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잠에서 나를 깨운 것이 유리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라 내 가슴에 기대어 뒤척이는 향기로운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흐트러뜨린 머리에 반쯤 가려진 하얀 얼굴을 나는 두근거리며 바라보았다. 잠든 유하의 평화로운 표정은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에 탄식 섞인 한숨이 절로 나왔다.
팔 안에서 유하의 따뜻한 몸이 꿈틀거렸다. 깨어나는가 하고 당황했지만 내 손은 그녀에게 익숙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볼을 쓸고, 목덜미와 어깨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스스럼이 없었다. 쓰다듬는 손 아래에서 그녀가 긴 숨을 내쉬었다. 품 안으로 파고드는 그녀를 꼭 안으면서 알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몇 년이나 십몇 년 따위가 아닌 더 오랜 옛날부터, 그때부터 그녀는, 분명 그녀는 내 여자였다.
오래 된 기억들이 확신과 함께 반짝거렸다. 반짝이며 하나 둘 모였다.
작은 기억의 조각들이 잘그락 잘그락, 유리조각처럼 쌓였다. 들어맞는 단면을 만나며 녹듯이 이어져 붙었다. 기억이 점점 이어진다. 길고 분명하게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나는 물을 따라 걷고 있었다. 꼬르르 꼬르르 개울물이 종알대는 소리를 들으며, 수면에 반짝반짝 떠서 함께 흐르는 햇살을 따라갔다. 그녀는 징검다리에 앉아 하얀 발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땋아 내린 까만 머리, 붉은 댕기, 가는 목과 둥근 어깨, 그 뒷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알았다. 그녀는 나의 소녀였다. 내가 잃은 것 대신 내게 주어진 것이었다.
기억의 조각들이 이어졌다. 함께 한 시간들이 펼쳐놓은 명주폭처럼 펄럭였다. 모든 것이 선명했다. 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 기억이었으며 해명도령의 과거였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바랐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해명.”
유하의 목소리가 나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잘그락 잘그락 이어지던 기억들이 일순 멈췄다. 기억에서 빠져나온 내 눈에 잠에서 깬 유하가 보였다. 나를 불러들인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끈끈했다. 그녀의 깊은 시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능적으로 읽어내는 것 같았다.
“해명…”
기억을 따라가며 내가 보았던 것을 그녀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을 따라가다 따라가다, 결국 우리가 두려워 마지않는 순간까지 닿게 된다는 것을. 그러나 이름을 불리기 전에 이미 그것을 본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속일 수 있을까? 그녀를?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를 보는 유하의 눈 속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함께 차올랐다. 그녀는 갑자기 가여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유하야, 나 배고파.”
나는 짐짓 불쌍한 얼굴을 하고서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20대 중반쯤의 남자가 할 짓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그러면 그녀는 금세 어른이 되어서 나를 돌봐준다. 나를 돌봐주는 동안 그녀는 두려워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유하는 수선스레 아침을 준비했다. 늘 먹던 가벼운 아침이 아니라 찬과 데운 국을 놓은 밥상이었다. 어제 점심을 먹은 후로 쭉 굶었던 나는 게걸스럽게 세 그릇이나 먹어치웠다. 밥을 새로 퍼줄 때마다 기뻐하는 유하의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지만 세 그릇이 한계였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야 내가 뭔가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신경 써줘야 했던 게…
‘신발!’
아아, 잊고 있었다. 완전히 잊어버렸어. 뭐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이야. 생업을 팽개치고 있었으면서!
허둥지둥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신발들은 네 켤레와 슬리퍼 한 짝 모두 어제 놓았던 그대로 작업 선반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야? 이 신발들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때 전화가 왔다. 수영이 엄마였다. 피곤한 목소리로 그녀는, 못 찾았던 수영이의 슬리퍼 한 짝이 어제 갑자기 나타나 집안을 돌아다니는 통에 쫓아다니며 그걸 잡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말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녀석은 집 안에 있는 것이다. 집주소와 약속 시간을 확인한 뒤 나는 먼저 창고의 물품출납서를 확인했다.
수호도 그렇고 수영이도 그렇고 심지어 어머니도 그렇고, 어딘지 묘한 그 집안과 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재작년에 호랑이 인형, 4년 전에는 부채를 맡겼다고 했지?’
해당연도의 노트를 꺼내놓고 찾아보자 과연 2년 전 4월 중순쯤 ‘백호 인형’이란 이름으로 맡겨진 것이 있었다.
[백호 인형. 아기 고양이 크기의 봉제인형. 어린 백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영이 엄마의 것임. 우유와 생고기를 좋아함. 그러나 인형이므로 우유를 주면 젖음. 이빨이 없어 고기를 주면 핥기만 함. 세탁시키면 좋아함. 손빨래 후 수건으로 닦을 것. 세탁기에 돌리면 사나워짐.]
뭐지, 이건. 페이지를 몇 장 넘기자 출고내역이 있었다.
[2년 전과 마찬가지로 도깨비가 된 케이스 같다. 짧은 시간에 도깨비가 깃들게 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음. 한 달 동안 꾸준히 훈련시킨 결과 강아지용 간식과 물로 식사를 대신할 수 있게 됨. 손님이 만족하므로 귀가조치.]
도깨비라고? 게다가 도깨비가 깃든 인형을 집으로 돌려보냈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 집에는 자기가 호랑이 새끼인줄 아는 봉제인형이 강아지용 간식을 먹이 삼아 살고 있다는 말이다. …뭐지.
물론 오랫동안 물레 도깨비와 함께 살았던 순례 할머니의 예가 있으니까 불가능하다거나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거겠지만. 그래도 본래 도깨비라는 건 그 성질이 한 쪽으로 치우친 정령인 셈이라 인간이 가까이 하면 이롭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다시 4년 전의 노트를 뒤져보았다. 백호 인형 때의 기록을 보면 4년 전의 부채도 도깨비가 깃들어 맡겨진 것일 터다. 노트의 끄트머리쯤에서 ‘부채 도깨비’란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채 도깨비. 난초 그림이 프린트 된 양산형 합죽선. 손님인 수영이 엄마가 길거리에서 5천원 주고 샀다고 함. 조악한 품질이지만 바람은 잘 남. 밤이 되면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부채질을 함. 바람이 매우 세기 때문에 집안이 난장판이 된다고 한다. 도깨비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도깨비가 깃들만한 시간도 이유도 없는 점이 이상함.]
그리고 다시 며칠 후의 날짜로 수리 완료가 되어 있었다.
[부채 도깨비가 창고에 남기를 원하여 수영이 엄마의 동의를 받아 수리를 종료함. 부채를 돌려주지 않았으므로 수리비는 못 받음.]
어라….
창고에 남았다니 그 말은, 지금 창고에 있는 부채 도깨비가 4년 전 수영이 엄마가 맡겼던 바로 그 부채 도깨비라는 말이잖아. 혹시 다른 도깨비인 게 아닐까 하고 그 뒤로 쭉 훑어보았지만 부채 도깨비의 출고내역은 없었다.
그렇다면 창고에 가서 부채 도깨비를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직 도깨비들이 깨어서 돌아다니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창고에 들어가자 몇 놈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나를 보고 후다닥 물건으로 돌아갔다. 물건들 사이에서 “이봐, 이봐.”라거나 “왔어. 왔어.”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얘들은 또 왜 이래.
부채 도깨비를 찾아 미로 같은 창고 안을 돌아다니는데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왔다. 쿵, 짝, 하고 맞추는 장단에 이어 작지만 흥겨운 목소리로 누군가 사랑가 한 대목을 흥얼거렸다.
사랑이로구나. 사랑이야. 어화 둥둥 내 사랑이야.
한쪽에서 벽에 기대어놓은 가야금이 손대는 이도 없는데 홀로 현을 튕겨 흥겨운 곡을 연주한다. 도깨비들의 서로 희롱하는 간지러운 목소리가 들리고 창고 여기저기에서 목 안으로 웃는 소리가 낙엽처럼 굴러다녔다.
“적당히들 해라, 응?”
신경질 내는 목소리로 불평했지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나도 진심은 아니었다. 함께 지낸 기억은 고작 몇 개월.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 만큼 녀석들은 단순하고 정직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이다. 유하와 관련된 기억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다른 기억은 여전히 조각 난 채로 흩어져 있었다. 백은호 때와 비슷했다. 덕분에 4년 전 일에 대해 부채 도깨비에게 물어야 하는 거고.
녀석은 부챗살을 쫙 펴고 선반 위에 늘어져 자고 있다가 내가 건드려 깨우자 살을 탁 접었다. 건드리면 입을 꽉 다무는 조개와 비슷했다.
“깨워서 미안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시간이 좀 없어서 말이야.”
약속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오, 도령?”
부채 도깨비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꾸했다. 부챗살을 슬그머니 펴자 선면에 그려진 난초 그림이 얼핏 보였다.
“네가 전에 있던 집, 기억 나? 4년 전에,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곳.”
“그야 기억이 나오만.”
부채 도깨비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 집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줄래? 집이나 사람도 그렇고, 또 네가 어떻게 부채에 깃들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보통 도깨비가 붙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특히 누군가 사용하던 물건에 도깨비가 깃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사람의 손에 길들여져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래 써서 짧아진 부지깽이라든가 끝이 닳고 닳아 뭉툭해진 대빗자루라든가. 사람의 손이 오래 머물렀다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멀어진 물건에서 도깨비는 흔히 생겼다.
하지만 이 부채 도깨비는 다르다. 길거리에서 5천원에 파는 양산형 합죽선이라는 것은 보통 한 계절을 버티기 힘든 법이었다. 살에 댄 종이가 찢어지든 물에 젖든 해지든 한두 달이면 그 수명을 다하는 법이다.
그러나 난초가 그려진 이 부채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 새 것에 가까웠다. 선면도 빳빳하니 구겨지지 않고 손잡이 쪽은 때도 별로 묻지 않았다. 이렇게 깨끗한 걸 보면 오래 사용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물건에 어떻게 도깨비가 깃들었을까.
“거 참 요상한 것을 묻는구먼. 도령은 도령이 태어날 때 어머니가 아이구야 하고 소리 지르던 것이 기억나시오? 젖 빨며 칭얼거리던 때가 기억나시오?”
아니, 설마 도깨비도 아가일 때가 있는 거야?
“사람과 같다는 것은 아니오만, 바위나 나무더러 물어보시오. 네가 어떻게 생겨났냐고 하면 뭐라 할지.”
그래. 바보 같은 질문해서 미안하다. 그럼 생겨났을 때 말고,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도…
부채 도깨비는 살을 접었다 폈다 하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말했다.
“가물가물 하오만 내가 갓 눈을 뜨고 세상의 기운을 하나씩 접하고 있을 때, 멀리서는 천지간에 운행이 순조롭고 밤낮의 구분이 명확하였으나 가까이에서는 그렇지 못해 조금 고생을 한 기억이 있다오.”
가까이 어디?
내 물음에 부채 도깨비가 살을 탁 소리가 나게 접었다.
“그 집이 그랬더란 말이오. 그래서 다시 돌아가기가 싫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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