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02화 (102/218)

의운(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유하에게 안효정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러 갔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참 그렇지. 그녀가 건물 안에서 생기는 일을 모를 리가 없지. 잊고 있었던, 혹은 잊으려고 애썼던 그녀의 모습이 되살아나자 나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태령 윤문과 결국 상대하게 되나요. 그들과는 악연이 깊지만 이렇게 직접 부딪칠 일은 거의 없었는데.”

유하가 담담히 하는 말에 나는 별로 대꾸할 것이 없었다. 윤문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랬던가?”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곳에 이사 온 뒤로는 수호의 일로 만난 것이 처음이었어요.”

유하의 말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을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다른 곳에서 살았어? 여기 온지는 얼마나 되었는데?”

“6년이에요. 전에 살던 곳은 제주도였어요. 바다에서 먼 곳이었지만요.”

“그 전에는?”

“부산에서 3년, 보성에서도 5년 살았어요.”

건물 밖으로 나갔던 일은 거의 기억이 없으니 그녀가 말한 도시들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남쪽의 도시다. 겨울이 늦게 오는 따뜻한 곳들이었다. 하루라도 늦게 겨울을 만나려고 우리는 남쪽 땅을 맴돌았던 것이다.

가지 말까? 애써 아낀 하루하루를 유하와 함께 보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다.

생각과 함께 나도 모르게, 안효정의 애원하는 듯한 얼굴이나 지금쯤 위태로울지도 모르는 두 사람을 유하와의 시간과 저울질했다. 오래 남지 않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 마음속에서 삐죽삐죽 돋아났다.

“돌아오면, 같이 소풍 갈래요? 늦게까지 단풍이 지지 않는 곳을 알아요.”

유하가 문득 말했다.

“거기 가면 서리가 내리기 직전까지 단풍을 볼 수 있어요. 맑은 날에는 그림처럼 풍경이 고와요.”

그렇구나. 이제는 맑은 날에도 외출할 수 있으니까. 하얀 햇빛 아래에서 그녀와 함께 걸을 수 있어.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원강의 부적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

“응. 그러자.”

그렇게 생각하자 웃으면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유하가 내 여행 가방을 준비해주는 동안 나는 백은호와 통화했다. 역시 상대는 태령 윤문이니까 최대한 대비를 해두고 싶었다. 물론 윤문의 뒤를 캐는 일이란 말은 안 한다.

백은호 녀석이라면 분명 “그런 일에 관여해봐야 좋을 일이라고는 없습니다.”라든가 “언제고 윤문과 부딪치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런 무식한 방식으로…”어쩌고 하면서 실컷 나무란 다음 귀찮은 체 잘난 체 관대한 체하며 따라올 테니까. 잔소리 들으며 아쉬운 소리 하기는 싫단 말이지.

백은호에게 전화를 한 나는 대신 다른 것을 부탁했다.

“규한이란 이름이 전부입니까?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노앵설이 가르쳐 준 두 개의 이름 중 안효정도 모르는 하나, 규한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봐 달라는 것.

“글쎄. 본명은 아닌 것 같지? 우리나라에 규씨 성은 없잖아.”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백은호가 수화기 너머에서 혀를 찼다.

“그 정도로 뭘 알아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백화주를 준비해 두셔야 할 것 같군요.”

대가를 준비하라는 건 뭐가 되었든 결과물을 내놓을 수는 있다는 말이잖아? 본명도 아닌 이름 하나 가지고.

여전히 자신만만한 여우요괴다.

뭐 이걸로 일단 백은호도 끌어들였고, 핑계였지만 의외로 규한에 대해 뭔가를 알아낼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유하에게 뭔가 꼼꼼하게 꽉 찬 백팩을 받았다. 백팩은 넣을 수 있는 한계까지 꽉꽉 밀어 넣은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갈아입을 옷하고 수건, 면도기랑 비누, 해명이 좋아하는 커피, 그리고 날씨가 쌀쌀하니까 생강차도 조금 넣었어요. 도시락은 가장 위에 있어요. 가는 길에 드세요. 따뜻한 물은 보온병에 넣어뒀어요. 그리고…”

유하에게 안에 뭐가 들었느냐고 묻자 손가락으로 헤아리며 하나하나 알려준다. 끝없이 셀 것 같은 손가락을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하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낯을 붉혔다. 뭘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거야.

하지만 소녀처럼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잠시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떠나기 싫어지네.

“기차 시간에 늦어요.”

곱게 눈을 흘기며 유하가 말했다.

떼기 싫은 걸음을 옮겨야 했다. 유하는 3층에서 손짓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서운했지만 1층의 출입문 앞에 서자, 그 감정은 낯선 시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희미해졌다.

문 너머는 밝았다.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워하는 것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득한 느낌. 문에 손을 대자 햇빛의 온기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유하와의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 나는 이 햇빛을 느낄 때마다 생각하고는 했다.

둘째 형이 한 일 중 가장 현명한 행동은 이 모든 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본래의 의도는 아니었는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덕분에 적어도 그녀는 태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손잡이를 잡고 나도 모르게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압축하여 가공해서 질긴 가죽 끈에 담배 크기의 금속 통이 달려있는 이 목걸이는 오늘 아침 유하에게 받은 것이다. 통 안은 텅 비었고 돌려서 반으로 나눌 수 있었다.

원강이 준 부적은 주머니에서 나오자마자 돌돌 말려 통 안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면 늘 몸에 지닐 수 있고 어지간해서는 부적이 상할 염려가 없었다.

부적은 여기에 있으니…마른 침을 삼키고 문을 열었다. 네모나게 잘린 햇빛이 문사이로 노랗게 새어 들어왔다. 황금빛 네모가 내 몸을 세로로 타고 올라왔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문을 열자 황금색의 네모는 점점 커져서 내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얼굴에 햇빛의 온기가 느껴졌다.

큰형…큰형의 시선은 태양과 같았다. 어디에나 공정하게 두루 비추고, 따뜻했다. 그러나 절대로 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임무는 열두 형제중 그에게 가장 적합했다. 태양 아래에서 나는 큰형의 눈앞에 발가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가 나를 볼 수 없다 해도.

미안해요. 어리광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중얼거려도 그에게는 들리지 않겠지. 무거운 걸음으로 나는 수리점을 떠났다.

분명 밝은 땅을 밟으며 걷고 있는데 어쩐지 마주친 모든 것들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영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를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기분만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비켜주지 않아 부딪칠 뻔했다.

그들은 내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듯이 내 뒤쪽 먼 곳을 보고 있다가 나와 가까워지면 그제야 흠칫 놀라고는 했다. 은신부란 본래 몸을 숨기는 용도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귀(鬼)나 영(靈)에게 발견되지 않게 하거나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원강의 부적은 이목천왕 외에도 본래의 효용 역시 착실하게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밝은 길을 홀로 걷는다는 낯설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사라져갔다. 역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적응하고 있었고, 기차에 타고나자 창밖의 풍경이나 객차 안의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단순한 건 이럴 때 좋잖아.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을 여유도 있었다. 그 여유는 안효정과 약속한 장소에 가서 한가하니 시간을 보낼 때까지도 계속 되었다.

그곳은 작은 공원이었다. 운동장 크기의 바닥에 잔디가 깔려 있고 주변에 나무가 빙 둘러진, 큰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이따금 차 소리가 날뿐 조용했다. 평일이라 사람도 거의 없었고 중년의 남녀가 운동복을 입고 조깅을 하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만 이따금 보였다.

오후가 되자 젊은 엄마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왔고 더 어두워지자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걷거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했다.

유하와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드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여덟 시간 가까이 안효정을 기다리고 있자니, 지루한 것을 넘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시각은 밤 9시를 향하고 있었다. 안효정은 오늘 밤까지는 연락을 주겠다고 했었다. 이미 밤이지만 몇 시까지라고 확실히 말하지 않았으니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적어도 12시까지는.

하지만 정말로 기다리고만 있어도 괜찮은 걸까. 뭔가를 숨기고 있다가 사라진 기완이나, 그를 찾는 안효정에게 경고했다는 다섯째 스승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안효정도 기완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건 아닐까.

게다가 노앵설이 말한 이름 중 하나는 그녀의 둘째 스승이었다. 그 호기심 많은 아가씨라면 직접 스승에게 묻거나, 그 이상으로 위험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스승의 방을 뒤진다거나 뒤를 밟는다거나…아니야. 설마 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시각이 11시를 넘어서자 그 설마가 정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공원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가로등이 네 개 있지만 공원 안을 다 밝히는 것은 무리였다. 가로등에서 좀 떨어진 어두운 벤치에 앉아 나는 3분마다 한 번씩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30분. 40분. 50분.

좋아. 10분만 더. 12시까지다. 그 이상은 못 기다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뭔가 파닥거리며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작고 하얀 것이었다. 기타 피크 두 개를 맞대고 있는 모양과 크기였다. 피크 모양의 그것이 날개처럼 파닥파닥, 가로등 빛을 반사하며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것이 날아온 방향은 정확히 내 앞이었다. 손을 내밀자 얌전히 손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지자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종잇조각이었다. 접힌 종이의 귀퉁이를 찢어내 나비와 모양이 비슷했다. 날개 한 쪽에는 붉은 얼룩이, 다른 한 쪽에는 알아보기 힘든 깨알 같은 문자가 쓰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생명이 있는 것처럼 날아왔지만 지금은 꼼짝하지 않는 것이나 무슨 뜻인지도 모를 문자가 적힌 것도 그렇고, 이것을 보낸 사람이 안효정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도술을 모르는 것 같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종이 나비를 따라와서 나를 포위하듯 다가오는 것들이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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