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운(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꿈결 같은 나날이라는 표현을 한다. 유하와의 기억이 돌아온 이후로, 가슴 한 구석에 밀어놓은 불안이나 괴로움을 인식하면서도 나는 그것을 뛰어넘는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반쯤 멍하니 홀린듯한 꿈결 같은 나날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행복이나 기쁨 외의 다른 감정을 마비시키는 미약 같기도 했다. 아니면 현재의 만족에 집중하면서 곧 닥쳐올 미래를 외면하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결코 버리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며칠간 계속되었다.
달력의 날짜는 이미 11월 초순을 벗어나, 날씨는 점점 서늘해지고 긴 소매의 홑옷을 입으면 썰렁한 기분이 들었다. 원강이 안효정과 함께 갑자기 찾아온 것은 가디건을 하나 걸칠까 말까 망설이던 오후였다.
그는 수리점에 오자 벨소리를 듣고 내려간 나에게 말없이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후줄근한 양복 차림에 말수 적은 조용한 남자였다. 같이 온 안효정은 어색한 표정으로 쭈뼛거리다가 원강의 나무라는 표정을 보고야 내게 꾸벅 인사했다.
그녀가 미리 준비해온 것 같은 사과의 말을 또박또박 읊었다. 요약하자면 몰라 뵈어서 죄송하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원강은 대체 안효정에게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한 거야?
잠시 후 유하가 차를 가지고 내려오자 안효정의 어색하던 표정은 단박에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그래. 저 아가씨도 여전하다.
원강은 특유의 점잖고 낮은 목소리로 내가 섬에서 떠난 이후의 일들을 찬찬히 이야기했다.
일행은 별장의 주인이 약속대로 지불한 가방을 하나씩 들고 섬을 떠났다고 한다. 내가 먼저 떠났기 때문에 내 몫은 남은 여덟 명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나. 그게 왜 공평한 건데! 난 죽은 게 아니잖아!
그리고 원강은 그 일을 마지막으로 태령 윤문과는 작별했다고 했다.
“애초에 그렇게 약속하고 갔던 겁니다. 그래서 무사히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리라 짐작했지만 도령 덕분에 별 탈이 없었습니다.”
그건 사실이라고 본다. 내가 치료한 사람들이 합류한 덕분에 일이 더 쉬워지지 않았겠어? 그런데! 왜 나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내 돈을 나눠 갖는데!? 내가 진짜 해명도령씩이나 되어서 돈에 연연한다는 말 들을까봐 불평은 못 하겠고. 그치만 억울하잖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기의 차가 식어가자 원강은 이제 가겠다며 일어섰다. 일 이야기 말고 다른 대화를 나누는 손님은 거의 없어서 나는 그가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떠나려던 원강이 내게 내민 것은 세 개의 주머니였다. 노랗게 물들인 무명천으로 만들었는데 생긴 모양은 복주머니와 비슷하지만 복 복(福)자 대신 다른 문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입구를 모아서 묶은 끈은 종이를 꼬아만든 것 같았다. 뭔지 복잡한 방식으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외출할 일이 생기면 요긴할 겁니다. 사용할 때가 아니면 매듭을 풀지 마십시오.”
그가 당부하고 떠났다. 안효정이 혹처럼 붙어서 그를 따라 나갔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원강은 주머니 세 개를 남기고 갔다. 외출할 때 요긴한 주머니라니 이건 뭘까. 주머니 안에는 얇고 가벼운 뭔가가 들어있었다. 만져보니 바스락거린다. 종이 같은데.
옛날이야기 속에서 이런 주머니를 받았다면 쫓아오는 괴물을 퇴치할 수 있는 가시덤불이라든가 산이나 강 같은 걸 만들어내는 신통한 능력이 있겠지. 그런데 내가 딱히 괴물에게 쫓길 일은 없고.
필요할 때가 아니면 풀지 말랬으니 풀어볼 수도 없고 주머니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내용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별로 오랜 후가 아니었다. 바로 다음 날 안효정이 다시 수리점에 찾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그녀 혼자였다.
찾아온 그녀의 손에는 뭔가를 꼼꼼하게 싼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보자기를 풀어놓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떡과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접시에 담겨 있고 술병과 잔도 하나 있었다. 안효정은 그것을 작업 선반 위에 주섬주섬 펼쳐 놓더니 먹으라고 눈짓을 한다.
주는 걸 안 받을 수는 없고, 이 아가씨가 갑자기 웬 떡과 술이람 하면서 조금씩 맛을 봤더니 떡은 영 아니었지만 과일과 술은 먹을 만했다.
“왜 떡은 안 드세요?”
내가 한 입만 먹어보고 다시 떡에 손을 대지 않자 안효정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왜는? 맛이 없잖아.
“그거 사흘 밤낮을 쪄서 만든 건데…”
맛없다고 하자 안효정이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무슨 떡을 사흘 밤낮을 쪄서 만들어요? 그러니까 이런 이상한 떡이 되는 거 아냐?
“정성이라고요, 정성!”
안효정이 볼을 붉히며 항의했다. 정성 두 번 들였다가 떡 가지고 차돌을 만들겠다. 아니 그런데, 웬 떡에 사흘씩이나 정성을 들여? 원강이 그러라고 시켰나? 아니, 이런 이상한 짓을 하라고 시켰을 리는 없고.
나한테 이상한 떡을 먹이는 것 말고 다른 용건이 있느냐고 묻자 안효정은 한숨을 쉬었다.
“실은 부탁이 있어요.”
“뭐 맡길 물건이라도?”
수리라면 언제나 환영이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뭐…사람도 일단은 어딘가 고장 났다면 수리가 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뭐 일단 보고 나서 결정하겠지만, 사람의 경우는 수리비에 숙박비가 포함되니 고려하시고요. 고쳐야 할 사람은 누구예요?”
내 질문에 안효정이 눈을 깜박거렸다.
“수리비요?”
“사람을 맡길 거라면서요?”
“그건 그런데…”
맡길 사람을 데려오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러나 말끝을 흐렸다가 안효정이 지적한 부분은 다른 곳이었다.
“수리비를 받을 거예요?”
일하면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잖아. 일단은 지인이니까 약간의 DC는 생각해 보겠다만.
“하지만 떡이랑 술이랑 드셨으면서…”
안효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나한테 먹인 이상한 떡과 술과 과일이 수리비 대신이라는 거야? 이 아가씨가 물물교환 하던 시대에서 살다 오셨나. 아니 잠깐…
지금 나한테 술과 음식을 내놓고 부탁을 들어달라고 한 거잖아. 무슨 서낭신이나 산신에게 하듯이. 어이…이봐. 진짜 원강한테 나에 대해서 도대체 뭐라고 들은 거냐. 무슨 말도 안 되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거야?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신령에게나 하는 거고요. 저는 하루 세 끼를 먹어야 사는 사람이라.”
“하지만 해명도령은 천왕의 현신이라면서요! 원강이 그랬어요.”
원강은 이 호기심 많은 아가씨에게 별 쓸데없는 소리까지 한 모양이다.
유하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녀와 관련되어 있는 형제들의 기억도 일부가 돌아오기는 했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몇 명의 형제를 기억한 것만으로도 내가 아란어미의 아들이며 찢어진 하늘과 땅의 열두 번째 조각을 따라 간 십이천왕의 막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실감할 수는 없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다.
“미안하지만 예전에 내가 뭐였든 지금의 나는 인간이라, 신령이나 들어줄 수 있는 일을 부탁할 생각이었다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네요.”
내 말에 안효정의 표정이 굳었다.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뭔지 중요한 일이었나 보다. 하지만 사정이 어쨌든 할 수 있는 일을 해달라고 해야지.
“그, 그럼…안 되는 건가요…?”
안효정이 파리해져서 물었다.
아니, 내가 무턱대고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인지 이야기나 해 봐요.”
사정도 모르고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들어는 봐야겠지. 내 부드러운 목소리에 용기를 얻었는지 안효정이 한결 나아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저번에 섬에 가는 거, 원래는 기완 사형이 갈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부상을 당해서 입원하는 바람에 제가 대신 가게 된 거예요.”
별일 없었다면 그 호랑이 남자를 만났을 거라는 이야기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돌이켜 보니 별로 오래 전도 아닌데 어쩐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그 남자라면 어지간해서는 다칠 것 같지 않았는데.”
“그렇죠. 기완 사형의 어머니는 호녀(虎女)이니까요.”
호녀? 호랑이라고? 진짜 호랑이?
“우리나라에서 호랑이는…멸종된 거 아니었어?”
“그건 보통의 호랑이이고요. 또 지역적으로는 그렇게 말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종족 자체가 멸종되었다고 할 수는 없죠. 호랑이에게는 국경이 없으니까요. 우리나라 말고 다른 곳에서는 아직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어요.”
호랑이에게는 국경이 없다라. 하긴, 그 말은 맞네.
“어쨌든 기완 사형의 어머니는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라 호녀로,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다고 해요. 기완 사형은 호랑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체력조건을 가지고 있고, 또 스승님을 만난 후로는 호랑이의 특성을 발현하는 법도 배워서 무력에 관한 한 태령 윤문에서는 손꼽히고 있어요. 물론 태령 윤문의 사람들은 대부분 도사라 무력과는 별로 연관이 없지만요.”
나는 약간 우쭐해지려고 했다가 안효정의 마지막 말에 도로 겸손해졌다.
“어쨌든 그런 사형이 입원을 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다쳤는데, 전 일 때문에 찾아가지도 못했다가 섬에서 나온 후로 문병을 갔었거든요. 거기에서 이상한 말을 들었어요.”
안효정은 기억을 되살리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찌푸렸다.
“사형이 다친 건 일이나 수련 때문이 아니라 동문 중 하나 때문이라고요. 모란이라는 아이인데 3년 전에 산에서 헤매던 것을 둘째 스승님이 거둬서 제자로 삼았거든요. 그 애가 사형을 쓰러뜨리고 윤문에서 달아났다는 거예요.”
기완이 당했다고? 그 녀석, 겉모습만 무시무시하고 실은 약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기완 사형의 상처는 분명히 무기를, 그것도 둔기를 이용한 강한 타격으로 입은 거였다고요. 하지만 모란은 힘도 약하고 도술 같은 걸 익힌 적도 없어요. 둘째 사부는 모란에게 의술만 가르쳤거든요. 기완 사형은 방심했다가 독에 당한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럴 리도 없어요. 기완 사형에게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도 않고…무엇보다 모란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안효정은 말하며 맞잡은 손끝을 문질렀다.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기완 사형은, 문병 갔을 때는 확실히 말해주지 않았지만 뭔가 숨기는 것 같았어요. 제가 캐물으니까 확실해지면 말하겠다면서 한사코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이틀 후에 퇴원했는데 퇴원한 그 날 후로 기완 사형과도 연락이 안 돼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어디 산에라도 들어가서 수련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하죠. 물론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안효정은 문지르던 손끝을 꽉 잡았다.
“하지만 전 아무래도 수상해서 모란의 일이라든가 기완 사형의 행적을 계속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다섯째 스승님께서 넌지시 말씀하시기를…”
어설프게 뱀 꼬리를 붙잡지 말아라. 그것이 다섯째 스승의 말이었다. 듣는 순간 안효정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고 했다. 분명한 경고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란도 기완 사형에게도 큰 일이 생긴 것 같아요. 두 사람의 안전이 걱정되어서 다른 도사들에게 부탁해 봤지만 모두 들은 척도 안 해요. 어쩔 수 없이 윤문을 떠난 원강에게 부탁하니까 두 사람 모두 행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해요. 추적을 방해하는 힘이 있어서 원강의 힘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요. 원강이 못할 정도라면 그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자의 방해라는 뜻인데,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안효정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아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태령 윤문의 사람이겠지.
“그러니까 지금, 태령 윤문이 하는 일을 저더러 캐달라는 거…?”
게다가 의뢰는 태령 윤문의 사람.
안효정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예.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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