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85화 (85/218)

당신이 잠든 사이에(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인형이라고 생각한 것은 머리와 몸통에 해당하는 나무토막에 사지처럼 길쭉한 나뭇가지가 달려있기 때문일 뿐이다. 사실 인형이라고 말해주면 감사할 수준의 엉성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것이 멀쩡히 제 발로 서서 눈이라고 우기는 구멍 두 개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무슨 요괴지? 머릿속의 얼마 안 되는 지식을 모두 끄집어내도 모르겠다. 나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은 두두을뿐이지만 그건 요괴가 아니라 신이잖아.

갑자기 나타난 나무 요괴가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도 물러나려다 생각해 보니 뒤는 요괴들의 도가니였다. 옆으로 슬쩍 피하려는데 나무 요괴가 팔을 휙 뻗었다. 생긴 것과 달리 재빨랐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나를 잡으려고 하는 팔을 낚아채서 확 당긴 다음 딸려오는 몸을 힘껏 걷어찼다. 봐주지 않은 것도 있지만 발길질 한 번에 나무 요괴는 허무할 정도로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 버렸다. 무엇보다 방금 싸운 소리를 다른 요괴들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무조건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이번에는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에, 가볍게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수십 미터를 한 번에 뛰어내리는 셈이 되었다. 떨어지며 가속이 붙은 몸은 착지할 때 신발 자국을 깊고 선명하게 찍을 정도의 무게로 변했다. 그런 식으로 서너 번 뛰어내려서 마을 위까지 도착해 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산은 여전히 고요했다. 정상 너머의 요괴가 소용돌이치던 광경이 거짓말인 것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을 기억에 의지해 겨우 저택에 돌아간 나는 창문으로 뛰어 올라 방에 들어갔다. 신발에 묻은 흙 때문에 비싸 보이는 카펫이 지저분해졌지만 알 게 뭐야. 배 타고 한 시간을 달려서 요괴들의 휴양지 같은 곳에 와 있는 지금 청소하는 사람의 수고를 배려해줄 기분이 아니다.

이런 곳에서 잠들어도 정말 괜찮은 거야? 산 너머에 몰려있는 요괴들이 여기로 안 온다는 보장도 없잖아. 요괴들의 감각으로는 옆집 마실 가는 거나 다름없는 정도의 거리인데.

정상에서 내려다보았던 광경을 떠올리자 새삼 오싹해진다. 창문과 문을 단속하고 침대에 누워도 내가 본 것이 정말인지 싶었다. 이래서는 잠도 안 올 것 같고. 유리조각이나 맞추며 시간을 보낼까 생각했으나

“시간!”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가방을 열어보았다. 제길. 이미 유리조각들은 울퉁불퉁 하나로 뭉쳐버린 후였다. 아…잘 시간이 지났다는 거군.

이제 할 일도 없고. 더 돌아다닐 마음도 없고.

좀처럼 잠들 수 없는 밤이었으나, 늦게까지 뒤척거린 끝에 그래도 결국 잠이 든 모양이다. 자면서 별로 즐겁지 않은 꿈을 꾼 것 같다. 다행히 괴롭히던 것들이 쨍그랑 깨지면서 나는 눈을 떴다. 아니, 깨진 건 내가 가져온 유리장식 같은데.

습관적으로 침대 밑을 내려다보았지만 유리파편은 없다. 가방 안을 보자 산산이 부서진 유리조각들이 얌전히 담겨 있었다.

뭘까. 지금까지 나는 유리장식이 탁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며 깨졌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떨어지거나 부딪치지 않아도 깨질 뿐 아니라 소리도 나는 거네.

별로 쓸데도 없는 것 같은 새로운 정보를 하나 습득한 다음 느릿느릿 옆방으로 갔더니 백은호는 방에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벌써부터 일어나 다들 로비에 모여 있었다. 모여 있다고 하기에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 생각에 잠기거나 창밖을 내다보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거였지만.

내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안효정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해명 도령, 어제는 원강의 인형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면서요?”

예? 뭔 소리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산 위에서, 해명 도령이 너무 긴장감 없이 몸을 드러내고 있기에 잘 숨으라고 알려주려던 건데 그걸 발길질 한 번으로 산산조각 내버렸다면서요. 와아.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벌써부터 우리를 견제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서운해요.”

안효정의 말에

“도령이 너무했구만.”

하고 추기영이 맞장구쳤다. 그럼 어제 내가 부순 나무인형이 원강의 꼭두각시였던 건가?

원강은 소파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푸라기로 뭔가 엮고 있었다. 백은호가 한숨을 쉬고 싶은 표정으로 창밖을 보는 체하는 걸 보니 그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서운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웃음을 참는 안효정의 표정을 보니 이 사람들 지금 나를 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난 그게 요괴인줄 알고…”

어쨌든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 꺼낸 내 말에 안효정이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이렇게 순진하시담. 갑자기 기척도 없이 다가갔으니 잘못은 원강이 한 거죠. 그치만 요괴와 괴뢰도 구분을 못해서 어떡해요. 그래가지고 먹고 살 수 있겠어요?”

그녀가 놀려대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정말로 요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구분을 못했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이상하기는 했다. 요괴라면 이미 익숙했다. 여러 종류의 요괴를 이미 만나보기도 했고, 백은호와도 오래 알고 지낸 만큼 요괴의 기운은 능숙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웃을 일이 아니네.”

지푸라기를 엮던 손을 잠시 멈추고 원강이 말했다. 안효정은 물론 추기영과 백은호도 그를 쳐다보았다.

“다들 느끼고 있을 테지만 이 섬은 이상해. 이상할 정도로 비틀려 있지. 이곳의 기운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흐르고 고이는 것 같아. 게다가 요기가 강해서 그런지 가까이 가기 전에는 요괴를 발견하기도 힘들어. 이미 알고들 있겠지. 산 뒤쪽의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 있나?”

그의 질문에 추기영도 백은호도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로 보니 이미 산 너머에 뭐가 있는지 다들 아는 것 같다. 나야 어제 직접 다녀왔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아는 걸까. 안효정은 원강에게 들었다 치고, 원강은 목각인형을 부려서 알아냈을 터다. 추기영은? 그리고 백은호는 잔다더니 나 모르게 뭐라도 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 십분지 일이 되는 요괴들만 모여 있더라도 이 거리라면 모를 수가 없어. 거기다 이상한 것은 이 집도 마찬가지고. 자네, 어제 집을 살피는 것 같던데 알아낸 것이 좀 있나.”

원강이 지목한 사람은 추기영이었다. 거뭇거뭇하게 돋아난 턱수염을 긁적이고 있던 추기영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가 쑥스럽게 웃었다.

“들켜버렸습니까? 이거 참.”

웃는 얼굴인 채로, 그는 로비 안쪽의 방문들을 날카롭게 훑어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저야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는 쪽이 더 편해서요. 바깥도 그렇지만 못지않게 안도 궁금한 것이 많더란 말입니다. 특히…”

말하며 그의 시선이 천장으로 올라갔다.

“가지 말라면 더 궁금한 거 아닙니까. 산에까지 갔다가 돌아온 뒤로 잠도 안 오고 해서 살짝 구경삼아. 하하. 그런데 확실히 묘한 것이 있더구만요. 거기도 2층과 마찬가지로 복도가 둘에다 방이 여덟, 막다른 곳에 작은 방이 있는 것까지 똑같았습니다. 게다가 방에는 모두 노리개가 걸려있고 말입니다.”

음? 3층은 어르신인가 하는 노인이 쓰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할아버지 혼자 방 여덟 개를 다 쓰는 거야?

“왼쪽 복도의 방 네 개는 모두 비어 있고, 오른쪽 복도의 방은 막 하나를 열어보려는데 옆에서 문이 열리기에 바로 줄행랑을 쳤지요. 그런데, 거기에서 나온 사람은 아마도 노인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안효정의 물음에 추기영이 씩 웃었다.

“도망치면서 발소리를 들었는데 노인보다 무겁고 키도 큰 것 같더라고. 그리고…”

조금 생각해보더니 그가 덧붙였다.

“어디가 불편한 것처럼 걷더군. 치질이라도 걸린 사람 같달까. 걸음이 느려서 다행이었지.”

“뭐예요, 그게.”

안효정이 풋 웃었다. 우스워서 웃었다기보다는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살려보려는 노력 같았다.

“그러면 이 집안에는 우리 외에 다섯 명이 더 있는 셈인가.”

원강이 말했다. 일하는 사람이 두 명, 비서인 정호섭, 집주인인 노인, 그리고 정체불명의 치질환자 하나.

“적어도 하나는 더 있을 겁니다.”

듣고만 있던 백은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젯밤 우리가 먹은 요리를 만든 사람 말입니다.”

우리라기보다는 너잖아.

“요리라면 미리 만들어둘 수도 있잖아요.”

안효정의 반박에 백은호는 예의 얕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종류의 볶음 요리를 직접 만들었다면 몸에 냄새가 남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 두 명 중 요리 냄새가 몸에 밴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서는 줄곧 우리와 함께 있었고 노인이 요리했을 리도 없고요. 추기영씨가 마주쳤다는 몸이 불편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으나, 상식적으로 몸이 불편한 요리사를 쓸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게 말하면 또 그 말이 맞는 것도 같고.

보통이라면 기운을 읽어서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확인하거나 이런 식으로 추리할 수밖에 없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저택이었다.

“집안과 섬을 둘 다 조사해봐야 할 필요가 있어. 이것은 단순히 집에 뭐가 들어왔다는 정도의 문제는 아닌 것 같네. 그리고 아마도, 집주인 역시 그것을 알고 있겠지. 여기 모인 사람들을 보면 말일세.”

그 말을 들으니까 말인데,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아직 얼굴을 구경도 못 한 사람이 하나 있다. 몸이 불편하다며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한 번쯤 들여다봐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그 이야기를 하자 원강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 식당에서 본 여자의 말이, 오늘 점심때까지는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군. 공수나 치성 중에 방해하는 것이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어. 확인한답시고 들어갔다가 일을 망쳐놓으면 낭패일세. 청단애기님이라면 용케 이런 곳에 모셔왔다 싶을 정도로 이름 있는 분이기도 하고. 좀 기다려 보세.”

원강이 저렇게 말할 정도로 그 처녀보살이 유명하긴 한가보다.

대화는 다시 조사 문제로 돌아가서 추기영과 안효정, 나, 이렇게 세 명이 섬을 돌아다니고 백은호와 원강은 집을 조사하기로 했다. 추기영은 그래도 괜찮겠지만 안효정이 요괴와 만나도 문제없는 건가? 내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 쪽을 보자 안효정이 묘한 웃음을 띠며

“추선생님은 괜찮겠지만 해명 도령이 요괴를 만나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라고 놀려댔다. 섬을 돌아다니다 요괴를 만나도 위험할 때까지는 안 도와줄 테다. 나는 약간 꽁해져서 생각했다.

아침식사는 다행히, 어제와 같이 이상한 요리가 없었다. 평범한 재료로 9첩 반상을 차려놓았을 뿐이다. 아침부터 회접시가 올라온 식탁을 보니 돈이 대단하긴 하구나 싶은 한편, 죽과 과일 정도로 가볍게 내놓던 유하의 아침 식탁이 문득 그리웠다.

그릇을 싹싹 비우며 먹으면 내색하지 않아도 기분 좋은 듯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배가 안 고파요?”

내가 멍하니 식탁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보고 안효정이 물었다.

“아뇨. 그냥…”

집 떠난 지 하루 만에 집밥이 그리워진 건가. 아니면 수상쩍기 짝이 없는 그녀가 그리워진 건가. 한숨을 쉬고 나는 수저를 들었다. 맛은 뭐, 괜찮았다. 흥!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