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20화 (120/218)

소설가와 보물성(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그렇구나. 어쩐지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상황이 비슷해서였어.

그러고 보면 백은호도 그렇지만 저 세 남자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열심히 방을 조사하고 다니는 기색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흩어져 이곳저곳 뒤지고 있을 때 그들은 느긋이 방문까지만 가서 힐끗 안을 들여다보고 다니는 식이었다. 내부의 구조를 확인하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이 요새의 모든 구조를 다 확인하고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각이 한…어라?

핸드폰을 확인한 나는 눈을 의심했다.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다. 성으로 들어온 때와 거의 비슷했다. 적어도 한 시간은 넘었고 거의 두 시간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5시 13분?

“백은호, 지금 몇 시야?”

혹시 내 핸드폰이 고장인가 싶어 묻자 그는 확인도 하지 않고 “5시 13분”이라고 대답했다.

“밖에서 모였을 때가 5시였는데?”

“여기는 ‘안’이니까요.”

그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다들 태연한 걸 보니 모르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안’은 시계가 고장나는 곳이라는 거야? 아니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라는 거야.

아냐. 후자는 아무래도 너무 판타스틱 해. 내가 아무리 요괴와 술 마시는 사이라고 해도…아 참, 그렇지. 나는 창고에 도깨비를 하숙시키고 요괴와 스무고개 하던 처지였지. 그렇게 생각하자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쯤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위장천을 빌려 만들어 낸 이런 공간은 요괴가 아니면 도력이 높은 도사들이나 열 수 있는데. 어느 쪽일까요? 그 소설가라는 사람은.”

금발의 남자, 조영석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질문이었지만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아무도 대꾸 않는데 무색한 기색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귀찮은 건지 생각에 잠긴 건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위장천이 뭐냐며 핸드폰으로 검색을 시도했는데…

“인터넷도 안 되고, 여기 전화는 되는 거야?”

통화 가능구역이라고 표시되었지만 어쩐지 찜찜해서 묻자 백은호가 한숨을 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안 된다는 거네.

어쨌든 바깥 세상과는 여러 가지로 단절된 이상한 공간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나가는 열쇠가 있다는 재단 직원의 말은 이런 상황이어서 한 거였구나.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흐르는 곳이라면 밖에서 하루가 지나는 동안 이 안에서는 며칠, 혹은 몇 달이 될지 모르니까.

일단 인정하고 나자 조영석의 말이 걸렸다. 이런 곳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요괴가 아니면 도사라…. 요괴는 이미 겪어 봤지만 도사라는 건 홍길동이나 전우치 같은 그런 사람인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축지법도 막 쓰고 도술도 부리고?

“소설가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어?”

창피하니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자. 라고 기껏 목소리를 낮추어 백은호에게 물어봤지만 대답한 쪽은 조영석이었다.

“동화 작가라고 하던데요.”

예? 애들이 보는 책인 그 동화요?

“별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책은 여러 권 냈대요. 뭐 부자니까 단순히 자기만족으로 한 걸 수도 있고. 그런데 필명이 금시조였어요.”

금시조?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내 표정을 보고 조영석이 씩 웃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딘지 음모를 꾸미는 듯한 표정을 연극적으로 지어놓으며 그가 속삭였다.

“좀 으스스하지 않아요? 금시조는 무덤을 수호하는 신인데 그 사람이 이 성의 주인이라면 여기는 누군가의 무덤일지도 몰라요.”

확실히 으스스하네. 나 나가는 열쇠나 찾아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조영석이 명랑하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대리인 치고는 정말 순진하시네. 누구 아는 사람 대신 온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 대신으로 온 게 아닌 모양이다. 그나 다른 두 남자도 나처럼 의뢰를 받고 여기에 왔다는 걸까.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다들 웬만큼은 아는 것 같고 이곳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있어 보이고…

“여기로 사람들이 초대되는 건 언제부터였어요? 꽤 오래 전부터 같은데.”

적어도 십몇 년 쯤? 어차피 내가 초보인 건 들통난 것 같으니 붙임성 있게 말을 걸고 있는 조영석에게 대놓고 물었다.

“정확히는 모르죠. 보물을 찾기만 하면 가져갈 수 있다는데 누가 소문내고 다니겠어요. 비슷한 건 몇백 년 전부터 있었다지만 이 성이 생긴 건 한 15년이나 20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그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여기가 15년이나 20년쯤 되었다는 건 짐작하고 있던 바지만 비슷한 게 몇백 년 전부터 있었다니? 이런 곳이 또 있다는 거야? 어리둥절해서 물어보자 조영석이 웃으며 설명해줬다.

“왜 있잖아요. 용재총화나 어우야담 같은데서, 무인도에 갔다가 괴물의 뱃속에서 보물을 발견했다든가 하는 이야기. 버들 도령이 사는 동굴 이야기 같은 거 몰라요? 그건 유명한데. 이건 농담이 아니고 오래 묵은 요괴나 도사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보물창고가 여러 개 있긴 있다는 거죠. 여기도 그런 곳 중 하나인데 다른 점이라면 이곳은 주인이 아니라 재단이 관리하고 있다는 정도?”

조영석은 말하고 나서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몰랐어요? 백사장님이랑 같이 와서 그래도 이 바닥에서는 좀 놀아본 분인 줄 알았지.”

그러게요. 제가 좀 놀아본 것은 같은데 기억이 하나도 없네요.

“그런데 저분들은 언제쯤이나 포기하고 오실라나. 빨리 모여야 열쇠를 맞춰볼 텐데 말이죠.”

조영석이 지루하다는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나를 힐끗 본 다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것도 모르시겠구나. 초대장이요. 그게 열쇠 조각이에요.”

그건 또 뭔 소리래요.

“초대장 보면 그림이 있잖아요. 그거랑 맞는 조각을 다 모으면 열쇠가 되는데 그게 문을 여는 열쇠일 수도 있고 보물 상자를 여는 열쇠일 수도 있는 거죠. 아아…그거 모르는 사람은 여기 와도 쇠붙이로 만들어진 열쇠만 찾아다니며 하루 다 보내고, 중요한 줄도 모르고 초대장을 아무데나 버리기도 하고 그러죠.”

저도 몰랐는데요. 나는 말없이 내 초대장까지 가지고 있는 동업자를 돌아보았다. 이 모든 설명들은 원래 네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사기꾼 같은 사차원 골동품점 사장 녀석아!

“이 성이 열린지 16년째입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겠지요.”

백은호가 태연히 말했다.

그런데 그렇다는 건, 애초에 여기에 초대받는 사람은 누구나 열쇠의 조각을 하나씩 갖게 된다는 거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혹시 다른 조각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가 가진 그림과 짝이 안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지.

“초대장 줘 봐.”

백은호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초대장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조영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을 빼서 들여다보고, 다른 두 남자도 내색은 안 했지만 눈동자가 이쪽으로 굴렀다.

봉투 안에는 마치 엽서처럼 생긴 종이가 들어 있었다. 세로로 봐야 하는 엽서. 그러나 엽서라기에는 작고. 음…비율은 명함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명함의 세 배 정도 크기? 뒷면은 격자무늬로 채워졌고 앞면에는 채색된 그림이 있었다. 다만 그림은 위쪽의 절반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한 장은 말과 거기에 탄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림의 위쪽이 없어서 기사의 상반신은 없었지만 그의 말 앞에 사람들이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림의 아래에 흐릿하게 ‘모든 이에게 공평하다’라는 문구가 그림과 반대방향으로 적혀 있었다.

또 다른 한 장은 뭔지 모를 그림이었다. 연못 같은 곳의 물가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누군가의 다리가 보이고, 그 사람의 손이 물병을 기울여 연못 위에 물을 쏟고 있다는 정도다. 다리 옆에서도 작은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뭘 그린 건지 이 상태로는 짐작도 안 갔다. 그림의 절반이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할 줄이야.

그림의 아래에는 역시 흐릿하게 ‘어두운 곳에서 보라’고 적혀 있었다.

조영석이 눈을 깜박이며 보다가 아쉬운 표정을 했다.

“아깝다. 내 거랑은 다른 그림이네. 혹시 같은 열쇠 조각 가지신 분 있어요?”

그가 다른 두 남자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이쪽을 외면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에에이, 사람들 다 모이면 어차피 까놓고 볼 건데 뭘 또 감추시나.”

“그러는 너는 뭔데?”

남자들 중 키가 땅딸막하고 다부진 체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양철수라고 했던가. 드러나 있는 손도 거칠었고 손가락 마디의 뭉개진 것 같은 굳은살을 보니 저 남자 옆에서 까불면 위험할 것 같다.

그의 질문에 조영석이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요. 저도 참. 어차피 알게 될 건데 또 막상 먼저 알려주기는 싫으네요.”

쟤가 겁도 없이 까불고 있다.

나는 양철수가 화라도 낼까봐 조마조마 했지만 그는 눈썹을 조금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조영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오려면 한참 걸릴 테니 전 방에서 쉴게요. 때 되면 누가 저 좀 불러줘요. 제 방은…”

그가 주머니에서 초대장을 꺼냈다. 봐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으나 앉아있던 사람들은 각도상 그가 꺼낸 초대장의 뒷면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조영석은 물고기 앞에서 미끼를 흔드는 표정으로 초대장을 파닥거리며 말했다.

“음, 2층 장미의 방이라고 적혀 있네요. 오오, 이거 기대되는 이름이네. 그럼 이만.”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식당에서 나갔다. 쟤 왠지 얄미워.

“저도 슬슬 산책이나…”

지금까지 한 마디도 없던, 권호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쓱 일어나서 우리에게 눈인사를 보낸 다음 밖으로 나간다.

“에이. 별 놈이 다 와가지고.”

양철수도 투덜거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역시 식당에서 나가자 결국 나와 백은호만 달랑 남게 되었다.

“뭐야. 결국 초대장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리고 다들 도망치듯이 나가버리고 말이야. 내 말에 백은호가 피식 웃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도령이 이상한 겁니다. 초대장은 초대받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어 소유권이 바뀌지 않는 유일한 열쇠 조각입니다. 남에게 뺏길 수가 없는 유일한 조각인 셈이지요. 그러니 히든 카드와 같은 그것을 쉽게 보여줄 리가 없습니다.”

백은호가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처음부터 좀 다 가르쳐 달라는 말이야!

“아직 내가 모르는 보물 찾기 규칙이 더 있냐?”

“무엇이든 겉보기로만 판단하지 마십시오.”

당연하다면 당연한 충고를 건네고 나서, 그는 초대장을 도로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 말은 맞는 거 같아. 겉보기에 말짱하고 말끔하고 말 잘하는 저놈이 이렇게 음흉하고 뻔뻔한지 몰랐다니까.

“내 방은 어디야?”

방으로 간다는 조영석의 말을 듣고 보자 문득 생각나서 내가 물었다. 재단 사람이 각자의 방은 초대장에 적혀 있다고 했었지.

“3층 ‘처녀의 방’입니다.”

예…? 멀쩡한 총각에게 무슨 그런 방을 주시나요. 불평이 나왔으나 궁금하기도 하고,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다들 식당으로 돌아올 때까지 오래 걸릴 것도 같아 나는 슬슬 3층으로 가보았다.

투박한 돌계단을 올라 3층에 닿자 어두컴컴한 가운데 계단을 중심으로 세 방향에 세 개의 문이 보였다. 처녀의 방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문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적갈색의 나무문 위에는 커다랗게,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방에도 열쇠의 조각 같은 것이 숨겨져 있을 수 있나? 그런 생각으로 나는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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