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83화 (83/218)

당신이 잠든 사이에(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어쩐지 뒤끝이 안 좋은 말을 해놓고 노인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손짓하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밖에서 정호섭이 휠체어를 밀면서 들어왔다. 식사시간 내내 보이지 않던 그는 마치 하인처럼 문 밖에서 대기하던 중이었나 보다.

그가 노인을 휠체어에 태워 모시고 나가자 여자가 대신해서 말했다.

“궁금한 점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섬이라 물자가 풍족하지는 않지만 어지간한 것은 하루 안에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도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묻지 말라는 걸까. 그녀의 말에 안효정이 가장 먼저 질문했다.

“우리보다 먼저 왔다는 사람들은 누구였지요?”

누구인지 말해줘도 어차피 나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 역시 궁금한 점이었다. 여자는 그 질문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도 없이 대답했다.

“원주의 원박수, 덕유산의 한진, 청일관의 연갑원 사범. 이렇게 세 분입니다. 원박수는 한 달 전쯤에 와서 사흘 뒤 실종되었고 한진과 연사범은 이주 전에 왔다가 역시 사흘과 나흘째 되는 날 실종되었습니다.”

세 사람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사람들의 표정이 굳은 것 같다. 원강과 안효정이 서로를 마주보며 눈짓을 나누었고 추기영은 뭉툭한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백은호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식사를 한 후로 그는 포만감에 차서 나른하니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던 참이다.

“그럼 다른 실종자 세 명은?”

추기영의 물음에 여자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모두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지난달 초순쯤에 집안일을 보는 이순영씨, 사흘 후에 주방 보조인 조명혜씨, 원박수가 실종되고 일주일 후에 어르신의 경호원인 김영권씨가 실종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머니에서 동전이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일이 생기고 있으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자의 태도에 짜증이 치밀어 내가 말했다.

물론 경찰을 끌어들일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섬에 가까워졌을 때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이곳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쩐지 싫었던 것 같다.

바다 한 가운데에 뚝 떨어진 섬에서는 악의가 느껴지는 강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식탁 위에는 정체를 모를 고기가 올라오고, 인간이 분명한 여자로부터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는 요괴 같은 말을 듣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 중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해서.

“고용인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고용주가 실종신고를 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신고를 하려면 시체라도 찾아야 하겠지요.”

여자가 짜증날 정도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안효정이 재빨리 질문을 했다.

“사람들이 없어지기 전에 특별한 일이 없었어요? 기현상이라든가 평상시와 다른 말을 했다든가.”

기현상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않아? 이런 섬이라면 매일 밤마다 귀곡성이 들린다거나 아침이 되면 집안의 물건들이 거꾸로 뒤집어져 있다든가 하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오히려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특별한 일과 특별하지 않은 일을 어디에 기준을 두고 구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실종 전에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초대되어 오신 분들 중 원박수는 이 섬에 수많은 사령들이 몰려있다는 말을 했고, 한진이라는 분은 밤에는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아니라도 어두워지면 아무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실종 전에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니, 잘도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이 여자는 인간이 분명한데도, 그리고 몸 안의 기운으로 짐작컨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 않은 보통 사람인데도 백은호보다 요괴 같았다.

“먼저 왔던 사람들이 남긴 말은 더 없었습니까? 아니면 사소한 거라도 기억이 난다면 말해주십시오.”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원강이 드디어 질문을 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다. 외모와 별반 다르지 않게 특색 없는 저음이었다.

그의 질문에 여자는 처음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돌이켜 보는 건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추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원박수는 대부분 방 안에 틀어박혀서 공수나 경문을 외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밖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어서 대화를 나눈 적도 몇 번 없습니다. 한진은 낮 동안 밖을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기 전에 이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무릎과 소매에 흙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으로 본 표정변화였다.

“한진이 실종된 날 연사범은 크게 다쳐서 의식이 없는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다음 날 실종되었지요. 스스로 걷기 힘들만큼 위중한 상태였는데 혼자서 나간 것처럼 창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정문으로 나갔다면 누군가 봤을 테니 거기에서 뛰어내린 것 같습니다. 실종된 후에 방을 청소했는데 침대에서 짐승의 털 같은 것을 한줌 발견했습니다.”

털이라고?

“무엇의 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짙은 색에 장모종의 개나 가질 법한 털 길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섬에 토끼나 다람쥐 이상의 큰 동물은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그 털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혹시 가족이나 보호자가 유품을 원할지도 몰라 가져온 물건들과 함께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것 좀 봅시다.”

추기영이 말하자 여자는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방안의 공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한진이라면 오주동(五洲洞)의 그 한진일까요? 소양 선생의 제자 중 하나인?”

안효정이 나직해진 목소리로 원강에게 물었다. 한진은 도사라든가 그쪽에서는 알려진 사람인 모양이다. 원강은 눈살을 찌푸릴 뿐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어도 안효정은 계속 물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형제 중 하나가 움직였겠죠? 동문이 실종되었는데 손 놓고 있을 리는 없잖아요.”

“모르겠다. 이제 스승도 없고 제자들도 각자 제 갈 길로 간 지금….”

원강이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추기영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일관의 연사범은 내가 면식이 있는데, 본래 화교라 무예로는 중국의 것을 배웠으며 선도에도 일가견이 있고 사람됨이 신중하고 영민해서 쉽사리 위험에 빠질 인물이 아니오.”

“원주의 원박수도 그 방면에서는 꽤 알려진 사람입니다. 박수라고 불리지만 앉은거리를 하는 법사로, 치성과 공수에는 전국에서도 손꼽힌다고들 하지요.”

백은호가 나른한 얼굴로 한 몫 거들었다.

들어보니 앞서 온 세 사람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혼자거나 기껏해야 둘이었잖아. 이쪽은 여섯. 거기다 우리에게는 백은호라는 몇백 년 묵은 여우요괴가…

옆을 힐끗 본 나는 어쩐지 요사한 백은호의 옆모습을 보고 약간 불안해졌다. 식사 후로 이 녀석 좀 이상해진 것 같다. 평소의 재수 없고 잘난 체하고 냉정무심한 여우요괴는 어디 가고, 졸린 것 같은 얼굴을 한 멍청한 표정의 백은호가 앉아있다. 그 얼굴을 8초에 한 번씩 힐끔거리는 안효정에게는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만.

복도 쪽으로부터 여자가 돌아와서 우리의 짧은 대화는 멈추었다. 그녀는 약봉지 모양으로 접혀 있는 종이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원강이 재빨리 손을 뻗어 종이를 펼쳤다. 하얀 종이 안에는 5센티 정도의 길이인 암갈색 털이 한 줌 있었다.

모두들 조금씩 털을 가져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나도 몇 가닥 가져다 눈앞에 들이대고 보았지만 뭔지 알 길은 없었다. 보기보다 올이 굵은 느낌이라는 정도? 거기에 남겨진 기운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털의 뿌리쪽 끝에, 뭔지 까맣게 말라붙은 작은 덩어리들이 보였다. 피일 터다. 털이 난 곳에서 쥐어뜯어 뽑아낸 흔적이었다. 나로서는 어떤 짐승의 것인지 구분이 안 갔지만 원강은 눈에 띄게 표정이 변하고 추기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백은호를 힐끗 보자 별로 흥미 없는 듯이 털을 휙 떨어뜨린다.

이 털이 뭔지 짐작도 안 가는 사람은 나와 안효정 뿐인 것 같다. 그녀가 궁금한 얼굴로 원강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눈도 맞추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할 생각이 없다.

이것은 그 미라 같은 노인의 마지막 말이 만들어낸 효과인가. 물론 안 좋은 쪽의 효과인 것 같지만.

일행은 털을 본 후로 모두 말이 없었다.

“질문이 더 없으시면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자는 우리를 데리고 로비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갔다. 카펫이 깔린 복도 양편에 네 개의 문이 있었다. 복도 끝에는 작은 방 정도의 공간이 있어 소파와 파티션이 놓였고 유리창 너머에서 2층에 닿는 나무의 가지가 까만 그림자를 흔들었다.

“여기에서 마음에 드는 방으로 아무 곳이나 고르시면 됩니다. 방을 정하시면 문 안쪽의 손잡이에 걸려 있는 노리개를 바깥의 손잡이에 걸어주십시오. 주인이 정해진 방이라는 뜻입니다.”

여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과연 이쪽 복도의 문 네 개 중 하나에는 파란 수실이 늘어진 노리개가 하나 걸려 있었다. 아직 얼굴을 못 본 청단애기의 방인 모양이다.

호기심 많은 안효정은 두리번거리며 복도 끝 방까지 들어갔다. 나도 따라가 보았다. 달리 이어지는 곳은 없었다. 막다른 곳에 만들어진 휴게실 같은 방일 뿐이다.

로비의 양쪽 벽을 타고 올라온 계단이 다시 각자의 복도로 이어졌으니 2층에는 두 개의 복도가 있는 셈이었다. 안효정은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다른 쪽 복도에 가더니 역시 막다른 곳에 만들어진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본 것과 쌍둥이처럼 똑같은 방이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3층 이상으로 보이던데. 그러면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어디에 있는 거지?

“저와 김씨는 일층에 있으니 필요하면 아래로 내려오셔서 저희를 부르십시오.”

여자가 우리를 향해 말했다. 김씨란 선착장에서 우리를 데려온 남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 말을 끝으로 내려갈 줄 알았으나,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이어서 말했다.

“1층과 2층을 자유롭게 돌아다니셔도 좋지만 3층은 어르신이 계시는 곳이니 부디 출입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한 번씩 본 그녀가 사뭇 우아한 태도로 눈을 내리떴다.

“혹시 바깥을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몸을 돌려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여자가 멀어질 때까지 우리는 계단 앞 복도에 서 있었다. 백은호만이 유유히 걸어서 가장 가까운 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을 뿐이다.

“경고인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해명 도령은 어쩔 셈이에요? 당신 일행은 나갈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안효정이 나를 보며 물었다. 여전히 호기심이 넘치는 아가씨다.

“그렇게 말하는 아가씨는?”

내 대신 추기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저도 첫날부터 힘 뺄 생각은 없으니까요. 배 타느라 힘들기도 하고. 오늘은 푹 쉬어서 기운을 모아둘래요.”

안효정은 그렇게 말하고는 저쪽 복도로 휙휙 걸어갔다. 원강이 우리에게 목례를 보내고는 그녀를 따라갔다.

정말일까? 호기심 강한 그녀가 얌전히 자러 가겠다는 말을 믿어야 하나. 그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추기영이 씩 웃었다.

“그럼 나도 이만.”

서글서글한 웃음을 남기고 그는 백은호가 들어간 방 맞은편의 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 방은 백은호의 옆 방 밖에 없다. 다른 쪽 복도로 가면 너무 멀어진다 싶고. 이래저래 이쪽 복도의 방 네 개는 모두 주인이 생기게 되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맞은편 문을 힐끗 돌아보았다. 청단애기는 이곳에 이미 혼자서 하루를 지낸 셈이다. 그녀도 매번 식사 때마다 그 불길한 고기를 대접받았을까? 방안의 기운을 읽어보았지만 어쩐지 막힌 것처럼 흐릿했다.

그러고 보면 백은호도, 그 맞은편 방의 추기영도 쉽게 기운이 읽히지는 않는다. 묘한 곳을 와버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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