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76화 (76/218)

요강 도둑(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말로 손님을 돌려보내놓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창고의 물품출납서 확인이었다.

6년 전에 왔었다니 분명 어떻게 수리했는지 기록해 뒀겠지. 전에 물품출납서를 훑어봤을 때 비슷한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때는 숨겨진 암호라든가 규칙 같은 것이 있는지 집중하면서 봤던 터라 오히려 내용은 가물가물했다.

6년 전, 놋요강. 물품명을 확인하며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으려니 공책 중간쯤에서 ‘할머니 놋요강’이란 이름이 나왔다.

[7월 25일, 놋요강이 집안을 굴러다니며 소란을 피운다며 수리를 맡김. 요강에 할머니 혼령이 붙어 있어 대화를 시도했으나 무시당함. 괴팍하고 성미 급함. 어깨 주무르기, 노래 불러드리기가 효과 있음. ‘동백 아가씨’를 좋아하심. 영감 도깨비와 사이가 안 좋으니 주의.]

할머니 혼령이 붙은 요강이라…. 어쩐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혼령에게 어깨 주무르기는 또 뭐야. 귀신이 되어도 관절염, 근육통은 사라지지 않는 건가. 거기다 노래 불러드리기…. 나 쉽게 돈 번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같은 달 28일에도 놋요강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다시는 소동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돌려보냄. 소란을 피운 이유는 끝까지 말 안 함.]

그리고 다시 한 달 후.

[한 달이 지난 현재에도 손님에게 연락이 없는 걸로 보아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듯함.]

이것이 놋요강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 뒤로 쭉 훑어보았지만 더는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

그러니까 까다로운 할머니 귀신이 붙은 요강이 약속대로 몇 년 얌전히 있다가 최근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없어진 것만 해도 찜찜한데 사라진 자리에는 왠지 벌레 시체가 잔뜩 남겨져 있었다는 거고.

정보가 이것뿐이어서야 곤란하잖아. 적어도 할머니가 소동을 일으킨 이유 정도는 알아야 요강 실종 사건이 예전의 소동과 관련이 있는지라도 짐작할 텐데. 지금으로서는 사라진 요강에 귀신이 붙어있었다는 정도밖에 모르는 셈이다.

상자 안에 갇혀 있어서 심심한 나머지 외출이라도 하신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면 벌레 시체는 뭐야.

좀 더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요강이 들어있던 상자나 손님의 집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외출이 가능한 것은 아무래도 내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구름을 믿고 나가는 건 무리겠지. 그러면 일단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나 생각했다가, 물품출납서의 기록에 하나 더 힌트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 귀신은 영감 도깨비와 사이가 안 좋았다. 모르기는 해도 사이가 안 좋아질 일이 있었겠지.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이니까 그거라도 알아볼까?

영감 도깨비가 좋아할 술을 들고 창고로 가자 아직 대낮이라 대부분은 물건으로 변해 있거나 선반 위에 늘어져 잠들어 있었다. 내 발소리에 깨어난 도깨비들이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영감 도깨비는 보료 위에서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폐암 같은 건 걱정 안 하고 종일 피워댄 담배 연기로 근처가 뿌옇게 흐렸다. 늘상 자욱한 연기에 주변이 흐려 보여서 영감 도깨비의 자리는 어쩐지 창고 구석이 아니라 사랑방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술을 권하며 6년 전의 요강에 붙은 할머니 귀신에 대해서 묻자 영감 도깨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술잔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며 꼼짝 않는 영감도깨비의 모습이 1분쯤 계속되었다. …그대로 잠든 건 아니겠지? 주름에 파묻힌 가는 눈이 뜬 건지 감은 건지 헷갈린다. 혹시 코고는 소리가 들릴까 걱정되기 시작하는 순간 주름진 눈이 꿈벅거렸다.

“아아, 그 요강.”

겨우 생각났나보다. 영감, 로딩이 느리잖아!

영감 도깨비는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거렸다.

“기억이 나오. 도듬질이 잘 된 방짜 요강이었다오. 입에서 허리로 부풀어 이어지는 선이 그윽하니 고왔지.”

“거기 붙어있던 할머니 귀신은 생각 안 나?”

내 질문에 영감 도깨비는 다시 허공을 보며 로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2분쯤 기다린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거기에 혼령이 하나 있었구먼. 새침하고 귀여운 색시였다오.”

아닌데요. 관절염 있고 동백 아가씨 좋아하는 할머니였는데요.

“그래. 그래. 기억이 나오. 맏손주를 아껴서 저승으로 가지 않고 그 집 요강에 붙어 있었지. 음전하니 자태도 곱고, 말하는 거며 행동거지며 보기 드문 숙녀였다오.”

영감, 기억이 제대로인 거 맞아? 혹시 세이브 하면서 뭐 잘못 건드린 거 아니야? 물품출납서에는 분명 괴팍한 할머니에 영감 도깨비와는 사이도 안 좋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 할머니에 관해 다른 기억은 없느냐고 물어봤지만 영감 도깨비는 고개를 저었다. 창고에 있을 때는 워낙 얌전하니 말이 없었고 도깨비들의 놀이도 멀리서 살짝 볼 뿐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뭐야, 이 할머니. 나한테는 노래도 시키고 어깨도 주무르라고 막 부려먹었다면서!

어쩐지 기분 나쁜 영감 도깨비의 증언에서 건질 수 있는 건 할머니의 정체 정도겠다. 손자 때문에 이승에 남아있다니 어디서 흘러들어온 혼령은 아니고 그 집안의 조상신인 셈이네. 그럼 더 이상하잖아. 6년 전에 할머니는 어째서 집안을 그렇게 소란스럽게 만들어 식구들을 고생시킨 거지. 게다가 나한테는 이유도 말 안 해주고.

의문만 더 늘어난 상태로 창고에서 나오니 작업장에서 수호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이 제대로 파일을 전해줬는지 미심쩍어 결국 하굣길에 직접 확인하러 왔다는 거였다.

“아까 받았어. 읽어봤는데 제대로더라. 수리비 인정.”

내 말에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지만 기분 좋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이 공책들은 뭐예요?”

작업 선반에 파일과 함께 쌓여있는 물품출납서를 보고 녀석이 물었다. 의뢰받은 이야기를 대충 알려주자 눈을 깜박이며 듣고 있다가 “그 벌레들, 어떤 거였는데요?”라고 물었다.

그건 안 물어봤는데.

“한 번 물어봐요. 사진으로 보내주면 더 좋고.”

그게 뭐 중요한가 싶지만 딱히 다른 방법도 없고. 전화로 묻자 손님은 꺼리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잠시 후 사진을 몇 장 보내줬다. 과연 말한 대로, 상자 바닥이 안 보일정도로 까맣게 쌓인 벌레들이 보였다.

가까이에서 찍은 것을 보자 뭔지 동글동글 말린 벌레와 긴 다리가 수십 개씩 달린 벌레들이 보였다. 검붉은 색에 짧은 다리가 촘촘히 붙은 것은 지네 같고, 좀 더 연한 색에 길고 가는 다리가 여러 개인 것은 그리마 같은데. 저 동글동글하게 말린 건 뭐야?

“그건 노래기예요. 사진에 찍힌 벌레들이 죄다 향랑각시네요.”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수호 녀석이 말했다. 향랑각시? 그건 또 뭐라니.

묻고 싶지만 녀석이 백은호스럽게 설명하는 걸 보기 싫어서 조용히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사전에 나온 설명은 “절지동물 배각류(倍脚類)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다. 그냥 지네 비슷하게 생긴 애들이라는 소리잖아.

“향랑각시는 지네나 노래기 같은 벌레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그 벌레가 변한 요괴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해요. 여자의 머리에 벌레의 몸을 하고 있대요.”

조용히 검색한 보람도 없이 수호 녀석이 설명했다.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고, 독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기도 해요. 호전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영역을 침범당하면 공격하니까 위험한 요괴인 셈이죠. 집에 향랑각시가 있으면 다지류도 많이 나타나서 옛날에는 해마다 향랑각시를 쫓아내는 행사도 하고 그랬대요.”

하긴, 옛날의 집은 흙과 나무로 만들었으니 곤충에게도 살기 좋았겠지. 하지만 콘크리트로 만든 요즘의 집은 곤충들에게도 별로 좋은 환경이 아닐 걸.

생각난 김에 손님에게 다시 전화해서 평소에 지네나 노래기 같은 곤충들이 자주 보였느냐고 물었다. 마당에서 어쩌다 한 번씩 보는 경우 말고는 거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다니 집에 향랑각시가 사는 것 같지는 않네.

전화를 끊으려는데 손님이 갑자기 “사장님!”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우연일지도 모르지만요. 왜 처음에 요강 가지고 왔을 때요. 그때는 집에 그런 벌레들이 많았어요. 안방이고 거실이고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자주 놀라고 그랬거든요. 약도 여러 번 놓고. 그런데 요강을 고쳐서 가져온 후로는 이상하게 벌레들도 잘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요강에 붙은 귀신이 없어져서 그런가보다 생각했어요.”

6년 전에 그랬었단 말이야? 손님의 말대로 우연일 수도 있지만 만일 아니라면 요강이 사라진 일은 어쩌면 향랑각시와 관련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6년 전에도 이번에도, 다지류 곤충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게 요강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잖아. 막상 향랑각시가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향랑각시를 찾을 수 있으면 뭔가 정보가 더 들어올 것도 같은데.”

요강이 사라진 자리에 곤충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향랑각시와 요강이 관계가 있다는 거니까. 어쩌면 요강을 가져간 게 향랑각시인지도 모르고.

내 중얼거리는 말에 수호 녀석이 픽 웃었다. 저 백은호스러운 표정을 보니 방법이 있는 거야. 묻고 싶지 않은데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냐, 너. 쪼개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하든가.”

“할 말 없는데요.”

웃는 표정을 싹 지우며 녀석이 의뭉스럽게 대꾸했다. 거짓말 하지 마, 임마. 있잖아. 분명히 쓸 만한 방법이 있는데 내가 모르니까 비웃었잖아.

내 소리 없는 외침을 들었는지 녀석이 조금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뭐, 향랑각시를 찾을 방법은 있지만요.”

“뭔데? 말해봐.”

녀석은 말하는 대신 집게손가락을 척 세웠다. 뭐. 어쩌라고.

“한 잔입니다.”

…예?

멍하니 쳐다보는 내게 녀석은 “고급정보를 공짜로 바라시면 안 되죠.”라고 태연히 말했다. 어린 게 벌써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 버린 거냐. 이 자식 어디서 딜을 하려고 들어. 누가 그렇게 가르치디? 응? 음…내가 가르쳤군. 제길. 이 녀석 수리비라고 자료수집 시켰더니 복수하는 건가?

“얌마, 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세속의 부는 먼지와 같은 것이라 깨닫지 못하는 사이 몸에 묻는 것이지 수고로이 뒤쫓는 것이 아니라며?”

“아저씨 스승님의 말씀도 타당하다고 봐서요. 중도를 걸으려고 합니다만.”

아니 별로 벌써부터 중도를 걸을 필요는 없지 않냐? 테스토스테론이 폭발하는 중2답게 한쪽으로 치우쳐도 괜찮아.

“그래서 한 장이 얼마인데?”

“한 장이 아니라 한 잔이라고요.”

뭐냐, 너. 설마 너도 백은호처럼 유하의 백화주를 노리는 거냐? 미성년자 주제에!

“카푸치노 아이스로요.”

응?

“엄마가 커피를 못 마시게 해요.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말래요.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마시면서. 심지어 식당의 공짜커피도 못 마시게 해요. 학교에도 자판기 있거든요. 커피도 안 마셔본 중학생이 어디 있어.”

녀석 쌓인 게 많았나 보다. 어쨌든 어머니 감사합니다.

가까운 카페에 커피 두 잔을 주문해 놓고 나는 녀석이 말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들었다.

“지네나 노래기는 냄새가 심해요. 향랑각시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것 때문이거든요. 기분 나쁘지 말라고 좋은 말로 향랑(香娘)각시라고 부르는 거지 사실은 악취잖아요. 그러니 냄새를 쫓아가면 향랑각시가 움직인 길을 찾을 수 있어요.”

“그게 사람 코로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냄새야?”

아니 그렇다고 해도 벌써 며칠 전인데 냄새는 이미 날아가지 않았을까?

“막 지나간 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무리죠. 하지만 후각이 뛰어난 개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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