땜빵 외전 - 첫만남(백은호와 무진산군편)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살갗을 찌르는 태양의 열기, 귀를 찌르는 매미 소리, 눈을 찌르는 햇빛.
‘도대체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하늘은 얼룩 하나 없이 푸르고 그 한가운데에서 태양이 무시무시한 빛과 열을 오직 현준에게만 퍼붓고 있었다. 이건 정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많은 사람들이 이 폭염 속에서 덥지도 괴롭지도 않은지 웃으며 이야기하며 산에 올라갈 리가 없잖은가.
‘더워 죽겠네. 바람도 안 불어.’
숨을 헐떡이고 비 같은 땀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현준은 무거운 발을 옮겼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집에서 시체놀이나 하든지 에어컨 빵빵한 피시방 같은 데서 죽치고 게임이나 하는 건데 내가 미쳤지 무슨 생각으로 산에 왔담. 게다가 혼자서, 손에 든 것, 등에 진 것 하나 없이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무등산에 오르다니. 아니 주머니에 집에 갈 차비는 있나?
‘아…저 나무 그늘에 쓰러져서 자고 싶다.’
그린 것처럼 멋진 자태로 기우듬히 자라난 소나무를 현준은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몸은 생각과 달리 한발 한발 정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힘들어도 걸음은 빨랐다. 아니 빨라서 힘든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왜 산에 왔지? 분명 밥 먹고 나서 선풍기 앞에 드러누워 속옷 바람으로 아침잠을 때리고 있었는데. 아, 옷이나 입으라는 어머니 잔소리를 듣고 뭔가 대충 주워 입은 뒤 다시 잔 것 같다. 아니 자다가 무슨 목소리를 들은 거 같기는 한데…. 그런데 깨어보니 산이었다는 말이지. 산에 오다니. 이 더운 여름날에. 내가 왜?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두고 내려가고 싶은데 몸은 힘든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꾸역꾸역 정상을 향해가는 것이다. 숨은 턱에 차고 무릎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슬리퍼 신은 발은 여기저기 부딪쳐 멍과 생채기투성이였다. …슬리퍼를 신고 왔다는 거냐. 아놔 정말 미치겠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앞뒤의 등산객들도 어느새 멀어지고 그만 외따로 남아있었다. 길은 아까보다 좁아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풀도 무성하게 자랐고.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코스인가? 비온 뒤끝이라 그러겠지.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쯤일까. 산이라곤 어렸을 때 싫다는 걸 억지로 두어 번 끌려온 뒤로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그였다.
등산이라니. 힘들여 시간들여 고생하는 짓을 뭐 하러 한담. 그 시간에 잠이라도 자면 몸이라도 편하지. 아 그러니까 좀 집에 가자.
우뚝 -
갑자기 발이 멈춘다. 돌아가려고 멈춘 것은 아니었다. 뒤에 누군가 있었기 때문이다. 확인하려고 돌아본 순간 몸이 움칫 굳었다. 젊은 남자였다. 훤칠한 키에 부드러운 이목구비가 멀리서 봐도 퍽 호감이 가는 외모였다. 위협적인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데 그 남자를 발견한 순간 몸은 사나운 짐승을 본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인사를 보냈다. 등산객 사이의 가벼운 인사 같은 것이겠지만 그 순간 현준의 발은 등산로를 벗어나 잡목 사이로 뛰고 있었다.
“이봐요! 잠깐…”
남자가 뒤에서 뭐라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달아나야 한다고, 저 남자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거칠게 쉰 숨에 목이 아프다. 나뭇가지에 쓸린 피부가 따갑고 돌부리에 채인 발톱이 얼얼했다. 신발 한 짝은 어디선가 벗겨져 버린 것 같다. 연한 발바닥을 돌과 나뭇가지가 찔렀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남자가 뒤따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젠장! 이거 뭐야?’
현준은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뒤따라오는 남자와 앞에 펼쳐진 거친 산길을 번갈아보았다. 이렇게 죽을 정도로 달려본 게 언제였지? 폐가 찢어지는 것 같다. 아니 정말 이러다가 진짜로 죽는 거 아냐? 저놈은 대체 뭐길래 날 쫓아서…아니 그보다 나는 뭐가 무서워서 이렇게 죽도록 도망가는 거야?
“우왁!”
뒤를 돌아본 순간 뭔가 발에 걸렸다. 현준은 달리던 속도로 사정없이 나뒹굴어 버렸다.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누군가 등을 꽉 찍어 누르고 있었다. 쫓아오던 남자인가? 꽤 멀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왔지? 버둥거리며 휘저은 손에 뭔가 부딪쳤다. 단단하지만 나무나 돌은 아니다. 게다가 털이…털…?
“크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엎드린 채로 눌려있는 현준은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등을 누르고 있는 것은 사람의 발이 아니다. 왼손에 부딪쳤던 것도 사람의 다리는 아니다. 부스스한 은색 털이 곁눈에 얼핏 비쳤다. 뭐지? 큰 개? 아니면 늑대? 흰 멧돼지? 그런 것도 있나? 무등산에 이정도로 큰 짐승이 돌아다니나? 그런 사고가 있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잖아. 아니 있었나?
정신을 못 차리는 현준의 귀에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달려오고 있다. 다른 등산객일까? 도와달라고 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마디라도 하는 순간 등을 누르고 있는 뭔가가 목덜미를 콱 물어버릴 것만 같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현준은 벌벌 떨며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만을 듣고 있었다. 누군가 사람이 오는 걸 보면 이 짐승도 달아나지 않을까? 제발 좀…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나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에서, 그러니까 엎드려 있는 현준에게는 바로 위에서. 동시에 다가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그리고는 피식 웃는 소리가 오른편 좀 멀리서 들린다.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인간들 말도 있다만, 물릴까 두려워서 내버려 둘 수는 없잖나?”
대꾸하는 목소리와 함께 다시 발소리가 다가왔다. 바삭바삭, 풀잎을 밟으며 다가온다. 무서워서 고개는 돌리지 못하고 곁눈으로 힐끔 쳐다본 현준의 시야에 흰 운동화와 청바지, 분홍빛 도는 셔츠가 보였다. 얼굴은 안보이지만 분명 아까 등산로에서 뒤쫓아 달려오던 남자다.
현준은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저 남자는 왜 나를 쫓아왔던 거지? 그리고 지금 날 밟고 있는 사람은, 아니 사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대체 뭐지? 그리고 난 왜 이 더운 여름날 집에서 낮잠이나 자지 않고 산속에서 이 꼴을 당하고 있는 거지?
“별로 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흰털의 뭔가가 말한다. 목소리는 확실히 사람, 그것도 젊은 남자의 것이지만 조금 전 으르렁거렸던 건 뭘까 하고 현준은 무서운 중에도 궁금했다.
“별로 먹을 거라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그쯤 산 여우라면 인간이 하는 짓은 다 할 테니 먹는 것도 비슷하겠지. 하지만 오해받을만한 장면 맞지 않나? 산 아래서부터 줄곧 그 아이를 쫓아가다 인적 드문 곳에 닿자 본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했거든. 내 산에서,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
남자의 목소리는 뒷부분에 이르자 기이하게 울리며 퍼졌다.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라기에는 뭔가 이질적인, 온몸의 세포를 진탕하게 만드는 울림이다.
그것을 느낀 것은 현준뿐이 아닌 듯, 등을 밟고 있던 발이 조금 움직였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허나 본모습을 보인 것은 인간의 모습보다 힘을 쓰기 수월해서이며, 공격한 것은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잠시 제압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흰털의 남자가 대꾸했다. 공손한 체 하면서 할 말은 다 하고 있잖아? 그런데 여우라니 뭔 소리냐. 이 사람들 날씨가 더우니 단체로 더위 먹었나. 아니면 뭐야? 현준은 혼란했다.
“그래 제압하고 나서 네 필요한 것을 취하면 이자는 그냥 두고 가겠다? 이 깊은 산 속에?”
“산군께서 계시니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간사한 여우로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현준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으로 뭔가가 쑥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움찔하며 굳어있는 동안 그것은 주머니 안을 뒤져 짤랑거리는 동전들을 꺼내갔다.
“그건가?”
“예. 다행히 모두 있군요.”
등을 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그래도 현준은 일어나지 못한 채 엎드려 있었다. 고개만을 조금 움직여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보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구두와 푸른색 스트라이프의 정장바지가 보인다. 누군지 구두에 정장을 입고 이 산속 깊은 곳까지 왔다는 거다.
“여우가 그런 것을 왜 필요로 하지?”
“아는 사람으로부터 부탁받은 것뿐입니다.”
“그래?”
“그럼 폐를 끼치겠습니다. 다시 뵙게 되면 그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다시 보겠지.”
두 남자가 느긋이, 그러나 어딘지 날이 선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현준은 죽은 듯이 엎드려 서 이 상황이 끝나기만 바랐다. 다행이 정장 구두가 떠나간다. 눈동자만 굴려서 힐끗거리는 현준의 눈에 결혼식장 하객 정도로 차려입은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게 보였다.
“어디선가 재미있는 녀석이 왔잖아.”
어쩐지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청바지의 남자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다 멈춰서 그가 말했다.
“빨리 안 따라오면 혼자 간다.”
그 말에 엎드려있던 현준이 벌떡 일어났다. 청바지의 남자는 다시 등을 보이며 걷고 있었고 흰털의 뭔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몇 발 앞서 걸으며 남자가 중얼중얼 투덜거렸다.
“그런 약해빠진 지박령 따위에게 홀리다니 정신상태가 어떻게 되먹은 건지.”
“호, 홀리다니 뭘…요?”
남자를 엉거주춤 따라가며 현준이 물었다. 처음 봤을 때는 무서워서 도망치고만 싶었던 남자가 지금은 별로 무섭지 않다. 게다가 왠지 몸도 가벼운 느낌이었다. 본의 아니게 엎드려서 푹 쉬게 된 덕분일까.
“뭐는 뭐냐. 동전에 붙은 지박령이지. 어디에서 주웠지? 분명 누군가 봉헌한 것일 텐데. 돌무더기 앞이라든가 음식, 촛불 옆에 놓은 거 아무거나 줍지 말아라.”
내가 언제 동전을 주웠나. 현준은 멍하니 기억을 돌이켜본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생각 안 나네. 그런데 저건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대뜸 반말이야. 키는 나보다 크지만.
“네 혼이 떠돌아다녀서 그런 거다.”
잠시 조용하던 남자가 문득 말했다.
“예…?”
“혼 말이다. 그게 사람 몸에 붙어있는 게 아니라 담겨 있는 것이거든. 그러니 멍청하게 넋 놓으면 그 자리에 다른 놈이 들어와 앉을 수 있다는 거다.”
갑자기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서는가 싶더니
딱 - !
눈앞에서 불꽃이 튈 정도로 아픈 군밤을 먹여줬다.
“정신 차리라고.”
평생 화 한번 내지 않았을 것처럼 온화한 얼굴을 한 주제에, 다 큰 남자를 어린애 다루듯이 때려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시 걷는다. 현준은 얼얼한 정수리를 문지르며, 무서운 할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손자처럼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길이 넓어지고, 등산객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소리가 늘어나고, 길가에 소주며 고기며 손수건 따위를 파는 장사치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현준은 문득 자신의 앞에서 걷는 사람이 바뀐 것을 깨달았다. 청바지에 셔츠의 젊은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앞에는 일찍 하산하는 등산객들만 걷고 있었다.
현준은 멍하니 서서 아직도 얼얼한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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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외전 - 암월청수님께 사과용!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허공에 맴도는 노래>
오날이 오날이소서
매일 오날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마르시고
새라난 매양장식에 오날이소서
날씨도 흐린데 노랫소리 참 처량하다.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듣던 백은호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저게 분명 축가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축하하고 감사하는 노래를 저리 슬프게 부르나. 어느 혼인지 민폐로다.
그런데 듣고 싶지 않아도 별 수 없는 것이, 혼의 소리라는 게 사람의 목소리와 달라서 귀를 막는다고 안 들리는 것이 아니며, 저렇게 들으라고 목 놓아 부르니 사방 십리 안의 무당이며 신령이며 짐승들이면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누군가 정 못 견디겠으면 해결하겠지. 어차피 볼일만 보고 나면 십리 밖으로 나갈 백은호는 노랫소리를 무시하고 잰걸음을 놀렸다.
목적지는 멀리 보이는 전통 찻집, 어제 전화로 약속을 잡고 오늘 오전 중에 만나기로 했다. 흥정만 잘 끝나면 오후에는 시간이 좀 남을지도 모르겠다. 가게 안에 진열할 정도의 물건이라니 몇 푼 집어주면 될 테고, 주인의 눈이 없어 좋은 물건을 못 알아보고 있는 거라면 횡재하는 것이고.
안으로 들어서자 적당히 밝은 조명에 눈을 자극하는 색채 없이 안온한 정경이 펼쳐졌다. 인테리어는 주인의 심성을 닮으니 흥정하기 좋은 타입이겠다. 생각하자마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다. 목소리를 듣고 상상했던 것 보다 젊은 남자가 눈인사를 보내왔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으니 분명 성격도 유순하고 맺힌데 없겠지만, 그 얼굴을 기억해내자 백은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알았어야 하는 건데. 실제로 들었던 목소리와 전화로 듣는 목소리는 미묘하게 다르기도 하고, 감쪽같이 사람인 체하며 전화를 한 덕분에 헷갈리기도 했고.
그러나 신의 권속인 주제에 속임수를 쓰다니. 백은호는 한 달 만에 재회한 산신을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뵙는군요.”
“그럴 거라고 했잖나.”
물건을 맡기는 손님인 체하여 그를 끌어들인 젊은 산신이 기분 좋은 낯으로 대꾸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좋은 인상의 청년 정도로 보일지 모를 그였지만 여우인 백은호에게는 달랐다. 무엇보다 요괴인 그를 본능적으로 두렵게 만드는 신령한 기운이, 조심스럽게 감추고 있음에도 서리서리 뻗어 나와 불편하게 만들었다.
“말씀하셨던 물건은…”
백은호가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거 카운터 뒤에 뒀다네. 손님들이 이상한 상상을 해서 말이지.”
산신이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산신이랍시고 사람 흉내를 내며 전통 찻집을 운영하는 것도 별나지만 골동품 상인인 자신에게 물건을 맡기려는 것도 진심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한 상상이라…? 주인이 카운터 뒤에서 내온 물건을 보고 백은호가 가볍게 실소했다. 하긴 그럴 법 하구나.
원통기둥을 눕혀 놓은 듯한 몸체에 한가운데 튀어나온 구연부, 이백 여년 전까지도 주방이며 나들이 행장에 빠지지 않았던 물건이지만 요새는 쓰지도 않거니와 쓴 기억이 있더라도 좋은 기억은 아니리라. 술이나 장, 물 같은 액체를 담아 나르는데 쓰이던 이것은 장군이라 한다. 지금 사람들 기억에는 오물을 퍼 나르던 똥장군 정도일까. 과연 그 내력을 알고 나면 커피마시며 쳐다볼만한 것은 아니지.
그나저나 이 물건 참으로 잘생겼다. 백은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포탄모양으로 유려하니 휘어진 마구리 중앙에 연꽃문양을 박지기법으로 새겼고 몸체에는 물고기를 선각했다. 힘 있는 구도에 섬세한 묘사의 물고기도 빼어나지만 측면의 양쪽을 수직으로 가른 당초문대며 아래쪽 마구리의 인화상감된 국화문이며 구연부 주위로 가늘고 굵은 선을 맵시 있게 자아낸 상감처리가 아름다우면서도 기품 있었다.
굽다리와 구연부에 약간의 결손이 있지만 미미한 정도다. 유약이 좀 둔탁한 빛을 띠는 것은 옥의 티랄까.
“어디서 이런 것을 구하셨습니까? 보기 드문 수작입니다.”
핥듯이 시선으로 쓸어보던 백은호가 눈도 돌리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가? 실은 구했다기 보다…전화로 말했듯이 사정이 좀 많은 물건이라서. 주인마다 옮겨가며 사달을 내다가 나에겐 공짜이다시피 들어온 거라네.”
“사달…?”
은호의 물음에 산신이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니까…. 몇 번 골동품상에게 맡겨봤는데 번번이 다시 되돌아오더군. 여기에서는 별일 없는데 이 집에서만 나가면 탈이 생긴다면서.”
호오라. 은호는 회백색의 장군과 그 주인을 번갈아보았다. 만들어진지 2백년은 넘었을 물건, 그 정도면 사연하나 없을 리 없다. 뭔가 붙어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지.
“아, 그래서 말인데…”
약간 주저하며 산신이 입을 떼었다.
“여기에서는 확실히 아무 일도 없긴 한데 그게, 밖에서 좀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말이지.”
라며 그가 가리킨 방향에서는 아직도 구슬픈 목소리가 노래하고 있었다.
오날이 오날이소서 - 매일 오날이소서 -
“원래 이 장군에 깃들어 있던 모양이다. 말을 걸어봤지만 오래 된 혼이라 그런지 말도 기억도 다 잃어버리고 남은 것은 깊은 한 뿐인가 노래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니. 원이 풀려야 떠날 텐데 말을 안하니 그 원이 뭔지 모르지. 보내주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나?”
산신이 버티고 있으니 혼령은 잠시 장군을 떠나 이 주변을 맴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더라도 참으로 마음 약한 분일세. 세월 쌓이는 동안 닿은 혼이 얼마며 스쳐간 인연이 몇인데 한낱 면식도 없는 혼령 따위를 걱정해 일부러 요괴 따위를 불러서 부탁한담.
“하긴, 이대로 사간다 해도 저 혼이 다시 붙어버리면 곤란하지요.”
공연한 소문나서 가격 떨어지면 안 되니까. 하고 백은호는 중얼거렸다. 아니 이미 소문은 날만큼 났으려나. 이 기회에 싸게 사보렷다.
그나저나 이 산신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제령이 아닐 터였다. 비록 오래 산 여우라지만 도술이 만능도 아니고, 말도 안 통한다는 혼을 무슨 수로 달래서 보내나. 남들은 좋다며 부르는 노래를 넋두리하듯 부르다니 무슨 까닭이며, 다른 것도 아닌 장군에 들러붙은 곡절은 또 무엇일꼬.
무엇을 담았던가. 튀어나온 주둥이에 코를 대보지만 안 쓴지 오래 되었나 커피 향만 조금 배어있을 뿐이다. 수백 년이 지났을 테니 흔적이야 남았을까 싶지만 백은호는 유약을 발라 매끈한 표면을 매만져도 보고 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그제야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빼어난 실력으로 만든 아름다운 작품치고 유약은 최상급이 아니지 않은가. 중국,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물토유라 해서 물토에 재를 섞어 만든 특유의 유약을 사용했다. 분청사기니 보통의 경우라면 산화철 함유량이 적어 흰색을 띈 것을 발랐을 터이다.
“물토유가 아니라…”
중얼거리는 백은호에게 그게 무엇이냐고 물은 산신은 대답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도자기를 구운 흙도 이 땅의 것이 아니더군. 그래서 나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그 외국이란 어디냐고 물으니 남동쪽을 가리킨다.
“바다를 건너 저편에서였지.”
그렇구나. 백은호는 알아차렸다.
그래 그때, 꽤 많은 사람들이 본의와 상관없이 배에 태워져 고향땅을 떠났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길기도 길었지만 모질기도 모질었다. 그때 잡혀간 도공이 얼마나 되는지 이제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다. 저 나라에서는 다완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도공이며 도자기 강탈에 열을 올렸다 하더구만. 이국에 갇혀 지내며 그들은 누구나 아는 노래로 고향을 그렸다고 한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고
날이 샐지라도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 그 말처럼 축하할 때 부르는 노래였는데 그것을 망향가로 불렀다니 서글프구나.”
은호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산신이 말했다. 혼령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우니 그는 대신 장군을 쓸어준다.
“이국 땅에서 죽은 이가 끝내 이루지 못한 원이면 그것이 무얼꼬.”
물으나 마나지. 백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저 신령한 존재는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정도의 작품이면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테고 큰돈이 오갔을 테니 못 알아 볼 것도 없겠지요. 거슬러 올라가면 만든 사람이 누군지 정도는 나올 겁니다. 만든 사람의 무덤을 찾는다 해도 이장이 가능한지까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일단은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하네.”
빙그레 웃으며 산신이 말했다. 왠지 결국은 이용당했다는 느낌이 들지만 상관없나.
혼령의 문제가 해결되면 물건은 알아서 처리하라는 산신의 말을 환송대신 들으며 백은호는 함에 착실히 넣은 장군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그로부터 멀어지자 노랫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가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아예 혼령은 장군 안에 들어앉아 나팔 같은 노랫소리로 귀를 울렸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
빨리 해결해 버려야겠다. 이 소리를 매일같이 들으면서 살 수는 없잖으냐고, 백은호는 물건을 싣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누구에게 가야 해결할 수 있는지 그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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