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말하자면 천지간의 운행이 순조롭지 못하고 밤낮의 구분이 모호한 집이라는 거네.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살아도 되는 건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땠어?”
“주인마님은 무서운 분이었지. 내가 잠깐 움직이기라도 할라치면 벼락같이 달려와서 확! 잡아 내려놓고 대화를 시도하셨다오.”
대화 좋잖아.
“한 시간 이상 계속되는, 무슨 말을 해도 반박당하고 무심코 한 말을 단어 하나까지 일일이 지적받고 오래 전에 한 말을 뭐 하나 잊지 않고 다 기억해서 소급하여 예로 들고 절대로 설득이 불가능한 대화 말이오.”
음…어쩐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죄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드네.
“그 댁의 바깥어른은 호인이었소. 나야 별로 볼 일이 없었지만 주인 마님과 화목하게 잘 살고 있으니 호인이 아닐 수 없을 게요.”
야, 그건 좀 감정 섞인 판단 같은데.
“도련님은 착하고 다정한 분이라오. 내게 먹을 것도 가져다주고, 바깥어른의 술을 몰래 갖다 주기도 했소.”
그건 많이 감정 섞인 판단 같고.
“아가씨는 활달하고 씩씩한 분이지. 나를 방으로 데려가서 마음껏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셨다오. 그런데 방이 너무 좁아서 날아다니기에는 불편했지.”
부채 도깨비는 그 외에도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었지만 대단치 않은 내용이었다. 들은 것만으로는 그 집이 어째서 특이한지 뭐가 문제인지 통 알 수 없다. 어차피 약속 시간도 가까워졌고 역시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고 나갈 준비를 하다 문득 생각났다. 오늘은 날씨가 맑다.
뭐?!
어처구니없게 날씨가 맑은데 외출 약속을 잡아버렸다. 왜 생각을 못했지? 잠에서 깨어난 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당연히 아무 때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듯이 약속을 정한 것이다.
이것은 혹시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 생기는 부작용일까. 이따금 떠오르는 과거 속에서 나는 날씨에 관계없이 어디에서나 자유로웠다. 그때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아, 그나저나 직접 가서 볼 수 없다면 이제 어쩌지. 문제는 그 집안에 있는 것 같은데. 날씨를 확인해 봤지만 오늘도 내일도 흐릴 기색은 없었다. 무서운 주인마님에게 며칠만 더 참아달라고 할까? 그런데 그랬다가 ‘한 시간 이상 계속되는 이하생략의 대화’를 시도하시면 큰일이다.
아무래도 잔소리를 좀 듣게 될 것 같다고 포기하려다 떠올랐다.
‘잠깐, 거기는 그러니까 수호 녀석의 집이잖아.’
부채 도깨비가 말하는 착하고 다정한 도련님인 수호라면 뭔가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그러고 보면 수호 녀석은 그런 일이 생기고 있는데 웬일로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지. 다른 일들은 잘도 부탁하러 오면서.
달력을 보니 마침 오늘은 토요일이다. 학교에 안 가는 날이면 집에 있을 터였다. 전화를 걸자 한참 신호가 간 후에 녀석의 귀찮아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요? 왜요?”
수리점으로 오라는 말에 녀석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왜는 임마. 오라고 안 해도 아무 때나 놀러왔던 주제에.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부탁을 해야 할 입장이니까 유하의 간식을 미끼로 구슬려 보는 수밖에. 녀석은 이리저리 빼다가 결국 알았다고 대답했다.
꽤나 오기 싫었는지, 3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으면서 30분이나 기다리게 만든 끝에 졸린 얼굴로 나타났다. 너 설마 아직까지 자고 있었냐? 볼에 눌린 자국 있는 거 보니까 그런 거 같은데.
“아저씨 때문이잖아요.”
잠 안 자고 뭐했느냐고 묻자 녀석이 대뜸 말했다. 내가 뭐?
“수영이 슬리퍼 하나가 집에 남아 있다가 어제 밤새 돌아 다녔어요. 어찌나 빠른지 잡기도 힘들고.”
내가 그렇게 될 줄 알았냐? 그리고 슬리퍼가 빠르면 얼마나 빠르다고…
“날아다니더라고요. 전에는 기껏해야 뛰어다녔는데.”
요컨대 진화했다는 거다. 갈수록 신기한 집일세. 어쨌든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너 말이야, 전에도 그런 식으로 물건에 도깨비가 깃든 적 있었다며? 왜 말 안 했어?”
“뭘 말해요?”
내 질문에 녀석이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예전에 집안에서 태풍 같은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가 날아다녔다거나 밤만 되면 강아지 간식을 사냥하러 돌아다니는 인형을 키운다는 이야기를요? 왜요?”
왜…냐고 물으니까 할 말은 없는데. 우리 그런 이야기 정도는 할 만큼 친한 사이 아니었냐? …아니었나 보다.
“그게 도깨비라는 건 알고 있어?”
“알아요.”
“그럼 쫓아내는 법도 알 텐데?”
“인형 도깨비는 별로 귀찮게 안 하고 밤에만 돌아다니니까요. 엄마랑 수영이도 귀여워하고요. 부채는 아저씨네 창고에 있잖아요. 부채 도깨비 때는 저도 스승님을 만나기 전이라 아는 게 거의 없었고…”
하긴 4년 전이니까.
“그럼 요새 돌아다니는 도깨비는?”
“확인한 적 없으니 도깨비인지도 분명치 않고, 도깨비라도 그걸 쫓아내려고 하면 인형 도깨비까지 도망가게 되잖아요. 저 도술 금지당한 거 아시죠? 어제도 직접 뛰어다니면서 잡아야 했어요. 귀찮아 죽겠어요. 빨리 좀 해결해 줘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나 밖으로 못 나가.”
내 말에 녀석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대놓고 지었다.
“외출금지 당했어요? 무슨 잘못을 한 거예요?”
내가 너냐?
“사정이 있어서 날씨 맑은 날에는 못 나가. 어쨌든 그래서 지금은 너희 집에 가볼 수가 없다고.”
“그런 이야기는 엄마한테 하시고요.”
야 이 매정한 놈아.
“그래서 붙잡은 슬리퍼는 어떻게 했어?”
“두꺼운 겨울 이불로 꽁꽁 싸놓았어요. 이불은 이불장에 넣어놨고. 좀 들썩거리기는 하는데 솜이불이라 소리는 안 나요. 그런데 아저씨.”
어쩐지 진지한 얼굴로 녀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게 도깨비라고 생각하세요?”
생각이고 뭐고. 나도 직접 본 게 아니니까 장담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부채 때도 인형 때도 도깨비였으니 이번에도 도깨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뿐이지.
마침 유하가 간식을 가져와서 우리의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녀석이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그것을 먹는 동안 유하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먹기 편하게 접시를 당겨준다거나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거나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다정한 태도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맛있다고 칭찬해 주자 유하는 기쁜 듯이 웃었다. 야, 중2. 남의 여자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 아니다.
유하가 3층으로 돌아가자 수호 녀석이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힐끗 본 다음 물었다.
“누나하고 화해했어요?”
무슨 소리야. 우리 싸운 적 없거든.
“아니, 오늘따라 사이가 좋아 보여서요.”
“말 돌리지 말고,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봐.”
유하가 와서 입을 다물었지만 녀석은 뭔가 말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녀석은 치즈가 엉겨 붙은 숟가락을 쪽쪽 빨면서 뜸을 들이다가 찡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는 원래 잡귀나 도깨비 같은 게 곧잘 들어오곤 해요. 정확히 말하면, 들어왔다가 못 나가는 거지만요.”
뭐야 그게? 쥐덫 같은 잡귀 덫 그런 거냐?
“보통 혼이나 영은 물질에 구애받지 않아서 벽이건 문이건 쉽게 통과해요. 그런데 우리 집에 들어오면 빠져나가는 길을 못 찾고 헤매는 거예요. 대부분은 며칠 지나면 헤매다가 저절로 나가던데…”
“너 또 무슨 부적이나…”
“안 했어요!”
녀석이 억울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도술을 배우기 전부터 그랬다고요. 그게, 스승님께 배우기 시작하면서 저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는데 지리적인 조건에 집안의 배치나 가족들의 사주까지 딱 떨어져서, 일종의 결계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아요.”
“그럼 이사를 가.”
쉽네.
“그건…”
녀석이 눈썹을 모았다.
“그게 또, 사주로나 풍수지리상으로나 지금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어서…오히려 길하달까. 가끔 이런 일이 생길 때는 귀찮지만요. 지금만한 곳을 찾는 것도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너희 가족의 복록을 위해서 지나가던 잡귀와 도깨비 등등의 통행권을 방해하겠다는 거냐?
“그리고 제가 이사하라고 말씀 드려봐야 부모님이 들어주실 리도 없고요. 참, 제가 도술 배우고 있는 거 부모님께는 비밀이에요!”
나도 별로 네 엄마에게 아드님이 여우요괴였던 남자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생각 없어.
“그래서 네 생각에 12시만 되면 신발 한 짝 신고 도망 다니는 그게 대체 뭐 같은데?”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딱 생각나는 여자가 한 명 있기는 하다. 신데렐라라고. 그 여자는 예쁘기라도 하지.
“신발을 신고 가는 요괴는 아저씨도 알겠지만 앙괭이가 있어요.”
왜 말은 ‘알겠지만’이면서 표정은 ‘몰라도 이해할게요.’인 거냐. 그런 기분 나쁜 호의 따위 필요 없거든.
“하지만 앙괭이는 정월에 나타나는 요괴고 신을 못 신으면 날이 밝는 것과 함께 사라져요. 또 한 짝만 가져가는 일도 없고요.”
발이 하나뿐인 앙괭이가 아닐까? 하지만 말하면 심히 백은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겠지.
“신발을 하나만 가져가는 걸 봐서 다리가 하나뿐이라고 가정한다면 외다리 도깨비가 있어요. 그런데 외다리라도 왼발, 오른발의 구분은 있을 텐데 좌우 구분 없이 한 쪽만 가져가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요. 다리가 하나이고 신발에 집착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요괴는 제가 아는 한 없어요.”
그래서요?
“이름이 붙은 요괴가 아니라면 남는 것은 하나뿐이죠. 어떤 이름, 어떤 목적, 어떤 사연을 가지게 될지 모르는 무한의 가능성이 있는 요괴, 귀신인 거예요.”
자기 집안에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말을 참 길고도 쉽게 하는구나.
“귀신이라고 생각했으면 쫓아보지 그랬어? 도술씩이나 쓰지 않아도 귀신 쫓는 방법은 많잖아.”
“해봤죠.”
해봤는데?
“말했잖아요. 우리 집은 그런 존재가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구조라고요. 쫓아도 도망만 다니지 나가지 못해요. 괴롭히기만 하는 셈이라고요. 게다가 이번의 경우에는 신발을 한 짝 가져가려는 강한 목적이 있어요. 어제 슬리퍼를 쫓아다니면서 창문을 슬쩍 열어뒀거든요. 밖으로 나갈 수 있나 하고요. 그런데 못나가더라고요.”
거 참 불편한 집이네.
“가뜩이나 빠져나가기 힘든 곳에서 신발까지 챙기려고 하니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러니 내버려 둔다면 언젠가 나가더라도 다른 잡귀보다 훨씬 오래 걸리겠죠. 아니면 인형 도깨비처럼 아예 눌러앉을지도 모르고.”
강아지 먹이를 사냥하는 인형도 키우는데 날아다니는 슬리퍼 정도 키우는 것도 괜찮지 않냐?
────────────────────────────────────
────────────────────────────────────
신데렐라(6)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조용히 날아다니기만 하면 새 키우는 기분으로 키워보겠지만….”
녀석이 중얼거리듯 대꾸한다. 참 그렇지. 문제의 신데렐라는 한밤중에 아무데나 돌아다니고 잡아두려고 하면 죽어라 반항하고 신발을 옮겨 다니며 도망치는 녀석이었지. 진짜 신데렐라는 적어도 얌전히 기다렸다가 왕자님 따라가서 잘 살았잖아.
“혼령이 하는 짓이라면 이유를 알아내서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에요. 그러려면 만나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수호 녀석이 말끝을 흐렸다. 이상했다. 녀석은 어제 밤새 슬리퍼를 쫓아다녔다. 결국 붙잡았고. 그런데 아직 정체를 확인하지도 못했고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엄마에게 비밀이니까 말을 거는 모습 같은 걸 보이지 않으려고 한 걸까?
아니 애초에, 우유와 생고기를 좋아하는 인형 따위를 강아지 기르듯 키우는 집에서 도사의 제자가 된 게 뭐 그리 별 일이야. 녀석의 말은 어째 앞뒤가 안 맞았다. 뭔가 말 안 한 것이 있었다.
딱히 남의 비밀을 캐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일단은 일과 관련된 사항이고 어디까지나 수리를 맡긴 것은 저쪽이고 기왕에 본인도 여기에 있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예. 캐내고 싶습니다. 백은호스러운 수호 녀석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라니 궁금하잖아.
“그럼 네가 만나 봐. 슬리퍼도 잡아놨겠다, 그 와중에 한 번은 눈에 보였을 법도 한데. 어떻게 생겼는지 못 봤어?”
천연스레 묻자 녀석이 눈썹을 모으며 시선을 피했다. 이상해. 역시 이상해.
부러 얼굴을 들이밀고 빤히 쳐다보자 잠시 외면하고 있던 녀석이 마침내 인상을 쓰며 나를 쏘아보았다.
“왜요? 뭐요?”
“그냥 말 하지?”
“말하긴 뭘 해요?”
“어허, 속여도 소용없다니까. 내가 해명도령이란 거 잊었냐? 다아 알거든?”
“다 아니까 말 안 해도 잘 알겠네요.”
그건 아니고.
“얌마, 며칠 동안 집안에서 귀신이 돌아다녔다는데 네가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뭐야? 뭘 숨기고 있는 건데? 왜? 쫓아내기에는 너무 예쁜 누나 귀신이었냐?”
“무슨 소리에요!”
녀석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그럼 뭔데? 보긴 봤지?”
“못 봤어요.”
“봤잖아.”
“못 봤다고요.”
“봤을 것 같은데.
“못 봐요!”
수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못 봐요? 진행형이잖아.
“그런 거 안 보인다고요.”
녀석이 못 박듯이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 보여? 귀신이?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은 금하고 있다지만 도술도 쓰고 여우요괴였던 남자의 제자이기도 하고. 애초에 그런 재능도 없는 녀석을 제자로 받아줄 리가…
아니, 가만…
그러고 보면 전에, 자신이 만든 부적 때문에 광개토대왕을 만나게 되었던 때 녀석은 직접 차사의 먹물을 훔치러 갔었다. 그때는 생각 못했지만 백은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 차사는 알아보는 눈만 있으면 오히려 상대하기 수월한 존재입니다. 속이기도 쉽습니다. 다만, 차사 역시 보는 눈이 있으니 직접 상대하는 것은 눈이 어두운 보통 사람이 해야 할 것입니다만.
눈이 어두운 보통 사람?
하지만 도대체 어딜 봐서 저 백은호스러운 놈을 눈 어두운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전혀 안 보인다는 거야? 그럼 도술은 어떻게…”
“전혀 안 보이니까 도술의 도움이 필요한 거잖아요. 부적을 이용하면 보거나 사로잡을 수도 있어요. 수…”
녀석이 말하다말고 머뭇거렸다. 수 뭐?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하지?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우물거리던 녀석이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수영이는 보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것 같지만요. 가끔 집안에 잡귀나 도깨비가 들어와서 돌아다니면 수영이가 먼저 알아보거든요. 그런데 신발이 나돌아다닐 때마다 걔는 자고 있어요. 깨우면 짜증내고.”
요는 수영이를 깨우기만 하면 귀신인지 신데렐라인지를 볼 수 있다는 거네. 그리고 그 방법이라면 나는 이미 알고 있단 말이지.
내가 그 방법을 알려주자 수호 녀석도 동의했다.
수호는 그 뒤로도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내가 건네 준 ‘수영이를 깨우는 묘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걸로 내일은 신데렐라의 정체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묘한 일이다. 정작 사람 외의 존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수영이는 고양이나 쫓아다니고, 눈이 어두운 평범한 수호 녀석은 환을 만나 ‘종이 한 장 너머’의 세계에 발을 들인 셈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가능할 리 없는 물건에 도깨비가 깃드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신기한 집안이었다.
수영이겸 수호 엄마에게 오늘 찾아갈 수 없다고 연락하자 다행히 약간의 잔소리 끝에 은혜롭게 용서해 주셨다. 맑은 날에는 외출할 수 없다는 걸 깜박 잊은 내 잘못이라서 어쩔 수 없지만, 어쩐지 난 이 집안 사람들만 만나면 뭔가 손해 보게 되는 것 같아. 나랑 상성이 안 맞나?
다음날, 그러니까 일요일 아침에 수호와 수영이 남매는 아침을 먹자마자 수리점에 찾아왔다. 간밤에 있었던 일을 알려주고 싶어서 근질거렸던 것 같다.
“이름은 주현이고요, 심주현. 동천 초등학교 3학년이고요, 집은 동천 마을 1109동…”
수영이는 나를 보자마자 누군가의 인적사항부터 쏟아놓았다. 수호 녀석이 동생을 타박하고는 제대로 이야기했다.
“신발 신고 도망가는 귀신, 죽은 지 얼마 안 된 애 같아요. 아직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길을 건너다가 신발을 떨어뜨려서 그걸 도로 찾으러 다니고 있대요. 그 말만 들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작년에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죽은 애가 하나 있대요.”
“3학년이었어요!”
작년까지 초등학생이었던 수영이가 오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끼어들었다.
“나는 못 봤는데요, 소문나서 들었거든요. 그거 본 애들이 스무 명도 넘는대요. 트럭에 치였대요.”
“초등학교 앞으로 트럭 안 다니거든?”
“애들이 그랬다니까?”
“버스겠지. 큰 차는 무조건 트럭이냐?”
“오빠는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아?”
“너도 안 봤잖아.”
“나는 본 애들한테 들었다니까?”
이것들이 또 남매인증 한다.
“얘들아, 지금 차종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남매 사이에 끼어들어 봤으나
“물어볼까? 반톡에 물어봐서 내 말이 맞으면 어쩔래?”
“맞으면 뭐? 그리고 걔들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어떻게 믿어?”
“와아, 인성 봐. 불리하니까 다른 애들까지 걸고…”
자연스럽게 무시당했다. 결국 두 녀석들은 유하가 간식 접시를 들고 올 때까지 옥신각신 하다 입 안에 먹을 것이 들어가며 실랑이를 멈추었다.
아이들이 먹느라 조용해진 동안 나는 유하에게 부탁해 따로 음식 쟁반을 두 개 더 준비했다. 떡이 놓인 접시 하나와 술이 담긴 잔이 하나 있을 뿐인 간소한 차림이었다.
작년에 초등학교 앞에서 죽은 여자아이가 누구이며, 그 아이가 찾는 신발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쟁반 두 개는 그들에게 줄 대가였다.
유하가 쟁반 두 개를 수리점 앞 이팝나무 아래에 하나씩 내려놓고 오자, 나는 창가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가 한참 후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작년에 초등학교 앞에서 여자애 하나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는데 그 애는 어떻게 되었을까. 저엉말 궁금하네.”
누가 들어도 티 나게 어설픈 독백을 그 자리에서 세 번 반복하는 동안 유일한 관객인 수호와 수영이는 “그 애가 우리 집에 있는 귀신 맞다니까요.”라든가 “왜 똑같은 말을 세 번이나 해요?”라며 내 혼이 담긴 연기를 방해했다.
내 독백이 끝나고 다시 한참 후, 수리점 앞 길가에서는 늘 듣던 목소리로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어이, 배부르다. 오늘은 모처럼 맛난 걸 먹었네.”
“나도 모처럼 좋은 술을 한 잔 했네, 그려.”
“아니 자네는 어디서 그리 좋은 술을 얻어마셨나?”
“아아, 요 앞 수리점의 예쁜 각시가 글쎄 고운 손으로 술 한 잔을 담뿍 따라서는 내게 가져다주지 않겠나.”
“나도 요 앞 수리점의 예쁜 각시가 김이 솔솔 오르는 맛난 떡을 가져다 줘서 잘 먹었지.”
“그런데 수리점 양반은 작년에 죽은 여자애 신발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각시 얼굴도 안 쳐다보던걸.”
“그 신발은 미장원 옆 골목 쓰레기통 뒤편에 깨진 유리랑 같이 버려져 있는데 그걸 모르다니 한심하긴.”
“그러게 말이야.”
목소리들은 낄낄거리며 수리점 양반을 비웃다 문득 사라졌다. 하여간 저것들. 직접 물어보면 나무인 체하며 대꾸도 안 해주면서.
어쨌거나 가르쳐준 목신들에게 감사하며 나는 수호와 수영이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둘은 나갔다 오더니 먼지와 얼룩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신발 한 짝을 내놓았다.
오랫동안 골목 안에서 비와 먼지에 방치되었던 신발은 유하가 정성껏 세탁했어도 별로 깨끗해지지 않았다. 못 신을 정도로 지저분하지 않다는 정도로 만족하며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남매는 신발을 가지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신발과 함께 여자애의 혼령이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아하면서 신발을 신더니 빛이 되어서 사라졌다고 하네요. 나는 안 봐서 모르겠지만요.”
전해주는 수호 녀석의 목소리가 뚱하니 불친절했다. 잘 해결되었는데 왜 기분이 저래? 음…혹시 녀석은, 동생을 질투하고 있는 걸까? 자신으로서는 도술의 힘을 빌려야만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노력도 대가도 없이 사용하는 거니까.
“잘 됐네. 그 애가 성불한 건 네 덕분이야. 내가 한 번 빚진 것 같은데?”
사실이기도 하고, 조금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말했더니
“예. 이번엔 한 잔으로 안 되니까 모카 라떼하고 레몬 에이드하고 에스프레소요.”
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했다. 야. 뭘 세 잔이나 시키는 거야. 그리고 에스프레소는 엄청 써요.
어쨌든 내 입으로 말 한 거라 사주기는 했는데, 다음날 수영이 엄마가 찾아와서 “이번 일은 우리 애들이 귀신도 찾고 신발도 찾아오고 신발도 돌려주고 해서 해결되었다면서요?”라더니 “그치만 사장님 체면도 있고 내가 유하씨랑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라면서 하해와 같은 은혜로 수리비를 지불하셨다. 지인이니까 디스카운트를 받아야 한다며 20%는 깎으셨다.
역시 이 집안 사람들과 나는 상성이 안 맞는 것 같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