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01화 (101/218)

의운(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묘한 기분이었다.

태령 윤문이라면 이미 두 번이나 안 좋은 일로 엮인 적이 있어서 언제건 손을 봐주겠다고 벼르고 있던 참이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 기회가 올 줄이야? 더구나 일을 가져온 사람은 태령 윤문에 속해있는 안효정이다.

함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 만일 아니라면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는 셈이다. 게다가 12월까지는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내게 남은 시간도 보름 남짓이라는 뜻이었다.

다섯째가 오고 있다. 내게는 셋째 형이자 아란 어미의 다섯째인 그가 오고 있으니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는 얼마 없었다.

굉장한 기회를 잡은 건지도 몰라.

뻔한 함정은 아닐까?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함께 다투었다. 내게 시간이 없다면 유하와 보낼 시간도 얼마 없는 셈인데 이런 때에 굳이 위험을 자초해야 할까?

하지만 이것이 다시 없을 기회라면? 안효정이 정말로 내게 부탁을 하고 있는 거라면 나는 태령 윤문 안에 트로이의 목마를 두고 있는 셈이었다. 맛없는 떡과 술 정도의 대가라도 상관없을 정도다.

함정인가 아닌가. 결국 판단은 여기에 달려 있겠지만…

‘그러고 보니…’

원강은 어제 떠나기 전, 외출할 때 요긴할 거라며 주머니를 주고 갔었지.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하며 내내 만지작거리던 주머니를 꺼내자 안효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와줄 거예요?”

“이게 뭔지 알아요?”

주머니를 가리키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강이 그걸 만드느라 수명을 십 년은 깎았을 거예요. 은신부(隱身符)예요.”

“은신부?”

“사람이나 귀신 같은 것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단순한 은신부가 아니에요. 하늘로부터 굽어 살피는 이목천왕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부적이라고요.”

안효정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외출할 때 요긴할 거라는 말을 들어서 구름이라도 불러 모으는 부적일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왕의 눈을 속이는 부적이라니 터무니없는 걸 만들었잖아.

이목천왕은 열두 세계의 규칙을 수호했다. 태양과 달과 별을 눈으로 삼아 규칙을 거스르는 자가 있는지 살핀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악한 목적을 가진 자, 세계의 규칙에 어긋난 존재들은 어둠과 안개 속에 자신을 숨겼다.

그런 이목천왕의 눈을 가린다는 것은 곧 세계의 규칙을 어긴다는 뜻이고, 당연히 그에 준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원강은 자신의 수명으로 그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하지만 부적을 위해서 수명을 십 년이나 깎다니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섬으로 가기 전에 원강은 이상하게 진지했었어요. 살아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면서 유언까지 남겼을 정도니까요. 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섬에 가보니 원강이 걱정할 만하더군요. 거기에서 무사히 나온 건 정말 행운이었죠. 원강도 그랬어요. 원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요.”

아아, 그는 원래 선진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다고 했지.

“당신에게 정말로 고마워했어요. 표현을 잘 안 하는 사람이어서 그렇게 안 보였을지도 모르지만요.”

내게 감사하는 한편, 안효정을 도우려던 것이 아닐까. 그는 내게 맑은 날에도 외출할 수 있는 자유이용권을 만들어준 셈이니 말이다. 안효정에게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안 된다고 하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원강이 이렇게까지 했다면 나로서도 그것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라면 섬에서 사흘, 그리고 어제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나는 그 점잖고 말수 적은 도사가 마음에 들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결국 내가 물었다. 안효정의 얼굴이 환해졌다.

“도와주는 거예요? 사형과 모란을 찾아줄 거죠?”

“장담 못해요. 난 사람 찾는 일에 익숙하지도 않고. 하지만 도움을 받을 곳은 있어요.”

내가 생각한 곳이란 노앵설이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라면 그녀보다 정확한 데가 없겠지. 다만 경험으로 미루어 그녀의 대답은 직설적인 게 아니라 힌트에 가까웠다.

또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몇 번의 중간 과정을 거쳐야 했다. 꾀꼬리의 울음소리 같다는 노앵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현재 한 명뿐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한 명인 수민이의 도움을 받으려면 수호 남매가 필요했다.

수호 남매는 노앵설을 알게 된 후 가끔 보육원에 찾아가고 있었다. 수민이가 이쪽으로 오기도 하지만 혼자서 여기까지 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서 보통은 보육원에서 만났다.

수호의 주목적은 전설 속의 존재인 노앵설을 구경하는 것이었고, 고양이나 강아지만큼 어린애도 좋아하는 수영이는 동생들과 노는 것이 목적 같았다. 노앵설도 말을 하지 않을 뿐 수영이에게는 꽤 친밀한 태도를 보였다.

어쨌거나 수민이는 수호를 열렬히 신봉하고 있었다. 보육원으로 찾아와주는 사람은 자원봉사자 말고 거의 없으니 수호의 방문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부러움을 사는 모양이었다. 그런 수호를 통해 부탁하면 수민이도 들어줄 성 싶었다.

내가 전화하자 수호는 평일에 보육원까지 갔다 오기는 시간이 부족하다며 불평했다.

“중요한 일이어서 그래. 얌마, 네가 수민이 데려올 때마다 보육원에 가져갈 과자값으로 나간 돈이 얼마야? 기브 앤 테이크 몰라?”

수민이가 수리점에 놀러 오면 돌아갈 때 보육원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한 보따리씩 안겨주곤 했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사준 거지만 수민이를 데려온 건 수호잖아. 이럴 때 좀 뒤집어씌워도 될 거야.

“아 진짜 치사하게…아저씨가 맘대로 사줬으면서!”

“받아먹었으면 값을 해야 하는 법이거든. 스승님이 그런 거 안 가르쳐 주시디? 인과라든가 등가교환이라든가…”

수호 녀석은 잠시 짜증 섞인 침묵시위를 하더니 “오늘은 늦었어요. 학원 가려면 두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빠듯해요. 내일 갈게요.”라며 미루었다.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안효정이 재빨리 “나 차 가져왔는데.”라고 끼어들었다.

“들었지? 수리점으로 번개같이 달려와. 진짜 중요한 일이라니까. 사람 목숨 살린다고 생각…아니, 정말로 목숨이 둘이나 걸려 있으니까 부탁 좀 하자.”

“거의 다 왔어요.”

“뭐?”

“거의 도착했다고요.”

그 말과 함께 수리점 입구로 녀석이 들어왔다. 저게! 전화 받았을 때 이미 출발했으면서 딴청이었어! 어른을 놀리면 재밌냐?

“나 친구랑 PC방 가기로 한 약속 포기하고 온 거예요. 와플에 딸기 쉐이크. 친구 것까지.”

이젠 아주 자동으로 대가를 요구한다. 오냐, 임마. 지금 와플이 문제냐.

녀석을 데리고 보육원으로 갔던 안효정은 두 시간이 되기 전에 수리점으로 돌아왔다. 노앵설에게 받았다며 그녀가 내게 내민 것은 반으로 접힌 하늘색 색종이였다. 접힌 것을 펴자 본 적 있는 필체로 “당신이 잃은 것은 규한과 목심에게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대답이 좀 더 구체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규한과 목심이란 사람 이름일까? 안효정을 쳐다보자 나와 부딪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는 이름인 모양이다.

“목심은 둘째 사부의 성함이고…규한은 모르겠어요. 윤문에 내가 모르는 사람도 많으니까…”

모르는 이름이지만 윤문의 사람이리라 짐작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사람이 얼마나 많기에?”

“태령의 본가에 상주하는 인원만 백 명이 넘어요. 윤문에 속한 사람들은 정확히 몰라도 5백 명이 넘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 도사가 그렇게 흔해빠졌어?

“도사들만 세면 백 명도 안 될 거예요. 그들 대부분은 전국에 흩어져 있고요. 나머지는 다양해요. 역술가, 무술가, 제법 소문난 무격도 있고 기완 사형이나 저처럼 특별한 태생인 사람도, 그리고 소문뿐이기는 하지만…요괴도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도사들의 집단에 요괴가 한 패라니 이상하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아니, 안효정의 말대로라면 도사들만의 집단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뭔가 복잡하고 방대해. 아니면 의외로 단순한 이익집단인 걸지도 모르겠다.

“이 부적, 일회용인가요?”

주머니를 가리키며 묻자 안효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일회용을 수명을 깎아가며 만들 리가 있겠어요. 반드시 몸 가까운 곳에 지니고, 훼손되면 효력이 사라지니 젖거나 찢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더럽혀지거나 해지거나 구멍이 나도 마찬가지예요.”

부적은 종이니까 말이지. 그렇더라도 보관만 잘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거다. 외출 한 번 하려면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내게는 그야말로 보물 같은 거네. 원강에게 굉장한 걸 받았어.

“제가 먼저 태령에 돌아가서 둘째 사부의 주변을 확인할게요. 규한이라는 사람도. 한시가 급하니 도령과 함께 가면 좋겠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태령의 감시를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따로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여기는, 예전의 일 때문에 윤문에서도 함부로 손을 쓰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예전의 일이란 태령 윤문의 도사들이 수호 녀석을 뒤쫓아 왔다가 산신에게 쫓겨 갔던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 후로 정말 윤문에서는 이 도시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효정은 우리가 만날 곳과 그녀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약속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내일 밤까지는 뭐 하나라도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말하는 안효정의 얼굴은 단단한 각오로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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