줘도 불만이야(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체리 정도 크기에 흠잡을 데 없이 둥근 모양의 환약이었다. 우윳빛의 매끈한 표면에서 묘한 광택이 흘렀다. 달두꺼비로부터 선단이라고 들어 약이려니 생각하지만 겉보기에는 환약이라기보다 대리석을 깎아놓은 것 같았다.
손에 올려놓자 영롱하니 무지개빛이 도는 것이나, 가슴이 상쾌해지는 좋은 향기가 풍겨오는 것이 여하튼 보통의 물건은 아닌 게 분명했다.
기억을 명확하게 만드는 선단. 달두꺼비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내 마음이 복잡하게 얽힌 감정으로 어지러웠다.
잠에서 깨어난 이후 줄곧 나를 괴롭혀 왔던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손 안에 있다. 분명 기쁘고 후련하고 두근거려야 할 텐데 사실 그렇지가 않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선단을 멀찍이서 내려다보며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단단해 보이네. 삼키다 목에 걸리지 않을까. 씹어서 먹어야 하나. 맛없으면 어쩌지. 엄청나게 쓴 맛이면? 웃기지도 않는 핑계가 줄줄이 낚였다. 그것들이 굉장한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고민했다. 고민하면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침 준비 됐어요.”
계단 위에서 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고민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안심했다. 일단 밥은 먹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알았다. 내가 기다린 것은 선단을 먹지 않을 핑계였구나.
겁내고 있는 건가. 무엇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곧 갈게.”
선단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등 뒤에서 기척이 들렸지만 그녀가 떠났는지 아직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메추리알 크기의 환약 하나. 손안에 그것을 쥐고 멍청하니.
‘그만 둘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별로 지금의 생활에 불만은 없고. 궁금해 하지만 않으면 앞으로도 불만은 없을 것 같고.
그럴 리가 없다.
곧 가을이었다. 그리고 겨울이 온다. 작년에 내가 잠들었던 때는 12월. 창고의 물품출납서를 보면 재작년에도 그 전에도 겨울이 시작되면서 기록이 끊어져 있었다. 겨울이 되면 다시 잠들게 된다. 몇 번이나 그래왔던 것이다. 그리고 봄이 되어 깨어나면, 나는 다시 이 짓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거다. 혼란스러워하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낙담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얼토당토않은 일들을 겪고…
그만둘 수 있다면 그만두는 게 맞았다. 이런 바보 같은 상황을.
무겁게 느껴지는 손을 끌어당겨 선단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잠깐 환약의 단단한 표면이 입에 닿았으나 이내 그것은 입 안에서 눈처럼 녹아 목구멍을 넘어갔다. 꿀꺽 삼키는 것과 함께 온갖 꽃과 나무가 뒤섞인 것 같은 향기로 입안이 가득 찼다.
뭔가에 의해 몸 안이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 외에 다른 변화는 없었다. 빛이 난다든가 오색구름이 피어난다든가 하는 이펙트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시시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서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으나 시간만 헛되게 흘렀을 뿐이다.
뭐야, 이거. 가짜 선단 아니야? 달두꺼비 녀석, 영물 주제에 사기를 친 거냐?
실망과 안도가 교차하며 얼룩졌다. 허망한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안심하고 있다.
“술만 공짜로 날린 거 아냐.”
웃으며 불평해 버리고 나는 3층의 유하에게로 갔다. 그녀는 식탁에 밥을 차려놓고서 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깎고 있던 사과로 눈길을 돌렸다.
사과.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내 눈이 반쯤 깎인 사과를 본 순간에 입안에서 그것이 와삭 씹히며 달콤한 즙이 혀 아래로 고이는 기분이 들었다. 달고도 새콤한 과즙, 향긋한 냄새, 이 사이에서 뭉개지는 과육, 꿀꺽 삼킬 때의 느낌이 생생했다.
지나치게 생생했다.
뭐야? 이거. 약간 당황하며 식탁으로 눈을 돌리자 검은깨를 갈아 넣은 죽과 익은 김치가 보인다. 봤을 뿐인데 갑자기 입안에 따듯한 죽이 가득 채워졌다. 아니 채워진 것처럼 느꼈다. 깨죽의 고소한 맛과 입에 닿았을 때의 거칠거칠한 느낌, 흑임자의 기름진 냄새가 물씬 풍겼다. 마치 한 숟갈 떠서 입안에 넣은 것 같았다. 손대지도 않은 김치가 죽과 함께 사각사각 씹혔다.
뭐지, 정말. 갑자기.
“왜요?”
식탁을 앞에 두고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내게 유하가 물었다. 그게…
“배가 별로 안 고프네.”
보기만 하고도 먹은 것 같다는 거다.
“과일도요? 음료라도 드릴까요?”
유하가 묻는 순간 내 입안에서는 그동안 마셔본 음료수들이 맹렬하게 소용돌이 쳤다. 나도 모르게 꿀꺽 삼켜버렸다. 물론 목구멍을 넘어간 것은 침과 공기뿐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예전에 마셨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 난 건가? 가만. 이건 혹시…
- 허면 기억을 명확하게 만드는 선단을 복용하면 될 터요.
달두꺼비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기억났다. 설마 선단의 효험이라는 거야? 이런 것이?
약간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이 정도로 리얼하게 기억이 난다면 약의 효과는 다른 기억에서도 똑같겠지. 나는 달두꺼비에게서 들은 노래의 내용을 떠올렸다. 과연 지난 밤 들은 그대로의 노랫소리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려오는 양 생생했다.
노래와 함께 그 노래로 떠올린 광경들 역시 선명하게 떠오른다. 얼굴들이, 표정이,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분명했다.
기억나고 있다.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진 기억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선연히 보였다. 나를 내려다보며 웃는 얼굴이 보이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들리고, 발아래서 물씬 올라오는 흙과 풀냄새를 맡았다.
- 명아.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 명아.
- 명이야.
- 우리 막내야.
그렇게들 불렀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길도 목소리도 나보다 훨씬 위에서 내려왔다. 어째서 다들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가 생각했다가 이내 그들이 높은 것이 아니라 내가 작은 것이라고 깨달았다. 내가 어렸다.
어린 시절이었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었구나. 노래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떠올린 그 모든 광경들은 멋대로 지어낸 망상이 아니었구나. 그림이었던 것들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였다. 부모님과 함께 열한명의 동기가 있었다. 내게는 분명히 가족이 있었다.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어주는 이들이 하나하나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 그것조차 선명하게 보였다. 부모님의 검은 머리카락이 차츰 하얗게 새어서 결국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이 주름지게 되어버렸다. 노래와 같았다. 그들은 떠나야 했다. 두려움과 슬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함께 우는 동기들이 보였다. 울면서 어미를 불렀으나, 그래서 잠시 걸음을 멈추게 했으나 그들은 결국 떠나야 했다.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갈라졌다. 그 한 조각을 딛고 서서 이승을 헤맸다. 그러다 닿은 곳이 여기였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지만 여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산이 있고 같은 물이 흘렀다. 분명히 여기다.
그리고 이 물가에 그녀가 있었다. 길게 땋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덤벙덤벙 물장구치는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까맣게 윤기 흐르는 머리채, 흰 목덜미, 둥근 어깨와 작은 손, 풍성한 치마 아래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다리를.
나는 다가가서 그녀에게 말했다.
- 나는 어저께 부모를 잃고, 오늘은 길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 나는 어저께 부모를 잃고, 오늘은 이름을 잃어 버렸다오. 도령이 내게 이름을 주면 나는 도령에게 길을 알려주겠소.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녀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나는 알게 되었다. 그녀가 가는 곳이 내가 가는 곳이 되리라는 것을.
나의 길이 된 소녀를 그제야 겨우 생각해냈다. 얼굴이 보였다.
“왜 그래요?”
몸을 기울여 내려다보며 이제는 소녀가 아니게 된 그녀가 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 얼굴로부터 두려운 기억이 되살아났다. 차곡차곡 쌓여있던 것들이 하나씩 걷히며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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줘도 불만이야(7)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볼과 곧잘 뽀로통하게 튀어나오는 붉은 입술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
땋아 내린 머리끝에 댕기를 물리고 서글서글한 눈매를 휘어 웃으며 들꽃 다발을 껴안는 하얀 손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고 앞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잡힌 손목에서 부드러운 압박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
나를 무릎에 눕히고 다정히 어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따뜻하고 옆머리에 닿은 치마에서 좋은 향기가 풍겼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이 물가에서 나는 소녀를 만났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
시간이 흐른다.
내게는 흐르지 않는 시간이.
“해명…”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로부터 다시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웃음소리 숨소리 목소리 옷자락 스치는 소리 작은 발이 타박타박 땅을 딛는 소리 물소리 머리 빗는 소리 그리고 문득 어두워졌다가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두근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 정적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았다. 어둠 안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다. 귀를 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전에 들려왔다.
- 아아아아아!
찢어지는 것 같은 비명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 소리가 몇 번이나 되울리며 날아왔다. 소리와 함께 심장이 얼어붙었다. 몸 안에서 하얗고 단단하게 멈춰버린 것 같았다. 온몸이 심장과 함께 차갑게 식었다. 식었다가 바사삭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해명.”
나를 부르는 유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게 갈라지던 기억으로부터 돌아와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 돼.’
얼굴을 보면 다시 떠오른다.
벌떡 일어났다. 식탁에 손을 짚으며 갑자기 몸을 일으킨 서슬에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놀란 유하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곳을 달려 나갔다.
“해명!”
유하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아니 무시해야 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안 되었다. 기억이 나버린다.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나는 이미 기억 속의 어둠을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바들바들 떨면서 내쉬는 숨소리였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약한 소리를 따라 나는 점점 깊이 들어갔었다. 숨소리에 울음소리가 섞이자 걸음이 빨라졌다. 차가운 심장이 함께 뛰었다.
기억에 겹쳐 눈앞의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달려 내 방으로 뛰어들었다. 유하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해명!”
“오지 마!”
방안이 쩡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버렸다. 스스로 말하고 움찔 놀랐다. 문밖에서 그녀가 우뚝 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봐서도 목소리를 들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기억이 이미 밀려들고 있었다. 비명 같은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 오지 말아요!
울음이 섞인 쉰 목소리였다. 내게 한 말이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를 듣고 안 갈 수는 없었다. 절대로 거기에, 혼자 둘 수는 없었다.
- 오지 마요…
가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떨고 있다. 두려움으로 추적추적한 목소리 끝에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어둠속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그것이 땅위를 기었다. 기어서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내 발목을 감았다.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두웠지만 그녀가 보였다. 나를 외면한 채 얼굴을 소매 안에 파묻고 있었다.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분명한 거부가 발밑에서 꿈틀거렸다. 발목까지 파묻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사각사각 사각사각 원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자위가 눈물로 얼룩져 번들거렸다. 그 얼굴에 가득한 괴로움과 슬픔이 가슴을 에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물었다.
- 당신은 나를…뭐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그 물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났다.
그 어둠으로부터 열세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있는 나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녀도 기억해 냈다.
기억을 잃은 동안 쌓여있던 질문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한순간에 모든 답을 알았다.
아…다시 여기로 와버렸구나. 피로와 허탈감이 온몸을 쳤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힘없는 숨이 밀려나왔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등 뒤에서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이쪽을 보고 있는 유하가 느껴졌다. 문을 열고 마주볼 용기는 아무래도 없었다.
차가운 철문에 등을 기대고 망설이다가 결국에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준 이름을 낯설게 불렀다. 잠시 말이 없다가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대답을 들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그녀도 다시 대답했다.
“예….”
두 번 부르고 나서도 역시 할 말이 없다.
기억이 없는 나였다면 넉살좋게 뭐라도 말해봤을지 모르겠다만. 아무 것도 모르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뭘 해도 엉성한 주제에 태평하기 짝이 없는 김해명이 조금 아쉬웠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의 나인데도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설다.
“아침…거르실 건가요.”
내가 말이 없자 그녀가 먼저 물었다.
“너는 참 변하지도 않는구나.”
물음과 상관없는 대답을 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그런가요.”라고 대답했다.
“언제까지 나를 방해할 셈이냐?”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지게 하고.
“방해해도 언제나 알아버리시네요.”
“나도 좀처럼 안 변하니까.”
문 뒤에서 그녀가 눈을 휘어 웃는 것이 느껴졌다. 보이지도 않았지만 알았다.
“바보군요.”
중얼거리듯 말하고 그녀는 돌아섰다. 가버리나 싶었지만 그러지 않고 그녀도 나처럼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두 겹의 철판으로 만든 두꺼운 문이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등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어쩐지 따뜻하게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딱딱한 철문이 부드러워져서 내 등을 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조금 돌리면 어깨 위로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그만해주세요. 충분히 노력하셨어요.”
그녀가 문득 말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들었던 말이다. 나는 조금 웃었다.
“기억을 잃고 한심하게 구는 나한테 질려버린 거냐?”
“질리지 않았어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진심이다. 정말로 바보스럽게도.
“그러면 조금만 더, 나도 바보인 채로 내버려 두려무나.”
바보 같은 한 쌍이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대화는 거기에서 끊어졌다.
말없이 등을 맞대고, 서로 반대편을 보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채로 우리는 그 후로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에필로그>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내가 방에 있지?였다.
어젯밤에 분명 달두꺼비의 선단을 기다리며 작업장 구석에서 문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큰일이다! 잊고 그냥 자버린 거야? 잠결에 방으로 돌아왔나?
허둥지둥 아래층으로 내려갔지만 문은 꽉 닫혀졌고 선단 그런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곧장 3층으로 달려가 유하에게 물어봤지만 문을 닫은 적도 환약 같은 것을 치운 적도 없다고 한다.
망했다.
달빛에 실어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아침이 되어서 사라져 버린 걸까. 말도 안 돼. 이런 식으로 기회를 날려버리다니!
허망한 나머지 멍하니 서있다 문득 옆구리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만져보자 까칠한 감촉과 함께 쏘는 것 같은 고통이 번졌다. 옷을 들춰보니 검붉게 피딱지가 앉은 것이 보였다. 이건 또 뭐야.
내 몸에 상처가 생긴 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만 상처의 모양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옆으로 번진 핏자국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렇게나 긁히거나 찔린 자국이 아니었다.
욕실로 들어가 물을 뿌려 씻어낸 다음 수건으로 닦자 깊게 파인 상처가 붉게 드러났다. ‘유령’이라고 읽을 수 있는 모양이다. 글자는 오른쪽으로 누워 있었다. ‘유’자가 위에, ‘령’자가 아래에 쓰여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내 손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을 뿐 아니라 짜증까지 치밀었다.
적을 데가 아무리 없기로 제 몸에다 상처로 낙서를 하다니 무슨 멍청한 짓이람, 이게. 게다가 유령이 뭐야. 무슨 소리야, 이거.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선단은 놓치고 몸에는 상처를 만들어 놓고. 나 약이라도 한 건가? 설마 두꺼비에게 선단이 아니라 마약을 받은 거야?
뭐야. 뭐야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지만 대답해줄 이가 없었다. 밤이 되어서 혹시나 하고 기다려 봤지만 달두꺼비가 다시 오는 일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달에 대고 불평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러니까 아마도 한 달쯤 후에 수리점 앞의 목신들이 개구리에게 들은 버드나무에게 들은 벚나무에게 들은 참새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달두꺼비의 한 마디를 수다에 섞어 전했다. 두꺼비가 말했다고 한다.
“거 참, 인간들은 줘도 불만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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