서 뭘 궁금해 하는 거야.

그러나 그 후로도 나는, 두꺼비의 노래와 머릿속 그림 같은 풍경 사이에서 저물도록 헤매었다.

해가 지고 밤이 깊어가자 유하는 다시 작업장에 술상을 차려놓았다. 상 앞에 보료를 깔고 맞은편에 방석을 놓고 나는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녹색 잔 안에 맑은 술을 찰랑찰랑 채워놓고 기다리는데 조금 열어놓은 출입문 밖에서 철썩 철썩 하고 두꺼비의 뛰었다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며 황금색의 달두꺼비가 펄쩍 들어왔다. 들어오더니 눈을 감고 머리를 좌우로 내두르며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 향기가 월궁까지 날아오더란 말이지. 내가 술 향기에 취했는고, 외로움에 취했는고.”

두꺼비가 펄쩍, 뛰어서 한 번에 술상 앞 방석 위로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나와 눈 맞출 새도 없이 제 앞의 술잔부터 덥석 집어 홀짝 마신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나를 발견했다는 듯이 눈길을 주었다.

“지난밤의 기약을 지켜 이 몸을 기다리고 있던 게요? 이렇게 기쁠 데가.”

나 때문에 기쁜 건지 술 때문에 기쁜 건지. 분간은 안 가지만 노래 때문에 두꺼비를 기다리고 있던 나 역시 불평할 처지는 아니다. 빈 잔에 한 번 더 술을 채워주자 두꺼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홀짝 잔을 비웠다.

“크어~. 맛도 좋고 향도 좋으나 따르는 손이 섬섬옥수가 아니니 그것 하나가 흠이로다.”

섬섬옥수가 아니라서 미안하네요. 물레 도깨비를 보고 싶은 모양이지만 이미 필요한 것을 다 챙긴 그녀는 이제 달두꺼비에게 관심도 없을 터였다. 아까부터 창고 안에서 업그레이드 된 음파공격이 들려오고 있으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것도 그거고, 나 역시 오늘 만남에 물레 도깨비가 끼어드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았다. 달에 산다는 이 전설 속의 영물에게 노래 말고도 듣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것을 다른 이가 듣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뭐 어때. 사내끼리 대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세 번째 술을 따르며 내가 말했다. 내 말을 들은 두꺼비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다 말고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이 자리에 사내라고는 귀공 뿐이오만.”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두꺼비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라는 뜻의 사내가 아니라 씩씩하고 남자다움을 의미하는 은유로 겸손하게 쓴 말인가. 아니면 두꺼비가 원래 달팽이처럼 자웅동체였나? 아니면 중성? 그러고 보니 이 두꺼비, 다리가 세 개 뿐인데 혹시 이 다리뿐 아니라 다른 다리도 문제가 생겨 고…

“내 한때 천계에 거하는 몸으로, 다시없을 영웅을 지아비로 모시고 하늘에도 땅에도 두려울 것이 없었으나, 모두 옛 이야기요. 이제 이 몸은 어리석고 외로운 한낱 섬여(蟾蜍)라.”

들고 있던 술을 훌쩍 마신 다음 두꺼비가 말한다.

남편이 있었다고? 이 두꺼비가? 여자였다고? 아니 지금도 여자라고? 도대체 어디가? 이 술과 여자와 노래를 좋아하는 낯 두꺼운 두꺼비의 어디에 XX염색체가 있는데? 꺼내서 보여주지 않으면 나는 못 믿겠다.

보고 있는 내 표정이 가관이었는지 아니면 확실히 하고 넘어가고 싶었는지 달두꺼비가 물었다.

“내가 예의 아내라는 것을 귀공은 몰랐소?”

예? 예?

예라고 하면, 하늘에 열 개의 태양이 나타났을 때 놀라운 활솜씨로 아홉 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렸다던 그 예를 말하는 건가? 예는 알고 있지만, 그에게 아내가 있고 그 아내가 두꺼비라는 건 금시초문이다. 예는 무슨 생각으로 두꺼비와 혼인을 한 거야. 혹시 키스를 받으면 공주로 변하는 두꺼비인가.

“몰랐다면 모르는 대로 둘 걸 그랬소.”

달두꺼비는 푸념처럼 말하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석 잔을 받았으니 석 잔 값을 해볼까.”

라며 목을 가다듬는다. 튀어나온 눈을 가늘게 뜨고 목을 부풀리더니 이윽고 노래를 시작했다.

아란 어미와 오로 아배가 다스리는, 동쪽 끝 서쪽 끝 나라에서부터였다. 해님인 아란 어미와 달님인 오로 아배에게는 열두 자녀가 있더니라. 첫째는 하늘 같이 굽어 살피는 아드님이요 둘째는 구름 같이 신묘한 따님이요 셋째는 벼락같이 맹용한 따님이요 넷째는 바람같이 거침없는 아드님이요…

열 두 명의 자녀들을 하나씩 헤아리고 나서, 그들이 흩어져 제 나라를 찾아내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첫째 아드님 내려다보시니 반듯 반듯 이목천. 첫째 따님 흘러가다가 아롱다롱 독비천. 둘째 따님 번뜩 내려가 성큼성큼 치벽천. 둘째 아드님 훨훨 날아서 따스한 온설천…

열두 남매가 하나씩 자리를 잡기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두꺼비의 노래는 길고 길었다.

막내인 여섯째 아드님 이야기까지가 달두꺼비가 지불한 석 잔 술의 값이었다.

그 뒤로 다시 열두 자녀들이 각자 제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내용이 이어진다고 두꺼비는 말했다.

“거기까지가 삼계 십이천의 십이천왕 본풀이라 할 수 있겠소. 참으로 길고 지난하니 이 노래를 제대로 기억하는 이도 몇 없다오.”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나인지도 모른다.

기억한다는 뜻은 아니다. 노랫말 같은 것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그 이야기가 더욱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처음에는 동화책의 그림 같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정밀한 그림이 되어가고 지금에 와서는 그림이라기보다 사진에 가까운 수준으로 그 정경이 펼쳐졌다.

첫째 아드님 첫째 따님, 둘째 따님 둘째 아드님. 그렇게 헤아리는 동안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보고 있는 것처럼 떠올랐다. 아니 모습만이 아니다.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면 목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웃는 소리나, 말을 거는 목소리나 심지어 “명아.”라고 부르는 소리까지.

상상인지 기억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노래와 함께 쏟아지는 감정에 감각이 뒤섞여 혼란했다.

생각이 지나쳐서 망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 두려웠다가, 어쩌면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났거나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반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 두근거렸다.

노래를 멈추고 목을 쉬는 두꺼비에게 술을 권하며, 기억날 듯 떠오르지 않는 이 난감한 상황을 슬쩍 흘려보았다. 어쩐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좀처럼 선명하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잡힐 것 같이 어른거리면서 좀처럼 잡히지 않는 기억을 경험해본 적 있는가? 손끝에서 흐릿하니 꿈틀거리는 기억을 잡으려고 애써본 적이?

달두꺼비는 그 기분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동정은 하는 모양이었다.

“허면 내가 선단을 하나 보내 드리리까?”

한 잔 한 잔 따르는 동안 술 한 병을 혼자서 거의 다 마셔버린 두꺼비가 취기 도는 얼굴로 내게 물었던 것이다.

“선단?”

내가 되묻자 두꺼비의 넓적한 얼굴에 자랑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이래 뵈도 내가 달에 살며, 그곳에는 날마다 쉬지 않고 선단을 만드는 옥토끼가 있지 않겠소. 그들에게 부탁하면 귀공에게 필요한 선단 하나쯤은 내어 주리다.”

내게 필요한 선단?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하였잖소. 허면 기억을 명확하게 만드는 선단을 복용하면 될 터요.”

뭐야, 그런 게 있어?

“단, 약효는 하루가 지나면 사라지오.”

그런 거야 문제도 아니지. 약효가 있는 동안 기억난 것은 적어두거나 녹음이라도 해두면 될 테니까.

달두꺼비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내일 밤, 달빛이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조금 열어두시구려. 보름달이 아니라 내가 직접 내려올 수는 없으나 선단을 달빛에 실어 보내드리리다.”

만난 후로 처음 듣는, 실로 영물다운 말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부탁이라도 해야 할 일이었다. 감사와 함께 달두꺼비와 작별하고, 나는 어쩐지 붕 뜬 기분으로 밤을 지샜다. 잠이 오지 않았다.

달에서 옥토끼가 만들었다는 선단을 실제로 보게 되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기억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생각으로 복잡해서 뒤척이다가 창밖으로 불그스레한 빛이 돌때에야 겨우 잠들었다. 그리고 두 시간도 안 되어 유리 깨지는 소리에 다시 일어나야 했지만.

나는 낮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몽롱한 채로 허깨비처럼 돌아다녔고 밤이 되자 출입문을 열어놓은 다음 언제 약속한 선단이 오나 문에서 눈을 못 떼었다.

작업장 구석에서 선단을 기다리다 깜박 졸았던 것 같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는데 출입문에서는 달빛 대신 아침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구슬과 같은 것이 하나, 열린 출입문 사이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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