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34화 (134/218)

에누리 없는 장사(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수리점의 출입문이 열리고 웬 남자가 불쑥 들어왔을 때, 나는 손님이 와서 반가운 마음과 함께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꺼림칙하다는 건 좀 심한 표현인가. 하지만 뭐랄까…어쩐지 바깥에서 병균을 묻혀 온 지저분한 짐승을 본 것 같은 그런 느낌과 함께 묘한 기시감이 있었다.

남자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훤칠하고 날렵한 몸에 아무나 못 걸칠 깊은 브이넥 셔츠와 보라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가 아닌 것이 아쉬울 정도로 파인 네크라인 너머로 잘 빠진 쇄골과 정성들여 가꿔진 대흉근의 골이 엿보였다.

작업장 안을 재빨리 훑어보는 눈은 크고 선명했으며 어둠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냈다. 들어올 때부터 기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확실히 알았다. 이 남자는 인간이 아니다.

그래. 당연하지 않겠어? 저렇게 흠잡을 데 없이 잘난 외모라는 건 가슴만 큰 날씬한 여자 같은 거지. 어딘가 손을 댔거나 요괴이거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인 주제에 요염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뭐 맡길 물건이라도?”

팔짱을 끼고서 내가 물었다. 저절로 말이 짧게 나왔다. 요괴 남자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속눈썹이 짙은 눈을 가늘게 내리떴다.

“네 주인께 카페 에코의 선영이 뵈러 왔노라 고하여라.”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돌리며 그가 말했다.

이 요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잠깐 이해를 못하고 있다 잠시 후에야 깨달았다.

“이 수리점 사장은 난데?”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요괴 남자가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긴 속눈썹 아래에서 거의 황금빛을 띄는 연한 갈색의 홍채가 신경질적으로 흔들렸다.

“문지기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려는 것은 알겠지만 천왕의 거처를 지키는 자가 어찌 이리 눈도 귀도 어두운가. 에코에서 온 선영이라 말했었다.”

그러니까 에코 어쩌고 하는 카페가 어딘지도 나는 모르고, 천왕 어쩌고 하는 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나는 여기 사장이지 문지기가 아니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 인간인 내가 요괴와 다툴 수는 없어. 요괴라는 건 기껏해야 백은호처럼 오래 산 여우라든가 형광충처럼 벌레라든가 아니면 단순한 도깨비 같은 거잖아. 더 고등생물인 내가 참아야지. 결코 저 요괴남자가 뭐로 변할지 몰라서 무서운 것이 아니고.

“그 에코라는 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는데,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쪽에서 잘못 찾아온 것 같네. 여기는 천왕 어쩌고 하는 데가 아니거든.”

내 말에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 무슨 억지인가. 네 한낱 인간이면서 산군의 명을 받은 내게 천왕의 위세를 빌려 박대하느냐.”

저기, 댁도 지금 산군이 어쩌고 하면서 호가호위 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산군이라고 하면 산신이란 말이다. 호랑이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기도 하지만 동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갇혀 사는 호랑이의 명령으로 왔다는 말 같지는 않고. 그러니 이 요괴는 어느 산을 다스리는 산신의 명령을 받고 여기에 왔다는 거다.

“어디 산신인지 몰라도…”

내가 막 대꾸를 하려는 참이었다. 그때 계단 위쪽에서 또각또각 걸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선영의 시선이 위로 힐끗 올라가더니 찌푸렸던 얼굴을 거짓말같이 펴고 요사한 미소를 지었다.

“유하 낭자, 마침 계셨습니까. 제가 급하고 막중한 일을 맡아 미리 연통도 넣지 못하고 갑자기 찾아뵈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와아, 너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말할 줄도 알았냐? 난 또 태어날 때부터 대꼬챙이 같은 요괴인줄 알았지.

그가 말하며 허리를 숙여 절했다. 유하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세요, 선영님. 산군의 손님은 언제라도 이곳에서 환영받고 있어요. 다만 오늘은 해명도령의 기분이 좋지 않으니 양해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극단적인 두 표정을 오가는 선영의 얼굴을 감상할 수 있었다. 단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부드러운 표정에서 얼어붙은 것 같이 딱딱한 표정으로.

“그…그렇, 습니까. 당연히 제가 이해해 드려야겠지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도령.”

어쩐지 바삭거릴 것 같은 입술을 움직여서 요괴 남자가 간신히 대답했다.

“해명, 이분은 무진 산군의 수하에서 일하며 그분의 전령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 도시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 해명과는 초면일 거예요.”

유하가 소개했다. 무진 산군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소개를 받은 이상 서로 인사를 나눠야겠지만, 요괴 남자 선영은 쭈뼛거리며 시선을 피하고 있고 나도 별로 넉살 좋게 말을 걸 생각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네자 선영도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선영님이 맡으셨다는 급하고 막중한 일은 뭐죠?”

다행히 유하는 다른 때처럼 가버리지 않고 나를 대신해서 선영을 상대했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던 요괴 남자가 숨통이 트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마침 두 분이 함께 계시니 다행입니다. 실은 산군께서 이것을 두 분께 부탁하셨습니다.”

말하며 그가 소매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담배 한 보루 크기의 상자였다. 그의 셔츠 소매란 단추가 채워져서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 한 틈이 있었을 뿐인데 거기에서 마술이라도 부리듯이 담배 열 갑이 붙은 크기의 길쭉한 상자를 꺼낸 것이다. 아, 요괴니까 요술인가.

별 장식도 없이 단순하게 만들어진 상자였다. 나무를 잘 깎은 다음 초를 먹여서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게 만들었을 뿐이다. 선영은 그것을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로 뚜껑을 열었다.

상자 바닥에는 녹색의 비단이 깔렸고 그 위에 쌀알 모양의 노란 것이 수십 개 세워져 있었다. 쌀알 모양이라고 해도 쌀알만큼 작은 것은 아니고 거의 아몬드 크기였다. 세로로 길쭉한 타원이었고 표면은 매끈했다. 마치 호박을 깎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보석이 아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뭔지 몰라도 이 노랗고 반질거리는 작은 것들은 살아있었다. 살아있는 수십 개의 작은 보석…?

“이게 뭐야?”

그것을 내려다보며 내가 묻자 선영의 아름다운 얼굴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굳었다.

“이것은…비란이 남긴 보석들입니다.”

모르는 이름이 또 나왔다. 유하를 힐끗 보자 그녀의 얼굴도 어쩐지 어두워져 있었다.

“그럼 비란은…”

“제가 찾았을 때는 이미 늦어서…다행히 다른 요괴가 냄새를 맡기 전이라 아이들은 무사했습니다만….”

“가엾게도.”

유하는 그로부터 상자를 받아 두 손으로 들고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잃었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나도 모르게 돌아보았다가 처음 보는 우울한 옆모습에 놀랐다. 나로서는 모르는 이야기만 나와서 두 사람의 대화를 거의 못 알아듣고 있었지만 그녀가 표정을 드러낼 정도로 우울한 내용인 것만은 분명했다.

선영 역시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이런 소식을…”

“아니, 비란은 여기까지도 각오하고 무진산을 떠났던 거예요. 그녀의 마지막을 모르는 우리가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기에는 일러요.”

유하는 한 손으로 노란 보석들 위를 스치듯이 쓰다듬었다. 보석 위의 허공을 어루만지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어쨌든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아이들이 깨어날 때까지 지켜주는 정도겠군요.”

유하의 말에 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까닭으로, 저도 당분간 도령과 낭자께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뭐?

선영이 한 말에 나는 놀라서 그를 노려보았다. 신세를 지겠다고? 그러니까 그 말은 당분간 이 수리점에 눌러 붙어 있겠다는 말이냐? 왜? 왜?

“그렇게 하세요.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해명과 함께…”

“뭐?”

“아닙니다.”

유하의 말에 나와 선영이 동시에 말했다. 선영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도령께 그렇게까지 폐를 끼치면 면목이 없습니다. 마침 이 건물은 옥상이 있으니 그곳을 내주시면 제게는 도리어 감사한 일입니다. 그편이 감시도 수월할 테고요.”

유하는 약간 난처한 얼굴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옥상으로 나가는 문이 있어요. 그럼 부탁드려요.”

뭘 부탁하는데? 그리고 요괴는 또 뭘 감시하겠다는 건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 끝에 선영은 나와 유하에게 목례를 보내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걸음 소리가 계단 한참 위쪽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유하에게 물었다.

“우선, 무진 산군은 누구고 비란은 또 누구고 그 둘과 저 녀석을 포함해서 다들 나나 너와는 어떤 관계고 비란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무엇으로부터 이걸 지키고 저 녀석은 뭘 감시한다는 건지부터 설명해 봐.”

좀 많은가. 하지만 모조리 다 궁금하단 말이다.

유하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우선 이것을 창고에 넣어두세요. 거기가 가장 안전할 테니까요.”

안전하다고 해봐야 벽 하나 사이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대꾸 없이 상자를 창고로 가져갔다. 그것을 문 근처 선반에 올려놓고 나오자 유하가 기다리고 있다가 나에게 말했다.

“무진은 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가장 높고 영험한 산이에요.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요.”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의자를 하나 작업 선반 옆으로 끌어당기더니 거기에 앉았다.

“무진은 한때 잠시 산군이 떠나서 빈 산이 되어버린 적이 있어요. 그 후로 인간들에게 불리는 이름이 바뀌었지만 요괴나 신령들에게는 여전히 무진이지요. 무진의 산군은 당신과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어요. 은호당의 백사장님과도 가깝고요.”

나는 산신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나 보다. 뭐…구미호와 동업하는 관계인데 뭔들 이상하지 않겠는가마는.

“무진 산군은 산 아래쪽에 에코라는 이름의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요. 카페라지만 커피보다는 전통차의 메뉴가 더 많은 곳인데, 인간들에게는 평범한 찻집이겠지만 요괴들에게는 산군의 거처이자 피난처인 곳이에요. 무진 산군은 그곳에 갈 곳이 없는 요괴들을 받아주고 있거든요.”

뭐야, 산신치고는 오지랖이 넓달까. 게다가 산신이 찻집 같은 거 운영해서 인간의 돈을 벌어들여도 되는 거야?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