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79화 (79/218)

요강 도둑(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흥…혼령이 붙어있는 요강. 알고 있어. 그 놋요강.”

향랑각시가 말했다.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방에 들어온 후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상대방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대답도 느리고, 지독히 사회성 없는 요괴인 것 같다.

“지금 어디에 있지?”

그래도 대화는 되고 있으니 다행이랄까. 내 물음에 향랑각시는 한 번 더 장죽을 빨더니 연기를 뿜어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그걸 왜 가르쳐 줘야 할까.”

음? 그거야…하긴 묻는다고 꼭 가르쳐줘야 하는 건 아니구나. 질문에 반드시 대답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잠깐. 그게 아니잖아.

어쩐지 흐리멍텅해지려는 머리를 흔들어버리고 나는 다시 말했다.

“네가 요강을 멋대로 가져왔으니 되찾아서 돌려놓으려는 거야.”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오면 도둑질이라고 엄마 지네한테 안 배웠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고 향랑각시는 다시 장죽을 물었다. 입술을 모으며 담배연기를 빨아들였으나 시원치 않았는지 대통을 뒤집어 놋화로에 탕탕 두드렸다. 대통 안의 재가 화로 안에 우수수 떨어졌다.

“할멈.”

향랑각시의 부름에 문이 열리고 옥색 한복을 입은 노부인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연초를 채워줘.”

그녀의 말에 노부인은 화로 옆에 앉아 대통 안에 연초를 채우고 꾹꾹 눌러 다졌다. 이 할머니는 또 무엇의 변신일까. 눈여겨보았으나 소녀와 달리 어디에서도 이상한 데는 없었다. 내게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얼굴도 평범하게 주름진 노인의 것이었다.

등을 꼿꼿하게 세운 자세나 군더더기 없으면서 조용한 행동에 기품이 엿보였다. 요괴라도 이정도로 나이를 먹으면 연륜이라는 게 생기는 건가 감탄했다가,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기운이 다르다.

노부인은 향랑각시나 소녀와 다른 종류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어둡고 음습하면서 서늘한, 피부를 차갑게 식히는 이 느낌은 분명 혼령 특유의 것인데.

“재미있는 말을 들었어, 할멈.”

대통을 화로의 불씨 안에 푹 파묻으며 향랑각시가 말했다.

“내가 어디에선가 남의 요강을 훔쳐왔다고 하네. 허락도 없이 말이야.”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부인은 화로 옆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침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향랑각시가 물부리에 입술을 대고서 눈을 치켜떠 노부인을 올려다보았다.

“말해 보아. 내가 할멈이 깃든 요강을 훔쳐 왔나?”

향랑각시의 시선이 확실히 노부인에게로 닿았다. 그 시선을 따라 내 눈도 노부인을 향했다. 이 할머니였어. 요강에 깃든 할머니 혼령. 그러고 보니 얼굴에서 손님과 닮은 구석이 보였다. 제길.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방에 들어오자마자 알아차렸을 텐데.

향랑각시의 붉은 입술이 하얀 연기를 풍겼다. 노부인이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오.”

한마디뿐이었다. 들었냐는 듯이 향랑각시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라고?

“할머니, 무슨 소리에요? 할머니 손자가 저를 직접 찾아와서 요강이 사라졌다고 했어요. 찾아달라고요. 집안의 상자에는 죽은 향랑각시가 무더기로 남아있었고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원해서 여기에 있는 건 아닐 거예요. 그렇죠?”

6년 전에도 할머니는 소란을 피운 이유를 한사코 말하지 않았지만 사흘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이다. 영감 도깨비도 할머니가 집에 남아있는 이유가 손자 때문이라고 했고. 자의로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

“내 스스로 온 게요.”

내 생각을 뚝 잘라버리는 듯 단호한 대답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뭐라고 우길 수도 없고.

향랑각시의 담배연기가 훅 날아와 시야를 흐렸다.

“이제 알았으니 되었겠지.”

내 등 뒤에서 드르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례가 나가는 길을 안내해 줄 거야.”

막례란 아까 나를 인도해 온 소녀의 이름인 것 같다. 분명한 축객령이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가라는 대로 갈 수는 없잖아. 무엇보다 스스로 여기에 왔다는 할머니의 말도 신용할 수 없고. 향랑각시에게 약점이 잡혀 있거나 홀렸거나 한 상태인지도 몰라. 음…혼령도 홀릴 수 있는 건가.

어쨌든 쫓겨나지 않으려면 뭔가 핑계가 있어야 했다.

“그…밤이 늦어서 그런데, 하룻밤만 묵어갈 수는 없을까?”

내가 말했지만 어설프다고 생각은 한다. 지금이 “지나가던 과객이오만…”이라며 민가에서 잘 곳을 구하던 시절은 아니잖아. 당장 이곳을 나가면 5분 안에 모텔이 나올 테고 차를 타면 15분 안에 집에 갈 수 있단 말이지.

그러나 향랑각시는 내 말에 고개를 기울이더니 막례에게 새롭게 명령했다.

“얘, 손님에게 방을 내 드리고 자리를 봐드려라.”

문밖에 서 있던 소녀가 “예, 아씨.”하고 대답한 다음 내가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뭐냐. 이런 어설픈 핑계가 먹히다니. 하지만 기회가 주어졌으니 놓칠 수는 없겠지.

고맙다고 말한 다음 방에서 나오자 소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서서 갔다. 복도를 따라 쭉 걷더니 몇 개의 방문을 지나친 끝에 막다른 곳에서 멈추어서 불빛이 어른거리는 장지문을 옆으로 밀었다.

안은 향랑각시의 방과 비슷한 크기에, 전형적인 사랑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녀가 “잠시만 기다리시어요.”하고 나를 문 밖에 세워놓더니 방 한가운데에 펼쳐진 왕골 돗자리와 방석, 화로 같은 것들을 재빨리 치우고 그 자리에 두툼한 요와 빛 고운 비단으로 겉감을 댄 이불을 깔았다.

“그럼 편히 쉬시어요.”

소녀는 공손히 절한 다음 총총 떠나갔다. 잰걸음으로 걷는 소녀의 치맛자락 밑에서 여전히 바늘같이 가늘고 뾰족한 것들이 들락날락 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거, 벌레 소굴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될 판인데. 그래도 이걸로 일단 시간은 벌었으니 무엇보다 먼저 할머니 혼령과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소녀는 어디론가 가버렸고 복도는 텅 비었다. 내가 나온 뒤로 문 여닫는 소리를 못 들었으니 할머니 혼령은 아직 향랑각시와 함께 있는 것일까.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서 복도를 되돌아갔다. 향랑각시의 방은 모퉁이를 돌아 두 번째 문이었다.

복도 양쪽으로 보이는 문마다 모두 불빛이 환했으나 사람의 기척도 요괴의 기척도 혼령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향랑각시의 방이 유일했으나, 그것도 꽤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약했다.

이상한 일이다. 거리는 고작 15미터 정도. 이 거리에서 기운을 읽는 것은 이제 능숙하게 하고 있는 터였다. 어떤 존재인지 몇 명인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는지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불편할 정도로 그 감각이 둔했다.

어느 정도로 둔해졌는가 하면, 향랑각시의 방 앞까지 오고 나서도 어쩐지 요괴와 혼령의 기척이 다시 15미터 정도 멀어진 것처럼 느껴질 만큼이다.

이거 안 좋은데.

불안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복도를 걸으며 방향과 문의 개수를 틀림없이 세고 있었다. 모퉁이를 돈 다음 오른쪽으로 세 번째 문, 거기가 향랑각시의 방이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훨씬 멀었다. 이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은 분명 아까 본 그대로 보름달을 닮은 둥근 모양. 안에서 호박색 불빛이 창호지를 뚫고 조금씩 흔들리며 새어나왔다. 귀를 기울여 보아도 아무 소리가 없다. 이렇게 된 바에는 안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거라면, 조상님들이 쓰던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문을 열지 않고도 조용히 방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

나는 집게손가락을 입에 넣어 침을 묻힌 다음 창호지에 대고 조심히 밀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창호지가 침에 젖자 손가락 모양으로 조금 밀려났다가 이윽고 소리 없이 구멍이 나고 말았다. 그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자 과연 불빛에 밝혀진 방안의 풍경이 환히 드러난다.

노란색 장판지에 사방탁자만 놓여있는 넓은 방이었다.

향랑각시의 방이 아니야? 여기가 아니면 어디지?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방향을 헷갈렸나?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읽었던 기운을 믿고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15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할머니 혼령의 서늘한 기운과 함께 향랑각시의 요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곳이. 그쪽으로 이동하자 복도는 한 번 더 꺾이며 세 번째에서 아까와 같이 둥근 모양의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기운은…다시 멀어졌다.

이번에는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서 확인하지 않고 곧장 문을 열었다. 역시 텅 빈 방이 나타났다.

이런 식이란 말이지.

이 건물의 구조가 마음대로 바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내 감각이 엉망이 되어있는 거겠지. 둘 다일 수도 있고. 어쩐지 몰래 움직여 할머니 혼령을 만나보겠다는 계획은 망한 것 같은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되는데까지 발버둥 쳐볼 수밖에.

혼령의 기운에 집중하며 다시 이동했다. 이번에는 살금살금이고 뭐고, 최대한 빨리 가는 것으로 바꾸었다. 복도를 달려 모퉁이를 돌고, 기운이 가까워지는 곳에 닿자 역시 아까와 같은 동그란 문이다. 문을 확 밀어젖혀 여는 순간 혼령의 기운은 사라지고 방안은 텅 빈 채로 나를 맞았다.

그렇다고 같은 장소를 맴돌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내가 계산하기로는 그랬다. 방향은 매번 다르고 달린 거리도 달랐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기운을 따라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대신 지나가는 길목마다 보이는 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텅 빈 방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기운은 점점 가까워진다. 모퉁이를 돌아 세 번째로 보이는 문. 보름달처럼 둥근 문이다. 문을 밀자 흐릿한 방안에서 담배냄새가 물씬 풍겼다.

돌아왔다. 향랑각시의 방이다.

장침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있던 향랑각시가 눈을 조금 치떴다. 할머니 혼령은 없었다.

“어쩐 일일까. 잠자리가 불편했나.”

향랑각시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할머니 혼령은 없지만, 그 기운만은 여전히 방안에 있었다. 여기에 있다. 어딘지 모르지만 분명 이 방 안에 할머니의 놋요강이 있었다.

“아아, 너무 외롭더라고.”

대충 대꾸하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요강을 숨길만한 장소는 많았다. 세 개나 되는 큰 장이 있었고 사방탁자의 아랫칸도 크기가 충분했다. 다락은 말할 것도 없다.

보통 때라면 혼령의 위치 정도는 짚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집중해도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정도밖에 느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그렇다면 잘 되었어.”

향랑각시가 장죽을 내려놓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켰다고 생각했으나, 어쩐지 앉은키라고 보기에는 머리가 높았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사각거리며 일어났다. 바닥을 손으로 짚거나 다리를 고쳐 앉는 동작도 없이, 그녀의 몸이 점점 일으켜 세워지고 있었다.

“마침 나도…”

점점, 자라는 것처럼 일자로 서는 순간, 그 키에 미치지 못한 크림빛의 치맛자락이 공중으로 들렸다. 그리고 치마 밑에서 보료를 밟고 있는, 여러 개의 붉은 가시와 같은 뾰족하고 가는 발이 검붉은 몸통과 함께 드러났다. 그 모습은 분명 지네, 그대로였다.

완전히 몸을 일으켜 나보다도 커진 향랑각시가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며 붉은 입술을 핥았다.

“배가 고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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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 도둑(6)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수호 녀석, 향랑각시가 위험하지만 호전적인 성격은 아니라며! 나보다 머리 세 개쯤은 높은 데서 흔들흔들 내려다보고 있는 저걸 직접 봐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수호 녀석이 앞에 있다면 짤짤 흔들면서 불평하고 싶은데 지금 그런 희망사항을 꿈꿀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다. 긴 몸체를 세운 향랑각시가 입맛을 다시며 나를 노리고 있었다. 인간인 체하는 것을 그만둔 순간 하얗고 긴 손도 이미 가늘고 뾰족한 다리들로 바뀌었다.

백치미 있는 요염한 미모가 지네의 몸통과 결합되자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얼굴은 오히려 기괴함만 더했다. 차라리 머리도 지네로 변해 버리지. 사람만한 지네 쪽이 오히려 편할 것 같다.

칫 - 치잇 -

그 몸의 어디에선가 소리가 새어나왔다. 바닥을 디딘 발들이 보료를 꽉 잡으며 향랑각시의 상체가 뒤로 조금 물러났다. 온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내 몸도 바짝 긴장했다. 물러났던 상체가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속도가 느리다. 백은호와는 비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윽!”

나는 더 느렸다. 긴 몸이 달려들어 나를 뱀처럼 휘감는 동안 한 발짝을 뗀 것이 전부였다. 지네의 딱딱한 마디가 몸을 감고 거기에 붙은 수십 개의 발이 피부를 꽉 물었다. 오싹한 느낌도 느낌이지만 한순간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냄새가 마디마디 사이로부터 확 풍겼다.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힘이 안 들어가.’

빠져나가기 위해 잡혀있는 팔을 바깥으로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이 부족할 리가 없다. 힘만으로는 백은호와도 겨룰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힘을 전혀 쓸 수가 없다는 거지.

움직임도 힘도, 복도를 헤매던 때를 생각해 보면 기운을 읽는 감각도, 모두 둔해져 버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뿐이 아니다. 뭔지 모를 지독한 냄새를 맡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생각조차 둔해지는 것 같았다.

- 향랑각시는 지네나 노래기 같은 벌레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그 벌레가 변한 요괴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해요. 여자의 머리에 벌레의 몸을 하고 있대요.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고, 독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기도 해요.

수호 녀석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아른거렸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로 유명한 지네인데다 독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건물에 들어온 후로 물린 적도 없고 뭔가를 만진 적도 없는데 어떻게 독에…

시야가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깜박이며 앞을 보려고 애쓰는 내 앞으로 향랑각시의 하얀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휘어져 웃고 있는 붉은 입술을 보자 생각이 났다.

‘연기다.’

이 방에 들어온 후로, 나는 그녀가 내뿜는 담배연기를 계속 마시고 있었다. 그 냄새에 지네의 독이 섞여 있었다면 설명이 된다. 아아…지네는 담배 냄새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지네 쫓아내는 민간요법에 그런 거 있지 않았나. 어쩐지 십자가 목걸이를 건 뱀파이어의 농담이 떠올랐다.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뇌 어딘가에 있을 위기를 감지하는 부분이 슬슬 마비되고 있나 보다.

“향기로운 몸이로다.”

향랑각시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참. 잊고 있었는데 나는 요괴들에게 꽤 맛있는 먹잇감이었지. 이 맛있는 몸은 이제 곧 얼굴만은 미인인 향랑각시에게 먹히게 되는 건가. 저 붉고 야들야들한 입술이 닿는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하…아니, 취소다.

그 입술이 쩍 벌어지면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 대신 까맣고 뾰족한 이빨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자 멍청해졌던 머리가 확 깨는 것 같았다. 씹히는 건 수영이 녀석의 카페 잡담으로 충분하니까 저런 이빨은 사양이다.

그런데 마음뿐이고, 좀처럼 힘이 모이지 않는 몸을 이리저리 틀어 봤지만 빠져나가기는 고사하고 팔을 빼내 막을 수조차 없었다. 향랑각시의 이빨을 막기 위해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어깨에 걸렸던 가방을 미끄러뜨려 떨어뜨리는 정도였다. 흘러내리는 가방을 무릎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차올렸다.

타격을 줄만한 속도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가방은 내게 달려들려던 향랑각시의 눈앞을 가로막았고, 향랑각시는 그것을 무시하는 대신 사나운 입으로 확 물어 흔들었다. 캔버스 소재의 가방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동시에 안에 있던 물건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수백 개의 구슬이 좌르륵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뭔가 작고 노란 것들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가방 안에서 쏟아진 것을 본 향랑각시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소리였다. 비명과 함께 주변 정경이 물그림자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비명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나를 죄고 있던 몸이 풀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수십 개의 마디로 이루어진 몸통이 안과 밖으로 번갈아 휘었다 펴졌다. 그동안 괴로운 비명이 계속해서 울렸다.

바닥에 노랗게 깔려 있는 구슬과 같은 것을 집어서 보니 그것은 콩이었다. 누렇게 구워진 자국이 있었다. 향랑각시는 방바닥에 흩어진 콩 위에서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지만 방안 어디에도 콩이 없는 곳은 없었고 둥근 구슬 같은 콩 위에서 그녀의 몸은 수없이 구르고 미끄러졌다.

아무래도 저렇게 울부짖고 있으니까,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괘씸하지만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괜찮을까. 구해주면 다시 마음을 바꿔서 잡아먹으려고 드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는데 방 밖에서 향랑각시의 치맛자락을 잡고 끌어당기는 손이 있었다. 요동치는 몸이 치마와 함께 방에서 끌려 나갔다.

방에서 나간 향랑각시가 울음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었다. 방안에 있는 동안의 고통이 끔찍한 것이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울면서 방으로부터 멀어지려고 꿈틀거리며 복도를 기어간다. 향랑각시를 방에서 꺼내준 장본인인 할머니 혼령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향랑각시는 치맛자락 같은 울음소리를 끌며 복도의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할머니 혼령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아이가 또 도령을 귀찮게 했구려.”

역시 이 할머니는 나를 기억하고 있다.

“뭐, 저야 일이니까요. 할머니가 깃든 요강을 어디에 숨겼는지 아시죠? 집으로 돌아가게 해 드릴게요.”

그것도 그렇고, 향랑각시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이 지네 소굴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 말에 할머니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소만 나는 갈 수 없다오.”

예…?

“왜요? 향랑각시가 해코지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럼 아까 왜 살려주신 거예요. 그냥 두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어요?”

물었지만 할머니는 입술을 꽉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말 안 해주시면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요강 때문에 손자분이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대요. 가서 뭐라고 설명해요. 할머니가 돌아가기 싫다면서 지네랑 같이 있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내 말에 할머니의 표정이 더욱 난처하게 굳었다. 미안하지만 이쪽도 일이라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라도 알기 전에는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말씀 안 하시면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향랑각시는 퇴치해 버리고 요강을 찾아서 돌아가는 수밖에.”

“그건 안 되오. 내가 약…”

내 말에 놀랐는지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가 후회하는 얼굴로 말을 끊었다.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조금만 밀어붙이면 될 것도 같은데.

“6년 전에도 저한테 아무 말씀 안 하고 돌아가셨죠? 이번에는 안 되겠어요. 또 같은 일이 생겨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왔다가 이런 위험한 꼴을 당할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할머니는 오히려 향랑각시를 풀어줘 버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모두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게요.”

할머니가 사정조로 말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요. 덕분에 잡아먹힐 뻔 했으니까 그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할머니 죄송. 그런데 궁금하기는 해요.

내 단호한 태도에 곤란한 얼굴로 망설이던 할머니가 마침내 한숨을 쉬었다.

“아까 그 지네는, 본래 우리 집 창고 뒤편에 살고 있었다오. 지금은 집을 넓혀서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창고 뒤로 집터보다 좀 높은 자리에 텃밭이 있었소. 텃밭과 창고 사이의 울타리 나무 밑 그늘진 곳이 지네의 거처였던 것 같소. 그런데 가족들이 불고 방이 부족해지자 집을 넓히기로 하고 그 자리를 밀어버렸던 게요.”

6년 전의 일이었다.

“살던 곳이 쓸려 나가니 거기 살던 지네가 밖으로 기어 나왔는데 그것을 본 손주 녀석이 그만 들고 있던 삽으로 지네를 내리쳐서 죽여 버렸다오. 그때 죽은 것이 저 향랑각시의 남편이었소.”

어엇, 그런 거였어? 그러면 6년 전의 그 소란은…

“남편이 죽으니 과부가 된 향랑각시가 노한 것은 당연한 일. 독을 품고 손주에게 복수를 하려고 들었소. 그것을 막자고 내가 밤마다 소란을 피울 수밖에 없었던 게요. 잠들어 있는 사이에 독을 마시고 혼수상태가 되면 저항도 못하고 죽게 될 테니 말이오.”

“그런데 왜 그때는 그런 이야기를 안 하셨어요?”

말해줬으면 그때 어떻게든 해결했을 일이었잖아.

“어찌 되었건 손주가 향랑각시의 남편을 죽인 것은 사실이고 그 원한이 손주에게 되돌아가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일을 순리대로 풀자면 결국 그 아이가 대가를 치러야만 하지 않겠소. 내가 아녀자의 얕은 머리로 그 일만은 어떻게든 피하자고 생각하여 도령에게도 말하지 못했다오.”

아니 뭐. 손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잘못은 아니죠….

“그래서 다시 향랑각시가 찾아왔을 때, 내가 먼저 제의를 했소. 복수를 한들 남편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며 내 손주를 죽인들 그 업은 다시 지네에게 돌아갈 터이니, 차라리 내가 그 죄를 대신 갚겠다고 말이오.”

그래서 할머니는 향랑각시의 요구에 따라 이곳에 와서, 3년 동안 온갖 오물을 받는 놋요강으로, 또 3년 동안 가래나 침을 뱉는 데 쓰는 타기(唾器)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3년 동안 뜨거운 불을 담는 놋화로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이 7년째니까 할머니의 요강은 놋화로의 모습을 하고 있을 터다. 눈앞에 두고도 몰랐구나.

“내가 향랑각시와 약조를 한 터이니, 도령에게나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돌아갈 수는 없다오.”

말하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할머니 혼령에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약속은 약속이지.

할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향랑각시는 남편의 복수를 포기하고 그 집을 떠났고, 향랑각시와의 약속 때문에 할머니는 떠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이곳에 머물겠다니 나로서는 이들의 약속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전후 상황도 확인이 되었고, 이후로 향랑각시 때문에 문제가 생길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바닥에 흩어진 콩들을 쓸어 담아 그곳을 떠났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의 건물 안은 더 어둡고 칙칙해져서 화려한 단청이나 빛 고운 초롱들도 어쩐지 거뭇하게 변색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갈수록 심해졌다. 마침내 1층 입구를 벗어나 돌아보자 내가 보았던 기와 얹은 아름다운 건물은 간 데 없고 짓다 만 시멘트 건축물이 회색 골격만 갖춘 채로 흉물스럽게 서 있었다.

오래 전에 작업을 멈추고 방치 되었는지 녹슨 철판이나 목재들, 딱딱하게 굳은 시멘트 포대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건물 옆의 숲으로 가보니 달님이 녀석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세상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잠든 달님이 녀석을 안고, 간간히 찻소리가 들릴 뿐 조용한 밤길을 걸어 나는 수리점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손님에게 전화를 했다. 사라진 요강은 아마도 3년 쯤 후에 돌아올 것 같다고 알려줄 셈이었으나, 뜻밖에도 이미 요강이 돌아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를 받은 남성-아마도 할머니의 손자일 것이다-이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향랑각시의 원한은 이제 풀린 건가. 아니면 너무 혼이 나서 더 복수할 기운이 없는 건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돌아왔다니 잘 풀린 거겠지. 할머니 때문에 조금 남아있던 미련이 씻겼다.

그날 밤, 습도가 높아 눅눅한 공기에 여전히 더운 기운을 쫓아내려고 샤워를 하고 나온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다 말고 멈칫했다. 허리의 상처가 상당히 아물어서 이제는 깊은 상처만 약간 딱지가 앉은 정도였다. 얕은 상처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남아있는 자국이 전과 다른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유리.

‘령’자에 있던 얕은 상처가 사라지고 나자 획 두 개와 받침이 없어져 ‘리’로 바뀐 것이다.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상처를 낸 당시, 그 날의 기억이 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둘째, 내가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을 누군가에게 방해받으리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몸에 상처를 남긴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고, 그것마저도 방해받을 여지가 있다고 판단해 상처의 깊이를 달리해서 글자를 속였다.

셋째, 그 누군가는 내 방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언제라도 내 물건이나 심지어 내 몸을 확인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아…네 가지구나.

넷째. 그 사람은 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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