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보물성(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째서 난 저런 놈하고 같이 일하는 사이가 된 거지?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뭐 약점이라도 잡혔나?
“됐고, 내 초대장이나 줘봐.”
양철수 말이 맞다. 놀면 뭐해. 도움이 안 되는 동업자는 놀게 놔두고 내 카드 반쪽이나 찾으러 가야겠다. 아까는 멋모르고 아무데나 마구 뒤졌지만 이번에는 힌트가 있는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보라.
카드 아래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물가에 사람이 있는 그림이라서, 나는 이 카드가 ‘별’이 아니면 ‘절제’ 카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머지 그림이 맞춰져야 확실히 알겠지만 일단 힌트로 보면 별 카드인 것도 같고. 어쨌든 아직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성 어딘가에 잘 감춰진 모양이니 내가 먼저 찾으면 된다는 거지.
어…그러고 보니 이 카드의 문구를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지. 그럼 혹시 그 사람들 역시 나처럼 어두운 데서 찾아보고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다들 쉬러 간다고 말은 했지만…
아니 내 카드뿐이 아니다. 식당에서 사람들이 본 모든 카드가 다 해당되었다. 다른 카드들의 문구도 알려졌으니까. 그렇다는 건…
“설마 사람들, 죄다 카드 찾으러 간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습니까.”
백은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진짜? 하품까지 하며 나가던 중년 부인이라든가, 허리를 두드리며 쉬어야겠다고 말하던 등산복 남자라든가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어차피 그들이 보여준 카드도, 힌트를 알지만 찾지 못해서 내놓은 것뿐입니다. 아무 것도 못 찾았다며 초대장을 보여준 사람도 실은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지만 힌트를 보여주기 싫어서 거짓말 한 것일 수 있지요. 식당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사람들도, 어쩌면 그런 이유로 아예 나타나지 않은 걸지도 모릅니다.”
뭐야, 나만 모르는 그런 눈치작전을 펴고 있었다는 거야?
성격 좋아 보이던 중년 부인이라든가 야무진 간호사 아가씨라든가 어쩐지 기운 없어 보여서 불쌍하게 생각했던 안경의 남자라든가, 다들 사실은 가면 밑에서 열심히 손익을 계산하고 있었다는 거네. 차라리 대놓고 의심스러워 보였던 양복의 남자 쪽이 오히려 순진한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나갔다 올게.”
나는 조금 기분이 상한 채로 식당에서 나갔다. 도무지 속을 읽을 수 없는 동업자와 시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어쨌든 기왕 힌트가 생겼으니 한번쯤 찾아볼까 싶었다. 힌트에 의하면 어두운 곳에 있다는 말이지.
그런데 문제는 여기가 중세시대 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건물 안은 대체로 어두컴컴하고 창이 없으면 아예 캄캄한 곳도 많았다. 백은호가 가장 먼저 들어갔던 와인 창고만 해도 눈앞이 잘 구분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
생각난 김에 와인 창고로 가보려는데 마침 거기에서 막 나오는 등산복의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 씩 웃고는 고개를 까닥여 보이더니 휙휙 가버렸다.
생각은 했지만 눈앞에서 보니 기분이 나쁘네. 카드를 확인해 보자 아직 문구는 그대로다. 아직 누군가 찾아낸 것 같지는 않다.
딴 데로 가고 싶은 걸 참고 와인창고부터 뒤져보았다. 이미 한 사람이 다녀간 뒤라서 뭔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핸드폰으로 이리저리 비추며 샅샅이 뒤져보니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와인 창고로부터 시작해서 성탑의 안이나 식료품 창고, 다용도실, 어두워 보이는 곳은 모두 뒤져보았다. 그 와중에 방에서 쉬겠다던 사람들을 몇 명이나 만났지만 피차 시선만 한 번씩 보낼 뿐이었다.
아성에서 출발해 요새 전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도착할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내 카드의 문구는 변하지 않았고 나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몸이 피곤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머리가 피곤한 기분으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4층에서 3층으로 가려는 때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여사님 방입니까? 오오라, 이 문에 새겨진 모양이 방의 이름이니까 그럼 이 방은 사과나무의 방입니까?”
이 목소리, 양복의 남자다. 그의 말에 누군가 살갑게 대꾸했다.
“사과는 사과인데, 보통 사과가 아니죠. 좀 더 잘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예요.”
여자목소리였다. 간호사 아가씨가 아닌 것 같으니 분명 중년의 부인이다. 실례겠지만 나는 계단을 오르다말고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녀의 말에 남자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아하.”하는 탄성을 냈다.
“이것이 그 나무로구만. 이브의 사과나무. 그러니까 이 나무는 선악과나무라 이거요? 그러면 이 방의 이름은 선악과의 방이겠군요?”
남자의 말에 부인이 굴러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장선생님은 정말 모르는 게 없으세요. 맞았어요. 제 방의 이름은 선악과의 방이에요.”
“야아, 이거. 운 좋게 맞췄네요. 그럼 이름을 맞췄으니 약속대로 방안도 구경시켜주시는 겁니까?”
“약속인데 당연하죠. 들어오세요. 돌아다니느라 힘드셨을 테니 기왕 온 거 푹 쉬다 가셔요.”
부인의 목소리가 과일즙처럼 달콤했다.
“정말 피곤하기는 하네요. 그런데 숙녀의 방에서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기어가는 뱀처럼 은밀했다.
“어머, 시간도 많은데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다보면 실례가 안 되는 사이로 발전하지 않겠어요?”
“어쩌면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십니까.”
남자가 호탕하게 웃는다. 웃음소리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나는 그들의 뒷이야기를 더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리고 2층으로 내려갔을 때 거기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댁이 가지고 있는 거 맞지? 응?”
사나운 남자의 목소리다.
“어허 참, 아니라니까 그러네…”
“웃기지 마! 분명히 붕대 감으러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 주머니에 있었단 말이야! 댁이 나를 부축한다면서 내 옆에 바짝 붙어 있었잖아!”
“거 참. 나 같이 눈도 어둡고 힘도 없는 늙은이가 무슨 수로 그런 짓을 하나. 생사람을 잡아도 분수가 있지.”
대답하는 목소리는 일행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다. 그러고 보면 화내는 남자는 그 사람이다. 팔을 다쳐서 치료받았던.
“내 열쇠를 훔치려고 한 게 아니었으면 왜 그렇게 바짝 붙어서 도와주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엉? 팔을 다친 나를 부축해줄 필요가 뭐 있다고 말이야! 사기꾼 같은 늙은이가!”
“아니 그렇다면 나보다 훨씬 오래 가까운 곳에 있던 그 간호사 처녀를 의심해야지, 이 사람아.”
“내가 봤다니까! 내 그림 아래에 적혀 있었단 말이야. ‘늙은 도둑’이라고! 우리들 중에 늙은이는 댁뿐이잖아! 그리고 모를 줄 알아? 이래 뵈도 내가 별이 세 개야. 감옥 가서 배우고 온 건 너 같은 사기꾼 구분하는 방법이랑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것뿐이라고!”
“에잉. 상종 못할 사람이구먼. 친절을 베풀었더니 그걸 이렇게 갚나 그래.”
“어딜 가려고? 이 늙은 도둑놈아! 내 그림 내놔!”
“어이쿠!”
말싸움이 점점 커지더니 몸싸움 하는 소리로까지 바뀌자 나도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봐요. 그거 놔요.”
복도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내가 소리쳤다. 땅딸막한 남자에게 팔이 붙잡혀 있던 노인이 나를 보자 반색하며 외쳤다.
“젊은이! 나 좀 살려주게. 이 사람이…”
“내놓으라고!”
남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노인의 품을 뒤졌다. 재킷의 주머니 안에서 지갑이 나오자 남자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것을 뒤졌다. 그러나 안에는 약간의 지폐가 전부였다.
“무슨 짓입니까? 그거 돌려주세요.”
내가 말리려고 하자 남자가 눈을 부릅뜨더니 버럭 소리 지르며 갑자기 팔을 휘둘렀다.
“참견 말고 꺼져!”
허공을 가르는 주먹이 바람소리를 냈다. 맞았으면 꽤 아팠을 것 같은 불의의 공격을 내가 어떻게 피했는지 모르겠는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 손은 그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손을 잡힌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가 다른 손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표정으로 봐서 엄살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의 팔에 손 모양의 자국이 깊게 남아있었다. 약간 힘을 줬을 뿐인데. 이 남자는 겉보기와 달리 피부가 연약한 체질인가?
남자는 내가 손을 놓자 허둥지둥 복도를 뛰어서 달아나버렸다.
“어이구 참, 젊은이 아니면 큰일 날 뻔했네. 저렇게 흉악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근처에도 안 갔을 걸.”
노인이 혀를 차며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주웠다.
“아뇨.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사람이 늙고 힘이 없어지니 별 수모를 다 당하는구먼. 괜찮네. 방에 들어가 좀 쉬면 되겠지.”
노인이 힘없는 얼굴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나는 하릴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성에 들어온 후로 체감 시간은 거의 17시간 정도. 정말로 17시간이 지났다면 사람들은 밤을 꼬박 새고도 오전 10시가 될 때까지 이곳을 헤매고 다닌 셈이다. 잠을 자지 못해서 신경이 곤두서고 쓰러질 것 같은 피로를 느낄 만한 그런 때.
그래봐야 핸드폰에 뜬 시각은 고작 6시 33분일 뿐이지만.
이 요상한 성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서 그런지 잠이 온다거나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과 별개로 정신만은 피로하다.
백은호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내가 본 것들이 뒤섞여 어쩐지 지저분한 마블링을 이루고 있었다. 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나는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노인을 업고 방으로 데려다 준 다음, 그가 초대장을 보여줬을 때 거기에는 뭐라고 쓰여 있었더라. 사람의 다리가 그려진 그림 위쪽에, 뒤집어져서 쓰인 흐린 문구를 나는 기억해냈다.
‘고통으로 인해 자유롭다.’
내가 노인의 카드를 봤을 때, 그 카드의 짝은 이 문구와 관련 있는 곳에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도망간 그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래 뵈도 내가 별이 세 개야. 감옥 가서 배우고 온 건 너 같은 사기꾼 구분하는 방법이랑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것뿐이라고!
감옥에서 보낸 고통의 시간으로 그가 죄를 갚았다면, 카드의 문구는 그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노인이 가지고 있는 카드의 반쪽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면, 어쩌면 정말로 노인이 그의 카드를 훔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카드를 완성시켰을지도…
문득 나는, 내가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을 모두 불신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거짓말하고, 부적절한 방식으로 타협하고, 폭력적인 방법도 불사하며, 속임수에 능했다. 내가 본 그들은 그랬다.
“보물찾기는 성과가 있었습니까?”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느새 계단을 모두 내려갔고 내 앞에는 백은호가 서 있었다. 나를 향해 묻는 그의 얼굴은 기이하게도 요사했다. 그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문의 조각이 멋대로 움직이는 괴상한 성에 어울리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도 내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인간들이란.”
어딘지 오싹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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