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광충(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머릿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잠에서 깼다. 몸과 마음이 반쯤 꿈속에 걸쳐진 듯 멍했지만 그 와중에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뭔지 몰라도 가슴 속에 무겁게 얹혔던 것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무엇 하나 거치적거리는 데 없이 편안했다. 아주 푹 잘 잤나 보네. 이불 속에서 기지개를 켜던 나는 정말로 내 몸에 뭐 하나 거치적거리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불 속의 나는 속옷 하나 없이 발가벗고 있었다.
잠자리에서는 반드시 누드여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고 듣기는 했다만 내가 그런 타입이었나? 멍하니 생각하다 문득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내가 어떤 타입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내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모르겠다. 이름이 뭔지 어디에서 누구와 살고 있는지 여기는 어디이며 어째서 자신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는지. 그밖에도 수많은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일단 한 가지만은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인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돌아보았다. 침대가 놓인 곳은 두 평 남짓한 공간이었고 천장이 낮았다. 침대 위에서 일어서면 머리가 닿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침대 발치에 계단이 있고 그 아래로 훨씬 넓은 공간이 있었다.
이곳은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복층구조인 것이다. 위층에는 침대와 작은 탁자가 하나 있을 뿐이고 맞은편 벽에도 여기처럼 두 평 남짓한 공간이 만들어졌지만 거기는 텅 비어 있었다.
벽 한 면은 전체가 유리창인지, 천장에서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게 드리워진 롤스크린을 뚫고 햇빛이 들어와 방안을 흐릿하게 밝혔다. 나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일층에는 한쪽 구석에 작은 주방, 그 옆에 책상 하나. 반대쪽에 소파 하나와 티브이, 그리고 끝이었다.
이 황량한 공간을 모두 확인하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람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공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고, 실제로 주방을 뒤져보니 컵이 두 개 있을 뿐이다.
그럼 이런 곳에서 누드로 잠들어 있던 나는 도대체 뭐람. 드레스룸을 뒤져 보았으나 옷장도 텅 비었다. 양말 한 켤레도 없었다. 아니, 옷이 한 벌 있기는 했다. 옷장이 아니라 식탁 위에.
올리브색 면직인데 접힌 모양을 보니 바지 같다. 바지라도 있으니 다행이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집어 들었으나, 입으려고 펴는 순간 바지가 두 벌 아니, 두 조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지는 세로로 이등분 되어 있었다. 다리 사이를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놓은 것이다.
뭐냐, 이 흉악한 몰골의 바지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보는데 식탁 위에서 뭔가 작은 것이 눈에 띄었다. 바지가 놓인 자리 옆이었다. 생긴 모양은 확실히 바늘이다. 그런데 바늘귀 옆에 조그마한 연두색 싹이 돋아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바늘의 재질은 나무다.
싹 난 나뭇가지를 깎아 바늘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정성스러운 바보짓은 또 뭐지. 그리고 바늘이 있으면 실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실은 어디에 있지? 물론 실이 있어도 나무 바늘로 바느질을 할 수 있을 리 없다는 이성의 충고를 받고 실제로 찾아보지는 않았다.
이거 어쩐다.
머리도 몸도 방도 텅 비었다. 총체적 난국이다.
그러나 잠깐 망연자실한 순간이 지나고 나자 텅 빈 머리로 조금씩 정보가 들어왔다.
마치 이삿짐 옮기기 전의 새집 같이 텅 빈 곳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오래 거주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어도 아래층에 내려온 뒤 계단 아래에 감춰진 드레스룸을 쉽게 찾아낸 점도 그렇고 문을 열자마자 어두컴컴한 곳에서 무의식적으로 스위치가 있는 곳에 손을 가져갔던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가 내 집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집이 비어있는 것은, 정말 이사라도 할 생각으로 짐을 모두 뺐다든가 리모델링을 할 계획이었다든가 하는 이유를 댈 수도 있다. 뭐 내가 잠든 사이에 속옷 한 벌도 아쉬운 도둑들이 다녀간 걸 수도 있고 보증 잘못 서서 볼펜 하나 안 남기고 경매로 넘어가 버린 걸 수도 있는데 그런 비상식적이고 암울한 가정은 일단 하지 말자.
하나뿐인 침대가 싱글사이즈인 것을 보면 가족은 없는 것 같고, 애초에 복층 원룸이란 신혼부부 아니면 혼자 살기 좋은 구조인데 벽에는 사진이 걸렸던 못 자국 하나 없고 벽지색이나 무늬 없이 칙칙한 롤스크린이나 태초의 모습에서 하나도 바뀐 게 없는 것 같은 방안 어디를 봐도 신혼과는 백 년쯤 떨어진 황폐한 광경이다.
집안 물건뿐 아니라 기억까지 털린 암담한 상황에 당장 말이라도 걸 누구 하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마음이 어두워졌다. 아니, 어두운 건 방안이다. 저런 볼품없는 롤스크린으로 벽지 바르듯 유리창 위를 발라놓으니 침침한데다 방안 분위기까지 썰렁해지잖아.
창으로 다가가 롤스크린의 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발밑에 노란 햇빛이 번진다 싶은 그 순간 나는 유리창 반대편 벽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뭐? 왜 여기 있는 거야? 언제 여기까지 와버렸지?
창가에서 맞은편 벽까지는 5미터 정도. 뛰었다고 해도 네 걸음 이상은 디뎠을 순간에 대한 기억이 없다. 롤스크린 줄이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내 손에서 놓인 지 얼마 안 된다는 증거다.
그에 못지않게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가자 내 발은 저절로 바닥에 붙었다. 나도 모르게 노려보고 있는 것은 창밑으로 하얗게 그려진 네모난 빛이었다. 가까이 가면 안 돼.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속삭였다. 저 빛에 닿으면 안 돼.
닿는 순간 두려운 일이 생기고 만다는 것을 나는 확신했다.
빛에 접촉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없다. 설마 내가 뱀파이어라서 몸이 불타버린다든가 하지는 않겠지만 심각한 질병이나 알러지일 가능성은 있었다. 나는 정체모를 두려움의 경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름도 기억 못하는 때에조차 남아있는 정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창밖을 보기는 틀렸으니 남은 선택지는 출입문뿐이다. 하지만 공연음란죄로 잡혀갈 것 같은 이 꼴로 밖에 나갈 수는 없잖아. 입을 거라고는 조각나서 중요한 부위는 전혀 가려지지 않는 바지 한 벌뿐. 침대시트를 벗겨올까 생각했지만 그걸 토가처럼 두르고 나가도 미친놈 취급 받기는 매한가지일 것 같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설마 내가 한 건 아니겠지? 누군가 나를 곤경에 빠뜨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입지도 못하는 옷에 쓸 수도 없는 바늘을 두고.
나는 아직까지 손에 들고 있던 나무 바늘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라는 거지? 나는 혹시 어떤 정신병자에게 잡혀서 탈출 게임 같은 거라도 하게 된 게 아닐까. 이 옷과 바늘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바늘이라는 건 실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물건이잖아. 그냥 바늘만으로는…
나는 쓸모없는 바늘을 조각난 옷에 쿡 꽂았다. 역시 침대 시트라도 두르는 편이 낫겠다.
다시 계단으로 가려고 했으나, 시야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옷에서 뭔가 일어난 것이 보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을 의심하고 싶은 광경이 펼쳐졌다.
바늘이 움직이고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잡혀 옷을 꿰매는 것처럼 바늘이 스스로 천을 뚫고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반복한다. 실도 없이. 빈 바늘이 조각난 천 가장자리를 오가는데 더 믿을 수 없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가 말끔히 고쳐지고 있었다.
꿰맨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본래부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실오라기 하나 일어나지 않은 깨끗한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아주 잠깐 사이에, 바늘은 두 조각 난 바지를 재빨리 꿰매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원래대로 만들어 놓았다.
바지가 수선되고 나자 바늘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지만 눈앞에는 분명 정상적인 모습을 한 바지가 남아있었다.
자, 둘 중 하나다. 방금 내가 혼자서 실도 없이 옷을 수선하는 마법의 바늘을 봤거나, 본래부터 아무 탈 없던 옷이 조각 나 있다가 고쳐진 환상을 봤거나.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해야겠지. 그런데 내가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환상을 봤을 리가 없잖아.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빠져서 좀 허우적거릴 참이었으나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소리였다. 탁탁탁 딛는 소리가 가볍고 경쾌했다. 발소리에 섞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환상이고 딜레마고 바지부터 후다닥 입게 되었다.
“명! 명! 명이 일어났어.”
멀리서 작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말에 대답하는 맑고 높은 목소리가 문 바로 밖에서 크게 울렸다. 목소리만으로는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의 말에 누군가가 다시 뭐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꽤 멀리에서 말을 거는지, 게다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어 내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왜? 왜? 명하고 놀 거야.”
문 앞에서 소년의 투정 부리는 듯한 대꾸가 들려왔다.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가만가만 소년에게 말한다. 잠시 듣고 있던 소년이 콧소리를 섞어 웅얼거리더니 이내 타박타박 문에서 떠나갔다.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누구였을까. 옆집에 사는 사람들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렸다.
아까 잠깐이지만 정신병자의 탈출 게임 어쩌고 하는 가정을 했는데 그건 취소하겠다. 문은 쉽게 열렸다. 약간의 공간을 두고 정면과 오른편은 하얀 벽이었다. 정면의 벽에 세로로 길쭉한 창이 하나 있지만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밖은 보이지 않는다. 왼쪽에는 계단이 있었다. 위로도 아래로도 이어져 있다.
내려가는 계단에도 유리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뿌옇게 번져있는 걸 보니 아래가 지하는 아닌 모양이다. 내가 있는 곳은 최소 2층, 그렇다면 이 건물은 최소 3층. 올라가볼까 아니면 내려갈까 망설이는데 닫히는 문의 손잡이에 뭔가 걸려서 팔락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옷이었다. 검은 도트 무늬의 하얀색 셔츠다. 대충 걸려있지만 깨끗했고 꼼꼼하게 다림질한 흔적이 보였다. 바지 다음은 웃옷. 이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빵조각일까? 하지만 이 웃옷은 잘라진 것도 아니고 멀쩡하니 일단 입는 수밖에.
이걸로 대충 미친놈 취급은 받지 않을 겉모습이 되었다. 아직 맨발이지만 또 모르지. 아래로 내려가면 신발도 나와 줄지.
반쯤 농담처럼 생각했던 거지만 계단을 따라 내려간 나는 정말로 신발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쌍의 슬리퍼였다. 다만 슬리퍼 한 쪽은 엉덩이 밑에 깔고 다른 한 쪽은 입에 물고 뜯는 털복숭이도 한 마리 덤으로 있었다.
“명!”
털복숭이가 나를 보더니 묘한 소리로 짖었다.
“명! 명!”
녀석이 짖어대며 내 주변을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반가워하는 모양을 보니 나와 잘 아는 사이인가. 내 집의 상황으로 봐서 개를 키웠을 것 같지는 않지만…아니. 잠깐. 여기는 또 어디야.
슬리퍼와 강아지 때문에 미처 못 본 아래층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잘못 들어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다세대 주택이라는 게 그렇잖아.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다른 층이 나오거나 아니면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런데 계단 끝에 펼쳐진 곳은 계단도 출입문도 아닌 텅 빈 공간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고. 벽 가장자리를 따라 잡다한 물건들이 놓인 철제 선반이 있고 안쪽의 컴컴한 곳에는 넓은 작업용 선반도 하나, 주변에 낡은 의자가 세 개 있었다. 그뿐이다.
그 외에는 황량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계단 맞은편 벽에 문과 창문이 보였지만 창문은 블라인드로 가려졌고 문은 꼭 닫혀 있었다.
이건 어딘가 이상한 구조잖아. 이 건물이 다세대 주택이라면 계단은 곧장 출입문으로 이어지는 것이 맞았다. 거주인들이 이런 묘한 곳을 지나서 집으로 가고 싶어 할 리도 없고, 애초에 이런 식으로 만들지도 않고.
그럼 뭐지. 이 건물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다시 위로 올라가 건물 안을 샅샅이 뒤져보는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발밑에서 깡충깡충 지치지도 않고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피하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아까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최소한 두 명 이상이 여기에 더 살고 있을 터다. 그 사람들의 집은 3층일까. 혹은 그 이상?
조금 전 내가 문을 열고 나왔던 층을 지나쳐 다시 한 번 계단을 올라갔다. 3층. 역시 문이 하나 있고 다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문손잡이를 슬쩍 돌려봤지만 열리지 않는다. 열렸어도 무단침입을 할 수는 없으니 의미가 없겠지만.
다시 한 번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이번에는 문이, 지금까지와 다른 방향에 만들어져 있었다. 어쩐지 누군가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기보다…
끼익 - 하고, 문이 열렸다. 아직 몇 계단 아래에서, 나는 두꺼운 철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타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텅 빈 세탁 바구니를 든 젊은 여자였다. 나를 보고는 놀라지도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여자의 얼굴이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느꼈지만 잠시였다. 그녀의 입술이 움찔거리다가 천천히 양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봤다. 눈을 가늘게 휘고 입술을 당겨, 여자는 어쩐지 애써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애처로운 인형처럼 보였다.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녀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