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28화 (128/218)

소설가와 보물성(1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열쇠를 완성하고 나면 문을 열 때마다 주의해야 하지요. 문 너머의 공간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저 남자의 경우에는 나가는 문이었군요.”

사이코패스 동업자가 일어나 다가오면서 말했다. 노인이 자기도 모르게 나가버렸던 그 거리의 풍경은 이제 그림처럼 흐릿해졌다. 문 밖은 점점 예전의 모습인 1층의 홀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다가온 백은호가 무릎을 굽혔다. 그가 문 앞에 떨어진 것을 주우며 씩 웃었다.

“카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카드였다. 위쪽의 그림이 비어있는 불완전한 상태의 카드다. 푸르스름한 피부의 사람들이 네모난 상자 안에서 일어나 위쪽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분명 관속에서 시체가 일어나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저것은 심판 카드의 아래쪽이었다.

“사람이 밖으로 나가니 갖고 있던 카드는 여기에 남겨졌군요.”

심판 카드가 남겨져 있었다면 문의 열쇠가 된 카드는 역시 그거였을까? 손을 다친 남자로부터 훔쳤다고 의심받고 있는 카드, 매달린 남자.

기껏 카드를 훔쳐서 완성한 열쇠로 본의 아니게 성에서 나가게 되다니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열린 문 바깥에서 그 할아버지가 만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빚쟁이라도 되는 것처럼 쫓아와서 붙잡던데.

생각에 잠겨 있던 내 시야에 누군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노란 머리는 잘못 보래야 잘못 볼 수 없는 조영석이다. 그가 홀을 가로질러 달려가면서 나를 봤는지 손을 흔들었다.

“밖에서 싸움 났어요. 도사 아저씨 들킨 것 같네요.”

유쾌하게 알려주더니 그는 신난 얼굴로 뛰어나갔다. 도사 아저씨라고 하면 권호를 가리키는 것 같다. 양철수의 카드를 뺏어서 도망간 후로 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결국 들켰나보다.

조영석 말고도 몇 명이 뒤따라갔다. 거기에는 백은호도 끼어 있었다. 싸움 구경은 사차원 사이코패스도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다.

밖에서는 과연 권호와 양철수가 한바탕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권호는 나비를 몰고 다니며 그것을 이용해 눈을 어지럽히거나, 눈속임인지 도술인지 구분이 안 가는 방법으로 양철수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양철수 쪽은 그야말로 몸으로 때우는 타입이었다. 그의 발길질에 벽돌을 쌓아 만든 굴뚝의 한 귀퉁이가 완전히 부서져 버리는 것을 보니 놀라운 한편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여기 나 말고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생물학적으로 상식을 말아먹은 것 같은 이런 인간들이 의외로 많은 게 아닐까. 그 많은 사람 중 하나가 나라고 생각하면 조금 걱정이 덜 된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 같은 두 사람을 구경하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나도 별로 고상한 인격자는 아닌 것 같은데. 과연 사차원 사이코패스와 동업할 만한…

‘어…?’

녀석이 없다. 분명 나보다 먼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봤는데. 백은호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내 시선이 문득 조영석에게 멈췄다. 그는 아성으로 들어가는 계단 가장 위쪽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싸움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라도 보듯이 입을 벌리고 멍청한 얼굴로, 싸우는 두 사람과 그들을 구경하는 우리 모두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티브이 같은 것을 집중해서 보는 사람 특유의 바보 같은 얼굴이 사라졌다. 아니, 조금은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도 같고. 날카로워진 것도 같고…

그가 갑자기 눈동자를 빨리 움직여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우!”

나직한 외침과 함께 그가 일어났다. 일어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 자리에서 단숨에 아성의 거의 꼭대기까지 떠오른 그가 뱀처럼 몸을 휘어 4층의 작은 창 안으로 쑥 들어갔다.

빨려 들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잠시지만 그 몸이 길쭉하게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싸움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봤고, 동시에 그가 한 말도 들었다. 여우. 여우라는 단어를 여기 온 뒤로 두 번째 마주쳤다. 첫 번째가 뭐였지? 여우. 흰 털의 여우.

생각이 났다. 권호가 가지고 있던 카드 아래에 쓰여 있던 문구다. 흰 털의 여우.

백은호는 카드 아래의 문구가 카드의 짝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힌트라고 했다. 그런데 권호가 가지고 있던 카드의 짝은 백은호가 갖고 있었으니까…그러니까 흰 털의 여우라는 건 백은호를 가리키는 힌트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방금 조영석도 누군가를 찾는 듯이 두리번거리더니 여우라고 말하며 급히 가버리고. 그리고 여기에 있어야 할 백은호는 어디론지 사라졌고.

그 모든 생각이 눈 깜박이는 순간에 휘몰아치듯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생각보다 먼저 내 몸은 홀 안에 뛰어들어 계단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조영석이 간 곳에 백은호가 있다. 그리고 백은호는 조영석의 뭔가를 노리고 있다. 그것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깨달은 것 같았다.

4층에 닿기도 전부터 머리 위에서 뭔가 무거운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조영석의 것으로 생각되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그 순간 4층에 들어선 나는 복도 양편의 방 네 개 중 하나가 열린 것을 발견했다.

아니 열렸다기보다는 부서졌다고 해야 하나. 문 왼쪽의 벽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이다. 허리를 숙이거나 몸을 틀지 않고 방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었다.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폭풍이 한바탕 휘몰아친 것처럼 모든 물건이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백은호와 조영석이 어지러운 방 안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서있었다. 백은호는 늘 보던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조영석은 달랐다.

가볍고 까불대는 유쾌한 청년의 표정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백은호를 노려보는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뭔가를 한 겹 뒤집어 쓴 것 같았다.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가질 수 있을 리 없는 깊고 복잡한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백은호 역시…겉보기에 30대 초반 정도이면서 그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묘한 구석이 있다.

“바로 이거군요. 그 소문만 무성하던 대단한 보물이.”

약간은 감탄한 목소리로 백은호가 말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양장본이 한 권 들려 있었다.

“과연,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책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할 때의 백은호는 어딘지 굶주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백은호라면 왠지 저 두꺼운 하드커버를 비스킷처럼 씹어 먹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인데도.

책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백은호, 무슨 일이야.”

일단은 백은호가 저 책을 손에 넣기 위해 방문을 부수고 들어온 걸로 보인다. 하지만 저건 카드도 아니고, 이 방은 또 누구의 방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투성이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보시다시피 보물찾기입니다, 도령.”

백은호가 대답했다. 조영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는 규칙을 어겼다, 여우.”

그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나직했다. 그래서인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말투조차 바뀌었다.

“벽을 부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던가요?”

백은호가 태연히 물었다. 조영석의 볼이 움찔거렸다.

물론 그런 규칙은 없었다. 하지만 문이 안 열린다고 벽을 부수고 들어가다니 그런 걸 보통 사람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보물은 열쇠로 얻는다. 그것이 이곳의 규칙이다.”

조영석이 대답했으나 백은호는 얕보는 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당신이 미끼로 뿌려놓은 하찮은 보물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보물처럼 감추고 있는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것을 가져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든 백은호의 손이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 손이 향하는 곳을 보고 조영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것을…!”

“이 성 안의 물건은 초대받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지요. 음식을 먹거나 버리거나, 물건을 쓰거나 부수거나, 책을 읽거나 태우거나 자유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벽난로의 불 위로 책을 가져가며 백은호가 말했다.

확실히 성 안의 물건을 훼손하면 안 된다는 주의는 들은 적 없다. 하지만 백은호는 왜 저 책을 태우려고 하는 걸까. 저 책은 뭘까. 그리고 조영석은…?

“그 책이 도대체 뭔데 그래?”

무엇보다 궁금한 질문을 먼저 던졌다. 백은호의 단정한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이것은 입장료입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조영석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보물을 찾으면 가져갈 수 있는 권리를 얻습니다. 세금이니 뭐니 하면서 조금 떼어가는 건 우스운 수준이지요. 하지만 찾기만 하면 보물의 주인이 된다니 터무니없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정말로 믿는 건 인간뿐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는 것도 인간뿐이지요. 대개의 경우 말입니다.”

대개의 경우가 아닌 특별한 경우에는 인간 말고 뭐가 오는데? 묻고 싶었지만 지금 그걸 물을 타이밍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입을 다물고 백은호가 계속해서 하는 말을 들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야박해진 인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규칙입니다. 세상의 규칙은 절대 한쪽으로만 고이지 않습니다. 주는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줘야 합니다. 그것이 세계를 유지하는 큰 규칙 중 하나인 균형이지요. 누군가 여기에서 보물을 가져갈 권리를 얻었다면, 그 권리만큼의 대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지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불한 대가가 저 책이라는 말이다.

“아시겠습니까? 이 책 안에는 도령이 지불한 대가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참지 못하고 묻자 백은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인간의 정기(精氣)입니다.”

정기? 그…전설에서 여우 요괴 같은 게 사람한테서 뺏어가려고 하는 그 정기?

내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백은호가 나를 보며 요사하게 웃었다. 여우처럼.

“상상하시는 그 비슷한 것입니다. 인간이 열두 명. 보물에 대한 강한 욕망을 품고 들어와서 불사르는 듯한 열정으로 자신을 태우며 온 성안을 돌아다니지요. 이들이 내뿜는 정기를 모아서 응축하여 한 장을 이루고, 그것이 십 수 년 동안 쌓여 책이 된 것입니다. 태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것입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일은 확실히 처리해야 하니까요.”

“일?”

“예. 그러고 보니 아직 말씀을 드리지 않았군요. 제가 맡은 일은 여기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책을 찾아서 없애는 것입니다.”

뭐?

“보물 찾으러 온 거라면서?”

“물론 보물을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나가려면 문의 열쇠가 필요하니까요. 보물을 얻으면 문의 열쇠와 교환할 수 있고 말입니다.”

뭐야, 이 사기꾼은. 나 동업자 맞아? 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죄송하지만 도령은 포커페이스가 불가능해서 말입니다. 미리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백은호가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그…내가 포커로 30분 만에 포도 한 송이를 잃은 전력이 물론 있기는 한데…

내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안 조영석이 한발, 백은호에게 다가갔다.

“그것이 인간의 정기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우겠다고? 여우, 네가?”

조영석이 물었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조소가 배어 있었다.

“무릇 여우란 것들은 인간의 정기에 환장하여 그것을 얻기 위해 인간과 엉키는 것을 서슴지 않는 족속이거늘. 침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태우겠다고? 태워서 없애겠다고? 네 눈으로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으냐? 십 수 년 동안 수백 명으로부터 얻은 정기를…”

퍽 - 하고, 장작에 양장본의 딱딱한 커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로 안에서 주황색 불티가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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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와 보물성(12)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비명이, 아니 포효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울부짖음이 조영석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인간의 성대로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음파가 내장을 진동했다. 고출력의 스피커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성 전체가 그 소리에 한바탕 부르르 떠는 것 같았다.

아니, 떨고 있는 것은 조영석이다. 자신이 낸 소리가 내부에서 진동하는 것처럼 그의 몸이 떨었다. 떨 뿐 아니라 변하고 있었다.

피부에서 오돌오돌 비늘이 돋고 머리는 짐승의 것으로 바뀌었다. 머리뿐만이 아니다. 마치 머리와 다리를 잡고 위아래로 쭉 늘이듯 그의 몸이 길쭉해지기 시작했다. 손이 사라지고 발은 뾰족한 꼬리로 변했다.

푸른 비늘을 번득이는 등과 하얀 배, 그 긴 몸을 감아 도사리고 있는 모습은 뱀 아니 그보다는 이무기와 같았다. 멀쩡한 사람이었던 조영석이 몸통이 한 아름은 될 것 같은 이무기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무기냐고 묻는다면 단정 지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무기란 결국 커다란 뱀이다. 그러나 눈앞의 이것은 뱀보다 들짐승에 가까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뿔과 긴 수염, 짧은 다리만 더해주면 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복도 쪽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왔다가 구멍 너머로 조영석이 변하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지만…백은호가 웃고 있었다.

저 사기꾼 사차원 사이코패스가 태연히 웃고 있는 것을 보자 어쩐지 두려움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기에 온 이후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이 성에 온 사람들 중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지만, 정작 위험이 닥치자 이 괴상한 성 안에서 녀석이 있는 장소보다 안전한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손이 뜨거워서….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었지요?”

백은호가 천연스럽게 묻는다. 조영석은 아니, 이제 이무기 비슷해진 그는 백은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노란 눈자위는 난로 안에서 불타는 책을 향하고 있었다. 불길이 책의 표지를 핥으며 가장자리로부터 까맣게 태웠다.

보통의 책이라면 나무장작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속지까지 타들어 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것은 달랐다. 노란 불꽃이 흰 속지에 닿는 순간, 책은 오히려 불을 뿜어내듯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마치 기름이라도 적셔진 것 같았다.

그것을 그는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고, 백은호는 아쉬운 얼굴로 외면했다.

[어떻게…너는 여우이면서…]

푸르스름한 비늘이 돋은 짐승의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야말로 원래의 먹이는 인간의 정기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이지 않았던가요, 미비여.”

백은호가 대꾸했다. 방금 생소한 이름을 들은 것 같다.

“미비…?”

“영노라고도 하는 이무기입니다. 그 모습은 용을 닮았으나 결국 뱀이며, 인간을 잡아먹는 요괴일 뿐이지요. 아무나 잡아먹지는 않고 죄 지은 자나 탐욕스러운 자를 노려서, 대다수의 인간들에게는 영물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는 것도 같지만 말입니다.”

내 중얼거리는 듯한 질문에 백은호가 담담히 대답했다.

죄가 있는 사람만을 잡아먹는다면 나쁜 요괴가 아닌 거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게다가 이 미비는 인간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정기를 빼앗을 뿐이다.

“그런데도 원한은 똑같이 쌓인 것 같군요. 내 의뢰인은 보물을 찾아내 당신의 눈앞에서 없애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백은호가 덧붙여 말했다.

[어째서? 어째서!]

미비가 갑자기 외쳤다.

[누가 무엇 때문에 내게 원한을 품는단 말이냐! 나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나는 공정했다. 내가 가져간 것은 고작해야 한 줌밖에 안 되는, 없어진 것도 깨닫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채워질 정기일 뿐이야! 오히려 그들은 이곳에서 쉽게 손에 넣지 못할 보물을 찾아서 떠나지 않느냐! 누군가 해를 입었다면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욕심과 더러움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이곳에 와서 자의로 판단하고 결정했다. 그러니까 그 결과 역시 자신의 책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비의 말이 정말로 옳은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알 바 아니지요.”

백은호가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이럴 때 보면 미비보다 저 녀석이 더 요괴 같다.

미비는 백은호의 말에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이성이 아예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똬리를 틀고 있던 커다란 몸이 마치 화살을 쏜 것처럼 백은호를 덮쳤다. 이무기에 비하면 연약하게 보이는 그의 날렵한 몸이 커다란 몸통에 친친 감겼다.

잠시 백은호의 모습이 뱀의 몸통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분명, 그 커다랗고 긴 몸을 우습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백은호의 차가운 눈이었다.

우둑, 하고 뭔가 어긋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그것이 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스프링처럼 촘촘하게 백은호를 감고 있던 이무기의 몸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풀어졌다. 긴 몸통이 벽과 바닥에 부딪치며 나가떨어진다. 그러나 나는 나뒹군 이무기가 아니라 조금 전까지 ‘백은호였던 것’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절대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짐승의 모습을 한 것이, 그러나 짐승이되 동시에 짐승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오연히 서 있었다.

눈처럼 희고 긴 털, 넘실거리는 꼬리는 아홉 개. 길고 날렵한 몸통과 주둥이가 뾰족한 머리는 분명 여우를 닮았다. 그러나 말에 육박하는 크기와 있을 리가 없는 아홉 개의 꼬리는 이것이 절대로 동물도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짐승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 말할 것도 없이 구미호였다. 백은호가 구미호였다.

구미호로 변한 백은호가 눈을 내리뜨며 쓰러져 있는 미비에게 말했다.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말했듯이 내 목적은 책을 불태우는 것이고, 의뢰인 역시 당신이 죽어버리면 의미가 없다고 하더군요.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의뢰인의 원한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일은 일이니까요.”

구미호로 변했어도 얕보는 듯한 녀석의 태도와 말투는 변함없었다. 미비가 꿈틀거리면서도 고개를 쳐들었다. 노란 눈 위로 분노가 번들거렸다.

[나를 죽이지 않고 무사할 것 같으냐. 여기는 내 굴이다. 이 안에서 영원히 시간이 멈춘 채로 하루가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 나를 죽여도 여기에서 나가지 못할 수도 있지. 구미호야. 구미호야. 네가 내 굴 안에 있으면서 언제까지 그렇게 오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미비의 말에 나는 약간 두려워졌다. 이미 이곳은 바깥에서와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저 미비가 이곳의 주인이라면 훨씬 느리게 시간이 흐르도록 만들거나 아예 멈춰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절대로 끝나지 않는 하루라니…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그러나 백은호는 태연했다. 여우의 얼굴인데도 나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글쎄요. 당신은 공정하니 이곳은 여전히 규칙에 의해 움직이겠지요. 요컨대 우리에게 문을 여는 열쇠가 있으면 언제라도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야, 그건 무리지. 일단 대리인은 문의 열쇠를 찾기도 힘들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냐? 운 좋게 다른 사람이 문의 열쇠를 구한다면 내 카드와 바꿀 수도 있겠지만 만일 못 찾으면?

“도령. 아직 카드를 완성하지 않았겠지요? 지금 해보십시오.”

백은호가 나를 향해 말했다.

뭐? 이 와중에?

지금이 그럴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녀석은 진지한 것 같다. 나는 품 안에서 내 초대장과, 탑 꼭대기에서 던져지며 손에 넣은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두 개의 그림을 맞추었다. 물병을 기울여 물을 따르는 여자 위에서 여러 개의 별이 빛나고 있는 그림, 별 카드가 완성되었다.

“이제 문을 여십시오.”

카드가 완성되자 백은호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우리는 그 문으로 나갈 겁니다.”

뭐야. 진심이야? 이 카드가 문을 여는 열쇠라고 생각하는 거야?

“대리인은 문의 열쇠를 못 찾는다면서?”

스스로 그렇게 말했었다. 설마 그것도 거짓말이야?

“대리인은 보물을 찾아야 대가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당연히 문의 열쇠가 아니라 보물을 찾기 바라는 법이지요. 그러나 도령도 그랬습니까?”

백은호가 내게 물었다. 나?

“나는…”

나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채영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내가 바라던 것은 이 괴상한 성의 보물이 아니었다.

찾는 사람의 의지가 열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이 열쇠로 연 문의 너머에는 분명…

나는 문을 밀었다. 벽이 부서지면서 이미 경칩이 흔들거리고 있던 문은 조금 삐걱거리다가 아예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떨어져나가며 밖이 보였다. 밖은 캄캄했고 가까이서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보였다.

멀리서 찻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좁은 도로는 한적하니 고요했고 도로 옆의 건물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이 낯선 어딘가의 풍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끌어당겼다. 당겨지는 것처럼 나는 문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발밑으로 하얀 여우 한 마리가 따라 나왔다. 꼬리는 하나뿐이지만 그것이 백은호라는 것을 나는 거짓말처럼 알아차렸다.

밖으로 나와서 돌아보자 우리가 방금 빠져나온 그 공간이 허공에 맺힌 채로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미비가 머리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지만 거의 들리지 않았다. 미비의 굴은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역시, 도령을 데려간 보람이 있군요.”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백은호가 말했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기꾼 여우요괴 동업자를 나는 조금 질린 채로 쳐다보았다.

“나를 데려간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어?”

“예. 도령이라면 반드시 문의 열쇠를 찾아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끝내도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남의 굴에 들어갈 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이런 녀석이었다. 이 녀석이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잠깐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요괴라면 지금까지의 태도가 이해가 된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요괴를 동업자로 삼고 있는 나일까. 아니지. 내 집 창고에서 도깨비가 하숙하는 마당에 요괴 동업자쯤이야…

아주 잠깐 혼란한 뒤에 나는 ‘백은호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요괴였다’라고 인정해버렸다. 이 요괴는 짜증나는 녀석이지만 어쨌든 위험한 것 같지 않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조영석이 미비…그 성의 주인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 질문에 백은호가 씩 웃었다.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을 말입니다.”

“너는 쭉 식당에만 있었잖아.”

식당에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지. 어어…도대체 핸드폰으로 뭘 보고 있었던 거야?

“어쨌든 덕분에 수월하게 나왔군요. 감사드립니다.”

백은호는 제대로 대답해 주지도 않고 그렇게만 대꾸한 다음 휙 돌아섰다. 이봐, 입으로만 감사하고 튈 셈이냐. 내 수고비는? 녀석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으나

“도령은 보물을 찾지 못했으니 받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라는 대답이나 들었다. 아니, 내가 찾은 게 문을 여는 열쇠인 건 사실이지만…

내가 할 말을 찾는 동안 백은호는 휭 하니 사라져버렸다. 저 여우같은…아니 여우가!

나는 잠시 백은호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그것도 곧 그만두었다. 녀석 때문에 짜증내기에는 피곤했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잖아. 자야 할 시각이다. 그리고 나는, 황량하기 짝이 없지만 잠들기 좋은 침대가 있는 방을 하나 알고 있다. 덤으로 위층에는 요리 실력이 좋은 가사도우미가 살고 있었다.

“다녀왔어.”

누군가 대답해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내가 말했다.

“어서 오세요.”

기대하지 않은 목소리가 나를 맞았다. 늦은 밤인데 유하는 작업장에 있었다. 계단 위쪽의 조명등 아래에서, 은은한 불빛을 받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깨비와 함께 살고 여우 요괴와 동업자인 나라면, 위층의 가사도우미는 어떤 사람인 걸까. 문득 궁금했지만 내 인사에 누군가 반응해줬다는 반가움이 그것을 덮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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