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운(1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나를 향해 몰아치는 윤병완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그의 힘은 강했다. 목심처럼 잡스러운 도술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의 의지가 이끄는 대로 기운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바위처럼 단단해지기도 했다. 그것이 세기 귀찮을 정도로 빠르고 어지럽게 공격해왔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점점 뒤로 물러났다. 윤병완의 공격은 점차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내 주변의 바닥은 할퀸 것 같은 자국으로 난잡해졌고 이미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또다시 부서지고 날아갔다.
땅거죽 위로 끌어올린 지하실도 마찬가지였다. 두꺼운 벽이 부서지면서 내부가 드러났다. 바닥에 펼쳐 놓은 광경을 어둠 속에서도 알아보고 멀리 있던 도사들 사이로 웅성임이 퍼졌다.
윤병완은 점점 조급해 하고 있었다. 그의 공격은 내게 확실히 충격을 가했지만 그 충격은 쌓이기도 전에 도로 회복되었다. 베고 베어도 다시 고이는 물 위로 칼을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점점 부서지고 있는 지하실은 다르겠지. 그의 차가운 기운이 벽을 두드리고 바닥을 갈라지게 하며 점점 아이들이 갇힌 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 아이들은 뛰어나올 터다. 본능만 남은 것 같은 그들이 밖으로 나와 이목천왕의 준엄한 눈앞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할까?
아니면 본능만 남은 저 아이들을 말 그대로 요괴도 인간도 아닌 그냥 짐승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부서지는 지하실을 바라보며 나는 혼란한 머릿속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때 웅성이던 것이 잠시 멎었다가 다시 한 번 물결처럼 일어났다. 사람들이 당황하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윤병완이나 나보다도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하는 일이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지하실에서 눈을 뗐고 윤병완조차도 우뚝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본 방향에서부터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스승님! 결계가…”
아직 우리들 가까이 있던 두 명 중 여도사가 외쳤다. 그녀의 말이 아니어도 이미 다들 알고 있었다. 이곳 태령 윤문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결계가 남쪽으로부터 크게 흔들리며 찢어지고 있었다.
쿵! 쿵! 바깥에서부터 뭔가 부딪쳐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마다 보이지 않는 베일처럼 이 땅 위를 덮고 있던 힘의 장막이 번득였다. 부수려는 쪽과 막으려는 쪽, 양쪽의 힘이 부딪치며 땅과 하늘을 울렸다.
쿵! 쿵!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땅거죽에 진동했다. 아니 부딪치는 소리 이상이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소리가 거기에 섞여 들려왔다. 우는 것도 같고, 고함치는 것도 같고, 괴로이 울부짖는 것도 같은 소리가.
그리고 그 소리가 들려오면서 지하실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갑자기 멈췄다.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가. 모르면서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쿵쿵 두드리는 소리와 괴로운 울음소리에 내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이 안에 함께 있는 심장이 요동했다. 두근. 두근.
이제 더는 들을 수 없는 어린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당신이 이름을 줘서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고 내가 당신의 손을 잡고 걸으니, 이 인연은 하늘일지라도 끊을 수 없어요.]
우리는 서로를 생성하고 자라게 하고 죽였다가 되살린다. 그래서 이목천왕조차도 그녀를 내게서 데려갈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하늘도 자를 수 없는 또 다른 인연의 끈들이 결계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하나 둘이 아니다.
윤병완이 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목에 핏대가 서고 침을 튀기며 고래고래 외쳤으나 그 소리는 짐승의 것에 가까웠다. 발악하는 것 같았다. 그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햇빛처럼 따스하게 반짝이는 고운 실들이 허공에 길게 늘어져서 이쪽으로 날아왔다. 검푸른 하늘에 수를 놓는 것처럼 보였다. 실은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고 윤병완의 노한 얼굴과 나를 지나 금이 가고 부서지는 지하실로 곧장 날아갔다. 실들이 하나하나 제 짝을 찾고 있었다.
쩌어엉 - !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결계가 부서졌다. 개방된 공간 안으로 결계 때문에 밀려나 있던 온 산의 기운이 확 쏟아졌다. 한 바탕 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무 냄새가, 풀벌레 소리, 밤새 소리, 안개가 섞인 차가운 밤공기가, 달콤한 흙냄새가 일시에 돌아왔다. 이제야 이곳은 정말로,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이 아닌 한밤중의 산사가 되었다.
서늘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공기가 가득한 이곳으로, 계단 밑에서부터 여러 명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스물에 가까운 수다. 인간과 요괴가 섞여 있었다.
몇 명이 막을 셈으로 달려갔다가 가장 앞에 있는 요괴의 기세에 눌려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물러선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는 눈으로 다른 자들을 돌아보았으나 그들도 윤병완과 그 뒤에 있는 두 명의 눈치를 살피더니 꼼짝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세 명 중 가장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은 자는 여도사 옆의 젊은이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살피고는, 팔짱을 낀 채 방관하는 젊은이의 태도를 따라하듯 뒷짐을 지거나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윤병완도 알아차렸는지 충혈된 눈이 깨진 결계와 침입자들에서 젊은이에게로 옮겨갔다.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이것은 스승님의 짐이라, 제자가 도울 길이 없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고개를 조금 숙이는 것으로 윤병완의 시선을 슬쩍 비껴내며 젊은이가 말했다. 그리고는 뒷걸음으로 이곳을 물러났다. 그와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그를 따라 떠나갔다.
여도사가 당황한 얼굴로 스승과 떠나는 젊은이를 번갈아 보다가 주춤주춤 사람들을 따라갔다.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보자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도 낭패한 얼굴로 이곳을 벗어났다. 그것을 보는 윤병완의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진작부터 그를 싫어하고 있었구나. 모두 떠나고 윤병완은 놀이터에 홀로 남겨졌다. 자신이 그려놓은 선 안에 혼자 있었다.
결계를 깨뜨리고 들어온 자들은 떠나는 이들에게도 윤병완에게도 내게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쪽으로 곧장 달려온 그들이 향한 곳은 지하실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지나 뛰어갔다. 어둠 속에 산길을 걸어 지친 남자가, 사슴처럼 말간 눈과 얼룩진 털이 난 여자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남자가, 뾰족한 뿔과 딱딱한 발굽을 가지고 깡충깡충 뛰어가는 이가, 나뭇가지 같은 뿔이 난 이가, 곰처럼 크고 털이 난 남자에게 부축 받아 오는 노인이…
인간과 요괴가 뒤섞이고 누구 하나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이들의 무리에 단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아름답게 반짝이는 인연의 실을 따라 자신과 이어진 아이를 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하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비명처럼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은 짐승과 같이 날뛰었다가 자신을 붙잡는 팔에 안겼다. 본능이 가르치는 대로, 아이들은 자신을 속박하는 팔 안에서 으르렁거리며 쉬었다. 안도하였다. 그 팔은 자신을 낳은 자의 팔이며, 기른 자의 팔이며, 같은 냄새와 같은 피를 가진 자의 팔이므로.
단 세 명만이 지하실로 가지 않고 내 앞에 남아있었다. 그 중 하나는 말할 것 없이 백은호여서 나는 웃음이 났다. 여우요괴와 내 사이에도 있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지고, 서로 엮이며, 그래서 종국에는 하늘조차도 끊을 수 없는 가족의 인연이.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던 백은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뒤에서 상당히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기완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저 자식…. 일단 좀 주먹으로 대화를 하고 싶은데 옆에 바짝 붙어있는 여자를 보자 자연스러운 관대함이 솟아났다. 아무래도 호랑이 두 마리를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여자는 어느 모로 봐도 호랑이가 사람의 옷을 입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동화에서 호랑이가 엄마를 흉내 낸 모습 같은.
“기완님의 어머니인 인화님입니다.”
백은호가 알려줬다. 아, 그 호녀라던.
“어떻게 된 거야?”
백은호가 나에게 하고 싶었을 질문을 내가 가로채어 먼저 했다. 궁금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가족이 모두 여기에서 나타나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다.
“저들을 모아서 데려온 분은 인화님입니다. 전부터 교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태령 윤문에게 아이들을 잃은 사람은 많아요. 나 역시 같은 처지라 서로 도우며 지내던 거지요. 여기 온 이들은 아이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믿고 태령 가까운 곳에 머물러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빨리 모일 수 있었지요.”
여자치고는 굵은 목소리로 인화가 말했다. 기완을 힐끗 보자 커다란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엄마 뒤에 서 있다. 쟤가 뭐라고 했더라, 어머니는 나 같은 반쪼가리 아들에게 관심도 없을 테고 어쩌고 하지 않았던가? 응?
“도령이 멋대로 여기 뛰어드는 바람에 제가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도움을 주신 분도 인화님입니다. 인화님은 수년 전부터 태백산에 머물며 산신께 공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태령 윤문에 잡혀 있다고 생각하셨거든요.”
백은호가 다시 말하자 나와 기완은 동시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미안해. 잘못했어요. 근데 기완이가 조금 더 잘못한 것 같아.
“저희야말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도령과 백은호님이 아니었다면…”
인화가 말을 잇지 못하며 지하실로 눈길을 보냈다. 제 아이를 되찾은 이들이 하나씩 거기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목천왕이 내려다보는 맑은 하늘 아래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별빛 아래를 걸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무수히 반짝이는 별무리 속에서 큰 형의 시선을 느꼈다. 별만큼이나 많은 눈으로 숨김없이 들여다보는 그이니까, 나는 처음부터 그를 속이려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쩌면 원강의 부적 뒤에 숨어있는 지금도, 그는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바짝 여윈 몸으로 가족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보기에도 가여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가족과 함께 행복하렴. 무서운 일은 잊어버리고. 마음속으로 말하며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근 두근, 하고 내 것이 아닌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기억의 조각이 혈관을 타고 와서 유리심장에 붙었다. 잘그락.
공포, 고통, 슬픔, 고독, 가슴 아픈 기억들이 본래 내 것인 것처럼 녹아들었다. 심장이 저릿저릿하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이 파르르 떨었다. 그런데 손 아래에서 잠든 아이의 얼굴이 어찌나 평화롭고 사랑스럽던지 심장을 죄는 고통을 나는 금세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다른 아이의 머리를 똑같이 쓰다듬었다.
잘그락 잘그락. 기억의 조각들이 내게 달라붙었다. 잊기를 원하는, 고통만을 주는, 원하지 않는 일들이 기억의 혈관을 타고 와서 유리 심장에 스며들었다. 아이들의 기억만큼 커진 심장이 가슴 속을 꽉 채웠다.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렸다.
“도령…”
다가와서 나를 내려다보는 백은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뭐 저렇게 높은 데서 내려다보지.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쓰러지고 있는 거구나. 허공에 뜬 것 같은 몸이 덜컥 잡히는 것을 느꼈지만 내 모든 감각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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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운(12)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백은호의 차에 실린 채로 수리점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차창 밖이 푸르스름하니 밝은 걸 보니 새벽인 모양이었다. 뒷좌석에 드러누워 창밖의 풍경을 보다가 차가 멈추자 눈을 감고 잠든체했다.
“공주님처럼 안아서 모시고 가기를 바라는 거라면 한 번쯤은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백은호의 목소리에 소름이 오싹 돋으며 눈이 절로 뜨였다. 됐거든요?!
막상 일어나 보니 백은호는 앞좌석에 태연히 앉아 백미러로 도도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차에서 내릴 생각도 않고 내가 물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머리 한 쪽이 멍했다. 가슴이 약간 욱신거리기도 했다.
“앞뒤 재지도 않고 힘을 남발하고 무리하게 기억을 흡수해서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는 일을 막으려고 생각 없는 도령의 뇌 대신 몸이 자신을 보호한 거겠지요. 일종의 방어기제입니다.”
무리해서 기절했다는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냐?
“윤문에서는? 다들 안전하게 돌아갔어?”
기절한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장 궁금했다. 아이들은 이제 윤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걸까. 윤병완은 어떻게 되었을까. 안효정은? 내가 돌아온 걸 보면 대충 마무리는 지어진 것 같은데…
“아이들은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윤문에서는 방해하지 않더군요. 묘율이 영리한 선택을 한 것이지요. 이 일을 키울수록 불리한 쪽은 윤문이니까요.”
묘율이 누구지?
“기억하실 겁니다. 명혜의 옆에 있던 젊은 남자입니다. 그녀와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던 중 몇 달 전 명혜가 수호의 일로 산신에게 쫓겨난 다음 그 세가 현저하게 강해졌지요. 지금은 태령을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백은호가 약간 뻐기듯이 말했다. 그 일을 한 것은 자신이니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여도사의 이름은 명혜였구나. 그리고 묘율.
“뒤탈은 없을까?”
“이번 일은 산신제를 통해 정식으로 고해질 예정이라 윤문에서도 더는 문제 삼지 못할 겁니다. 윤문의 본가는 태백산의 줄기에 있습니다. 태백 산신의 노여움을 먼저 가라앉혀야 할 테니 당분간은 정신없기도 하겠지요.”
“윤병완은 어떻게 됐지?”
“제자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을 돌린 마당입니다. 그 자신은 태백 산신의 노여움을 입었고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윤문의 도사들이 모여서 곧 거취가 결정되겠지만 계속 가주의 직을 수행할 수 있을 리는 없습니다. 자업자득이겠지요.”
그래? 그렇더라도 그 남자는 잊어버려도 되는 상대가 아니다.
아…하지만 곧 12월.
“그렇더라도 윤문의 오래 묵은 도사들은 아직 윤병완을 따르고 있으며, 묘율이라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도령은 공연히 돌부리만 하나 늘어난 셈입니다.”
백은호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안효정은? 그리고 모란이라는 아이는 어떻게 되었어?”
내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백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뻔한 수작에 넘어가준다.
“그녀는 기완과 인화님이 데려갔습니다. 묘란이 죽은 뒤로 그녀에게 가족은 이제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그녀의 마지막 가족을 죽인 장본인이면서 백은호는 조금도 가책을 받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이럴 때 보면 요괴는 요괴 같고.
“기완은 이번 기회에 윤문과 인연을 끊을 모양입니다. 인화님은 차제에 아들을 더욱 엄하게 가르치실 작정인 듯하니 걱정 없겠지요.”
확실히 그분은 말 그대로 호랑이 엄마잖아. 호랑이가 아들을 엄하게 키운다는 건 어떤 걸까. 나는 기완이가 조금 불쌍해졌다.
“그리고 규한이라는 자는…”
말하는 백은호의 얼굴에 어쩐지 심술궂은 표정이 번졌다.
“도령도 아는 사람입니다. 확실히 사람이지요. 인간이 된 김에 새 이름을 지었는데 아내의 이름 한 글자를 넣었다고 합니다. 문규한이란 이름입니다.”
전에 인간이 아니었는데 인간이 되었고 아내의 이름에 ‘규’자가 들어있다면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규한이 환이었어? 모란은 환과 함께 있는 거야? 어떻게?”
“재미있는 일이지요. 윤문에서는 꽤 오랫동안 환을 괴롭히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새끼여우는 윤문에서부터 환에게 이어지는 이매망량의 길을 따라 갔다고 합니다. 영리한 건지 대담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낸 셈입니다. 환과 규희가 모란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아…그렇구나. 모란도 무사했어. 아이들은 모두 돌아가고.
“궁금한 것이 아직 남아있습니까?”
백은호가 쌀쌀하게 물었다. 백미러로 힐끗 보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문의 결계를 부순 건 너였어?”
“도움을 받았지요.”
도움을 받았다는데 저 백은호라서 전혀 겸손하게 들리지 않았다. 도움을 받았어도 결국 내가 한 일이라는 표정이다.
“잘했어.”
비싸게 세팅했을 것 같은 머리카락을 뭉개듯 쓰다듬으며 말하자 백은호가 백미러 안에서 눈썹을 곤두세웠다.
“그런 칭찬은 도령이 기르는 쓸모없는 강아지에게나 하십시오.”
그 쓸모없는 강아지가 무서워서 달님이 있을 때는 수리점에 오지도 않으면서.
어쨌든 백은호가 더 화내기 전에 나는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백은호는 차문이 닫히자마자 엑셀을 밟으며 떠났다.
나는 환한 햇빛을 받으며 수리점으로 돌아갔다. 길가의 이팝나무에 깃들어 있는 목신들이 길쭉한 몸을 조금 숙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말을 걸지도 인사를 건네지도 않지만 쓱 보고는 모르는 체하는 눈길이 어쩐지 정답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말인데, 저번에 목신들이 떡과 술 정도로 도움을 준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밑지는 장사인 것 같아. 내가 떡과 술을 받고 일을 해보니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든다. 서낭신이라든가 산신도 그렇고, 가택신도. 받는 것은 고작 음식상 정도. 그런 걸 받으며 참 정성스럽게도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거든.
생각에 잠긴 내 위에서 목신들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시작했다.
“이상허다. 어째 빗자루 소리가 멈췄네.”
“그렇군. 그렇군. 수리점의 예쁜 각시가 빗자루질을 하다 말고 아까부터 가만히 서 있잖겠어? 왜 그런지 아나?”
“나야 알지. 자네는 아나?”
“나도 알지. 모르는 건 도령뿐일걸.”
나도 알거든요. 이 오지랖 넓은 양반들아.
또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려던 생각을 접어 넣고, 나는 수리점 문을 열었다. 불이 켜져 환한 작업장에서 유하가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쓰는 체하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녀왔어.”
내 인사에 유하는 예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요.”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에필로그 >
수리점 문에 ‘휴가중’ 팻말을 걸어놓고 그로부터 열흘 동안 우리는 말 그대로 휴가를 보냈다. 태령으로 가기 전 약속한 소풍도 가고, 같이 장을 보거나 요리를 하거나, 아무 일도 안하고 빈둥거리거나, 기차를 타고 며칠씩 여행을 가거나 하며 남은 시간을 함께 썼다.
백은호의 골동품점에 갑자기 찾아가거나 박선생을 불러내서 등산을 하기도 했고 수호 남매와 함께 노앵설이 있는 보육원으로 놀러가기도 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유하와 함께, 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있었다. 그러다 남겨진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우리는 노는 것도 먹는 것도 그만 두고 내 방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서로에게 기대었다.
[도령. 도령. 다섯째가 왔소. 다섯째가 왔소.]
땅 밑으로부터 울려오는 목소리는 신목의 것이다.
“도령, 다섯째가 왔소. 바로 여기에 와 있소.”
살며시 말하고 사라지는 목소리는 용신의 것이었다.
“다섯째가 왔다네. 바로 여기에 와 있다네.”
“어이쿠, 고개를 숙이고 있게나. 우리를 볼라.”
겁먹은 체하며 큰 소리로 대화하는 목소리는 목신들.
[다섯째가 왔어. 다섯째가 왔어.]
[다섯째다. 이를 어째.]
[쉿. 쉿.]
새들이 창밖으로 날아다니며 목신의 대화를 되풀이 한다.
우리는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것을 보았다.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자정이 되면 이제 음력으로 시월 스무이틀이다.
김해명. 이십오세. 시월 스무이틀.
인간의 수명이 기록된 염라전 명부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음력 10월 22일에 나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죽어서 저승차사와 함께 다섯째 하늘로 가야 했다. 거기는 죽은 자의 혼이 모여드는 곳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판결 받는 곳이었고 모든 기억을 버린 다음 새로이 태어나는 곳이었다.
마침내 차사가 왔을 때, 나는 그와 함께 가는 것을 거부했다. 심판이나 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유하를 잊어버리는 것만은, 절대로 싫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나를 그녀가 기다려야 하는 것도 싫었고 오랜 후에 찾아낸 내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싫었다. 나는 죽음 같은 잠으로 차사를 속였으며 저승사자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이번에는 차사가 아닌 다섯째 하늘의 주인, 양이천왕이 직접 나를 데리러 왔다.
셋째 형이며 열두 남매 가운데 다섯째. 그는 잔혹한 심판관이자 괴팍한 수집가였다. 그에게는 죽은 자를 다스리는 권능이 있었다. 그의 명부에 이름이 적혀 있다면 누구나 잠재적인 그의 백성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다섯째가 왔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잠들어 그의 눈을 속였다. 그는 이미 죽은 나를 명부로 데려갈 수 없었지만 대신 김해명의 기억을 가져갔다. 죽은 자로부터 기억을 취하는 것은 그의 권리였으므로.
그래서 죽음과 같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후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을 계속해 왔다.
그녀를 잃지 않으려고 한 일이 그녀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녀를 잊지 않으려고 한 일이 그녀를 잊게 한다. 나는 이 우둔한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벗어나는 길을 알지만 거부하고 있다.
조금만 더…라고.
그녀가 용납해주는 동안 조금만 더…
“어두워지네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유하가 문득 말했다. 숨소리가 고요해서 잠들었나 생각했지만 창밖을 보고 있던 모양이다.
“한 번 더, 다녀와도 돼?”
매년 한 번씩, 열두 번쯤 했을 내 질문에 유하가 나직이 웃었다.
“다녀오세요.”
그녀가 허락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후에야 졸음이 밀려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잘그락 잘그락 하고, 나를 벗어난 유리조각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져 쌓였다. 기억이 사라져간다. 죽은 자는 기억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기억의 조각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나는 말했다.
“내년에 내가 다시 깨어나면, 그때는 내게 말해줘. 내가 무슨 바보짓을 했는지. 그래서 너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감추지 말고 말해버려. 말하고 나서 실컷 화내.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말해줘. 말 안 해줘도 금방 알게 되겠지만. 그리고…”
소용없는 부탁을 한다. 그녀는 절대로 말 안 할 테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평할 터다.
“그리고…너 말이야. 내가 처음 깨어났을 때 나를 보면 조금이라도 웃어줘. 넌 정말 예쁘니까 네가 웃는 걸 보면 분명히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눈에 반해버릴 걸. 그러면…”
너를 의심하거나 멀리 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또…
할 말이 많은데, 잠이 와서…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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