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27화 (127/218)

소설가와 보물성(10)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 나는 채영이 남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 이건 생각만 한 건데요, 눈을 감으면 어디에서나 캄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눈을 감고 찾아봐요.

보물찾기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시각을 차단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럴듯하기는 했다. 내 초대장의 그림 아래에는 분명 ‘어두운 곳에서 보라.’고 적혀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어두운 곳에서 보면 빛이 난다든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으면 어디에서나 어둡다.

물론 눈을 감는 경우야 얼마든지 있다. 잘 때라든가 눈을 깜박이는 아주 짧은 순간이라든가. 눈을 감는 것만으로 카드가 보인다면 이미 누군가는 발견했겠지. 그러니 눈을 감는 것에서 그치면 의미가 없다. 문구는 분명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눈을 감고서 뭔가를 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을 크게 떠야만 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반대라는 거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시야가 까맣게 사라진다. 당연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기를 바라며 감은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한다면, 정말로 보일까?

나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음으로는 아래쪽을, 발을 옮기며 꼼꼼히 살폈다. 여전히 눈앞은 새카맣다. 그야 보일 리가 없지. 눈을 감고 있으니까. 어쩐지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지지만 나는 캄캄한 주변을, 감은 눈으로 더듬었다.

어디나 까맣다. 확실히 어둡긴 하네. 피식 웃다가 문득 생각났다. 원래 별이라는 건 하늘에 떠 있는 거 아냐?

생각과 함께 고개를 꺾어서 위를 바라보았다. 분명 눈앞이 까만데, 뭔가가 작게 빛나고 있었다. 놀라서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다시 눈을 감자 어두운 가운데 빛나는 작은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혹시나 하고 고개를 돌려서 다른 곳을 보자 거기는 아무 것도 없이 캄캄했다. 저 빛은 그러니까 착시나 시신경 쪽의 오류가 아니고 확실히 한 장소에 있는 어떤 것이란 말인데.

나는 식당을 나가 계단을 뛰어 올랐다. 층이 바뀔 때마다 눈을 감고 확인하자 빛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다. 가까워지고 있다는 거다. 나는 빛을 따라 계단을 오르다 결국 아성의 마지막 층, 깃발이 걸려있는 꼭대기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눈을 감자 식당에서는 별처럼 작았던 것이 분명한 사각형으로 보였다. 거리는 대략 10미터 정도일까?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뻗으며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사각형이 점점 가까워진다. 동시에 그 모양과 안에 그려진 그림까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황금색의 커다란 별과 하얀 작은 별들, 그리고 여자의 상체가 그려져 있었다.

틀림없었다. 별 카드의 윗부분이다.

나는 약간 조급해져서 발을 크게 내딛었다. 그 순간 무릎이 딱딱한 곳에 부딪쳤고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우왓!”

성벽의 타구에 허리가 걸린 채로 기울어지던 몸이 갑자기 멈췄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뒷덜미를 낚아챈 누군가의 손이 나를 멈추게 한 것이었다. 눈을 뜨고 돌아보자 백은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웬 소경놀이인가 했더니 자살 놀이였습니까? 그러나 죽는다고 해서 이 성을 나가게 되지는 않습니다. 여기가 꿈속이라 생각하고, 죽으면 꿈에서 깨듯 여기에서 나가게 되리라 믿은 사람이 예전에 한 명 있기는 했지요.”

백은호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럼 소설가의 저택에서 죽었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

“그런 게 아니라고. 카드란 말이야.”

나는 카드가 있는 쪽을 향하며 눈을 감았다. 보인다. 팔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이 가까운데 성벽을 붙잡고 상체를 최대한 기울이며 손을 내밀어보아도 잡을 수가 없었다. 눈을 떠 보면 카드가 있는 곳은 그냥 허공.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뛰어서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백은호가 뒤에서 잠시 지켜보더니 말했다. 녀석도 이제 카드를 볼 수 있게 된 모양이다. 그런데 그걸 누가 모르냐? 다만…

“이봐, 여기 4층이거든? 적어도 12미터 이상일 거야.”

떨어지면 운이 좋아도 복합골절이다. 재수 없으면 죽는 거고.

“그렇군요.”

성벽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며 백은호가 대꾸했다. 그리고 조금, 웃은 것 같았다. 같았다고 말하는 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웃었다 싶은 순간 시야가 매우 흔들린 것이다. 녀석의 얼굴에서 성벽까지의 정경이 휙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은 허공이었다.

“우아악!”

시야만 허공인 것이 아니다. 내 몸도 허공에 있었다. 백은호가 나를 집어던진 것이다. 75kg의 성인 남성을 어떻게 한 손만으로 가볍게 집어던졌는가는 둘째 치고, 12미터 상공에 내 몸이 있다는 말이다, 지금.

공중으로 날려간 내 몸은 아주 잠깐 중력을 무시하고 허공에 떠 있다가 이내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온 몸을 휩쓸어 올리고 눈앞으로 지면이 달려들었다. 실제로는 불과 몇 초 사이의 짧은 순간이었을 텐데 길었다. 그렇지 않아도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더 느려진 건가 생각될 정도로 길었다.

그리고 지면이 코앞에 닥친 순간 나는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움직임으로 몸을 회전해 바닥에서 굴렀다. 두어 바퀴 구른 다음 벌떡 일어났는데 딱히 아픈 데가 없었다.

뭐야. 나도 모르게 낙법이라도 쓴 거야? 사람이 위기가 닥치면 초인적인 능력이 생긴다더니 방금 그런 거였나? 어리둥절한 채로 위를 올려다보자 이쪽을 내려다보는 백은호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저 자식! 웃었어. 분명히 웃었어.

내가 동업자라고 믿고 있던 인간이 사실은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의심되었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 저 놈이었던 게 아닐까. 아무 생각 없이 녀석의 앞에서 잠들었던 것을 생각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런데 저 사이코패스가 어쩐지 이번에는 자살을 하려는 것 같다…뛰었어!

백은호가 뛰어내렸다. 마치 계단 몇 개를 건너뛰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러더니 낙법이나 다른 기술 따위는 하나도 없이, 마치 새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가볍게 땅 위에 착지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와이어 액션인데. 그런데 당연하겠지만 녀석의 등 뒤로 와이어 같은 것은 없다. 물론 날개도 없었다.

“카드를 잘 넣어두시죠.”

백은호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12미터를 일직선으로 뛰어내린 주제에 녀석은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카드라고?

녀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떨어뜨리자 과연 카드가 있었다. 바로 내 품에 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백은호 녀석이 카드를 향해 나를 집어던졌으니 말이다.

“이걸로 우리 일은 끝났으니 느긋이 문이 열리기만 기다려도 되겠군요.”

녀석이 태연히 말하고 나를 지나쳤다.

뭐야, 정말 저 녀석은…. 사람을 한 손으로 집어던지지 않나. 4층 높이에서 영화라도 찍는 것처럼 가볍게 뛰어내리지 않나.

게다가 저 녀석뿐만이 아니다. 12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한 사람이 여기 하나 더…나도 있었다.

그래. 우리는 동업자였지. 백은호도 백은호지만, 저 사차원 사이코패스와 동업자인 나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닌지도 모른다. 손에 들고 있는 카드에 대한 생각조차 잠시 잊고서, 나는 오싹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권호 같은 도사라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딱히 도술을 쓴 것도 아니잖아. 맨몸으로 이 높이에서 멀쩡하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어쩌면 나 자신이 비현실적인 존재인 건 아닐까. 햇빛을 싫어하는 거라든가…

도깨비도 있고 빛을 내는 벌레 요괴도 있으니까 뱀파이어도 있을지 모르잖아? 그런데 뱀파이어라기에는 별로 피가 마시고 싶지도 않고…. 그보다는 술이나 한 잔 했으면 좋겠다. 어쩐지 흰 사기잔에 담긴, 거기에 꽃향기까지 나는 말간 술 한 잔이 그리웠다.

그런 것이 있을 턱은 없지만 내 걸음은 식당으로 향했다. 갔더니 얄미운 사이코패스 동업자가 이미 먼저 와서 피처럼 붉은 와인을 홀짝이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얼굴을 못 본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손을 다쳤던 그 남자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카드를 훔쳐갔다면서 난동을 부린 후로 쭉 본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배가 고팠는지 식당에 와서 거기 있는 음식을 말없이 먹고 있었다.

남자는 내가 들어가자 움찔 놀라서 몸을 웅크렸다가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돌아앉았다. 손 좀 세게 잡은 거 가지고 사람을 이상하게 취급하잖아. 조금 전까지도 자신의 정체에 의문을 품고 있던 주제에 나는 마음속으로 불평했다.

그때 뒤에서 식당 문이 달칵 열리며 또 누군가 들어왔다. 아니 들어오려다 도로 나갔다. 이 안에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가자마자 문밖에서 놀라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잠깐 내 눈에 비쳤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도로 밖으로 나갔을 때 그때 보인 곳은 분명히 홀이 아니었는데…아스팔트가 깔린 길에, 차도 있고, 사람들, 그리고 건물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문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 사이로 방금 도로 나갔던 그 사람이 보였다. 이쪽으로 돌아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의 뒤에도 몇 사람이 함께 달리고 있다. 그러나 괴상한 일이었다. 그와 문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이쪽에서는 그와 배경이 되는 바깥의 풍경이 점점 멀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 달리는 그를 뒤에서 쫓는 사람들은 점점 거리가 좁혀졌다. 잠시 후 그가 쫓아온 사람들에게 잡히는 것이 보였다. 그때쯤에는 이미 문에서 까마득하게 멀어져 표정조차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외치는 목소리가, 그리고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만은 확실했다.

그 남자, 손을 다친 남자로부터 늙은 도둑이라고 불렸던 그 할아버지는 몇 명의 사람들에게 붙잡힌 채로 이쪽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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