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21화 (121/218)

소설가와 보물성(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어…어?”

문이 안 열린다. 손잡이를 잡고 밀어 봐도 당겨 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 문은. 잠긴 거야? 설마 방에 들어가는데도 열쇠가 필요한가?

불평하려는데 손잡이 아래에 묘한 것이 보였다. 문에 조각된 여자의 한손이 문손잡이 아래에 있는 것이다. 마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이 문을 처음 봤을 때 여자는 보티첼리의 유명한 비너스 그림처럼 한 손을 벌거벗은 가슴 위에, 다른 손은 긴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아랫도리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손이 손잡이 아래에 있어서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지 않은 가슴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조각된 모양이 바뀔 리는 없잖아…?

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그 생각은 곧 부정당했다. 조각상 여자가 나를 힐끗 내려다본 것이다. 어딘지 기분이 상해 보이는 표정이어서 나는 문에 조각된 여성에게 내 시선은 지극히 건강한 남자의 본능적인 탐색경로를 따른 것뿐이라고 해명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여자는 도도한 얼굴을 다시 본래 쳐다보던 방향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 손잡이 밑에 있던 그녀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않는 여인은 그냥 나무를 깎아서 만든 조각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잠깐 헛것을 봤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자, 조각상 여자는 귀신같이 손을 뻗어서 문손잡이를 꽉 잡는다. 이거 들어가지 말라는 소리지?

“여기 내 방인데요. 초대장에 적혀 있거든요?”

항의해 봤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조각상이라 당연한가.

아무래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자 나는 옆방의 문도 확인해 보았다. 다른 곳도 다 이 모양인가?

바로 옆에는 번개 모양이 새겨진 문이 있었다. 혹시 열리나 하고 손잡이를 잡은 순간 찌릿한 감각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재빨리 손잡이를 놓았지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순간 문에 새겨져 있던 번개 모양은 확실히 그 끝이 손잡이로 향해 있었다.

번개가 그려져 있으니 전기로 방해하는 건가? 그 옆으로 염소가 새겨진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거기까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다. 염소의 뿔에 받힌다든가 뭐 그런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1층으로 도로 내려갔더니 홀이 약간 시끄러웠다. 식당 맞은편 방에 몇 사람이 있었다. 가만, 재단 직원이 저 방에는 구급약품이 있다고 했잖아.

“아, 괜찮다고 했잖아! 구경났어?”

“가만히 있어 봐요. 뼈라도 부러졌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거 좀 시키는 대로 하지. 간호사님이라잖소.”

화를 내는 것 같은 거친 목소리와 나무라는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타이르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작은 방 안에서 세 사람이 옥신각신하고 있었고 밖에서 중년의 여성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래요?”

“몰라요. 갑자기 비명소리가 나서 가보니까 저 사람이 이층 바깥의 회랑을 막 달려오더라고요. 그런데 팔이 꽤 부어 있어서 채영씨가 치료해주겠다고 데려왔는데 저렇게 난리네요.”

옆으로 가서 슬쩍 묻자 그녀가 소곤소곤 알려줬다.

채영씨란 방안에서 남자의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젊은 여자의 이름인 모양이다.

“좀 부딪친 거 가지고 사람을 병신 만들려고 해? 내가 어디 잘못되었으면 좋겠지? 응? 그래야 내 열쇠를 니들이 가져가지!”

남자가 사납게 을러대는데 채영은 얼굴을 조금 찌푸릴 뿐 겁먹지도 않고 붕대를 척척 감았다.

“다 됐어요. 혹시 모르니까 이 손은 조심히 사용하시고요. 목소리 크신 거 보니까 금방 낫겠네요.”

비꼬는 투도 없이 쾌활하게 말한 다음 그녀는 구급상자를 재빨리 수습했다. 남자는 입속으로 뭐라고 투덜거리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나왔다. 문 입구에 있던 우리가 후다닥 옆으로 비껴 서자 그는 우리를 노려보더니 이내 계단 쪽으로 가버렸다.

저 사람 이제 보니까 그 남자네. 처음 모였을 때 재단 직원에게 불평하던 그 사람. 어쩐지 사회에 불만이 많은 것 같은 그의 뒷모습이 계단 위로 훌쩍 사라졌다. 뭐 하다 다쳤는지 몰라도 분명 저 성질머리 때문일 거야.

“채영씨 대단하다. 안 무서웠어? 세상에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치료해 주는 사람한테 욕을 욕을 아주…”

남자가 안 보이자 그제야 중년 여성이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뭘요. 말만 그렇지 치료는 얌전하게 잘 받았어요.”

채영이 구김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도 대단하다는 말에는 동감한다. 저런 험상궂은 남자가 옆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도 안 되는 화를 내는데 태연히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제가 일하는 곳이 유흥가 근처에 있어서요. 거기 응급실에서 근무하면 밤마다 취하고 싸워서 다쳐 오는 사람을 원 없이 보거든요. 저 정도는 양반이에요.”

“그래도 그렇지 도움 받는 사람이 저렇게 사나워서야 원. 아무튼 아가씨가 정말 수고했어. 간호사라 다르구먼.”

노인의 칭찬에 그녀가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나저나 저 사람 때문에 한참을 낭비했네. 우린 다시 열쇠나 찾으러 가요.”

중년 여성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하고 채영에게 눈짓했다. 노인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래도 더 못 돌아다니겠소. 늙으니까 이게 걷기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야.”

“아유, 정정하시면서 뭘 그러셔요. 계단 오르내리실 때 보니까 젊은 사람 못지않으시더구만. 그럼 좀 쉬었다가 다시 찾으세요. 우리는 먼저 갈게요. 총각도 수고해요.”

두 여자는 우리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총총 떠나갔다. 노인은 그제야 허리를 숙이고 긴 숨을 내쉬었다.

“어이구, 좀 걸었다고 몸이 내 몸이 아니네. 어구구야…”

“어르신 괜찮으세요?”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앓는 소리를 하고 계신다.

“으응. 괜찮아. 뭐 늙으면 다 그렇지.”

저기요, 말씀과 행동이 다르시잖아. 힘없는 목소리하며, 곧 쓰러질 것 같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면서 괜찮다고 하시니 그냥 괜찮다고 생각하고 가버릴까.

“식당으로 가셔서 쉬실래요? 부축해 드릴까요?”

“거기 의자가 딱딱해 보이더구먼. 나는 그냥 내 방에 가야겠네. 어구구…그런데 내 방이 2층이니 저 계단을 어떻게 올라간담. 아이구…늙으면 죽어야 한다더니…”

그냥 업으라고 하세요.

나는 괜찮다고 몇 번을 사양하는 할아버지를 업고 2층으로 갔다. 2층 계단에서는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복도 양쪽으로 문이 두 개씩 보인다.

“내 방은 저길세.”

노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간 나는 문에 새겨진 것을 보고 움찔 섰다. 거기에는 마치 교수대처럼, 올가미 모양으로 매듭이 지어진 밧줄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 참 흉악하게도 만들어놓지 않았나. 늙은이한테 이런 방을 준 걸 보면 이 집 주인도 보통 사람이 아니야.”

혀를 차며 노인이 말했다. 그러게요. 열기 싫어지는 문인데 이거. 이 집 주인인 소설가는 동화작가라면서 혹시 잔혹 동화 같은 거 쓰셨나. 그런데 이 문도 내 방처럼 열려고 하면 밧줄 같은 걸로 묶어버리며 반항하는 거 아냐?

약간 긴장한 채 손잡이를 돌리자 아무 저항도 없이 문은 열렸다.

내부는 단순했다. 침대와 작은 탁자, 장식장 하나가 전부였다. 벽은 석고가 발라졌고 작은 창이 하나 있어서 빛이 들어왔다. 한 쪽 벽에는 태피스트리, 다른 쪽 벽에는 박제된 사슴 머리가 걸려 있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 낡았지만 깨끗하고 침대도 반듯하니 정돈되어 있었다. 노인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나 때문에 시간낭비 힘 낭비를 했구먼. 미안해서 어쩌나.”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뭘요. 그럼 전 갈게요. 쉬세요.”

“아, 젊은이. 혹시 자네 초대장 말일세. 이것과 비슷하지 않나?”

나가려는 내게 노인이 작은 엽서 같은, 자신의 초대장을 꺼내 보였다. 그것 역시 아랫부분의 그림만 남겨져 있고 윗부분은 없었다. 누군가 한 발로 서서 발레 하듯 다른 다리를 접고 있는 모습의 하반신이 보였다.

그러나 내가 본 초대장과 달리 그의 것에는 그림 위쪽에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자유롭다.’라고.

그림은 모르겠는데 문구는 왠지 오싹하잖아. 이 방도 그렇고 할아버지 어쩐지 이상한 게 걸린 것 같다.

“아닌 것 같아요. 제 그림도 사람 다리만 있는 거라서.”

“그래? 아쉽구먼.”

“예 그럼…쉬시다 괜찮으면 식당으로 오세요. 거기 술도 있더라고요. 음식 맛도 괜찮고.”

어쩐지 편히 쉬시라고 하면 영원히 쉬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렇게 말하자 노인이 볼에 주름을 지으며 웃었다.

식당으로 돌아가자 백은호가 혼자 핸드폰을 꺼내놓고 있었다. 전화도 안 되는 걸 왜 들고 있나 싶어 넘겨다보니 게임중이다.

“야, 백은호. 내 방이 정말 처녀의 방 맞아? 거기 들어가려고 하니까 문이 안 열리던데?”

내가 묻자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야 초대장에 적힌 이름은 대리인과 다르니까요. 방은 초대장에 이름이 적힌 사람이 쓰는 곳이라 안 들여보내 주는 겁니다.”

…아무래도 얘는 여기 일 하러 안 오고 나 복장 터지게 하려고 온 것 같다.

그런데 짜증을 내려다 문득 나는 떠올랐다.

“조영석. 장미의 방으로 쉬러 간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도 대리인이니까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아니 애초에 그걸 알고 있을 텐데…”

내 말에 백은호는 그제야 핸드폰 액정에서 눈을 뗐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가 반대편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요사한 빛을 띠고 있는 눈매가 가늘어지며 그가 조금 웃었다.

“그렇군요.”

뭐야. 뭔가 알아차렸잖아. 뭔데? 응? 응?

물어보면 잘난 체할 것 같아 눈빛으로 열심히 질문해 봤지만 백은호는 다시 게임에 열중했다. 야 임마.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사람들이 지쳐서 돌아올 때까지 별로 할 일은 없습니다. 그때까지 편안히 쉬면 되는 겁니다.”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때는 재미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실 테니 잠시도 지루하지 않을 겁니다.”

말하는 그의 얼굴은 어쩐지 묘하게 기분 좋아 보였다.

이건 그냥 헛생각이겠지만, 저 녀석이 여기 온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라 그 ‘재미있는 것’ 때문이 아닐까. 뭔지는 몰라도.

하지만 나도 딱히 열쇠를 찾겠다고 이 방 저 방 뒤지고 다닐 생각은 없고, 저 녀석도 느긋한 것 같고.

반쯤 체념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가 돌아다녔다. 뭔가를 찾겠다기보다는 관광하는 기분이었다. 아성의 계단을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성벽을 따라 걷고, 망루에 올라가보고, 성탑의 어두컴컴한 나선 계단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한참 놀다가 마구간처럼 보이는 곳의 짚더미 위에서 잠깐 잠이 들기도 했다.

깨어나서 시각을 확인하니 5시 48분. 아까 두어 시간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15분도 안 되었으니까 이 정도면 꽤 오래 지난 셈이었다.

나는 식당으로 돌아갔다.

백은호의 말대로, 보물을 찾다 지친 사람들이 거기에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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