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04화 (104/218)

의운(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담 너머는 넓었다.

탁 트인 공간 너머에 대웅전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하나, 그 양쪽으로 다시 낮은 담을 끼고 작은 기와집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여러 개 보였다. 커다란 건물 뒤편으로 다시 계단을 수십 개 올라가면 3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있었다.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했다. 저기에서 누군가 밖을 보고 있었다면 방금 담을 넘어 들어온 나는 꼼짝없이 들켰을 터다.

빛이라곤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몇 개의 불빛과 띄엄띄엄 선 가로등뿐이었으므로 경내는 어두웠다. 또한 고요해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신발 밑에서 흙 알갱이가 비벼지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이런 밤중에 들을 수 있을 법한 새 소리나 벌레 울음소리도 없다. 사람들이 꽤 많은데도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건물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몰랐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보통 넓은 게 아니었다. 건물도 많고 담과 회랑이 미로처럼 사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행히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자의 기운을 따라 가다 건물이 나오면 돌아가고 담이 나오면 뛰어넘으면 될 뿐이었다.

남자는 경내를 똑바로 가로질러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작은 기와집들 사이로 지나갔다. 그 중 하나로 들어가나 싶었더니 거기도 통과해서 뒤쪽의 언덕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은 작은 기와집들을 지나가며 하나 둘 흩어져 들어가서 이제 남자는 혼자였다.

그를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자 다시 몇 채의 건물들이 담 안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지나온 길을 언덕에서 슬쩍 내려다보니 초등학교가 두 개 쯤은 들어갈 정도의 넓은 공간이었다. 거기에다 그 절반쯤 되는 공간이 하나 더 있다. 크고 작은 건물의 수는 대충 세어도 스물 정도.

태령의 본가에 상주하는 인원이 백 명쯤이라던 안효정의 말이 실감났다.

남자는 담 안의 건물들 가운데 가장 큰 곳으로 쑥 들어갔다. 결계 안이라서 기운이 잘 읽히지 않지만 이쪽에는 사람이 몇 없어보였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는 것이,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희미하게 읽히던 그의 기운이 아예 씻은 듯 사라져 버린다. 얼마 전 염목도의 별장에서와 비슷했다.

커다란 결계로 둘러싸인 산 안에, 다시 뭔지 모를 수작이 깃들어 있는 건물이라.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곳은 정해진 셈이다.

언덕을 재빨리 내려가 담장에 바짝 붙었다. 남자가 들어간 건물은 북쪽 끝에 있었고 그 뒤는 산이었다. 담은 북쪽을 제외한 삼면을 둘러치듯 감싸고 있다. 담을 넘어 안을 가로질러 가는 것보다 산으로 올라가서 건물을 내려다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원강의 부적이 유효한 것을 여기까지 오는 동안 확인했지만 그래도 신중한 것이 낫겠지.

담을 따라 북쪽으로 갔다가 비탈에 닿자 훌쩍 뛰어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간 순간에 목덜미 털이 오싹 곤두설 정도의 기운을 갑자기 느꼈다.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는데 잘한 일이 아니었다. 기울어진 방향에서 무지막지할 정도의 힘이 나를 후려쳤다. 팔로 막을 수는 있었지만 충격에 갈비뼈까지 쩡 울릴 정도였다. 몸이 반대 방향으로 3미터쯤은 날아가 버렸다. 배트에 맞은 야구공이 된 기분이었다.

떨어진 곳이 흙바닥이었기에 망정이지 나무에라도 부딪쳤으면 둥치가 부러지면서 나무 쓰러지는 소리에 잠들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깨어나서 나왔을지 모른다. 그 정도의 타격이었다.

나를 날려버린 습격자는 내가 나가떨어지자마자 꿈틀거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들이닥쳤다. 눈앞으로 날카로운 것이 날아왔다. 하나가 아니다. 그때쯤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나는 어렵지 않게 날아온 것을 잡을 수 있었다.

“공격 패턴이 하나도 안 바뀌었잖아.”

그래도 힘은 여전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지만 양손을 붙들고 있는 팔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네 놈…!”

어둠 속에서 나를 덮친 습격자, 기완이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투기도 변함없었다. 몸 안에서 휘도는 기운이 위험할 정도로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안효정이 부탁해서 온 거야. 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녀석이 폭발해버리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내 말에 기완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는 팔을 잡고 있는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어깨를 움찔 떨더니 조금 뒤로 물러났다.

“원강도 그렇고 안효정은 정말 크게 걱정하고 있었어.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면서.”

사흘 밤낮을 공들여 내게 줄 음식을 준비할 정도로 말이다. 그 결과물은 이상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그 맛없는 떡 때문에 나는 여기까지 온 셈이다.

“정보를 모아보겠다고 나보다 하루 먼저 출발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너는 어떻게 된 거야?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었으면 연락이라도 해줬어야 안효정이 걱정을 안…”

나무라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녀석 멀쩡하지가 않잖아.

갑자기 공격받아서 미처 헤아릴 틈이 없었지만 지금 보니 어둠 속에서도 녀석의 모습이 엉망진창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옷은 너덜거리고, 드러난 몸은 상처와 멍과 핏자국으로 얼룩졌다. 들끓던 기운이 한풀 꺾여 가라앉자 그 흐름도 위험할 정도로 불안정했다.

얼굴도 부어오르거나 멍들어, 이마에서부터 한쪽 뺨으로 푸른 얼룩이 몽고반점처럼 번져 있었다. 예전과 같은 건 번득이며 나를 노려보는 눈빛 정도인가. 이 모양을 하고서도 기세는 여전하네.

“효정이가…”

기완이 중얼거리다가 갈라진 입술을 꽉 물었다. 인상을 쓰자 굵은 눈썹 사이로 깊은 주름이 파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통 몰라서, 일단 수상한 녀석을 하나 발견했는데 거기부터 뒤져볼까 하던 중이었지.”

남자가 사라진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완이 내가 가리킨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속에서 그의 눈이 푸르스름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한 번 이겨본 적 있는 상대이며, 지금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게 만드는 눈이다.

‘과연 호랑이라는 건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피는, 마주한 자로 하여금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백수의 왕, 산의 주인이라 불리는 호랑이의 권위였다.

“저 안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포기해라.”

건물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기완이 말했다.

“아무리 너라도…거기에 평소의 내가 동행한다고 해도 장담할 수 없다. 하물며 지금의 나는…”

말끝을 흐린 그가 으득 이를 악물었다. 견딜 수 없이 분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뭐야. 기완의 말은…

“그럼 저 안에 안효정이 있다는 거야?”

내 질문에 그가 한 번 더 움찔 떨었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에 분노와 수치가 뒤섞여 흘렀다.

“나를 빼내려고, 오늘 아침에 왔다가 내 대신 미끼가 되어 잡혔다.”

백은호는 기완을 자존심 강한 남자라고 말했었다. 그런 그로서는 죽기보다 하기 힘든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완은 마치 그 힘든 말로 자신을 상처 입히려는 것처럼 또박또박 내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걱정 말라고, 도와주러 올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거짓말처럼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너일 줄이야…라고 중얼거린 건 못 들은 걸로 해주마. 뭐 꼭 안효정이 사기당한 것처럼 말하는데, 나도 준비를 하고 왔거든요?

“백은호가 곧 뒤따라 올 거야. 셋이면 되지 않겠어? 아니 환자는 빠지고, 나와 백은호면 충분하지 싶은데.”

내 말에 기완이 화난 것도 안심한 것도 아닌, 한심한 것을 보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다들 나만 보면 저 표정이야! 내 얼굴에 누가 “나를 한심하게 여겨주세요.”같은 낙서라도 해놨어?

“그 여우는 이곳에 못 온다.”

기완이 딱 잘라 말했다. 무슨 소리야?

“태령 윤문을 둘러싼 결계를 부수지 않는 한 허락받지 않은 요괴가 산문을 넘어 들어올 수는 없다. 본래 절이었던 이곳에 자연스럽게 생긴 결계에다 도술을 더해 만든 것이다. 쉽게 뚫을 수도 없거니와, 결계에 이상이 생기면 윤문의 도사들이 모두 알아차릴 거다. 백은호가 그런 것도 가르쳐주지 않던가?”

어…그런 거였어? 그래서 백은호는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던 걸까?

큰일 났다. 백은호가 못 들어온다면…이제 어쩌지? 아니 잠깐, 염목도의 별장에서 나는 죽어가던 사람들을 감쪽같이 원상태로 복구해 버렸잖아. 그 능력이라면 기완도 본래의 상태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둘이서라면 좀 힘들어도 어떻게 될지 몰라.

그런데 막상 기완을 치료하려니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고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이 안 난다기보다, 그때는 굳이 어떻게 할 것도 없이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쉽게 치료해버린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가엾게 느낀 순간 힘이 저절로 끌려 나왔달까.

그럼 이번에도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했으나,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는 기완을 보자 고쳐줄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마음을 먹을 수가 없어.

“저, 어쨌든 도와주러 왔는데 함께 힘을 모아서…”

동료애가 생기면 좀 낫지 않을까 하고 말을 걸어보았으나

“네 한심함까지 함께 모일 것 같으니 사양한다.”

기완이 내 말을 자르며 대꾸했다.

이 자식 하나도 가엾지 않아. 더 아프게 만드는 능력 같은 건 없나?

기완은 나를 노려보았다.

“알아들었으면 왔던 길로 조용히 돌아가라. 네가 도와줄 일 따위는 없다. 네가 나설 자리도 아니고 나선들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깨달았을 터다.”

나지막이 말한 그가 휙 돌아서서 나무 사이로 천천히 걸어갔다. 산을 오르는 방향으로 보건대 내게 애초에 가려고 했던 곳, 의문의 남자가 들어간 건물을 뒤쪽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그 자리로 갈 셈인 것 같았다.

경내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고 건물에서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한 눈에 감시할 수 있는 자리란 말이지. 거기에서 버티다가 아마도 모두 잠들 시각에 침입을 시도해볼 모양이다. 그렇다면 거기까지는 내 생각과 같은데 저 엉망진창인 몸으로 제대로 움직일 수나 있을까?

지금도 억지로 옮기는 발은 바닥을 밟을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렸고, 움직일 때마다 치미는 고통을 참으려고 숨을 참는 기색이 뻔했다. 괜찮은 척하면서 느릿느릿 걸어봐야 다 티 난다고. 무엇보다 몸 안에서 흐르는 기운이 사지에 제대로 뻗어가지 못하는 것이나 가늘어졌다 뭉쳤다 하는 것이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걸어가던 기완이 나무에 손을 짚었다. 이를 뿌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무릎이 덜덜 떠는 것을 봐서는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무를 짚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이 휘어지며 손톱이 나무껍질을 긁었다. 발을 떼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된 자신에게 화내고 있었다. 아니면 나를 공격하느라 힘을 낭비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완은 자신이 상처 낸 나무에 기댄 채로 분노와 수치로 몸을 떨었다. 울고 싶지만 울 수 없는 어린애 같았다.

그래서 조금 가여워졌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서 늘어뜨리고 있는 한 팔을 잡아 어깨에 걸쳤다. 기완이 반항하고 싶은 듯 움찔거렸지만 몸에 힘이 없었다. 나보다 커서 팔이 자연스럽게 어깨에 걸쳐지는 게 좀 짜증나네. 하지만 기왕 가엾게 여기기로 했으니, 짜증내지 않고 나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내 안 어디에 있었는지 도무지 모를 기운이 그에게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휘몰아치는 것처럼 뿜어져서 그를 뒤덮고 스며들어, 상처를 아물게 하고 비틀어진 것을 바로 고치고 텅 빈 것을 채웠다. 나란히 걷는 그의 몸 안에서 처음 만난 그 날과 같이 두렵게 강한 기운이 고여 휘도는 것을 느꼈다.

기완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창백해질 정도로 놀란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너는 도대체 무슨…너는, 도대체 뭐냐?”

그가 약간 떠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해명도령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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