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29화 (129/218)

리코더의 요정(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유하 언니! 이거 좀 고쳐줄 수 있어요?!”

다급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생각과 다른 목소리이기도 했다.

수리점 출입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리고 무거운 발소리가 쿵쿵 들이닥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방금 들어온 사람이 둘 중 하나이리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이 죽도록 다급한 누군가이거나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돈을 빌린 다음 이자도 못 갚고 있는 사채업자이거나.

그런데 뜻밖에 여자였고, 뭐 꾀꼬리 같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나이도 어린 것 같았다. 10대 중반 정도? 우렁찬 목소리로 보아 몸집도 좋을 것 같고.

마침 창고에서 먼지투성이의 쓸모없는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던 나는 목소리만 듣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일단 열려있던 창고 문을 슬며시 닫았다. 왜 보관하는지 모를 이상한 물건들만 있는 창고였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일 곳은 절대로 아니었다.

혼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공이라든가 나비라도 되는 것처럼 팔락팔락 날아다니는 부채를 뭐라고 설명할 거야. 영감 도깨비는 적어도 사람처럼 생기기라도 했지. 물건의 모습을 하고서 돌아다니는 도깨비들이 창고에 우글거리는 걸 알면 요괴 때문에 오는 손님은 몰라도 유하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잠시 후 유하가 내려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하가 뭐라고 조곤조곤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예? 아저씨 왔어요? 와아, 진짜. 몇 달 만에 온 거예요? 어디 있어요? 2층에?”

목소리 큰 여자애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아저씨? 몇 달 만에 돌아와? 2층? 이건 분명히 내 이야기 같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는 거다.

반가운 것보다 먼저 긴장감이 느껴졌다. 저쪽에서는 나에 대해 알지만 나는 기억이 전혀 없다.

창고 밖으로 나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이쪽으로 왔다. 그리고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어쩐지 상상한 그대로의 모습을 한 소녀가 서 있었다. 통통한 얼굴에 건장한 몸집을 한 중학생 여자아이. 딱 그대로다.

“우아, 아저씨 완전 오랜만. 근데 외국 갔다 왔다면서 하나도 안 변했네요.”

내가 잠든 동안 외국에 가 있었다는 핑계를 댔다고는 들었다. 그런데 외국 갔다 오면 머리가 노래지고 눈이 파래진다니? 안 변한 게 뭐?

“맡길 물건을 가져왔는데 제가 고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무슨 말이라도 했다가 실수하기 전에 유하가 대화를 가로챘다. 말하며 그녀가 내민 것은 검은색 리코더였다. 문구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흔해빠진 교육용 교재인 플라스틱 리코더다.

유하는 이 수리점에 맡겨지는 보통 물건들, 예컨대 오래 된 티브이라든가 싸구려 선풍기라든가 그런 것들을 주로 맡고 있었다. 꼭 전자 제품이 아니라도 다리가 삐걱거리는 의자나 금이 간 물건 같은 것도 감쪽같이 고쳤다.

그러니까 그녀가 고칠 물건이 아니라면 이 리코더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금이 간 것도 아니고 어디가 부서진 것도 아니고….

“아저씨, 빨리 고쳐줘야 해요. 저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학교 가야 하거든요. 안 그래도 몰래 빠져나왔는데. 5교시 음악이라 그때 이거 써야 해요.”

“리코더 어디가 문제인데?”

유하는 언니인데 왜 나는 아저씨냐는 질문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소리가 안 나요. 분명히 지난주에는 소리가 잘 났었는데 오늘 불어보니까 소리가 안 나는 거예요. 어디 깨진 것도 아니고 막힌 것 같지도 않은데.”

내 눈에도 리코더는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취구에 입을 대고 살짝 불어보자 바람만 휭 하니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정말로 소리가 안 나네. 마치 리코더가 아니라 빨대를 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리코더의 구조상 특별히 구멍을 막거나 하지 않아도 소리는 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파이프에 입을 대고 부는 것처럼 바람이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내가 이 물건을 맡아야 하는 이유이겠지.

“어디가 고장인지 알겠어요?”

내가 리코더를 들여다보고만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여자애가 조급하게 물었다.

“모르겠는데.”

“예에?”

내 대답에 여자애가 난색을 보였다.

“5교시에 쓸 거란 말예요. 아 정말, 이제 20분도 안 남았는데.”

그건 네 사정이고.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리코더를 들고 와서 20분 만에 정상으로 만들어 놓으라는 주문이 무리 아니냐?

“아아, 몰라. 리코더 아니면 단소도 되니까 그냥 집에 가서 단소 가져 올래요. 아저씨, 이거 고쳐놔 주세요. 하교할 때 올게요.”

여자애는 재빠르게 포기해 버리고 쿵쿵거리며 달려 나갔다. 그런데 하교할 때까지 고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른다니까. 그리고 난 아저씨가 아니라…

그러나 내 생각이 끝을 맺기도 전에 이미 여자애는 사라졌다.

“쟨 뭐야?”

걱정될 정도로 세게 닫혀서 녀석이 떠난 후로도 아직 부르르 떨고 있는 문을 보며 내가 물었다.

“수영이라고, 근처 아파트에 살아요. 수호란 오빠도 있고요. 둘 다 가끔 여기 놀러 와요. 수호는 3학년이 되어서 요새 바쁜지 잘 안 오지만요.”

유하가 대답했다. 내 집에 왜 중딩 아이들이 놀러 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나 의외로 애들이랑 친했나?

유하는 대답해주고 바쁜 듯이 곧 위층으로 가버렸다. 그녀는 늘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바빠서 대화를 할 수 없는 걸까, 아니면 대화를 할 수 없도록 바쁜 걸까.

하지만 바쁘지 않다고 해도, 그녀에게 할 말이란 질문뿐일 테니까 그것은 대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렵네.”

뭔지 몰라도 그녀에 대해서는 쉬운 데가 전혀 없었다.

자, 그러면 이 물건은 어떨까. 쉬울까? 어려울까.

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생김새나 무게나 감촉이나 어떤 면에서도 평범해 보이는 리코더를 손위에 올려놓고 내려다보았다. 여자애, 수영이의 말에 의하면 지난주까지 아무 문제없이 사용했던 리코더다. 그러니 뭔가 달라졌다면 지난 일주일 사이겠지.

그 일주일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학생들에게 이런 악기라는 것은 보통 학교에서 음악시간에나 좀 사용하고 집에 오면 책상 위에 던져놓은 다음, 다시 음악시간이 될 때까지 거들떠도 안 보는 거잖아. 그러니까 본인 외에 누가 손 댈 일도 거의 없고. 집 밖으로 나갈 일도 없고.

방안에 얌전히 방치되고 있던 리코더에게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건 기껏해야 너무 오래 사용하지 않은 나머지 먼지가 좀 낀다거나 플라스틱이 변색된다거나 하는 정도 아냐? 그 정도 일로 소리가 안 나는 것을 넘어서 취구로 들어간 공기가 시원하게 빠져나가는 경우는 생기지는 않는다고.

그렇다면 내 전문인 무슨 요괴 같은 것의 조화인가 싶지만, 리코더에 장난치는 요괴가 있었나? 애초에 요괴에 관한 지식도 별 볼 일없는 내 머리로 기껏 생각해 봐야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결국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던 리코더를 작업 선반에 내려놓고 방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건 고민하지 말고 인터넷 검색.

그러나 막상 검색해 봤더니 나오는 거라야 애니메이션이라든가 게임 안의 요괴라든가 그 정도다. 오래 된 악기라면 도깨비가 깃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리코더라는 건 만들어진지도 몇 년 안 되었을 테고, 겉이 반질반질하니 흠집이 거의 없는 걸로 봐서 산지도 얼마 안 된 것 같다.

인터넷 검색은 성과가 없었지만 도깨비라고 하니 생각나는데, 어쩌면 영감 도깨비가 뭔가를 알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작업장으로 갔으나 당황할 일이 생겼다. 작업 선반 위의 리코더가 사라진 것이다. 바닥에 굴러 떨어졌나? 아닌데. 누가 들어와서 기껏 리코더를 들고 갔을 리는 없고.

유하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온 적도 없단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만 20분쯤 작업장 구석구석을 뒤지고 나자 내 쪽에서 곡소리를 내고 싶어졌다. 어디로 간 거야?!

나도 모르게 2층으로 들고 갔던 것은 아닐까 하고 내 방도 샅샅이 뒤졌으나 없다. 수리해달라고 맡긴 물건을 10분 만에 잃어버리다니 이 노릇을 어쩐담. 그냥 새로 하나 사서 줄까? 5천원정도면 살 수 있을 것 같이 생겼던데.

신용에 문제가 생기는 것에 비하면 5천원 손해쯤이야…·

내 결론이 대충 그쪽으로 가닥이 잡히는데 바로 그때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피리소리였다.

피리라고 해도 재질에 따라 그 소리차는 미묘하게 다른 법인데 내가 들은 것은 맑고 가벼우면서 울림이 얇은 것이 나무나 금속은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가자 소리는 점점 크고 명확해졌다. 창고 쪽이었다. 어쩐지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했다. 게다가 문이 조금 열려 있다.

수영이 녀석이 왔을 때 내가 문을 제대로 안 닫고 나왔던가?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문안의 광경을 보게 되자 머릿속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가득 찼다. 거기에는 평소의 창고와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부가 뭔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은 아니다. 미로처럼 놓인 선반도, 그 위의 물건들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우선은 공기가 달랐다. 안의 온도는 서늘한데도 묘하게 덥혀진 바람이 불고 있었다. 조명도 바뀌었다. 창고 안의 백열등을 켜놓지도 않았는데 커다란 불이 지펴져서 안을 밝히고 어둑어둑한 허공으로 푸른 불덩어리가 휙휙 날아다녔다.

뿐만 아니라 불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목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웃음소리, 이야기 나누는 소리, 노랫소리, 그 위에 맑은 피리소리가 있었다. 피리소리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이 보이고 몽당 빗자루나 부지깽이 같은 것이 혼자서 까닥까닥 움직였다.

나는 철제선반 사이로 드러난 그 요사하고도 흥겨운 광경을 숨을 죽이며 훔쳐보았다.

사람 모양을 한 것들 사이로 술잔이 돌고, 화로에서 불꽃이 피어올라 허공에 짐승이나 물건의 모양을 만들고는 했다. 남녀의 모습을 한 것들이 서로 껴안고 희롱하며 웃었다. 그 사이를 연기처럼 보이는 흐릿한 형체가 슬금슬금 돌아다닌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그들 사이에서 마주보며 피리를 부는 두 사람이었다.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그 겉모습은 사람과 닮아 있었다.

옥색의 예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와 고동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다. 남자는 갓 잘라온 대나무로 만든 것같이 파란 대금을 연주했고 여자는 흔해빠진 모양을 한 리코더를 불고 있었다. 저 리코더. 저거. 저거잖아.

나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 리코더다. 수영이 녀석이 맡긴 바로 그것. 그리고 30분 동안 내가 정신없이 찾아다닌 바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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