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90화 (90/218)

당신이 잠든 사이에(1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계단은 창문도 없는 벽 사이에 나선을 그리며 가파르게 올라갔다. 이런 계단을 지나야만 갈 수 있는 3층에 노인의 방이 있다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할 그 노인이?

그러나 확실히 3층에서는 사람들의 생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결계가 풀리고 정상적으로 기운을 읽을 수 있게 되자 가까운 곳에서부터 하나하나 잡히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수가, 좀 많았다.

‘넷…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뭐야.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3층으로 올라가고 있는 세 명을 빼고도 열다섯 명이었다.

3층에는 백은호의 말대로 네 명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2층에 여섯 명, 1층에 다섯 명이 더 있었다. 1층에는 백은호와 원강 외에 일하는 사람 둘이 있겠지만 나머지 하나는 누구지? 게다가 2층의 여섯 명은 또 뭐야?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그것도 빈 방이 아니라 우리들이 묵는 방에 하나씩 누군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계단이 끝나고 3층이 나타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왼쪽 복도로 달려갔다. 청단애기의 숙소는 복도 안쪽 끝 방. 그러나 그 옆방에도 사람이 한 명 있다. 앞서 달려간 안효정과 추기영이 눈짓도 없이 양쪽의 방으로 나뉘어 들어갔다. 이럴 때 보면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추기영이 간 방보다 청단애기의 방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더 약했다.

“청단애기님!”

처녀보살을 부르는 안효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로막는 파티션을 밀어젖히자 침대위에서 청단애기를 끌어내리는 안효정의 모습이 보였다. 침대의 주변에는 부적과 촛불, 뭔가를 담아놓은 그릇으로 너저분했다.

구겨진 한복을 입은 노부인이 안효정의 팔에 안겨 바닥으로 내려왔다. 메마른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했다. 나이는 60대로 보이는데 반백의 머리를 처녀처럼 땋아 내려서 붉은 댕기까지 물리고 있었다.

“숨이 너무 약해요.”

손목의 맥을 잡아보고 청단애기의 코 앞에 뺨을 가져가서 숨결을 확인한 안효정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단애기의 상태가 안 좋은 것은 나도 금세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몸 안의 기운이 꺼질 듯이 연약했다.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조금 큰 목소리로 말만 해도 파르르 떠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몸에 손을 얹었다. 가여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콘크리트 틈바구니에 삐죽이 돋아난 작은 새싹이나 눈도 못 뜬 강아지가 버둥거리며 어미를 찾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가여운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그런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새싹이나 강아지를 보았을 때와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착하구나. 부디 무탈하여라.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내 손이 노부인의 몸을 쓰다듬었다. 하얗게 샌 머리로부터 주름진 얼굴과 약하게 뛰는 가슴과 힘없는 다리와 차갑게 식은 팔을 모두, 구석구석 만지고 지나갔다. 손 아래에서 연약하게 떨고 있던 기운이 점점 크고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청단애기님, 정신이 드세요?”

청단애기가 눈을 깜박이자 안효정이 반색하며 그녀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반백의 처녀보살은 눈을 깜박였다. 잠에서 막 깬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안효정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방안을 한 번 휘둘러보고 다시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나이답지 않게 맑은 눈이 나와 안효정의 얼굴을 반사했다.

“아가, 네가 죽인 것이 너를 살리겠다.”

안효정을 보며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안효정이 눈을 크게 떴다. 청단애기는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비가 오면 내가 살줄 알았소. 그렇고말고. 무얼 하오, 도령. 할 일이 많지 않소.”

그리고는 손짓으로 우리를 쫓아냈다.

“어서 가오. 이 늙은이는 이제 괜찮으니.”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지만 할 일이 많기는 했다. 그리고 시간도 별로 없었다. 나는 망설이고 있는 안효정을 재촉했다. 청단애기는 이제 괜찮았다. 그것은 알 수 있었다.

복도로 나오자 정호섭이 옆방의 문 앞에 길게 누운 것이 보였다. 어제 식당에서 본 뒤로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더니 그 역시 희생자가 될 뻔한 모양이다. 추기영이 맞은편 방에서 뛰어나왔다. 우리가 청단애기와 있는 동안 그는 나머지 방들을 모두 확인하고 있었다.

“이쪽 복도에는 더 없는 것 같구만. 이 친구는 꽤 정기를 뺏겼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이네.”

그가 정호섭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하면서 우리 어깨 너머로 청단애기를 확인했는지 추기영의 굳은 얼굴이 약간 풀렸다.

이쪽 복도에는 아무도 없으나 오른쪽 복도에는 아직 남아있다. 게다가 거기에서 기다리는 것은 희생자가 아니었다. 셋 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목적하는 방으로 걷는 걸음이 신중해졌다.

안효정은 어느새 손안에 단검을 꺼내들고 있었다. 아까 백골의 요괴를 해치웠던 그 칼이다. 그때는 급해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붉은 색으로 한자를 닮은 문양이 칼날에 오목새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옷을 갈아입고 온 뒤로 그녀의 허리춤이 한결 두툼해졌다. 풍성한 웃옷으로 가렸지만 뭔가 두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요괴의 후손이라고 했겠다. 둘째인 묘영이 선조라니 묘란은 그녀에게도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자매의 후손을 불러들여 제물로 삼으려고 한 묘란은, 요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목적이 없이 살아가는 그녀여서일까.

가장 앞에서 걷던 추기영이 걸음을 멈췄다. 방문을 앞에 두고 있었다. 오른쪽 복도의 방은 하나를 빼고 모두 비어있다. 굳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멈춰선 문 너머에서 거리낄 것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반쯤 요기로 잠식당한 사람의 기운이 하나. 두려움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요괴의 기운이 하나. 방 안에는 그렇게 둘이 있었다.

멀리서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1층일 것이다. 원강의 결계가 요괴들을 더는 버티지 못하고 깨졌으리라. 서리가 맺힐 것처럼 차가운 백은호의 요기가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각오가 새겨진 시선이 오갔다. 추기영이 말없이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끼이이 -

경칩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3층 오른쪽 복도 바깥쪽 끝 방. 두 개의 커다란 창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을 테지만 방안은 캄캄했다. 젖혀진 커튼 너머로 어두운 하늘이 얼핏 보였다. 먹구름으로 덮인 하늘보다도 방안은 어두웠다.

이 방의 어둠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질척하고 무거운 것이 가득 고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둠이 피부에 진득하니 닿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떨치며 우리는 방에 들어섰다.

눈에 보이는 것은 거의 없었으나 세 사람 모두 느꼈다. 방 안쪽 파티션으로 가려진 침대였다. 거기에 있었다. 백은호와 다르지만 그처럼 강하고 농도 짙은 요기를 물씬 풍기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걸음을 옮겨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요괴와 마주 섰다. 캄캄한 안에서 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요괴가 붉은 입술을 휘며 웃는 것을 나는 본 것처럼 느꼈다.

[가련하여라 이 몸은, 쉬이 지치고 늙어지나니.]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둠 안에서 들려왔다. 달콤한 목소리였다. 꿀을 바른 것처럼 향기롭고 끈적거렸다.

[병들어 시드나니.]

그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우리로부터 여섯 걸음은 떨어진 곳에 있을 테지만, 들려오는 음성은 마치 귓전에서 속삭이듯 가깝고 선명하다.

[괴로이 죽어가나니.]

달디 단 숨결을 뺨에 내뿜으며 그녀가 말했다. 바로 귀 옆에서 그 요사한 입술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발칙한!”

쩡 울리는 기합과 함께 어둠 속에서 하얀 빛이 번득였다. 안효정이었다. 그녀가 휘두른 칼에 파티션이 두 조각으로 잘리며 쓰러졌다. 칼날의 길이는 고작 15센티. 서 있는 곳으로부터 2미터나 떨어진 파티션을 그녀가 어떻게 베어버렸는지는 모른다.

소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가구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우리의 모든 신경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요괴, 묘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 도사리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우리는 모두 본능적인 두려움과 혐오를 느꼈다.

그녀의 모습은 어둠속에서도 빛을 낼 것 같이 아름다웠다. 남색 하늘에 교교하니 떠오른 보름달과 같았다. 파르스름하니 창백한 얼굴은 오히려 신비로웠다. 부끄러움 없이 드러낸 상체의 풍만한 곡선도, 주름하나 없이 통통한 손가락도, 다가가서 감촉을 느끼고 싶도록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아름다움과 매혹은 상체까지다.

허리 아래에서부터 길고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있는 그녀의 하체는 뱀과 다름없었다. 아니 뱀의 모습 그대로였다. 원통형의 긴 몸체, 등을 덮고 있는 짙푸른 비늘, 구불구불 주름진 배, 점점 가늘어지다 뾰족하게 변하는 꼬리까지.

그 긴 뱀의 몸으로 그녀는 한 사람을 친친 감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젊은 남자였다. 아니, 본 적이 없던가? 어째서인지 남자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요괴, 묘란의 눈이 안효정의 위아래를 훑었다. 붉은 입술 위로 비웃음이 번졌다.

[칼을 든 어린아이야. 네가 나를 알면서도 그 칼로 이 몸을 베려고 하느냐.]

“모를 것 같은가.”

안효정이 나직이 대꾸했다. 짙은 요기로 둘러싸인 뱀도 인간도 아닌 존재를 앞에 두고서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수일이참대(隨日而漸大). 자를수록 커진다는 뜻이다. 그 몸을 베면 벨수록 더욱 크고 강해진다는 요괴. 무기로는 절대 상하게 해서는 안 되는…”

[호오.]

묘란이 짧게 감탄했다. 안효정이 한 말보다는 그녀의 두려움 없는 태도에 대한 찬사였다.

[하여 찌를 수도, 벨 수도 없는 나를 어찌 죽일 작정일꼬. 나는 이와 같은 몸을 가진 내 언니들을 죽이기 위해서 통째로 삼켜버렸다만. 네 작은 몸으로 나를 삼킬 터이냐?]

무서운 말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언니들이라고 하면 자매인 묘설과 묘영을 뜻하는 것일 터다. 자신의 자매들을 통째로 삼켜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요괴가 아니다.”

손안의 칼을 꽉 움켜쥐며 안효정이 말했다.

[그렇다면 죽는 수밖에.]

묘란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가늘고 긴 혀가 날름거렸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