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보물성(8)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나는 백은호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머리는 확실히 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딱히 빈 방도 없고 백은호도 식당에서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의자들을 끌어당겨 일렬로 세워놓고 그 위에서 불편한 잠을 자는 수밖에. 좁고 불편한 침대였지만 막상 눕자 끌어당기는 것처럼 나는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깨기 직전에는 뭔가 꿈을 꾸고 있었다. 카드라든가 사람들, 괴상한 성에 관련된 것 같다. 대단치 않은 내용이었지만 꿈속에서 깃털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 고양이 부인이 계속 말을 거는 바람에 귀찮아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났다고 생각하는데도 고양이 부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아직 꿈속인지 한 번 더 꿈에서 깨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그랬더니 글쎄 그 여자가아, 끅, 아주 그냥 낯바닥을 빤빤히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어…”
아닌데. 이거 정말 현장감 넘치는 목소리인데.
“남편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교양 있는 척이냐면서 끅, 내가 정마알 기가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서어…”
이 목소리, 선악과의 방에 묵는 그 아주머니잖아. 취하셨는지 목소리가 좀 꼬부라지긴 했는데.
“끅, 남편은 생활비 제 때 주는데 뭐가 문제냐는 거야. 돈 벌어서 딴 년 살림살이에 다 쏟아 붓는 놈도 있다면서…끅, 친구라는 것들은 돈 잘 버는 남편 비위맞추는 게 뭐 그리 어렵냐고 하지. 끅, 그래애…뺏긴 년이 멍청한 년이지.”
바로 그 중년 부인이 식당에 있었다. 식탁 위를 굴러다니는 빈 술병들을 보니 꽤 드신 것 같다. 그녀가 주정인지 한탄인지 모를 푸념을 꼬부라진 목소리로 늘어놓는 동안 백은호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백은호를 상대로 부인은 우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 꼴을 당하고 보니 세상이 달리 보이대. 끅, 평생에 내가 어디 가서 염치없고 낯부끄러운 짓은 안 하고 살았는데, 그게 다아 부질없는 짓이었어. 끅, 그런데…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서방질도 해 본 년이 해야지. 끅, 내 꼬라지를 봐아…”
말하며 그녀가 웃었다. 울음 섞인 웃음이었다.
그녀의 한탄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지만 나는 자는 체했다. 부인은 한참을 더 이야기하더니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다 결국은 식탁에 엎드려 잠들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식당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가끔 식당 밖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밖으로 나가보아도 사람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가끔 창밖으로 혼자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뒤져보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나도 다시 돌아다녀 보았지만 어두운 장소란 장소는 다 뒤졌는데도 나오는 게 없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카드를 찾아낸 건지 모르겠다.
이리저리 헤매던 나는 결국 다시 식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식당에서는 여전히 백은호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본 체도 안 했고 잠들었던 중년의 부인은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양철수와 간호사 아가씨와 안경의 남자였다.
세 사람 모두 의자 두세 개씩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아 있었다. 양철수는 얼굴을 찌푸리고서 술잔을 홀짝였고 안경의 남자는 힘없는 얼굴로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간호사 아가씨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는데 별로 좋은 기색은 아니었다.
식당 안에는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나 있었지만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아아…이 분위기 어쩔 거야. 도로 나갈까.
망설이는데 식당 문이 열리고 또 한 명이 들어왔다. 중년의 부인이다. 아까보다는 훨씬 술이 깬 얼굴이었다. 그녀는 간호사 아가씨를 보자 반색하며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도 간호사 아가씨의 안색이 안 좋아 보인 것 같다.
“채영씨,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네.”
“아니에요.”
간호사 아가씨, 채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만 내가 봐도 아닌 건 아닌 것 같다.
“아니긴 뭘. 얼굴만 봐도 뻔하구만. 무슨 일이야.”
“별 거 아니에요.”
“자기는 내 그런 꼴도 봤으면서 말 못할 게 뭐 있어. 이러고 있는 거 보니까 별 거 아닌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채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망설이던 채영은 결국 말했다.
“제가 찾은 카드요. 갖고 다니다 잊어버릴까봐서 숨겨두었거든요. 그런데 좀 전에 갔더니 없어졌더라고요. 누가 찾았나 봐요.”
“어머? 그걸 어디에 숨겨두었는데? 자기 방에 안 뒀어?”
“항상 방에 있는 것도 아닌데 거기 두면 누가 가져갈지도 몰라서…밖에 있는 작은 집 안에 숨겨뒀었거든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가지고 다니는 건데…”
채영의 말에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모르고 있었어? 방에는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못 들어가. 그러니까 방이 제일 안전한 거라고. 나는 또 채영씨가 아는 줄 알고…”
그녀의 말에 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하지만 정여사님은 아까 그 남자분이랑 같이 방에…”
채영이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중년의 부인, 정여사도 볼이 붉어졌다.
“그거야 내가 문을 열고 불러들였으니까…뭐, 꼭 그렇지 않더라도 방 주인 의사에 관계없이 문을 여닫을 때는 드나들 수 있으니까 채영씨도 조심해요.”
말하고 그녀는 멋쩍은 얼굴로 식당을 떠났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저도 모르게 안경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권호와 양철수가 싸운 직후, 성벽로 위에서 나는 채영과 안경의 남자를 봤던 것이다. 채영이 두리번거리며 집에서 나온 후에 안경의 남자는 그 집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자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황상 의심할만했다. 남자는 이쪽을 외면하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는 분명 옆모습을 보이고 있었거든. 이야기를 듣고서 고개를 돌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찔리는 게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채영이 숨긴 카드는 안경의 남자가 가지고 있다…그렇게 생각해도 될까.
채영이 숨긴 카드는 식당에서 보여줬던 그것일까? 갑옷을 입은 남자가 그려진…. 윗부분만 있어서 정확하지 않아도 나는 그것이 ‘전차’카드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림의 아래에 뭐라고 적혀 있었더라. 대충 봐서 그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아…진짜 우습네요. 여기 올 수 있는 초대장을 받았을 때만 해도 저는 보물섬으로 가는 티켓 같은 거라도 얻은 기분이었거든요.”
잠깐 눈이 마주치자 채영이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보물을 찾으면 뭘 할까. 그런 상상에 빠져서 며칠 동안 정말 행복했네요. 하하…세상에 쉬운 게 없죠. 이러려고 남편과 애를 두고 여기까지 왔나 싶네요.”
그녀는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애엄마였나 보다. 그래. 세상에 쉬운 건 없지. 내가 봐도 이 요사한 성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쉽게 내놓을 것 같지는 않았다.
“보물을 찾으면 뭘 할 생각이었어요?”
기운이 빠져 있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북돋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물었다. 상상뿐이지만, 행복한 상상이 잠시라도 이 성에서 마주친 현실을 잊게 만들지 않을까?
채영은 내 질문에 피식 웃었다.
“돈이 없지 쓸데가 없겠어요. 할 거 많죠. 더 좋은 동네 넓은 집으로 이사하고, 우리 딸 예쁜 옷이랑 인형이랑 장난감이랑 갖고 싶어 하는 거 다 사주고, 아버지 더 좋은 병원으로 옮겨드리고…새벽부터 일 하러 가는 신랑, 일 다 관두고 하고 싶은 일 하게 해주고, 나도 공부…”
말하던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상상이 무슨 소용이람…”
입술을 깨물고 눈에 힘을 주면서 애썼지만 결국 그녀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망했다. 위로하려고 했던 건데…
그러나 그녀는 금세 눈가를 훔치더니 젖은 눈으로 쑥스럽게 웃었다.
“아아, 창피하게. 그래도 휴가 이틀 날린 대신 좋은 거 배웠네요. 여기 오니까 집이 얼마나 그립고 가족들이 보고 싶은지.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식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저녁 먹을 수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겠어요.”
“그렇죠. 집이 최고죠.”
맞장구쳤으나 지금 시각은 겨우 8시 54분. 집에 가기까지 아직도 20시간은 남았다. 체감상 며칠이 될지 모르는 20시간 말이다.
그래도 채영은 내 말에 조금 기운이 났는지 전처럼 당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교 때 선생님 생각이 나네요. 얼굴도 가물가물 잊힌 분인데 선생님이 자주 말씀하시던 말씀은 아직 기억하거든요. 행복이란 손닿는 데 있는 꽃들로 꽃다발을 만드는 솜씨다. 그때는 그냥 멋있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진짜였네요.”
그 뒤로 채영은 완전히 활기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처음 성에 왔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싹싹하게 굴고 핸드폰을 꺼내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웃기도 했다. 사진 속의 그들은 보물이 필요 없을 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여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걱정이 되는 거라면 이 괴상한 성의 느려터진 시간 정도일까. 그녀가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채영의 카드를 가져갔을 것 같은 안경의 남자는 어느새 식당에서 사라져버린 후였다. 사실대로 내가 본 것을 이야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만두었다. 어차피 채영은 마음을 정리한 것처럼 보였고 잔잔해진 수면에 다시 돌을 던질 필요는 없다.
채영이 식당에서 나가고 나자 나는 백은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보물 상자의 방이 어디인지 알아? 계속 돌아다녀 봤지만 그런 곳은 못 본 것 같은데.”
백은호는 핸드폰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보물의 열쇠를 손에 넣으면 보물 상자의 방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은 원리로,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생기면 문을 찾을 수 있는 거지요.”
보물은 됐고 문이나 열 수 있으면 좋겠다.
일 때문에 여기 왔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집에 가고 싶었다. 내 편안한 침대와 유하의 음식이 그리웠다. 그녀의 요리를 먹기 시작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행복이란 손닿는 데 있는 꽃들로 꽃다발을 만드는 솜씨다.
나도 내 꽃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