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더의 요정(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침묵이 한 번 더, 체감상 3분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30초 정도일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혹시 제 설명을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까?”
침묵을 깨뜨리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두 번째로 울컥했다. 알면 설명하라고! 해달라고!
“귀수산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커다란 거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명은 기본이 수천년이라 머리나 등 위로 자연히 쌓인 흙먼지가 두껍게 눌러 붙고 거기에서 나무나 풀까지 자라서 멀리서 보면 마치 산과 같습니다. 실제로 산만큼이나 크기도 합니다만.”
산이나 섬 정도로 큰 거북이? 진짜? 그건 음…그런 걸 거북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야? 공룡이라든가…아니, 공룡도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보통 바다에 사는데 헤엄치는 동안 물 위로 드러난 부분이 머리와 등딱지뿐이라 보는 사람은 산이나 섬이 떠다닌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야 바다는 넓으니까 어디에선가 크로노사우르스 같은 고생대 공룡이 돌아다녀도 이상할 건 없지. 게다가 겉보기에 섬 같다면 배타고 지나가다 눈에 띄어도 누가 신경 쓸 리 없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묻게 되었다.
“진짜 그런 게 있어?”
“있기는 합니다만…”
백은호가 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정도의 큰 귀수산은 이제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있다고 해도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거나 다른 하늘 아래의 일이겠지요.”
그러니까 결국 없는 거나 매한가지…아니 잠깐. 큰 귀수산이 없다 뿐이지 작은 귀수산이 없다는 건 아니잖아.
“그럼 작은 건 있다는 말이지?”
음…큰 귀수산이 섬이나 산처럼 보일 정도라면 작은 귀수산은 바위나 언덕 정도로 보이는 걸까? 그런 게 바다에 떠다닌다면 조그만 무인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걸.
“완전체가 되지 않은, 아직 어린 것들이라면 몇 있습니다. 도령도 하나 기르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강아지라도 기른다는 투로 백은호가 태연히 한 말을 나는 잠시 못 알아듣고 있었다. 내가 뭘 길러요? 산만한 거북이?
“우리집에 거북이 같은 건…”
도깨비는 여럿 들러붙어 사는 것 같고, 떠돌이 개처럼 보이는데 말도 하고 사람으로 변신하기도 하는 종족이 모호한 녀석도 하나 있는데 거북이는…
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수화기 너머에서 어쩐지 익숙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귀수산의 머리에는 대나무가 한 그루 자라는데 낮에 둘로 나뉘었다가 밤이면 하나로 합쳐집니다. 그 대나무가 귀수산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자르면 귀수산은 죽거나 몹시 약해집니다. 그러나 그 대나무의 조각을 물에 넣어 기르면 귀수산의 새끼가 되어 자란다고 하지요.”
백은호가 설명했다.
“어릴 때의 모습은 용을 닮았다고들 하지만 인간들은 뱀과 비슷한데 다리가 있고 녹색이면 대충 용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릴 때는 등딱지가 얇고 부드러워서 거의 거북이처럼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귀수산은 귀수산이지요.”
뱀과 비슷한 모양에 녹색이며 물에 넣어 기른다. 기억 속에서 본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가 리코더의 여자에게 받은 것은 역시 귀수산의 새끼라는 말이다.
“어릴 때는 그렇다지만, 크면 어떻게 변하는 거야?”
“귀수산의 수명은 수천 년입니다. 성년이 되기까지도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릴 때의 귀수산은 모양도 성격도 제각각입니다.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보통은 기르는 쪽을 닮게 되지요. 바다에서 자라면 물고기 모양을 하고 뭍에서 자라면 짐승이나 사람의 모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성년이 지나면 그제야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데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는가에 따라 등딱지의 모습이 달라진다고들 하지요.”
그렇다는 건, 내가 기르는 귀수산이 사람을 닮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겠지. 혹은 도깨비를….
옥색옷을 입은 남자가 귀수산의 성장한 모습일 가능성은 이걸로 거의 확실해진 셈이다.
“그런데 말이지…”
어쩐지 두려운 과거를 엿보는 기분으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귀수산이 노래를 하면 위험한 거야? 아니, 그보다는…귀수산의 노래에 특별한 능력이 있어? 사람들이 탐낼 정도로?”
내 말에 백은호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령, 만파식적을 아십니까?”
그가 난데없이 물었다. 만파식적? 그건 신라시대에 있었다는 신기한 피리잖아. 내가 그것도 모를 리가…어, 그러니까, 아마 그게…무슨 섬에서 신기한 대나무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만파식적을 만드는데 쓴 대나무가 바로 귀수산의 머리에서 자라는 그 신기한 대나무인 겁니다. 그것은 귀수산에게 있어 가장 큰 약점이자 힘의 정수이며 생명의 그릇이기도 합니다. 수천 년을 산 요괴의 모든 힘과 생명을 담고 있는 대나무입니다. 평범한 것일 리가 없지요.”
만파식적이라고 하면 그것을 불자 병든 사람이 낫고 적군이 물러가며 가뭄이 해소되고 장마가 멈추었다는 신기한 물건이다. 만파식적을 만든 대나무가 귀수산의 머리에 난 바로 그 대나무.
“신문왕은 그 피리로 적군을 물리치고 날씨를 움직였다지만,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니까요.”
백은호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하여 만파식적이 만들어진 이후로 귀수산은 본격적으로 인간들에게 노려지는 요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 그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귀수산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있으니까요. 귀수산이 성장하기까지는 천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는데 그것을 기다려줄 인간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소녀는 그런 말을 했던 거로구나. 인간의 욕심을 두려워하며 소녀는 내게 무서운 말을 했었다.
“그러면 말이야…”
싫은 과거를 들추는 것 같아 묻고 싶지 않았지만, 알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나도 모르게 낮아진 목소리로 백은호에게 물었다.
“그 피리의 소리가 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 있어?”
목소리를 빼앗는 방법…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내가 돌려 말했다. 내 질문에 백은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윽고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웬일입니까, 도령. 그런 것을 물으시다니. 잠을 못자서 머리가 조금 이상해지기라도 했습니까?”
저기, 내가 잠을 좀 덜 잔 것은 맞는데. 그게 머리가 이상해져야 할 수 있는 질문이었냐?
“궁금하시다니 알려드리지 못할 것도 없지요. 귀수산의 대나무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힘의 정수이며 생명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힘과 생명을 잃게 된다면 대나무의 특별한 능력도 보잘것없게 되어버리겠지요. 그래서 부러 자신의 정기가 모이지 않도록 대나무를 잘라서 태워버리는 귀수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싹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한 다음 백은호는 차갑게 비웃었다.
“어리석은 짓이지요. 고통스럽기도 하거니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어봐야 결국 하찮은 요괴의 삶을 살게 될 뿐입니다. 인간에게 노려지지 않을 뿐, 별 능력도 없이 수천 년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목소리를 버려서 평온하게 살 수 있다면 저로서는 그편이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녀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제 만난 그녀는 그 자신이 말한 대로 목소리 없이 나타났다. 정말로 그렇게까지 해서 얻으려고 했던 평온한 삶을 그녀는 누리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 질문은 그녀에게 하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전화를 끊고 창고 쪽을 돌아보았다. 아침이 되어 도깨비들은 모두 잠든 것 같다. 창고는 조용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자 도깨비들이 사는 창고라고는 믿을 수 없게 평범한 광경이 보인다. 어두컴컴하고 고요한 가운데 물건들은 어느 것 하나 특별한 구석 없이 잠잠히…아니군. 내가 지나가자 조금씩 꿈틀거리며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잠귀 밝은 것들 같으니라고.
그래도 어젯밤의 시끌벅적하던 놀이때와는 다르게 적막한 것이 모처럼 창고답게 보이기는 했다. 선반 위에서 선면을 파르르 떨며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부채라든가 벽에 기대서 코고는 소리를 내며 잠든 몽당 빗자루라든가. 이런 것들이 잠들어 있는 도깨비 창고 말이다.
리코더의 여자는 그 도깨비창고 안쪽 어두컴컴한 곳에 있었다. 리코더의 여자…라고 불러도 될지 모를 그런 모습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거북이라기에 목과 꼬리가 지나치게 길었고 등딱지는 부드럽게 반질거렸다. 흔히 옥색이라고 말하는 아름다운 초록색이었다. 긴 목과 꼬리를 맞닿을 정도로 둥글게 휘어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몸통만을 따지면 흔한 거북과 비슷한 크기겠지만 그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생명체였다.
그녀의 옆에는 어제 내가 잠깐 연주했던 녹색의 대금이 놓여있다.
‘아니…이건 아니야.’
똑같은 모습이기는 하지만 조금 다르다. 여기 있는 대금은 정말로 살아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에 비해 어제 쓴 대금은 마치 그림자…그런 느낌일까.
대금을 만져보려고 손을 뻗는 순간 녹색 거북, 어린 귀수산이 눈을 떴다. 푸른 눈꺼풀 아래에서 까만 눈동자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미안. 잠들었는데 나 때문에 깼구나.”
조용히 사과하자 귀수산이 머리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는 순간 녹색의 몸이 물그림자처럼 흐릿해진다. 흐려진 모습이 다시 선명해지자 거기에는 녹색 거북 대신 인간의 여자 모습이 남아있었다. 리코더 여자로 돌아온 것이다.
변함없이 야무진 얼굴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뜻일까.
인간으로 돌아온 모습을 보자 예전의 소녀일 때 모습이 떠올라서, 나는 백은호와 통화하다 생각했던 그 질문을 문득 입 밖에 냈다. 너는 지금 정말로, 평온하게 잘 살고 있는 거냐고.
리코더 여자는 그 질문에 눈을 깜박이며 나를 쳐다보더니 야무진 얼굴이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워지며 환하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몇 번이나 계속해서 끄덕인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으니 난처한 얼굴로 두리번거린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다 말고 뭔가 발견했는지 발딱 일어나서 종종걸음으로 벽을 향해 갔다. 그리고 벽에 붙은 선반 아래쪽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물레를 건드렸다.
“아우우…잠든지 얼마나 되었다고 귀찮게…응? 낭자?”
물레가 아니 물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흰 도포자락을 입고 갓을 쓴 여자가 불평하다 말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귀수산이 변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귀수산을 쳐다보던 그녀가 이윽고 내게 말했다.
“낭자가 말하길 자신은 평온한 삶을 행복하게 즐기고 있으며, 동생 또한 그렇게 보이니 도령이 선택한 방법도 싫지는 않다고 하오.”
‘옛다, 받아라.’ 하듯이 말을 던져주고는 물레에서 나온 여자는 도로 사라져버렸다. 내가 선택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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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더의 요정(5)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 창고에서 나왔다.
리코더 여자, 어린 귀수산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백은호의 말대로라면 그것을 위해 그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고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약한 힘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만파식적과도 같은 놀라운 힘을 버리고 얻은 삶이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기에 그런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그녀와 다른 방법으로 평온하게 살고 있다는 동생에게, 나는 어떻게 한 걸까. 궁금했다.
그 후 낮 동안 귀수산 남매는 도깨비들과 함께 잠들었는지 내내 조용했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 되자 일찍 일어난 도깨비들로부터 시작해 창고는 다시 조금씩 시끄러워졌다.
이른 시각부터 도깨비들은 다시 놀이판을 벌인 것 같았다. 손님이 와서 그런가 전보다 떠들썩하다. 살짝 들여다보자 다들 모여서 어젯밤과 같이 즐기는 중이었다. 저러다 창고에 불나면 어쩔 거야 싶게 큰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기름진 냄새가 떠돌았다.
아침에 귀수산의 말을 전해주었던 물레의 도깨비가 나를 보자 눈을 흘기며 손짓했다.
“뭘 숨어서 남의 일처럼 엿보고 있소? 와서 도령도 한자락 뽑아 보시오. 낭자는 밤이 깊기 전에 떠난다고 하니 어울릴 시간도 얼마 안 남았잖소.”
리코더 여자가 간다고?
물레의 도깨비가 내 손을 잡고 끌었다. 불가에 둘러앉아 있던 도깨비들이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하고 어디선가 술과 고기를 내왔다. 내 창고에는 어쩐지 내 물건 말고도 뭔가가 많이 보관되고 있는 것 같다.
상체만 사람 모양에 하체는 호리병처럼 생긴 도깨비가 목소리는 좋은데 음정이 엉망인 노래를 불렀다. 엉터리 노래에 맞춰 물건 모양의 도깨비들이 까닥거리며 춤을 추고 사람 모양의 도깨비들은 먹던 음식을 집어던지며 야유를 보냈다.
“제대로 못 해? 그게 노래냐, 소 울음소리냐?”
“나와요, 나와. 도령더러 한 곡조 들려달라고 해요.”
“해명 도령, 피리를 불어주오.”
“불어라. 불어라.”
도깨비들에게 떠밀려 불가로 가서 누군가 던져준 피리를 받았다. 날아오는 피리를 얼떨결에 받고 나서야 그것이 옥색의 대금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제 연주한 대금이 아니다. 똑같이 생겼지만 이것은 그림자가 아닌 실체, 오늘 아침에 귀수산의 옆에 누워있던 바로 그 대금이었다.
대나무 숲에서 방금 잘라온 것 같이 푸르고 싱싱한, 그 단면에 손을 대면 어쩐지 진액이 묻어날 것 같은 대금이었다.
그것을 잡자 손안에 착 감기듯 달라붙었다. 대금의 매끄러운 표면을 쓸면서 이동한 손가락이 여섯 개의 지공에 하나씩 얹어졌다. 취구에 입술을 대고 가만히 숨을 불어넣자 밑바닥에서부터 휩쓸어 올리는 듯한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렸다.
그것은 가만가만 달래듯 시작되어, 조금씩 조금씩 가벼워지다가 제비처럼 창공을 가로지르는 길고 매끄러운 고음으로 이어졌다. 비상했다 바람을 타고 유유히 날며, 파닥파닥 날갯짓 하듯 까불었다가 재주부리듯 공중제비를 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은 화창하고도 유쾌했다. 도깨비들의 요사한 연회를 노래한 춘야연(春夜宴)과는 달랐다.
춘야연(春野燕)…봄날의 들에 노는 제비와 같이.
기묘한 감각이었다. 내 숨이 대금을 따라 흐르고 그것이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질 때, 나는 소리가 닿는 곳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힘이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힘은 어그러진 것을 곧게 펴고, 약해진 것을 되살려 세우며, 차가운 것을 따듯하게, 뜨거운 것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눈앞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철제 선반의 녹슨 곳이 반짝반짝 매끄러워지고, 오래 되어 흔들흔들 늘어진 거미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영감 도깨비의 감투와 옷이 빛과 윤기를 되찾는 것이 보였다.
잠시도 쉬지 못하고 팔랑거리던 부채 도깨비가 날개 접은 나비처럼 얌전히 내려앉고, 영감 도깨비 앞의 화로에서 불 도깨비가 기분 좋게 굼실거렸다. 호리병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곡조를 따라 흥얼거리는데 놀랍게도 음정이 정확했다.
소리는 창고 안에서 멈추지 않았다. 더 멀리 퍼졌다. 수리점 앞 나무를 스치고 지나가자 조금씩 지고 있던 이팝나무의 하얀 꽃송이가 싱싱하니 되살아나고, 옆 건물의 식당을 지나자 술기운에 언성이 높아지던 두 남자가 껄껄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더 멀리 간다. 캄캄한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 위로 소리가 지나가자 늦은 시각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아 화났을 엄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이 모처럼 지친 얼굴 대신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하고 거실에서 가족들의 대화가 정답게 오간다.
땅에서는 어린 풀로부터 큰 나무와 흐르는 물까지, 하늘로는 바람과 구름…
소리를 타고 퍼진 따뜻한 힘이 그 모든 것을 조금씩이지만 변화시켰다. 그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소리와 함께 먼 곳을 내다보는 것 같던 그 느낌은 연주가 끝나며 함께 사라졌다. 사라졌으나…소리가 일깨운 기억이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다.
나는 눈 덮인 산길을 걸으며,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들판을 지나며 이 곡을 연주했다. 오직 겨울에만 세상에 울렸으며 그것으로 봄을 불렀다. 그러나 슬픈 일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지엄한 세상의 규칙이다. 아무리 불러도 봄은 와주지 않았다.
춘야연(春野燕)은 누구나 행복하고 평화롭게 만들어주면서 오직 내 소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곡을 부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이 곡은 리코더 여자와의 이별을 아쉬워 한 도깨비들을 달래준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즐거운 얼굴로 그녀와 작별했다. 리코더 여자는 웃는 낯으로 도깨비들 하나 하나에게 인사한 다음 내게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출입문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기 전에 하늘이 흐린 것을 느꼈다. 내 연주는 봄을 불러오지 못해도 잠시 구름을 불러 모으는 정도는 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떠나며 내게 그리고 내가 들고 있는 피리에게 몇 번이나 손을 흔들었다. 뒷걸음쳐 멀어지며 인사하고 웃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그맣게 보일 때까지 이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꽤 멀리까지 뒷걸음으로 떠나다 결국 보이지 않게 되자 기다린 듯이 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천천히 흩어졌다.
우리는 문을 닫고 어두컴컴한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창고에서 아직 연회를 끝내지 않고 있던 도깨비들이 피리를 불어달라고 졸랐지만 나는 거절했다. 지금은 어느 쪽의 춘야연도 즐기고 싶지 않았다. 조금 피곤했다. 머리 쪽이.
대금이지만 대금이 아닌 옥색의 피리를 작업 선반에 올려놓고, 나는 의자에 앉아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했던 걸까. 어떻게 어린 귀수산이 노래하지 못하게 한 걸까. 나는…
생각에 잠겼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도령, 저건 뭐예요?
어린 귀수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기심 어린 목소리였다. 어린 귀수산이 처음 보는 것들로 눈앞이 가득했다.
- 너를 돌봐줄 도깨비들이야.
- 나를 돌봐줘요? 도령은 어디 가요?
- 어디 가는 건 아니지만 너는 이제부터 도깨비들과 함께 살아야 해. 아침부터 밤까지 쭉. 도깨비들은 노래를 좋아하고 연주도 즐긴단다.
- 와아, 정말요? 매일 매일 들을 수 있어요?
- 매일 매일 들을 수 있어.
어린 귀수산은 팔짝 팔짝 뛰어서 도깨비들에게 달려갔다. 처음 보는 요상한 모습에도 상관 않고 뛰어드는 어린 귀수산을 보고 도깨비들이 깔깔거렸다. 그들은 작은 사내아이의 모습을 한 귀수산을 자신들의 놀이터로 데려갔다. 그곳은 쓰러져가는 폐가였다.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초롱이 안을 밝히고 무너진 지붕으로 달빛이 들어오는 낡은 집터에서 그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 부탁할게.
흥겹게 노는 도깨비들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영감 도깨비에게 내가 말했다. 영감 도깨비는 대답 대신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연기가 자욱하니 눈앞을 가렸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뿌연 눈앞이 선명해지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
그런 거였어. 한숨 같은 웃음이 나왔다.
나는 대금을 가지고 창고로 들어갔다. 나를 본 도깨비들이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을 위해 춘야연 한 대목을 연주해 주고, 대금은 도깨비들의 불가에 남겨놓았다. 그들을 떠나서 나는 창고 안 구석진 곳에 있는 영감 도깨비에게로 갔다.
영감 도깨비는 병풍이 놓이고 멍석이 깔린 자신의 자리에서 곰방대를 빨며 주변을 희뿌연 연기로 채우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곰방대 대가리로 화로를 땅땅 두드려 재를 털어냈다. 반기는 말이나 행동은 없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연기 속으로 들어가서 약간 머뭇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전에 내가 이런 말 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런 기억은 안 나니까.
“오랫동안 부탁대로 저 녀석을 돌봐줘서 고마워.”
백은호도 말했었다. 어린 귀수산은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기르는 쪽을 닮게 된다. 내가 기르는 동안 어린 귀수산은 사람의 아이 모양을 하거나 사람이 부는 악기의 모양을 닮아 있었다.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도깨비들이 돌봐주기 시작하면서 귀수산은 그들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나 놀았다. 물건의 모습을 하고서 돌아다니고 사람을 피했다. 도깨비들과 모여 놀기를 좋아하고 다른 것에 흥미를 갖지 않고, 자신이 귀수산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도깨비가 되어 산 것이다. 심지어 메밀묵을 가장 좋아했다.
게다가 도깨비란 음주가무를 즐기지만 유독 노래에는 약해서, 귀수산 역시 노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노래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노래를 통해 힘을 일으키는 귀수산이 노래하지 못한다는 것은 목소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도깨비들과 지내며, 어린 귀수산은 자신의 목소리를 창고 속에 넣어놓은 것과 같았다.
“감사인사라면 재작년에, 그리고 5년 전에, 또 7년 전에도 했었다오.”
영감 도깨비가 느긋이 대답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동안 내가 세 번은 사실을 깨달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빨리 기억해내셨구려.”
영감 도깨비가 중얼거리듯이 덧붙였다.
그래? 뭔가 그런 것도 할수록 실력이 느는 건가.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이따금 리코더 여자가 생각났다. 그 어린 귀수산은 지금쯤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자신이 원하던 평온한 삶을 어떤 식으로 즐기고 있는 걸까. 그런데 뜻밖의 곳에서 나는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인터넷 뉴스의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난, 읽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다지 화제도 되지 않는 짤막한 기사였다.
난치병으로 투병중인 소년이 할머니에게 선물 받은 리코더로 같은 병원의 환자들에게 연주를 들려주며 리코더의 요정이란 별명을 얻었다는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폐지나 고물을 주워서 생활했는데 쓰레기 사이에 버려진 리코더를 발견해 손자에게 줬다고 한다.
소년은 한 번도 불어본 적 없고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는 리코더로 아름다운 연주를 하며 병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문구점에서 5천원쯤이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플라스틱 리코더를 든 소년의 사진을 보고, 나는 거기에 누가 있는지 알았다.
그녀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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