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에(1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원강은 아직 이 섬의 상황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알아낸 것을 알려줬다. 그들은 금세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결계의 축이 되는 네 요괴를 처리하고 나면 묘란의 힘이 많이 약해질 걸세. 물론 요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섬에 미치는 그녀의 영향력이 낮아진다는 거지. 하지만 모여 있던 요괴들이 상당수 떠나게 될 테니 그것만으로도 한결 상대하기 쉬워질 거야.”
그 축의 하나가 귀목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게다가 이제 밤이다. 요괴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각에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
“낮까지 기다리면…”
추기영이 말을 꺼냈다가 스스로 생각해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묘란에게 더 이상 시간을 줄 수는 없지.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야.”
원강이 확인하듯 말했다. 그 말이 맞다. 안효정도 자신의 독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묘란이 그녀의 독에 당황해 잠시 달아났더라도 곧 힘을 되찾고 요괴들과 함께 별장으로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더 들을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백은호가 가장 먼저 식당을 나섰다. 다음으로 나간 사람은 뜻밖에 정호섭이었다. 노인의 말을 듣는 동안 그는 조금씩 입구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자신을 속이고 위험에 빠뜨린 별장의 사람들과 가까이 있기 싫었는지, 아니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식당을 나가자 머리를 흔들면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가죠.”
머뭇거리는 법이 없는 안효정이 추기영을 재촉했다. 추기영이 우리에게 눈인사를 보낸 다음 안효정과 함께 나갔다.
한진이 다음으로 말없이 일어났고 연사범이 뒤를 따랐다. 원강은 밖으로 나가는 한진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지만 그뿐이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사형제간이었다.
“이곳의 일은 청단애기님께 맡기겠습니다.”
원강의 말에 청단애기가 손짓으로 대답했다. 안심하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서 가라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도 갑시다.”
원강이 일어나며 말했다. 말투가 바뀌어서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가 생각했지만 그와 함께 남동쪽을 맡을 사람은 나다. 원강을 따라 별장을 나서며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별장에 두기 싫어서 가져온 것이다. 요괴와 싸우러 가는 마당에 가방이 방해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이 안에 든 유리조각들을 생각하니 역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2층에서 마지막 사람을 회복시키고 나서, 여자아이는 내 옆에서 유리조각으로 변해 쌓였다. 그것을 움켜쥐었을 때 손 안에서 유리조각 두 개가 맞붙어 한 조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내 방으로 가서 확인할 것도 없이 그것은 내가 집에서 가져온 유리조각이었다.
유리조각이 스스로 내게 왔다는 말이다.
누구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걸을 때마다 가방 안에서 유리조각들이 잘그락거렸다. 이것이 잠시 소녀가 되어 살아서 움직이던 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생각에 잠겨서 원강의 뒤를 좇고 있던 나는, 우리가 어느새 바닷가의 까만 바위틈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밑으로 모래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밟혔다. 가까운 곳에서 파도가 밀려오거나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마다 물방울이 여기까지 튀어왔다.
소리와 감각만으로도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에 보였다. 사방이 환했기 때문이다. 밤이고 별도 달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데 이곳은 밝았다. 불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다. 어젯밤 마을 뒷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산을 가로질러 가던 긴 불덩어리의 행렬이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둥근 원을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둥지에 웅크린 새의 모양으로 붉은 불덩어리가 타오르고 있었다.
설마 내가 상상하는 그런 것은 아니겠지. 새의 모양을 한 불이라니 그건 요괴가 아니잖아.
원강을 힐끗 보자 불빛을 반사해 불그스름한 얼굴이 웃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해놓은 것은 오랜만에 보는군요.”
이렇게까지 뭘 해놓은 건데요. 어쩐지 불길이 오르는 것 같은 저 커다란 새, 정말로 주작이라든가 피닉스라든가 그런 신화 속의 새는 아니겠지요? 응? 요괴라면 싸워보겠지만 그건 요괴가 아니라 영물이나 거의 신의 수준이잖아.
원강은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천천히 옮겼다. 허공에 둥둥 떠서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던 불들이 우리를 보자 옆으로 밀려갔다. 마치 반딧불의 무리가 사람을 피해 옆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훨씬 크고 밝은 불이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불덩어리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열어준 길을 걸어 천천히 새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것은 확실히 새의 모양을 갖추었다. 긴 부리와 목에 유려한 모양으로 휘어진 깃이며 그림에서나 봤을 것 같은 길고 아름다운 꼬리털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러나 그 몸은 새처럼 둥근 것이 아니라 네 발 짐승의 그것과 같이 원통형의 긴 모양이었다. 심지어 다리도 네 개.
이런 모습이라면 그리스 신화의 그리핀에 가깝지 않은가?
멀리에서는 불이 붙은 것 같던 그 모습은 황금색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광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것이 정말 묘란의 결계의 한 축인 요괴일까 싶었다.
“저것은 금시조입니다. 오래된 무덤을 수호하는 신입니다만, 그 특성을 이용해 묘란이 여기 잡아둔 모양입니다.”
“신이라고…”
그러고 보니 금시조는 마치 알을 품듯 봉분 하나를 품고서 커다란 날개로 그것을 덮고 있었다. 얼핏 봐도 오래 된 무덤이었다. 봉토는 세월에 닳아 야트막한 언덕처럼 변했고 약간 기울어진 비석에는 말라붙은 이끼가 번져 있었다. 희고 검게 얼룩진 이끼 안에 요철이 잘 구분되지 않는 한자가 몇 개.
주변은 높게 자란 풀투성이고 여기까지 오는 것도 길이랄 것 없는 바위틈을 걸었을 뿐이다. 오래 된 무덤일 뿐 누군가 정성들여 보살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새는 오래 된 무덤이면 아무거나 지키는 겁니까?”
“무덤을 쓰면서 금시조에게 가호를 부탁하는 제사를 지내면 도굴범이나 짐승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덤에 상주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상대는 요괴가 아니라니 싸울 수도 없고.
“말을 걸어보십시오.”
원강이 내게 권했다. 그를 쳐다보자 쓴웃음과 같은 것을 띤 얼굴로 조금 고개를 숙였다.
“저는 타락한 몸이라 금시조와 같은 신령한 존재에게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령에게는 분명…”
후르르 -
불꽃이 오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금시조가 있는 곳이었다. 황금색의 긴 날개가 가볍게 흔들린 것이다. 그것만으로 눈부신 광채가 쌀알처럼 흩어지고 향기를 품고 있는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원강조차 말하던 것을 잊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새의 머리가 조금 들려서 우리들을 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안에서 붉은 눈동자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화가 난 것 같다.
우리 때문은 아니었다. 신령한 몸으로 낡고 작은 무덤에 붙잡혀 있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노한 것이다. 그런 짓을 한 요괴의 술수에 화를 내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경한 존재에 대한 낯설음도, 신령한 힘을 가진 금시조 앞에서 나는 한낱 인간이라는 생각도 없었다. 길가다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나는 금시조에게 다가갔다. 잘그락 잘그락, 걸을 때마다 가방 안에서 유리조각들이 부딪쳤다. 그 소리가 속삭이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 도령. 도령.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흔들흔들, 나와 함께 걸었다. 목소리뿐이지만 어쩐지 함께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아진 나는 금시조에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너는 길을 잃었느냐?”
어쩐지 말투도 바뀌고 어린 목소리가 된 것 같은데.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눈앞의 금시조가 머리를 기울여 내게 다가오자 잊어버렸다.
[나는 날아갈 날개와 할퀼 발톱을 잃어버렸소. 도령이여, 어째서 이곳을 헤매고 있소. 여기는 사악한 곳이오.]
날개도 발톱도 그대로인걸. 금시조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한 말이 입에서 나왔다.
“네 날개는 크고 강하니 하늘 끝까지 날 수 있다. 네 발톱은 강철보다 단단하니 바위를 부수고 땅을 찢어발길 수 있을 터이다.”
[도령이여, 나는 날아갈 날개와 할퀼 발톱을 잃어버렸소.]
금시조가 머리를 흔들며 탄식했다. 내가 한 말을 못들은 것처럼.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네 날개는 크고 강하니 하늘 끝까지 날 수 있다. 네 발톱은 강철보다 단단하니 바위를 부수고 땅을 찢어발길 수 있을 터이다.”
[도령이여, 나는 날아갈 날개와 할퀼 발톱을 잃어버렸소. 어째서 이런 사악한 곳을 홀로 헤매고 계시오.]
금시조가 한탄한다. 두 번이나 한 말을 전혀 못 들었다는 듯이. 나는 할 수 없이 한 번 더 말했다. 금시조를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네 날개는 크고 강하니 하늘 끝까지 날 수 있다. 네 발톱은 강철보다 단단하니 바위를 부수고 땅을 찢어발길 수 있을 터이다.”
그러니 날아올라라.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금시조는 내 말을 들었다. 봉분 위로 늘어져 있던 황금빛의 날개가 펄럭, 바람을 일으켰다. 한 번 더, 그리고 연달아 펄럭이는 날갯짓에 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렸다. 봉분을 덮고 있던 커다란 몸이 무게가 없는 것처럼 떠올랐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황금색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끼우우우우 - !
길게 끌리는 금시조의 울음이 까만 허공에 메아리쳤다. 금빛의 새는 하늘을 한 바퀴 돈 다음 섬을 벗어나 멀리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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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16)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유성처럼 꼬리를 끄는 빛무리가 남았다가 그것도 곧 사라졌다. 까만 하늘 멀리 반짝이며 날아가 버린 금시조를 보자 기쁜 한편 서운하다. 조금 더 같이 놀고 싶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나는 스스로 한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이 놀 때가 아니잖아.
그나저나 금시조가 날아갔으니까 이쪽은 해결이 된 셈일까? 원강에게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 뭐 잘못한 거야? 날려버리면 안 되는 거였나. 어쩐지 혼날까 걱정하는 어린애처럼 그를 보고 있으려니 정색하던 그가 고개를 숙이며 웃어버렸다.
“내 눈으로 해명도령을 보게 될 줄이야. 청예의 말을 듣고, 처음 만났을 때도 반신반의 했으나 정말이었구나. 정말로 청예가 어리석은 꿈을 꾸었구나.”
그가 혼잣말처럼 탄식했다. 청예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은 원강이 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는 바람에 놀라서 날아가 버렸다.
“그간의 잘못과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상황이 위급하여 이렇게 짧은 사과로 대신하는 것이 송구할 따름입니다.”
예? 예?
갑작스러운 사과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동안 원강이 뭘 잘못했었지? 섬에서 만난 후에는 없는 것 같고 혹시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인가?
그때 그는 인형을 다루는 여도사와 함께 왔었다. 하지만 딱히 직접 싸운 적이 없고 곧 산군을 끌어들인 백은호에게 쫓겨 가는 바람에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냥 웬 도사 같지 않은 아저씨가 끼어있나 생각했었지.
“저, 그런 옛날 일은 지금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태령 윤문이 한 일들을 생각하자 새삼 그가 윤문의 사람이라는 것이 생각나서 기분이 묘해졌다. 어쨌든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었다. 허리를 편 원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겠지만 여기까지 오는 도중 요괴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별장으로 가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말대로다. 별장을 나오면서 요괴와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여기 와서 횃불처럼 몰려다니는 요괴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공격의사도 없고 오히려 우리를 보면 피해갔다.
그러면 그 많은 요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저는 결계의 축을 지키기 위해 요괴들이 네 방향에 흩어져 있으리라고 짐작했으나 이렇게 되면…묘란이 달아난 곳에 요괴들도 모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지요. 그녀 자신 역시 네 개의 축 가운데 하나이니….”
말하며 원강이 바라본 곳은 북서쪽이었다. 별장과 함께 만들어진 저수지가 있다는 곳. 묘란이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백은호.’
그는 북서쪽의 축을 맡아 혼자서 갔었다. 생각한 것과 동시에 발이 바닥을 찼다.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길을 따라 달릴 마음은 없었다. 저수지는 여기에서 별장을 지나 북서쪽. 그렇다면 일직선으로 간다.
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별장의 불빛이 멀리 보였다. 그곳을 향해 몇 번이나 도약해서 바위와 언덕을 밟고 뛰어넘었다. 순식간에 다다른 별장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지붕을 뛰어넘을 때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기운이 읽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별장이 있는 언덕을 내려가자 지금은 풀로 뒤덮인 예전의 밭과 집터가 하나둘 나타났다. 그 뒤로는 다시 오르막길이었다. 야트막한 언덕 뒤로 산자락이 이어져 있었다. 그것을 가로질러 넘어가자 오싹할 정도의 요기가, 바람과 함께 확 밀려왔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빛이 있었다. 한쪽에서 나무가 불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불이 점점 번져 빛도 갈수록 환해졌다. 하지만 못 보는 편이 나았을 것을. 눈앞에 펼쳐진 것을 내려다보고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보통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냥 어지럽게 파이고 뒤집힌 자국과 까맣게 탄 나무, 부서진 바위 같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푹 파인 땅에 반 토막이 나거나 짓이겨져 뒹구는 노래기가 세 마리. 그것들은 어제 정상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구렁이만큼이나 큰 몸으로 땅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무 몇 그루가 뿌리째 뽑혀 뒤집힌 곳에는 작은 짐승의 시체가 하나 걸려 있었지만 그것이 살아서 움직일 때는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죽은 뱀, 깨진 돌조각, 아직 불타고 있는 나무, 그 흔적은 모두 요괴들의 시체였다. 아직 그 위에서 뭉클뭉클 떠도는 요기가 피처럼 진득했다.
나는 그 사이를 한 발 한 발 걸었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발밑에 요괴들이 남긴 고통과 두려움의 사념이 찐득찐득 달라붙었다. 숨을 타고 들어오는 요기에, 먹은 것도 없는 뱃속이 꿀렁거렸다.
북서쪽을 향해 요괴들의 시체가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희미하게 백은호의 냄새를 맡았다. 베고, 불태우고, 뭉개고, 찢어발기고, 부수고 헤치며 지나간 길이었다. 긴 손톱을 번득이고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노리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수많은 요괴들을 모조리 처치하며 간 여우요괴의 냉혹하고 강한 힘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한 편으로, 어째서 그는 이렇게까지 한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에 요괴였다. 묘란에 대해 우리와는 입장이 다르다. 다른 요괴에 대해서도 인간인 우리와는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가 요괴를 해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 아닐까. 아니면 생물 외의 모든 것들을 요괴라고 뭉뚱그려 버리는 것이 인간의 무심한 분류에 불과한 걸까.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를 갖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를 파괴하는 것이 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걸까. 이토록 많은…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요기가 자욱하니 안개처럼 앞을 가렸다. 그 정도로 수많은 요괴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 사이를 걸은 나는 안개 속을 걸은 것처럼, 물방울 같은 요기가 온몸에 방울방울 맺혔다.
그리고 시체의 길 끝에 저수지가 있었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 물이 고인 저수지였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고여 있던 물은 사방으로 흩어져 주변을 질퍽하게 만들었다. 저수지 안 한가운데에만 작은 웅덩이가 남았을 뿐이다.
그 웅덩이 옆에 두 요괴가 서 있었다. 참으로 요괴라고, 멀리에서도 금세 알아볼 수 있는 둘이 거기에 있었다.
묘란은 이제 거의 뱀과 같은 모습이었다. 상체는 하체와 마찬가지로 짙푸른 비늘에 덮였고 길게 늘어난 목 위에서 마름모꼴로 변한 머리가 몸통과 함께 흔들렸다. 사람이었던 흔적은 아직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있는 얼굴 정도였다. 머리카락조차 없어서 민둥민둥한 이마에 검푸른 비늘이 번들거렸다.
백은호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카락만 하얗게 새었을 뿐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늘 보던 깔끔한 그는 아니었다. 자켓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셔츠도 바지도 너덜너덜 찢긴데다 요괴들의 피와 푸른 체액으로 얼룩져 본래의 색을 알 수 없게 변하고 말았다.
그 얼룩 가운데에는 백은호 자신의 것도 섞여 있는 것 같다. 늘어뜨린 팔에서 붉은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려 손톱에 맺혔다가 젖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무서우신 여우님….]
뱀으로 변했으면서도 묘란의 목소리는 달콤하게 허공을 울렸다. 백은호의 뒷모습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 사람을 가장하고 있는 여우요괴는 파르스름하니 어두운 요기에 휩싸여서, 머리카락 한 올 흔들리지 않으며 묘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하얀 털을 우리의 피로 물들이고, 결국에 저를 죽이려 여기까지 오셨나요.]
“하지 말았어야지.”
백은호가 나직이 말했다.
“네 언니들을 보고 배우지 못했느냐. 넘보지 말았어야지.”
[배웠지요.]
묘란이 속삭였다.
[언니들에게 내려진 천형(天刑)을 지켜볼 수 없어 내 스스로 그들을 삼켰어요. 내 뱃속에서, 두 언니가 몇 달에 걸쳐 소화되었던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잊을 수 있었나요?]
속삭이는데도 잘 들렸다. 바로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묘란의 입이 휘어졌다. 인간과 섞인 뱀의 얼굴이 기묘한 미소를 띠고 일그러졌다.
[아아…잊을 수 있을 리가. 천형을 받은 주인의 주위에서 개처럼 맴도는 당신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분도 알고 있나요? 자신을 인간도 요괴도 아니게 만들어버린 자가 누구인지.]
맹수의 포효가, 결코 여우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효후가 대기를 쩡 갈랐다. 그 소리가 내 귀에 닿는 순간에 이미 백은호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하얀 털이 번득였다.
아홉 개의 꼬리를 펼친 백색의 여우 요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들어 묘란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다. 뱀 요괴의 길고 굵은 몸통이 여우를 휘감았지만 아홉 개의 꼬리와 얽혀 복잡하게 꼬였을 뿐이다.
크르르르…
묘란의 목에 송곳니가 파묻힌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입 주위를 붉게 물들이고, 코 위로 주름을 지으며 으르렁거리는 백은호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해냈어요. 섭이여…]
묘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언니들이 한 것처럼 나도 해냈어요. 천왕의 규칙에서 벗어난 인간을 내 손으로 만드…]
우둑!
딱딱한 것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묘란의 목이 꺾였다. 푸른 비늘로 뒤덮인 머리가 툭, 기울어졌다. 묘란의 긴 몸통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우 요괴는 죽은 묘란의 시체 같은 것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 눈에서 물결치는 살기에 피부가 저릿저릿했다. 백은호가 도약하는 것이 보였다. 봤다고 생각한 순간 내 몸은 그의 강한 발에 떠밀려 쓰러지고 있었다.
“윽…”
커다란 짐승의 무게가 실린 발톱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이빨을 드러내어 으르렁거리는 여우의 입에서 더운 숨이 피 냄새와 함께 풍겼다.
그는 나를 위험하게 만들지 않는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미는 것처럼 날카로운 살기를 무시하고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강하며 냉정한 여우요괴가 지금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려워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백은호.”
내가 지어준 이름을 불렀다. 여우가 더욱 으르렁거렸다. 송곳니 사이로 피와 침이 섞여 털을 타고 흘렀다.
“백은호.”
한 번 더 부르자 위협하듯 입을 벌리고 코앞에서 낮게 짖는다. 나는 조금 우스웠다. 그래봐야 너는 조그만 꼬마 여우잖아. 풀숲에서 내가 처음 발견했을 때, 너는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폭신폭신한 털을 가진 하얀 아기 여우였거든.
“백은호야.”
그 어린 여우를 불렀다. 눈망울이 까맣고, 귀가 쫑긋하고, 짧지만 탐스러운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던 아이를.
지금은 주머니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아기 여우가 낑낑거리며 엎드렸다. 꼬리가 하나만 남은 보통의 여우가 되어서, 얌전히 모은 앞발 위에 머리를 얹고서 처진 눈을 내리뜬다.
“화 안 났어.”
녀석의 하얀 털을 쓰다듬으며 내가 말했다. 내 손아래에서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녀석이 문득 고개를 들고 캥캥거리는 울음소리를 냈다. 어쩐지 몸이 흔들리…아니, 그게 아니라.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앉아있는데도 쓰러질 것 같이 몸이 흔들렸다. 누가 나를 붙잡고 앞뒤 좌우로 막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순간에 서늘한 기운이 덮쳐왔다. 물? 바다?
그 기운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숨이 막혔다. 저항할 틈도 없이 몸이 휩쓸렸다. 발이 허공에 붕 뜬 것 같아 어찌할 수 없는데다 숨을 전혀 쉴 수가 없었다.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도 발을 딛지 못한 채로 몸부림치다가 의식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도령. 도령.]
누군가 나를 부른 것 같았다. 잠깐 눈을 떴지만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
[도령. 도령.]
나를 부르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였다. 까만 눈과 분홍색 뺨을 가진 작은 계집아이가 한손으로 댕기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쁜 듯이 소녀가 웃었다.
너를 물가에서 만났었지. 나는 기억이 났다. 찰박찰박 물을 때리던 작은 발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그녀에게 줬던 그 이름을 불렀다. 소녀가 웃으면서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몸을 안자 서늘하면서도 따뜻하게 두근거렸다. 두근, 하고 소녀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흡수되듯이 아니, 두 개의 유리조각이 붙어서 하나가 되어버린 것처럼 소녀는 내 안에서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기억들이 반짝였다.
<에필로그>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별장의 내 방에 누워 있었다. 시간은 이미 날이 밝고도 한참 지난 후였다. 정오가 넘었던 것이다. 기절한 김에 아예 푹 자버린 것 같기도 하고.
로비로 내려가자 추기영과 안효정이 나를 보고 함께 잠꾸러기라고 놀려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즉에 깨어서 점심식사까지 마치고 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나를 데려왔다는 백은호의 말에 따르면 결계가 부서지고 묘란마저 죽자 그녀의 강한 힘으로 통제되던 섬 주변에 큰 파장이 일어났다고 한다. 갑자기 사라진 힘의 공백으로 바닷물이 밀려들었다는데 덕분에 섬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파도에 휩쓸려 버렸다.
한진과 연사범은 원강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일찍 해결하고 별장에 돌아가던 길이어서 바지만 좀 젖을 정도였지만, 추기영과 안효정은 집채만한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밀려가 버렸다고 한다.
“죽는 줄 알았네. 수영은 제법 하지만 그런 파도 속에서는…”
추기영이 한숨을 쉬며 그 때를 회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물속에서 커다란 나무둥치가 불쑥 올라오는 게 아냐. 덕분에 살았지. 그 나무가 없었으면 우린 큰일 났을 거야.”
“귀목의 둥치였어요.”
안효정이 덧붙여 말했다. 그들과 함께 물에 휩쓸려 간 귀목의 둥치에 매달려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퇴치한 요괴가 목숨을 구해준 셈이니 뭔가 묘했다.
그럼 모두 무사한 셈인가 하고 하나 둘 사람들을 헤아려 본 나는 어쩐지 하나가 늘었다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불려온 사람이 아홉, 별장에 원래 있던 사람은 네 명에 2층에서 발견한 세 명을 더해 일곱이니까 모두 열여섯인 셈인데. 한 명이 더 있다.
그런데 그 기운이 기이했다.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딘지 묘한, 종잡을 수 없이 괴이한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낯익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마치…나나 유하처럼.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윤호정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들을 찾았지만 백치가 되었대요. 원강의 말이 앞으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고 해요. 뭐라더라, 천형이라고…”
“도령은 지금 가셔야 합니다.”
백은호가 우리를 향해 말했다. 왠지 심술궂은 목소리였다. 안효정이 재빨리 원강의 옆으로 돌아갔다.
“뭐? 배는 아직 안 왔다면서?”
“도령은 배를 타고 갈 수 없습니다. 섬 근방은 아직 흐리지만 보길도에서부터 그 위로 구름이 걷혔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직 광주에서부터는 흐립니다만 서두르지 않으면 거기도 곧 맑아지겠지요.”
뭐? 그럼 어떻게 돌아가?
“그래서 곧 올 겁니다. 일곱 번째로 불렀던 사람이. 뭐 그가 직접 오는 것은 아닐 테지만.”
뭐래? 뭐라는 거야? 영문을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
“일곱 번째로 부른 사람이 누군데?”
불렀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던 한 사람. 그가 왜 이제야 오는데?
“영광의 박선생입니다.”
뭐? 박선생을 왜 불러? 그 할아버지는 아무 능력도 없는 평범한 수집가일 뿐인데.
“박선생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백은호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리고 더 설명하기 싫은지 바닷가 쪽을 가리켰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밀려왔다. 좀 더 집중하자 서늘하면서도 신령한 그 기운을 가진 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백은호가 싫은 티를 내는 이유를 알겠다.
바닷가에서는 영광의 상여봉에서 만났던 용아, 지금은 산군이 된 그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박선생에게 연락을 했다는 건 그더러 오라는 말이 아니었다. 박선생을 전령으로 삼아 산군을 불러들인 것이다.
“댁으로 돌아가시는 길을 도우려고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인 용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도울 건데? 구름을 불러들이는 건가? 궁금해 하는데 용아가 손짓했다.
“저에게 업히십시오.”
업고 가는 거야? 설마…
그 설마였다. 용아는 나를 업더니 바다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수영도 잠수도 해본 적이 없는 나를 데리고 깊이 깊이…
“숨이 안 막히잖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다음 내가 물속에서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사람을 업고 물속을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요. 이대로 바다를 지나 강을 타고 갈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한 대로 순식간에 바다를 가로질러 잠시 후에는 짠 바닷물 대신 민물을 타고 갔다. 강을 따라 헤엄쳐 간 용아가 나를 영산강에 데려다 놓은 것은 별로 오랜 후가 아니었다.
“여기에서부터는 괜찮을 것입니다.”
아직 흐린 하늘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용아는 나를 강기슭에 내려놓은 다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첨벙 물로 뛰어들었다. 작은 아이 같은 그의 모습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섬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기껏 해야 10분? 차와 배를 번갈아 타며 서너 시간은 걸리는 곳을 단숨에 와버린 것이다. 용아의 그런 능력도 놀랍지만 그를 불러들인 청단애기를 생각하자 더욱 기분이 묘했다.
섬에 우리를 불러들인 사람은 그 할머니였다. 박선생에게 연락을 해서 용아를 오게 하다니, 청단애기는 날씨가 변해서 내가 돌아가기 힘들어질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걸까? 게다가 나와 용아의 관계는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은 처녀보살의 신기일까.
그런 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수리점 앞에 닿았을 때쯤에 하늘은 슬슬 구름이 걷히려 하고 있었다. 시간을 잘 맞춘 셈이다.
“다녀왔어.”
3층에 있는 유하에게 들릴 리는 없지만 안으로 들어가며 내가 말했다.
“어서 오세요.”
조용한 대답이 돌아왔다. 작업 선반 앞이었다. 마침 누군가 맡겨 놓은 선풍기를 해체하며 유하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것이다.
“시장하셔요?”
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그 말을 들으니 배가 고팠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엄살을 부렸다.
“곧 준비할게요.”
드라이버를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는 바람소리가 휙휙 나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배가 고파서 죽어버리기 전에 빨리 밥을 차릴 생각인 것 같았다. 정말로 죽을 리가 없잖아.
나는 서두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수상쩍은 저 여자에게 아직도 반한 상태인 것 같다. 눈을 떼기 싫을 정도로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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