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에(10)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뭐야, 너. 진심이냐?”
물으면서도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령도 태령 윤문에는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그건 다른 문제잖아. 태령 윤문과는 확실히 결판을 낼 마음이 있어.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함께 이곳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아니야?”
“함께, 라니요?”
여우요괴의 눈에서 비웃음이 번득였다.
“그자들이 없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실히 해두려고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잖아.
“너, 그 요괴가 누구인지 알지?”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느니 말하지만 정체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백은호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그렇습니까? 그렇게까지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도령과 더 이야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말하고 그는 일어나서 쌩하니 나가버렸다. 뭐야, 저 녀석!
어이없는 한편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삐친 것 같지가 않았단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는데 왠지 도망가는 기분이 들었다. 대화가 더 길어지기 전에 피하는 느낌.
식당을 나가니 로비에 추기영과 안효정이 있었다. 뭔가 이야기를 나누다 나를 보고 대화를 멈추었다.
“청단애기님은 보고 왔어요?”
식당에서 백은호의 그런 말을 듣고 난 다음이니 데면데면해져도 할 수 없지 싶었지만 내 물음에 그들은 의외로 편하게 대꾸했다.
“보기는 했지만요.”
있을 법한 뒷말 대신 안효정이 얼굴을 구겼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뜻이었다.
“어디에 있었는데요?”
“3층 왼쪽 복도의 안쪽 방.”
이번에는 추기영이 대답했다.
“거기라면 어젯밤에 확인하셨는데 비어있다던?”
“그렇더란 말이지.”
일하는 여자에게 청단애기를 문병하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둘을 데리고 3층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안내해 준 곳이 3층 왼쪽 복도의 안쪽 방. 어젯밤에는 비었다고 생각한 그 방에 청단애기가 있었고, 더구나 멀쩡한 얼굴로 그들에게 방해하지 말라며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였다는 것이다.
“아픈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혈색도 좋고. 목소리도 또렷하고.”
그럼 더 이상하잖아.
“그리고 이상한 게 하나 더 있는데, 우리를 방 안에 못 들어가게 했어요. 문밖에 세워놓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안을 못 보게 하는 건 아니고. 보란 듯이 문을 활짝 열고 있는데 문턱 앞에 딱 서서 들어가지는 못하게 하는 거 있죠.”
안효정이 약간 마른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원강의 말이, 이 집은 뭔가 강한 힘으로 통제되고 있대요. 단순히 건물 전체가 아니라 각 방마다 하나하나 따로 결계가 만들어진 것 같다고 했어요.”
“확실히 이 집에서는 다른 사람의 기운을 읽기가 어려웠지. 그래도 같은 방에 있을 때는 약하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런데 청단애기는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그렇다니까 말인데, 어젯밤에 방을 확인할 때는 안에 들어가 보셨어요?”
내 질문에 추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복도의 방 네 개는 모두 들어가 봤지. 청단애기님의 방도 물론이고. 방안에서 사람의 기척은 없었네. 그야 캄캄했으니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두 분이 본 사람이 청단애기인 것은 확실해요?”
“얼굴은 내가 알아요. 먼빛이지만 두어 번 본 적 있거든요.”
안효정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런 거였다. 청단애기가 정말로 멀쩡한데다 성격이 까다로워 사람을 싫어하거나, 이 괴사의 배후인 요괴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거나.
“좀 전에 우리 둘이서 이야기를 했는데, 역시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의뢰보다 우리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집주인이나 이 별장 사람들이나 수상쩍기 그지없고. 애초에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불러들인 건지도 의심이 갈 지경이니 말일세.”
추기영이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내가 식당에서 나오고 있을 때 나누던 대화가 그것인 모양이다.
“윤문 쪽은 동의하고 있으니 우리끼리도 상관없지만, 일단 자네나 백은호에게도 물어보려고. 우선 청단애기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 다음이 일일세. 일을 해결하기는 하되 이 섬에서 무사히 나가는 것이 첫째야. 그 과정에서 집주인과 마찰이 생겨도 어쩔 수 없고. 자칫하면 돈 가방 날릴 수도 있는 일이라 싫다면 빠져도 상관없네만.”
무엇보다 청단애기의 안전을 먼저 확보하겠다는 건데 싫을 리가 없다. 오히려 태령 윤문에서 동의했다는 게 신기한 걸. 청단애기고 뭐고 내버려두고 떠나자거나 돈 가방을 포기할 수 없으니 집주인의 요구에 맞추자고 할 줄 알았거든.
“전 물론 찬성이요. 그런데 백은호는…”
그 녀석은 싫어할 것 같은데.
“방해를 안 하면 그걸로 충분해.”
추기영이 말했다. 그 정도라면 어떻게 되겠지. 아니 오히려 우리가 집주인과 마찰을 일으켜 돈을 못 받게 되면 모조리 백은호의 차지가 되니까 좋아하려나.
내가 동의하자 안효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강이 곧 이 집의 결계를 풀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 시작…”
말하다 말고 안효정이 입을 벌린 채로 오싹 떨었다. 표정이 변한 것은 추기영도 마찬가지였고 나 역시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피부에 닿는 공기 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그러나 단순히 온도의 문제만도 아니었다.
온갖 요기, 음기, 악의와 삿된 사념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분명 무게가 없을 그것들에 몸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는 사람들, 좀 더 멀리로는 식물과 동물을 넘어 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농도가 강한 요기의 덩어리가 멀리서부터 느껴졌다.
이 느낌은 어젯밤 산의 정상에서 요괴들의 도가니를 내려다보던 그때와 거의 비슷했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계단 위에서 들려왔다. 백은호다.
“보기보다 성미가 급한 분들이군요.”
얕보는 듯한 눈길로 우리를 쓸어보며 그가 말했다. 추기영도 안효정도 거기에 반응할 정도의 여유는 없어 보였다. 갑자기 밀려든 요기에 대항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였다.
“묘란의 결계를 하루 만에 풀어낸 것만은 칭찬해 드리겠습니다만.”
“묘란, 그게 뭐지?”
추기영이 약간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흐트러졌던 호흡을 바로잡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서글서글한 미소가 떠나지 않던 얼굴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수일이참대(隨日而漸大)…”
중얼거리듯 대답한 사람은 안효정이다. 그녀 역시 곧 요기에 적응하고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백은호를 쏘아보았다. 백은호가 입술을 당기며 소리 없이 웃었다.
“과연 태령 윤문이군요. 아는 것이 더 있습니까?”
“묘설, 묘영, 묘란의 세 자매인데 도마뱀이었다는 말도 있고 뱀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본디 인간이었죠. 왜란 때 산으로 피난해 토굴 속에서 숨어 지냈는데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도마뱀으로 변해 있다가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요괴가 되었다고 했어요.”
“잘 아는군요. 본인에게 들은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는 게 아닌가요? 둘째인 묘영이 내 선조라는 거.”
안효정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이 자리의 네 명 중에서 나만 그 말에 놀란 것 같다. 요괴가 선조였다니. 안효정은 어느 모로 봐도 분명한 인간인데.
“재미있는 일이지요. 여기에 요괴가 하나, 요괴의 피를 가졌으되 인간인 자가 하나 있습니다. 또한 미숙하나마 선객이 하나, 그리고 타락한 선인이 또 하나 있지요.”
말하며 백은호가 본 사람은 추기영이다.
“마지막으로 천왕을 모시는 무당과 천왕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한 사람은 분명 나와 청단애기의 이야기였다.
“이만하면 애초부터 우리를 모은 이유는 이 괴사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물로 쓰기 위해서라는 것을 짐작해야 하지 않습니까. 또한, 이만한 섬을 결계로 묶을 수 있는 정도의 실력자가 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 하나라도 모를 리가 없다는 것도.”
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어제 내가 창문으로 빠져나가 산에 갔다 왔던 거라든가, 추기영이 밤중에 몰래 3층을 돌아다녔다든가 로비나 식당에서 우리가 목소리를 낮춰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전부?
그렇다면 백은호가 어제 말을 아낀 것은 배후인 요괴가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일까? 조금 전에도 그렇고.
“뭐, 이제 와서 불평해도 소용없겠지만 말입니다.”
말하는 백은호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흔들렸다. 흔들리며 그 빛이 연해지고 있었다. 눈이 길게 째지면서 요사한 빛을 띤다. 그 모습은 여전히 인간이지만 도저히 인간으로 느낄 수 없는 요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백은호의 말에 문 쪽을 돌아본 안효정이 갑자기 창문 앞으로 뛰어갔다.
“원강!”
안효정이 소리쳤다. 로비 안을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지만 원강에게 들렸을지는 모른다. 그는 별장 아래쪽의 언덕에서 막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필사적으로 달리는 그보다도 그의 뒤에서 몰려오는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니, 위에서라고 해야 할까.
연한 회색 정도로 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남쪽으로부터 점점 새카맣게 변하고 있었다. 그 변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치 물감이 빠른 속도로 번지는 것 같았다. 원강의 뒤를 쫓아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강이 별장의 입구로 뛰어들 때쯤에는 하늘에서뿐 아니라 땅위에서도 그를 뒤쫓는 것이 보였다. 얼핏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요괴들이었다. 어젯밤 정상에서 내려다보았던 그것들이 펄쩍펄쩍 뛰거나 휙휙 날거나 성큼성큼 원강을 쫓아오고 있었다.
추기영이 재빨리 문을 열고 안효정이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돌아가! 들어가라!”
이쪽을 향해 달려오며 원강이 소리쳤다. 외치는 그의 뒤로 누더기를 걸친 백골과 같은 요괴가 바짝 따라왔다. 달려가는 안효정의 오른손에서 하얀 날붙이가 반짝였다. 헐떡이며 달리는 원강의 팔을 반대쪽에서 힘껏 잡아당긴 안효정이 백골 요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한 치밖에 안 되는 짧은 날이 뱀처럼 교묘하게 휘며 백골을 베었다.
그녀의 코앞에서 백골이 흩어졌다. 바로 뒤에 있던 짐승처럼 털 달린 요괴가 발톱이 날카로운 앞발을 치켜들었지만 떠밀리는 것처럼 뒤로 확 밀려났다. 요괴로부터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추기영이 내밀었던 팔을 거둬들이고 원강을 부축했다.
세 사람이 별장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 문을 닫았다. 달려든 요괴들이 문에 쾅 부딪쳤다. 한 번이 아니다. 원강을 따라온 수많은 요괴들이 문에, 벽에, 창문에 온몸을 날렸다. 그때마다 유리가 깨질 것처럼 파르르 떨고 벽에 걸린 그림이며 문 앞의 선반이 달그락거렸다.
그러나 결코 깨지거나 부서지는 법은 없다.
“묘란의 결계를 푸는 것에 더해, 새로운 결계를 친 겁니까? 타락했어도 그 실력만은 변함없군요. 선진님.”
허리를 숙이고 쓰러질 것처럼 헐떡이는 원강을 향해 백은호가 말했다. 비꼬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감탄한 목소리였다.
“아…역시 오주동의 선진님?”
추기영이 중얼거렸다.
오주동이라면 여기에 불려왔다는 한진이 있던 곳이잖아. 이름도 비슷하고. 한진과 관련 있는 사람이었나 생각하는데 안효정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모르고 있었나 보다.
“3층으로…”
아직 거친 숨을 내쉬며 원강이 말했다.
“늦기 전에 청단애기님부터…”
“하지만 저것들은…?”
추기영이 못미더운 얼굴로 창문 밖에 우글거리는 요괴들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구름으로 어두워진 바깥에서, 창문마다 빽빽이 달라붙은 요괴들이 이쪽을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백은호인 섭이 있지 않나.”
원강이 말하자 백은호는 피식 웃어버렸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이것들을 상대할 필요도 없이 묘란만 처리하면 되었을 터인데.”
“그때는 청단애기님이 너무 위험해. 네가 백은호가 된 줄 알았는데 한 사람에게 외에는 여전히 섭이로구나.”
원강의 말이 백은호의 어딘가를 건드렸는지 여우 요괴의 눈이 하얗게 번득였다. 아직 웃고 있는 입술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으르렁거릴 것처럼 원강을 노려보았으나 백은호는 한마디만 하고 말았다.
“당신은 원강이 되니 어떻던가요? 선진님.”
원강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요괴들을 향해 돌아선 정도로, 백은호는 만족하는 것 같았다.
“뭘 넋 놓고 있는 거예요! 빨리 가요!”
안효정이 먼저 로비 안쪽으로 뛰어가며 외쳤다. 추기영이 뒤따라 달렸다. 시커멓게 몰려들어 우리를 노려보는 요괴들과, 그것들을 향하고 있는 원강의 뒷모습과, 요사하게 우아한 몸짓으로 손톱을 꺼내는 백은호를 본 다음, 나도 그들을 따라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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