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32화 (132/218)

리코더의 요정(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요괴라는 게 원래 사람과는 다른 족속이고, 사람도 생긴 것과 능력이 천차만별이듯이 요괴 역시 그러겠지.

리코더를 든 여자는 물론 겉으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기억 속에서 말하던 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창고 안에 나타난 걸 보면 인간은 확실히 아니다. 게다가 상대방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하멜른의 쥐잡이와 비슷하잖아. 그 유명한 독일 동화 속의 피리 부는 남자처럼 이 여자도 피리를 불고 사람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

어떤 요괴일까.

수영이 녀석이 리코더를 포기했으니 이제 굳이 수리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러나 그녀와 합주하면서 본 옛날의 기억 때문에 나는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피리를 고쳐야 했던 때보다 더 심정이 복잡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물고기처럼 헤엄치던 것이 자라서 옥색 옷의 남자가 된 걸까? 정말로 내가 그의 목소리를 빼앗았을까?

혼자서 궁리하다 결국에는 별 수 없이 유하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그녀는 옥색옷의 남자 이야기를 듣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창고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뭐가 있는지는 잘 몰라요.”

설마? 진짜? 몇 년이나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다면서 한 번도?

믿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는데 할 말이 없다. 그러면 그녀는 창고의 도깨비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말인데. 하지만 거기에 영감 도깨비가 있다는 것과 모르는 것을 그에게 물어보라고 가르쳐 준 장본인이 그녀다.

“그럼 요괴는…그러니까 뱀처럼 생겼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작은 요괴인데, 혹시 알아? 내가 그런 걸 키운 적이 있어?”

“누군가 부탁해서 맡은 거라면 창고의 물품출납서를 확인해 보세요. 입구 왼쪽의 선반에 있어요.”

그녀는 대꾸하고 나와 이야기하느라 잠시 내려두었던 다리미를 다시 들었다. 이제부터 일 할 테니 말 걸지 말라는 무언의 요구에 나는 순순히 물러났다. 더 물어봐야 소용없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물품출납서라는 새로운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창고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왼쪽 선반에 물품출납서가 있다고 한 그녀의 말대로였다. 선반 위에는 먼지가 하얗게 앉은 채로 층을 이루며 쌓인 공책이 열권 가까이 있었다.

표지에 ‘물품출납서’라고 적혀 있을 뿐 별로 서류 같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공책이었다. 펼쳐보자 날짜와 물품명 아래에 간단한 설명이 적혀있을 뿐이다.

[4월 9일인지 10일인지 까먹었다. 대충 그 무렵. 은쟁반.

골동품점 은호당의 사장인 백은호가 가져온 은제식기. 사고로 죽은 소년의 혼령이 깃들어 있어 쟁반이 보관된 곳 근처에서 물건이 떨어지거나 파손되는 현상이 일어남.

짜증나는 성격의 초딩 혼령임. 거짓말 잘함. 환생하면 옷값 배상 받을 것.(상하의 총 스물여섯 벌)

혼령과 함께 집으로 가서 과거의 기억과 대면한 후 성불함. ]

뭐야, 이건….

난 요괴뿐 아니라 귀신 퇴치 같은 것도 했던 모양이다. 날짜로 봐서 가장 위에 있는 공책이 최근의 기록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제목을 확인해 봤지만 공책 한 권이 다 끝나가도록 대야 속의 뱀 같은 물고기요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긴 그것이 크려면 시간이 필요했을 터다. 도깨비들이 리코더의 여자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면 그녀는 전에도 몇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얼마나 오래 전의 일일까.

가장 아래에 있는 공책을 확인하자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었다. 사람이라면 14년 동안 커봐야 중학생 정도인데 요괴는 어떨까. 동물처럼 금세 자라는 걸까? 아니면 나무처럼 천천히 자랄까.

머리로 생각해봐야 소용없다. 결국 공책을 한 권 한 권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그 작업이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제목만 대충 보고 지나갔지만 제목만으로는 그 물건이나 요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결국은 훑어보는 정도라도 모두 읽게 되었고, 열권이 넘는 공책을 다 확인하고 나자 새벽이 되고 말았다.

“으으…”

뻐근한 목과 허리를 뒤로 꺾으며 반쯤 감기려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 고생을 했는데도 리코더의 여자와 관련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나온 거라면 하나, 대금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 정도일까.

창고의 도깨비 중에는 대금이 변한 도깨비도 있는 것 같다. 그 녀석으로 연주를 해서 요괴의 기분을 풀어줬다는 기록이 서너 번 나온 것이다. 창고 안의 대금이라면 생각나는 것은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아까 옥색옷의 남자가 사용했던, 그리고 나도 한 번 써 본 그 대금이 도깨비였던 걸까?

대나무 향기가 나는 대금…그것을 연주한 기억이 익숙한 음률과 함께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흔들흔들 눈앞에서 과거가 어른거렸다. 기억하고 있을 리 없는…굉장히 오래 된…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들이…

- 불어줘요, 도령. 피리 불어줘요. 응? 응?

허리춤에 매달려 칭얼거리는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 불어줘요. 불어줘요. 나 노래하고 싶어요. 막 노래하고 싶어서 몸이 간질간질 해요.

- 또냐?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다.

대꾸하는 목소리도 어른은 아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뿐 둘 다 어린 아이들이었다. 해달라느니 귀찮다느니 조르고 밀며 시끄럽게 실랑이를 하더니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연주를 한다. 곱게 퍼지는 피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피리 소리가 닿는 곳 어디나, 하늘로부터 땅까지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모든 것이 순조로우며 평온한 것을 나도 모르게 깨달았다. 고작 피리 소리인데…. 그런데 그 소리가 닿자 어그러진 것은 펴지고 마른 것은 되살아나고 부서진 것은 이어지며 굳은 것은 풀린다. 멈춘 것이 흐르고 흩어진 것이 모인다.

이건 그냥 피리가 아니야. 피리…그런 것이 아니야. 나는 기억 속을 헤매며 중얼거렸다. 피리가 되기 전의, 물속에서 헤엄치기도 전의, 더 옛날의 모습이 어른어른 보였다.

- 도령, 난 언제 노래할 수 있어요? 도령이 불어주지 않아도 혼자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 그런 걸 왜 하고 싶은데?

_ 하고 싶어요. 하고 싶어요. 내가 노래하면 꽃도 피고 하늘은 맑아지고, 해님도 기분 좋아져서 웃으면서 보세요. 새도 날아오고 나비랑 벌이랑…

- 그리고 또? 내가 뭐랬어?

좀 더 나이 많은 소년의 목소리가 약간 딱딱해졌다.

- 으응…욕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요. 그런데 아직까지 한 번도 못 봤잖아요.

조금 기가 죽은 목소리로 아이가 대답했다.

- 항상 떠돌아다니니까. 그리고 곧 봄이라 나는 돌아가야 해. 집에 가면 소리 내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하는 거, 알지?

- 예….

아이의 목소리가 꺼져 들어갔다.

- 말 잘 들으면 도깨비들 노는 곳에 데려가 줄게. 거기에서는 노래해도 괜찮으니까.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아이는 금세 되살아나서 “정말요? 정말?”하고 몇 번이나 물었다. 정말. 정말이라니까. 그 물음에 나도 몇 번이나 대답했다.

기억인지 꿈인지 모호한 그것에서 깨어난 때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귀청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눈을 뜨게 만들었다. 깨어난 이후 지금까지 매일같이 아침이면 들려오는 유리 깨지는 소리다. 도대체 매일 아침 어디서 뭘 깨고 있는 건지. 수리점 옆집이 유리공장이라도 되나.

그러나 좋은 알람이 되어주고 있기도 해서, 오늘처럼 잠이 부족한 날만 아니면 별로 불만은 없었다.

“아아…”

눈을 뜨자 온 몸이 뻐근하고 욱신거렸다. 노트를 뒤지다 말고 작업 선반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몇 시간동안 구부려져 있던 허리와 머리에 눌렸던 팔이 우둑거리며 겨우 펴졌다.

시계를 보니 늘 일어나던 그 시각이었다.

나는 공책이 흩어져 있는 작업 선반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이 공책들을 뒤지고 뒤지던 끝에 나는 뭔가를 보고, 들었었다.

그게 뭐였지…. 가만히 기억을 돌이키고 있으려니 나를 조르던 어린 목소리와 거기에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내 목소리라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그럼에도 나라고 생각했다.

노래하고 싶어 하는 어린 아이와 대금을 연주하던 나를 기억해냈다. 그 피리소리가 울려 퍼질 때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다워지던 것을 나는 다시금 떠올렸다. 그 소리다. 그건 피리가…아니, 그 피리는 분명히 본래 대나무였다.

흐린 기억이지만 나는 그것을 본 것이다. 대야 속에서 헤엄치고 있던 물고기와 같던 그것이, 그 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대야를 들고서 나를 찾아온 소녀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하지만 내가 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냥 허황된 꿈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 모르잖아. 꿈이나 망상이 아닐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이것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알게 되었다.

별로 달갑지 않지만 내 망상 같은 꿈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아니, 요괴가 있었다. 확실히 꼬리가 아홉 개씩이나 생길 정도로 오래 산 여우 요괴니까 내가 본 것이 뭔지도 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백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쪽도 꽤 오랫동안 신호가 울리게 내버려두고 있다가 겨우 받는다.

“이른 아침에 전화하는 건 실례라고 가르쳐 봐야 내년이면 또 잊어버리겠지요?”

나른한 목소리였다. 전화 받자마자 하는 말하고는.

“그냥 평범하게 여보세요 정도로 하지?”

약간 울컥해서 내가 대꾸했다.

“여보세요.”

꼬리가 아홉 개인 여우는 착하고 성실하게 말했다. 타이밍이 틀려먹었지만 넘어가 주마. 일단은 부탁을 하려고 전화한 셈이니까.

“됐고, 물어볼 게 있어. 내가 뭔가를 본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너라면 오래 살았을 테니까 아는 것도 많고 본 것도 많을 거 아냐? 동물중에서도 여우라면 특히 영리하고…”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들으니 잠은 확실히 깨는군요. 질문이나 하십시오.”

이 까칠한 여우 요괴가.

“그러니까 내가 본 게, 일종의 섬인 것 같단 말이야. 섬 치고는 특이하게 생겼지만. 생긴 게 꼭…거북이 같달까. 섬 한 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산이 꼭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거든. 산 옆으로는 둥그스름하니 언덕 같은 숲이 있고. 그리고 거북이 머리처럼 생긴 바위산 말인데, 그 꼭대기에 대나무가 두 그루 자라고 있었어.”

물론 대나무가 두 그루 자라고 있는 건 별 일 아니다. 그런데 이 산의 대나무는 좀 별 거였다.

“특이한 건 그 대나무가 낮에는 분명히 두 그루였거든. 그런데 밤이 되면 한 그루로 바뀐단 말이지.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내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들어본 적 없나? 아니면 생각하는 척하면서 인터넷에서 열심히 검색이라도 하나?

그러나 곧 백은호의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도령, 거북이 모양의 섬에 나뉘었다 합해지는 대나무라고 하면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한 게 아닙니까?”

그게 왜?

물론 좀 특이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르는 게 이상하다고 할 만큼 유명한 것도 아니잖아. 억울한 마음에 항의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나는 대꾸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내가 묻는 거잖아. 그게 도대체 뭔데?”

“귀수산입니다.”

어딘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백은호가 대답했다. 귀수산? 그건 또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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