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75화 (75/218)

요강 도둑(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오늘 날씨는 맑음. 잠깐 구름이 낄 수도 있음. 내일부터 이틀 동안 비 옴. 아…얼마만이야, 이게. 모처럼 외출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태풍이 비껴가면서 내리는 비라 바람도 좀 불고 하겠지만 뭐 어때.

핸드폰으로 일기예보를 확인하는데 진동과 함께 수호 녀석의 메시지가 떴다.

[약속 있어서 동생한테 보냈어요.]

뭘 보냈는지는 안 적혀 있다. 모르는 건 아니다만.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아저씨이~”

라며 출입문을 차고 들어온 사람은 체격이 든든한 십대 소녀. 수호 녀석의 여동생이었다. 얘네 집안이 양반 가문이 아닌 것 같다. 이름이 뭐였지. 한 번 들었는데. 아, 맞다. 수영이다. 녀석은 맞은편 벽에 부딪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낸 문을 활짝 열린 채로 그냥 두고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문 좀 닫아줄래?”

작업장 구석에 숨어서 내가 말하자 “에어컨도 안 켜면서.”라고 투덜거리며 문을 닫으러 돌아갔다. 학교에서 곧장 왔는지 가방을 맨 채로 한 손에는 수호 녀석이 줬음직한 L자 홀더 파일이 들려 있었다.

“웬일로 네가 오빠 심부름을 왔냐? 사탕이라도 주면서 시키든?”

아무 생각 없이 물었는데 녀석이 “와, 진짜 점쟁이다.”하고 중얼거렸다. …중 1씩이나 되어서 사탕 같은 거에 넘어가지 마.

“저 물 좀 마셔도 돼요?”

날씨도 후덥지근하고 걸어오느라 목말랐는지 녀석이 물었다. 냉장고에서 생수와, 내친 김에 좋아할만한 군것질거리를 같이 꺼내 내놓자 녀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먹을 거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저렇게 튼튼한가.

녀석이 작업 선반 앞에 앉아 시원한 고구마 무스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동안 잠시 방치된 증편 접시로 대금 도깨비가 슬금슬금 다가갔다. 도깨비들도 먹고 노는 걸 좋아하는 만큼, 메밀만큼은 아니어도 맛있는 거라면 일단 건드려보는 것 같다.

들키면 안 되니까 저리 가라고 손짓으로 막아봤지만 못 본 체하며 꿈틀꿈틀 작업 선반 위를 기어갔다. 그러다 움찔 멈췄다. 고구마 무스에 정신이 팔린 줄 알았던 수영이 녀석이 힐끗 대금 도깨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4초 정도 정적이 흐른 것 같다. 애벌레처럼 기어가느라 구부러진 채로 굳어버린 대금 도깨비가 식은땀을 흘렸다. 대금을 내려다보던 수영이가 나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이 피리가 방금 움직였어요. 봤어요?”

뭐라고 하겠어.

“도깨비라 그래.”

한심하다는 얼굴로 대금 도깨비를 보며 내가 대꾸했다. 저리 가라고 그랬지, 내가.

“헐. 대박.”

수영이 녀석이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대금 도깨비를 툭 건드렸다. 평범한 대금인 척하고 싶겠지만 그러기에는 좀 과하게 구부러져 있어서, 대금 도깨비는 포기하고 후다닥 창고로 달아나 버렸다.

“어! 도망가요!”

녀석이 숟가락을 들고 대금 도깨비를 쫓아갔다. 도깨비라는데 겁도 없이. 마치 고양이나 강아지를 쫓아가는 것 같았다. 쟤네 남매는 뭐 저래?

그런데 창고로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수호 녀석 말고는 창고에 사람을 들여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때는 상황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문 사이로 들여다봤더니 미로 같은 창고를 폴짝폴짝 뛰어서 달아나는 대금 도깨비를 따라 수영이 녀석이 쿵쿵 뛰고 있었다. 선반 위의 도깨비들이 물건인 체하면서 눈동자만 굴려 그 모습을 구경했다.

대금 도깨비는 창고 안을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결국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벽을 타고 올라가서 전등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렸다. 구경하던 도깨비들이 야유를 보냈다. 선반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도깨비들과 함께 그 모양을 구경하고 있던 나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뭘 저렇게까지 열심히 도망가는 거야.

“아저씨. 피리 도깨비가 전등에 붙어 있어요.”

수영이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너 길 가다가 고양이 발견하면 쫓아다니지?”

내가 물었다.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겠냐.

저 녀석과 마주쳤다 도망 다닌 고양이들이 조금 불쌍해진다. 쫓아가는 쪽에 악의는 없겠지만 도망치는 쪽은 필사적이었을 걸.

“그만 놀고 나와서 먹던 거 마저 먹어. 안 그러면 다른 도깨비가 먹어버릴 거다.”

그럴 도깨비는 없었지만 대금 도깨비를 위해서 약간의 거짓말은 괜찮겠지. 과연 먹을 것이 없어진다는 말에 녀석은 당장 뛰어나왔다.

먹성 좋은 수영이 녀석이 접시를 싹싹 비우는 동안 나는 수호가 보낸 파일을 읽었다. 요지경 수리비라고 우겨서 받아낸 십이천왕에 관한 자료였다. 달두꺼비의 노래에서 듣고 나서 찾아봤지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불교신화 뿐이었다. 사방(四方)과 사유(四維)의 8천에 상하의 2천, 거기에 일월의 2천을 더해 12천인, 인간을 수호한다는 열두 신이었다.

하지만 달두꺼비의 노래를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요지경 때 언뜻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수호 녀석에게 물어보니 녀석도 아는 것은 이름 정도였다. 그래서 환에게 물어봐 달라고 했던 것이다.

수호 녀석은 오래 된 수리비를 이제야 무는 게 억울한지 꽤나 툴툴거리더니 결과물은 제법 성실했다. 노래에서 들었던 아란어미 이야기와 십이천왕의 탄생으로부터 공적까지 꽤나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첫째 하늘 이목천왕, 둘째 하늘 독비천왕, 셋째 하늘 치벽천왕…하나씩 헤아리며 노래하던 달두꺼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노래와 함께 떠오르던 그림들도…

“저기…저기요!”

낯선 목소리가 깨울 때까지 나는 멍하니 그 목소리와 그림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예…?”

목소리와, 목소리의 주인인 여성을 보고 나는 멍청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누구세요? 기척도 없이 들어온 걸 보면 귀신인가요? 아니…사람이구나.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수영이 녀석은 이미 먹을 거 다 먹고 갔고 시간도 한참 지나버린 것 같다.

사람이 들어와도 모르고 있었다니 어지간히도 얼이 빠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놀랐지만 문밖에 보이는 하늘이 구름으로 가려져 하얗다. 아…다행이다. 잠깐 구름 낀다고 했던 기상청 예보가 정말이었네.

“사장님, 맞으시죠?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6년 전에 왔었는데. 아유, 그땐 학생 같으시더니. 이제는 어려 보인다는 말 안 듣겠네요. 못 알아볼 뻔했어요.”

내가 방금 좋은 말을 들은 건지 욕을 들은 건지. 그렇게 말하는 여성은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6년 전이면 그 때의 내 나이는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

그나저나 두 번째로 온 손님이라는 거다. 뭔가 고칠 물건은 안 가져온 것 같은데. 그녀는 핸드백 하나만 달랑 들고 있었다.

손님은 작업 선반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앉고 나서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 저랑 애 아빠랑 같이 요강을 가져왔었어요. 놋요강인데, 그게 귀신이 붙어서는 한 밤중에 온 집안을 시끄럽게 하고 난리가 났었거든요. 생각나세요?”

말하며 내 눈치를 살핀다. 기억날 리가 없…아니, 잠깐. 그 요강 이야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그거잖아. 인터넷에서 검색했던, 마니마니 아니…수영이 녀석이 올린 괴담.

“그 요강에 무슨 문제라도…?”

내 대꾸에 손님은 한숨을 쉬었다.

“사장님이 고쳐주신 후로 아무 일 없었어요. 그래도 좀 꺼림칙하고 해서 안 보이는데다 깊이 넣어뒀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에,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요강을 넣어둔 상자를 열어봤는데, 글쎄 그게 감쪽같이 사라진 거예요.”

가족들에게 물어봤지만 다들 모른다고 했단다. 그게 아니라도 가족 중 누군가가 손댔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우리가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요. 정말 무섭고 정신없어서…고쳐서 가져온 후에도 식구들이 쳐다도 안 보려고 했어요. 사장님이 고쳐주신 후에도 다시 같은 일이 생길까봐서 몇 달 동안 걱정했어요. 그것도 그렇고…”

여자는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글쎄 그 상자 안에서 그냥 요강만 사라진 게 아니에요. 상자 밑바닥에 그냥 웬 죽은 벌레들이 가득…아이구, 어찌나 끔찍하던지.”

그녀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가슴을 누르며 말했다.

“그런데 그 상자가 분명히 박스 테입으로 밀봉해 놨던 거거든요. 어디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뜯어진 자국도 없이 요강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웬 벌레들이 가득 있으니. 아유, 걱정이 되어서 제가 잠을 못 자겠어요. 이게 무슨 귀신 조화인지.”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사장님이 뭘 고치고 그러는 거를 전문으로 하신다고는 들었지만, 혹시 이런 일도 맡아 주시나요? 없어진 요강이요. 그거 찾을 수 있을까요?”

사라진 물건 찾기…입니까. 으음….

“글쎄요….”

여기는 수리점인데요. 그것도 그거지만 찾고 싶어도 밖에 나갈 수가 없어요.

아니…잠깐. 제길.

기상청 얘들 뭐야. 점쟁이야? 왜 내일부터 비가 오는 거야? 아니, 그 반대다. 왜 내일부터 비가 오는데 오늘 이 아줌마는 밖에 나가야 하는 일을 가지고 온 거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뭐야, 진짜.

“안 될까요? 사장님…. 제가 처음 온 사람도 아니고, 여기서 한 번 수리 받은 거잖아요. 누가 사장님만큼 잘 알겠어요. 저도 다른 사람은 못 믿어요.”

망설이는 나를 보자 여자가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니, 고객님. 전 기억이 안 난다고요. 모른다고요.

“아유, 그 끔찍한 걸 보고 제가 그냥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쓰러질 뻔했어요. 요강이 없어진 것도 큰일이지만 이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길 징조가 아닌가 싶어서 무서워 죽겠어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제가 사장님 말고 누굴 믿겠어요?”

손님은 이제 아예 사정조로 나왔다.

그런데 진짜 기억이 안 난다고요. 난 누구 믿을 사람도 없다고. 이쪽이야말로 한탄하고 싶다.

“안 될까요? 예…?”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이런 얼굴을 보며 거절하는 방법은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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