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88화 (88/218)

당신이 잠든 사이에(9)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우리가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를 갓 넘긴 참이었다. 별장에서 일하는 남자, 김씨가 입구 근처에서 잡초를 뽑고 있다가 업혀 오는 추기영을 힐끗 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교대하는 것처럼 어제 식당에서 우리와 대화했던 여자가 별장에서 나왔다.

“다치셨습니까?”

여자가 추기영을 보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추기영이 하하 웃으며 내 등에서 내려왔다.

“아니오. 다치기는. 좀 굴렀는데 이 친구가 어찌나 걱정을 하며 극성인지 마음이나마 편하라고 좀 업혀 왔다오.”

……아니거든요. 걱정한 적 없거든요. 이 아저씨 멀쩡하게 잘 걷는 거 봐. 역시 속였어. 산에서 무슨 수련을 한다더니 연기 수련이었어?

“다른 분들은 식사중이십니다. 곧 준비하겠으니 여러분도 식당으로 가시지요.”

추기영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여자가 차분히 말했다.

“청단애기님은 내려오셨나요?”

안효정이 돌아서는 그녀에게 재빨리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처녀 보살, 점심때까지 방해하지 말아달라며 방에 틀어박혀 있었지.

여자는 안효정의 질문에 멈칫 서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분은 다시 몸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미음을 조금 드신 후 쉬고 계십니다.”

대답하고 나서 조용히 앞서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 우리도 말없이 별장으로 들어갔다. 대화는 없었지만 셋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 좀 씻고 나서 먹을게요. 음식은 식어도 상관없으니 지금 준비해 주세요.”

안효정이 먼저 말하며 위층으로 올라가고

“나도 옷 좀 갈아입어야겠소. 꼴이 이래서.”

추기영이 옷 핑계를 대자 나도 뒤를 따랐다. 어차피 세 명 모두 귀목에게서 빠져나가느라 뛰고 구른 다음이어서 옷은 흙투성이에다 찢어지는 등 엉망이었다.

말해놓은 것과 달리 우리는 곧장 청단애기의 숙소라 짐작되는 방으로 갔다. 안효정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열린 문 안쪽은 어두컴컴했다. 빛이 조금도 없는 방안으로 복도의 불빛이 밀려들었다.

그렇지. 이 방은 복도 안쪽이라 사방 어디에도 창을 낼만한 곳이 없을 터다. 안효정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 동안 추기영이 방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문 좀 활짝 열어보게.”

그가 방안에서 내게 말했다. 시키는대로 문을 열자 방안이 한결 환해졌다. 추기영이 방 안쪽의 어두운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불빛 덕분에 스위치가 보였는지 안효정이 “아!”하고 탄성을 내며 불을 켰다.

불이 확 들어오는 순간 나는 눈을 찌푸렸다. 방안은 온통 붉었다. 마치 붉은색 선글라스라도 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닥도 벽도 가구도, 심지어 전등도 붉은 전구라 사람들마저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내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여기는 흑백이 아니라 붉은색으로 모노톤이라는 것 정도다.

“정말이지 이 집의 손님방 인테리어는 악취미네요.”

온통 붉은 방을 둘러보며 안효정이 중얼거렸다. 말하는 걸 보니 그녀의 방도 비슷한 지경인 모양이었다.

“화장실 좀 확인해 보게. 옷장도.”

파티션 뒤로 들어가 침대를 확인한 추기영이 우리에게 말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침대가 비어있다는 뜻이다. 안효정이 화장실로 달려가고 나는 그 옆에 딸린 드레스 룸의 문을 열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이 깨끗하다. 화장실에서 나온 안효정도 고개를 저었다.

“최근 며칠 동안 사용한 적도 없는 것 같아요.”

침대는 주름 하나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안효정이 이불을 들추고 꼼꼼히 확인했다. 심지어 냄새까지 맡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용하고 있는 방은 확실히 아니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지? 아니, 정말 청단애기님이 오기는 오신 건가?”

추기영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 청단애기가 도착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직접 본 적은 없는 것이다.

“저와 원강의 방 옆은 둘 다 비어있었어요. 어제 확인했어요.”

안효정이 말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1층과 3층이다.

“1층은 아닐 걸. 주방과 창고로 쓰는 방은 확인했고, 계단 옆의 작은 방 둘은 그 여자와 김씨라는 남자가 쓰고 있을 걸세. 기척만 확인한 거지만.”

결국 3층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있다고 해도 왜 청단애기만 3층에 숙소를 준 거지? 의문은 계속 쌓이고 있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해보기로 하고 우리는 대충 옷만 갈아입은 다음 식당으로 내려갔다.

원강과 백은호는 거의 식사를 끝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렸잖습니까. 일부러 늦게 먹는 것도 고역이었습니다.”

백은호가 우리를 보고 불평했다. 이쪽의 둘도 우리와 할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안효정이 먼저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지금까지의 일을 보고했다. 귀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원강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바뀌고 백은호는 못 봐서 아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다음으로 청단애기의 방에 갔던 이야기를 했다. 방이 비어있다는 말에 그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이미 알고 있는 기색이었다.

“원강님이 별장 안의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는 동안 제가 방을 확인했습니다. 1층에는 일하는 사람 두 명, 2층에는 우리 다섯 명 외에 없고 3층은 적어도 넷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누굴 봤어요?”

네 명이라는 말에 안효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본 것은 아닙니다. 냄새를 맡았을 뿐입니다.”

백은호가 태연히 대답했다. 아, 저 녀석은 여우니까.

“냄새로 넷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거기에 누가 있는지까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두 명은 남성, 두 명은 여성이라는 정도일까요.”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와아, 역시 여우요괴!”

안효정의 감탄에 추기영의 표정이 뜨악하게 변했다. 백은호가 여우인줄 모르고 있었나 보다, 저 아저씨.

그런데 두 남자라고 했으니 그 사람들은 집주인인 노인과 비서인 정호섭씨겠지만, 나머지 두 명은 여자라…. 한 명을 청단애기라고 가정한다면 나머지 하나는 어젯밤 추기영이 마주칠 뻔했다는 그 사람일 터다. 그 사람이 여자라는 말이네.

하긴 추기영도 노인보다 무겁고 키가 크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 왜소한데다 깡마른 노인에 비하면 안효정도 크고 무거웠다.

백은호는 안효정의 감탄에 목례로 응하고 나서, 내리뜬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집에서 북서쪽으로 이 마장(馬丈)쯤 거리에 저수지가 있다는군요. 근방에 논도 밭도 없는데 별장을 짓는 것과 함께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서쪽으로 이 마장 거리에는 오래 된 광산이 있는데 워낙에 바다와 가까워서 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지금은 버려진 상태입니다.”

그런 게 왜 중요한 건데?

“거기에 북동쪽은 귀목, 남동쪽은 아직 확인을 안 해봤지만 이만큼으로도 알만하지 않습니까?”

백은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끄덕이고 싶은데 모르겠다고. 저수지에 광산에 귀목이 뭐…냐고 물으려다 문득 떠올랐다.

저수지와 광산과 귀목. 즉 물과 쇠와 나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불.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그것은 음양오행설에 있어 만물을 형성하는 기운이며, 그 중 목화금수는 사방에 해당했다. 분명 북쪽이 물, 동쪽이 나무, 서쪽이 쇠였지? 남쪽은 불이고.

각 방위에 해당하는 성질을 가진 것들이 이 별장을 중심으로 놓여있다는 뜻이다.

“섬 하나를 통째로 비틀어버리고 온갖 요괴를 끌어들이는 결계라니. 어떤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안효정이 오싹 떨며 중얼거렸다.

“만일 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이것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추기영이 원강을 향해 물었다.

“시간을 들인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혼자서라면 몇십 년은 걸릴 테지.”

“혼자라면 그렇겠지요.”

원강의 말에 이어 백은호가 덧붙였다. 모두들 일제히, 묘한 얼굴로 웃고 있는 여우 요괴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박수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이 녀석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어제와는 딴판이었다. 뭐 이렇게 기분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야?

“별장을 지은 것은 5년 전의 일입니다. 도술이나 주법은 제 특기가 아닙니다만, 여러 명이라면 사람의 힘만으로 5년 안에 이 정도까지 가능합니까?”

백은호가 질문한 대상은 원강이었다. 40대 후반의 꾀죄죄한 중년 아저씨로밖에 안 보이는 태령 윤문의 도사가 여우 요괴의 요사한 눈을 마주보았다.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은호의 질문은 태령 윤문이라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가 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만한 능력이 되는가? 혹은 태령 윤문이 이 괴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아닌가? 라는 뜻이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대답하기 싫을 질문이었다.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거예요?”

안효정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안 놀랄 것 같다. 태령 윤문이잖아. 그들의 꼴사나운 짓을 몇 개월 사이에 이미 두 번이나 겪었다. 오늘 도움 받은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태령 윤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효정의 태도가 사나워지자 원강이 한 손을 들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자중하거라.”

그런 뜻이 아니라고?

원강은 안효정을 진정시킨 다음 백은호를 향해 말했다.

“태령 윤문의 힘이라면 가능하겠지. 모든 도사들을 동원해서 5년,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그런 비효율적인 일에 뛰어들지는 않겠지요. 이 집의 주인이 동전 한 닢까지 모두 털어서 가진 재산을 다 내놓는다고 하면 어떨지 몰라도.”

백은호가 차갑게 웃으며 말하자

“그렇게까지 한다면 모르겠지만, 가방 안에 든 지폐다발 정도로는 어림없지.”

원강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백은호는 사뭇 우아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이 일은 사람이 꾸민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오기는 힘들 테지요.”

식당안의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요괴란 말인가. 그런 짓을 하는 요괴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

말하다 말고 그의 표정이 굳었다.

요괴라는 것은 보통 원하는 것이 단순하다. 도깨비처럼 노는 것을 좋아한다든가, 향랑각시처럼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싶어 한다든가, 여우처럼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든가. 그리고 그 원하는 바를 위해 살아간다.

인간이 요괴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단순함 때문이었다. 원하는 것을 알면 약점을 알게 되니까.

그러나 가끔은 단순한 목표가 없는 특별한 요괴가 있다. 백은호가 그랬다. 그에게는 사람이나 천호가 되겠다는 욕망이 없었다. 목표가 없으니 무엇을 할지 모른다. 예측할 수 없는 그에게는 약점이 없다. 만일 그와 같은 요괴가 마음을 먹는다면.

추기영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백은호와 같은 요괴가 있다면. 이 섬이 그 요괴가 몇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작품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범의 아가리 안에 맨몸으로 들어앉아 있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백은호. 누구인지 아는 거야?”

사람들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기도 하고, 나 역시도 궁금하여 묻자 여우 요괴는 단정한 얼굴로 부드럽게 웃었다.

“이런 일을 해낼 정도라면 요괴 중에서도 흔치 않습니다. 한 손으로 꼽을 정도겠지요. 짐작 하고 있으나 아직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니 장담은 않겠습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어떤 요괴인지 우리도 알아야…”

안효정이 발끈해서 입을 열었지만 원강이 다시 그녀를 막았다. 안효정은 씩씩거리면서도 원강의 얼굴을 힐끗 보고 고개를 홱 돌렸다.

“말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우리가 한자리에 불려왔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말이야. 알겠네. 어쨌든 여기까지 알게 된 이상 결계가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것을 찾아내야겠지.”

“청단애기님도요.”

고개를 돌린 채로 안효정이 말했다. 그건 나도 찬성이다.

“청단애기님이라면 도둑처럼 뒤질 필요 없이 이제 대놓고 물어보도록 하죠. 병문안이건 뭐건 이유는 얼마든지 댈 수 있잖습니까. 저쪽에서 핑계를 대고 거절하면 억지로 밀어붙이더라도.”

추기영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동의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얼굴 한 번 못 본채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안위가 걱정되었다.

안효정과 추기영이 일하는 여자에게 청단애기의 방을 물으러 가고, 원강은 잠시 별장 밖을 돌아보겠다며 나갔다. 식당에 백은호와 둘만 남게 되자 내가 비로소 물었다.

“왜 사람들에게 말 안 해주는 거야? 저 사람들도 알고 있는 편이 대비하기 좋잖아.”

내 질문에 백은호가 이상한 것을 보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들이 대비하기 좋도록 만들어줘야 합니까?”

뭐?

나를 보는 백은호의 차가운 눈 위로 요사한 빛이 떠올랐다.

“그런 것쯤 몰라도 제 몸은 지킬만한 위인들이 아닙니까. 게다가 혹 모르지요. 머릿수가 줄 수 있을지.”

집주인의 뒤끝 안 좋은 말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요괴에게만큼은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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