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12화 (112/218)

발광충(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김해명이에요. 이 건물의 주인이고 함께 사는 가족은 없어요. 다른 궁금한 것은 식사가 끝나고 물으세요. 요리하는 동안 방해받기 싫어요.”

빈 세탁 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여자가 한 말이었다. 바깥의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로 들은 내용이 절대 담담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숨겨진 여러 가지 정보를 깨달은 순간 내가 궁금해 하던 많은 질문에 그녀가 대답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사실대로 말해주기만 한다면.

생각과 거의 동시에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속삭였다.

- 정말로 그녀를 믿어도 돼?

그것이 질문인지 햇빛을 보았을 때와 같은 강렬한 기억인지 나는 모르겠다. 오래된 상처처럼 피부 속 깊숙이 뼈 가까운 곳에서 욱신거리는 물음이었다.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보류했다.

여자는 나를 데리고 3층으로 가서 잠깐 뭔가를 만들더니 금세 밥상을 내놓았다. 2인용 식탁의 공간이 빠듯할 정도의 상차림이었다. 그녀가 조리하는 동안 질문할 내용을 고르고 있던 나는 음식을 보자 맹렬한 허기를 느끼고 밥을 몇 그릇이나 비워 버렸다. 그리고 막상 배가 부르자, 꽤 열심히 쌓아 놓았던 질문의 탑에서 아무렇게나 하나씩 꺼내 그녀에게 물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그녀는 누구인지, 내게 특별한 질병이 있는지, 여기는 어디며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는? 내 직업은?

수없는 질문과 대답이 오간 결과 내가 가족이나 일가친척은 물론 변변한 친구 하나 없는 비사교적이고 게으른 수리점 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도 그렇고, 그녀의 말로는 내가 석 달 동안 혼수상태로 잠들어 있었다는데 이것만은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것 치고는 온몸이 멀쩡하고 움직이는 데도 아무 불편이 없고 무엇보다 석 달 동안 먹지도 않고 자고 있었을 내게 주사바늘 자국 하나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정황을 조목조목 짚으며 반박해도 그녀는 “어째서 괜찮은지는 저야 모르죠.”라며 무성의하다고 해야 할지 당당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대답을 태연히 했다.

수많은 질문들을 모르는 것 외에는 모두 대답해준 그녀였지만 단 한 가지만 예외였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딴 데를 보더니 다른 질문은 없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댁은 비서 겸 가사도우미라면서요. 이름도 모르는 사이는 아닐 거 아냐. 하지만 그녀는 어쩐지 캐묻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첫인상은 위태로울 정도로 연약해 보이는 미인이었는데 지금은 도도한 고양이 같은 미인이다.

한 시간쯤 지나 내가 질문하다 지쳐서 입을 다물자 이름도 모르는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일거리를 안겼다. 한 달 전부터 맡겨진 물건이 있으니 당장 수리하라는 거였다.

일을 하라고요? 지금?

물론 내 기억상실이 일 년에 한 번 꼴로 생기는 흔해빠진 거라 놀랄 것도 없고 기억이 없을 뿐이지 몸은 멀쩡하니 배려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20대 중반의 몸으로 갓 태어난 것처럼 순백의 기억력을 가진 사람을 노동의 현장에 밀어 넣는 건 무자비한 짓 아냐?

라고 항의하고 싶어도

“유리 등롱은 창고로 들어가면 문 왼쪽의 선반 가운데 칸에 있어요.”

딱 잘라 말하고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기세에 밀려버렸다. 좀 쉬고 싶다거나 내일 하면 안 되냐고 물을 용기도 나지 않는다. 나 고용주 맞아? 비서님이 좀 무서워.

슬금슬금 그녀의 방에서 나가 1층으로 내려가자, 넓고 텅 비고 어두컴컴하니 적막한 작업장이 기다리고 있다. 계단 옆으로 돌아 터벅터벅 걷다 걸음을 멈췄다. 나는 문이 있는 벽 앞에 서있었다. 어째서 이리 왔는지는 모른다.

문을 열자 캄캄한 안쪽에서 곰팡이와 먼지 냄새 같은 것이 담배 냄새에 섞여 풍겨왔다. 어둑한 속에서도 문 너머의 공간에 뭔가 잔뜩 올려진 선반이 줄지어 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고잖아. 나도 모르게 창고 앞까지 걸어온 걸 보면 내가 이 수리점 주인이 맞는 것도 같고. 사실 수리점 주인이라고 말은 들었지만 아직까지 내가 뭔가를 고치거나 기계를 다룬다거나 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켜보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캄캄한 내부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것을 봤다. 문에서 왼쪽이다.

가까이 가보니 빛을 내는 것은 예스러운 모양의 유리 등롱이었다. 구리로 만든 사각육면체의 살 사이에 유리를 끼워 넣고 정자지붕 모양의 갓을 씌워 놓았다. 갓 꼭대기에는 벽이나 손잡이에 걸 수 있도록 고리가 있었다.

거기까지는 일반적인 초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안이다. 보통 등잔을 넣거나 초를 고정하여 빛을 내도록 하는 것이 등롱이지만 이것은 달랐다.

유리 안에는 등잔도 초도 없었다. 대신 뭔지 알 수 없는 작은 것들이 푸르스름하게 빛을 내며 떠돌았다. 얼핏 보면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햇빛을 반사하며 떠도는 먼지 같기도 했다.

유리 등롱 안에서 유유히 날아다니는 작은 불빛들의 수는 많았다. 백 개도 넘을 것 같다. 반딧불보다도 작은 빛의 무리가 이리저리 뭉쳤다 흩어지고 있었다.

뭐지. 반딧불이 말고도 이렇게 빛을 내는 벌레가 있었나? 그런데 등롱 안에 등잔이나 초는 안 넣고 웬 벌레야. 형설지공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실제로 볼 줄이야.

창고에서 나오자 등롱 안을 좀 더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창고 안은 어두워서 상대적으로 빛이 강했지만 작업장은 계단 쪽에서 햇빛이 들어와 아주 어둡지 않다. 작업선반에 등을 내려놓고 들여다보자 아까보다는 덜 밝지만 여전히 푸르스름하니 빛을 내는 작은 것들이 유리 너머에서 나폴나폴 날아다녔다.

아무리 봐도 반딧불이처럼 꽁무니에서 빛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몸 전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등이 한 달 전부터 맡겨졌던 거라고? 반딧불이가 빛을 내며 날아다니는 건 보통 일주일 정도 아냐? 물론 이건 반딧불이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한 달…. 게다가 이렇게 많은 곤충에게 먹이는 어떻게 주는 거야?

그것도 그거지만, 이 등롱은 수리를 위해 맡겨졌다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어디가 고장났다는 거지. 등롱은 겉보기에 멀쩡했고 금 가거나 부서진 곳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름 모를 비서에게 물어보았으나

“손님은 사장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제게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사장님이라면 보기만 해도 아실지 모르니 일단 맡아두겠다고 했지만…”

역시 모르는군요? 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심이 드러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몰라서 미안하네요.

이름 모를 미인 비서가 손님에게 연락을 했고 약속시간은 세 시간 뒤로 잡혔다. 그때까지 할 일 없는 나는 작업 선반에 놓인 등롱과 그 안에서 떠도는 빛무리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볼수록 신기했다.

유유히 허공을 유영하는 작은 빛들은 등롱 안에서 흩어졌다 모였다 하며 우연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하얗게 모인 빛무리가 뭉게구름처럼 보이는가 하면 흩어졌다 다시 모이자 길고 구불구불한 모양을 이루기도 했다. 한쪽으로 우우 몰려서 동그랗게 뭉치기도 했다.

종일 보고 있어도 싫증날 것 같지 않았다. 그 푸르스름한 빛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계단 위에서부터 탁탁탁 하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명! 명!”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달려오는 열 살쯤의 소년이다. 한복 같지만 한복은 아닌 것 같은 묘한 옷을 입고 있는데 갈색과 황색이 섞인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아까 본 강아지와 똑같았다. 뭐니. 둘이서 커플로 브릿지라도 한 거냐.

소년은 달려오더니 폴짝 뛰어서 내 무릎위로 올라앉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얘가 혹시 내 아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럴 리가. 이름 모를 도도한 미인 비서가 분명 내게 가족도 친척도 없다고 했는데.

“명! 유하 누나가 명이 바쁘대. 명! 바빠?”

이 목소리는 분명 깨어난지 얼마 안 되어서 방안에 있을 때 들었던 그 소년의 목소리다. 그런데 유하 누나는 또 누구야?

“명! 놀아줘! 놀아줘! 석 달이나 잤으면서! 심심했어! 놀아줘!”

녀석이 내 셔츠를 잡으며 졸라댔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살짜리 사내아이가 무릎 위에서 몸을 흔들고 있는데 다리에 느껴지는 무게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볍다. 기껏해야 5kg 정도?

“달님아.”

계단 위에서 가사도우미 겸 이름 모를 도도한 미인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소년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내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몸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깨어난 후 두 번째로 눈을 의심했다.

바닥에 뛰어내린 소년은 갈색과 황색의 긴 털이 부스스한, 분명 내 슬리퍼를 물어뜯고 있던 바로 그 강아지로 변해 있었다.

마법의 바늘에 이어 한 번 더 환상을 보는 건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환상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 거지?

“유하 누나. 유하 누나.”

강아지가 팔짝 팔짝 뛰어서 그녀에게 달려가며 말했다. 말했다. 강아지가. 사람의 목소리로.

“해명은 바쁘다고 했잖아. 방해하지 마.”

발밑으로 달려온 강아지에게 그녀가 말했다. 말하면 알아듣는다는 듯이. 하지만 정말로 강아지는 “응.”하고 대답한 다음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멍하니 지켜보는 나를 둔 채 그녀도 돌아서서 계단을 오른다.

뭐야. 방금 소년이 강아지로 변한 거나 말을 한 게 나 혼자의 환각이야? 그렇다면 저 여자가 강아지와 대화한 건 뭐지? 아냐. 대화가 아니라 그냥 똑똑한 개라서 대충 알아듣고 간 걸지도 몰라. 정말? 정말 그럴까?

내가 정말로 미친 건지 아니면 여기에서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확인해야 했다.

“유하.”

강아지에게 들은 이름을 불렀다. 분명 환청으로 들었을 이름을.

“예.”

그리고 내 부름에 그녀가 대답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진 셈이다.

여기에서 뭔가,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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