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03화 (103/218)

의운(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어둠속에서 그것들은 소리를 죽이고 조금씩 다가왔다. 캄캄한 가운데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마치 빛을 내는 것처럼 그 기운을 조금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영이나 귀도 아니었다. 예전 도사들과 싸웠을 때 느꼈던 감각에 가까웠다. 부적과 같은 느낌이다. 불이 붙은 부적들이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부적은 아니고, 가까이 오자 어디까지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의 모습이기는 하되, 그 입은 것이나 머리 모양이나 요즘 사람 같지는 않았다. 사실 딱 보는 순간 어디 사극 영화 촬영장에서 점심 먹으러 나온 엑스트라 무리가 아닐까 싶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긴 머리에 투구, 비늘갑옷, 목이 긴 가죽신, 손에는 창을 들었다. 긴 머리를 상투도 아니고 땋아내린 것도 아니고 그냥 늘어뜨리거나 혹은 하나로만 묶고 있었다. 남자면서 양쪽 귀에 팔락거리는 귀걸이를 달고 있는 거라든가 어디로 봐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갈 예스러운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한 사람들이 스무 명 가량이었다. 투구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모두 달랐으나 표정이 똑같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것들이 뭘 하려나 잠자코 지켜보자 나를 에워싸더니 일제히 창을 겨눈다다. 둥글게 원을 그리고 사방은 물론 위아래로 움직이기도 힘들만큼 촘촘하게 간격을 짜서 날카로운 창끝으로 좁은 감옥을 만들어 놓았다.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애초에 생각이라는 것이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나를 발견하면 잡아두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시험 삼아 한 발 움직여 보자 창끝이 내 옷 안으로 파고드는데 물러서지도 그렇다고 제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리에 힘을 주고 제가 선 자리를 지킬 뿐이다.

어떡한다.

잠시 망설였다. 이 묘한 것들을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안효정이나 그녀가 믿는 사람이라면 일부러 도술을 써서 나를 찾아낼 필요가 없다. 결국 그녀와 비밀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데.

도술을 부릴 수 있고 내가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 안효정에게 신뢰를 받고 있지 않은 사람. 무엇보다 아직까지 안효정의 연락이 없는 지금, 그 원인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 생각할수록 안 좋은 쪽으로만 결론이 난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사로잡으라고 명령했으니 그 자는 분명 잡힌 나를 보러 여기에 오리라는 점이다. 그러면 사양할 필요가 없겠지. 어차피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도 않고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마음을 정한 순간 몸을 낮췄다. 뒤늦게 창들이 나를 따라왔지만 늦다. 납작 숙인 채로 힘껏 바닥을 휩쓴 다리에 걸려 네 명이 나뒹굴었다. 포위는 한 겹이 아니었다. 뒤쪽에서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의 창이 그들 대신 빈 공간을 메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 역시 늦었다. 창 네 개가 사라져서 훨씬 넓어진 틈 사이로 끼어든 내가 다시 두 명을 때려눕혀 버렸다. 그들의 반응은 빠르고 정확했지만 요괴에 미치지 못하는 속도였다.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두 명 때문에 생긴 구멍으로 포위를 빠져나가자 다음은 더 쉬웠다. 나머지를 해치우는 데는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한 명을 쓰러뜨리고 나자 반딧불처럼 내 주변에서 깜박거리던 기운들이 사라졌다. 바닥에는 예스러운 군복을 입은 사내들 대신 파란 댓잎들이 흩어져 뒹굴었다. 아직 푸릇하니 대향이 감도는 싱싱한 잎에는 먹으로 작게 령(令)이라 적혀 있었다.

댓잎으로 만든 병사라. 죽엽군(竹葉軍)이란 말인가. 참 오래된 수법을 잘도 써먹고 있네.

나는 그곳을 벗어나 멀찍이 있는 나무 위로 자리를 옮겼다. 자신이 보낸 죽엽군이 당한 것을 도사는 알아차릴까? 알더라도 내 흔적을 확인하게 위해 여기까지는 오겠지. 무엇보다 그 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숨은 나무는 죽엽군과 싸운 벤치에서 꽤 멀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아까도 나비 같은 종잇조각이 나를 찾아냈으니 다시 한 번 같은 방법으로 찾아낼지 모른다. 그러면 역시 싸우는 수밖에 없을까.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도 문제이지만 그 다음은 더 문제다.

아직 연락이 없는 안효정의 상황을 알아내려면 누군지 모를 그 도사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쉽게 말해줄 리 없지. 그런 일이라면 백은호가 제격일 텐데. 잔소리를 듣더라도 그냥 같이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살짝 꺼내보니 백은호다. 이 양반은 못 되는 여우요괴가 하필 이런 때에…

핸드폰을 볼에 착 붙이고 손으로 감싸서 최대한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며 속삭여 말했다.

“미안한데 지금 통화 못해. 숨어있…”

“어디입니까.”

백은호가 내 말을 자르며 물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좀 화난 것 같다. 사실대로 말 안 해서 삐쳤나. 백은호라면 결국 알아내고 쫓아올 거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먼저 야단맞느냐 나중에 야단맞느냐의 차이였어.

“태백 체험 공원 주차장 위…”

“20분 안에 도착합니다. 거기 꼼짝 말고 계십시오.”

백은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단단히 혼이 날 것 같은걸. 화가 난 백은호와 만나는 일이 걱정되는 한편 든든한 아군이 곧 온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막 핸드폰을 집어넣는데 멀리서부터 인기척이 있었다. 사람들이다.

‘여섯…아니 일곱.’

빠른 속도로 공원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나무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들이 어두운 공원을 가로질러 내가 앉아있었던 벤치로 달려갔다. 그들이 몸을 숙이고 땅에 흩어져 있는 댓잎을 발견하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원강의 은신부는 나를 어디까지 감춰줄 수 있을까.

먼빛으로도 그들의 지휘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천천히 벤치로 갔다. 거리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본 다음 고개를 들더니 그 자리에서 주위를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가까운 곳이 아니라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얼굴이 내 쪽으로 향했다가 슥 지나갔다. 그의 손짓에 함께 온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한 명이 내가 숨은 나무 밑을 두리번거리며 지나갔지만 다행히 위를 올려다 볼 생각은 안하는 것 같았다.

흩어졌던 사람들은 곧 소득 없이 벤치로 돌아갔다. 벤치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남자가 신경질적인 손짓을 하자 사람들은 그를 따라 왔던 곳으로 향했다. 돌아갈 모양이었다.

좋았어.

나는 나무 밑의 까만 어둠에 숨어 그들이 가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주차장 쪽이면 낭패였지만 다행히 산 쪽이었다. 차를 탈 일은 없는 것 같다. 일곱 명 모두 능숙한 걸음으로 어두운 산길을 타고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멀찍이 따라가며 뒤늦게 꼼짝 말고 기다리라던 백은호가 생각났지만 어쩔 수 없다. 백은호가 뭘 알아냈는지도 모르고 안효정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 지금 저들을 놓치면 다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들을 따라 산자락을 타던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산을 오를수록 공기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밀도가 높아진다고 해야 할까. 혹은…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꽉 막힌 듯한 답답한 기분?

게다가 앞서 가는 일곱 명의 기운이 어쩐지 옅어지고 있었다.

‘섬과 비슷한데.’

그렇다는 것은, 내가 섬처럼 강력한 결계로 묶인 어떤 곳에 들어섰다는 뜻이겠지.

백은호가 잘 따라올 수 있을까. 조금 걱정도 되었다. 여우인 그라면 내 냄새를 맡고 뒤쫓아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대책 없이 뛰어든 참이었다. 하지만 결계 안에서도 그가 나를 쫓아올 수 있을까.

그러나 걱정할 틈도 별로 없었다. 산 위쪽으로 노란 불빛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 걷던 일곱 명은 금세 불빛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불빛의 정체는 가로등이었다. 지금까지 거의 등산로 같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이런 산꼭대기에 가로등이라니. 그러고 보니 가로등 아래의 길은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내가 올라온 길은 그 큰길 옆으로 난 작은 산길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로가 나선을 그리며 산을 휘감고 있었다. 소방도로 정도의 폭이지만 바닥은 시멘트로 잘 포장되어 있다. 그 도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자 머지않아 커다란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났다.

두 개의 두꺼운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그 일주문은 어느 절의 산문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가로등의 약한 불빛 속에서도 섬세한 단청과 무지기 치마처럼 겹을 이루고 있는 처마가 또렷이 보였다.

현판도 없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지만 산문에서라면 없었을 커다란 대문이 기둥 사이에 있었다. 대문은 약간 열린 채로 문 건너편을 슬쩍 보여주었다. 유혹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유혹이 없어도 나는 계속 올라갈 생각이다.

문을 지나자 잠시 넓은 길이 계속되었다가 한 번 더 문이 나타났다. 사실 문이라기보다는 집처럼 보이는 건물이었지만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다 가운데가 뻥 뚫린 채로 지나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으니 문이라고 할 수밖에.

이곳 역시 현판도 없고 안쪽은 텅 빈 공간이었지만 마치 절의 중문처럼 보였다. 본래 사천왕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막한 중문을 지나자 곧 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계단 위로 크고 널찍한 지붕과 처마의 실루엣이, 남청색 하늘위로 까맣게 드리워져 있었다.

본래는 절이었을지도 모르는 건물들이나, 내가 읽고 있는 기운 가운데 그런 신령하거나 정숙한 느낌 따위는 없었다. 가까이 갈수록 피부가 간질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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