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35화 (135/218)

에누리 없는 장사(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우리도 전에 신세를 진 적이 있어요. 당신은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작년의 일이에요. 아직 그 일에 사례한 적이 없으니 그 때문이라도 이 부탁은 거절할 수 없는 거예요.”

물론 기억은 안 나는데, 어차피 상대가 산신이라고 하면 부탁씩이나 하고 있다는데 딱히 거절할 수도 없고.

“비란도 요괴인가?”

내 목소리가 약간 조심스럽게 나왔다. 아까 보니 선영이란 요괴에게는 ‘선영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면서 비란은 님자도 안 붙이더라고. 꽤 친한 사이 같은데 오갔던 대화를 봐서는 아무래도…

“예. 산군에게 보호를 받던 요괴 중 하나로, 무진산에는 어릴 때 와서 꽤 오랫동안 있었다고 들었어요. 3년 전에 산을 떠났지요. 하지만 그녀는…본래가 약한데다 노리는 요괴가 많아서 다들 걱정하고 있었어요.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어서 더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유하는 아까의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평소의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요괴의 세상은 짐승의 세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요. 약한 요괴는 강한 요괴에게 잡아먹히거나 복종해야 해요. 그것이 자연스러운 법칙이라, 오히려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무진의 산군 같은 분이 별난 거예요. 비란은 약하면서도 요괴들에게는 탐스러운 먹잇감이라 태어날 때부터 쫓기며 살았어요. 무진산에 오지 않았다면 오래 전에 어느 요괴에게라도 잡아먹혀 버렸겠지요.”

요괴의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듣고 있는 거지만, 백은호도 그렇고 아까의 선영도 그렇고 요괴라기에 겉모습은 사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서 잡아먹는다든가 하는 상상을 해보자 어쩐지 오싹하다.

“그런데 왜 안전한 곳에서 떠난 거야? 그리고 산신이나 다른 요괴들은 위험한 줄 알면서 왜 안 말린 건데?”

당연하다면 당연하달 질문이 나왔다. 물론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이유란 게 뭐였을까.

“비란은 용감했으니까요. 무진산에 숨어서 언제까지라도 평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그녀는 혼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했어요. 무엇보다 그녀는, 후손을 남기길 원했어요.”

유하는 창고 쪽을 돌아보았다. 벽 너머에 있는,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을 상자가 있을 방향이었다.

“무진산은 물론이고 이 근방 어디에도 그녀의 동족은 없었거든요. 다른 동족을 만나려면 산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어요. 비란은 많은 아이들을 낳아서 자신의 후손이 번성하기를 바랐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해는 안 된다. 약하고 쫓김 당하는 삶을 많은 아이들에게 물려주려는 마음이란 어떤 걸까?

“결국 원하는 대로 후손을 남겼으니 그녀를 위해 기뻐해야 할지…”

유하는 말끝을 흐렸다. 비란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녀 역시 심정은 복잡한 것 같다.

그런데 그렇다는 건, 그 후손이라는 게 아까 그 노란 보석 같은 그거란 말인가? 물론 보석은 아니고 살아있는 어떤 것이란 느낌을 받기는 했어도…. 어, 그럼 선영이 감시하겠다고 하는 건 그런 뜻이었어?

“그 아이들의 냄새를 맡고 요괴들이 쫓아온다는 거야? 여기로?”

내 물음에 유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카페 에코로 몰려갔을 거예요. 분명 산군께서 그쪽으로 유인하려고 무슨 수를 썼을 테니까요. 여기로 아이들을 보낸 것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예요. 강한 요괴가 약한 요괴를 잡아먹는 것은 힘의 순리. 엄밀히 말하면 산군이라도 그것을 가로막을 권리가 없으니까요. 무진의 산군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약한 요괴들을 보호해 올 수 있었던 거지만 신령한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일만큼 할 수 없는 일도 분명 있거든요.”

만약이라는 건가. 그럼 당장 뭐가 몰려온다는 말은 아닌 것 같네.

그런데 산군 그 양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위험을 몰고 다니는 요괴를 나한테 보낸 건데? 백은호하고도 친하다면서 그 구미호를 이럴 때 써먹으면 좋잖아. 아무렴 수백 년을 산 여우 요괴가 15미터에서 떨어져도 멀쩡한 인간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

불평하고 싶지만, 뭐가 변한 건지 모를 선영이란 요괴도 있고 창고에는 도깨비들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것 같고. 또 어쩌면 산신이 아예 알아서 다 해결해 버려 여기까지는 아무도 안 올지도 모르잖아.

낙천적으로 생각하자. 그래. 의외로 선영이란 녀석이 굉장히 강한 요괴라 내가 나설 필요조차 없을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 창고로 들어갔다. 비란의 아이들은 상자 안에 얌전히 놓인 채로 반들거렸다. 요괴의 아이는 요괴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예쁘게 깎아놓은 보석 같다니 신기하다. 보석 같지만 하나하나 살아서 두근두근 숨 쉬고 있었다.

딱딱한 껍질 안에서 부드럽게 요동하는 생명. 마치 씨앗 같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보고 있자니 그것을 어루만지듯 손으로 쓸던 유하가 생각났다. 비란의 이야기를 듣고 어두워진 표정도 그렇지만 이것들을 내려다보며 어루던 때의 그녀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절대로 약하지 않은.

나로서는 기억조차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한숨이 나왔다. 내 한숨이 노란 보석들에게 닿았는지도 모른다. 두근두근 숨 쉬던 것들이 조금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선영이나 유하가 ‘아이들’이라고 부르던 것이 떠오르자 이 작은 보석들이 매우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뭘 기죽고 그러냐, 임마들아. 내가 이래 뵈도 구미호랑 친구 먹는 사이거든. 산신하고도 친하고. 또…도깨비들도. 그리고 옥상에는 선영인가 하는 요괴도 있고. 알아? 우리가 지켜줄 거니까 걱정 말라고.”

상자를 내려다보며 큰소리치다니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런데 내 말을 듣자 어쩐지 노란 것들이 다시 편안하게 두근두근거리는 것 같다. 그냥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영감 도깨비에게 상자 안의 노란 것들을 부탁해 두고 창고에서 나왔다. 별 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또 생각한 그대로 별 일 없이 그날은 저물었다. 아무래도 맡아놓은 것도 있고 요괴가 올지 모른다는 말도 들어서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기는 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한 하루였다.

다음 날 나는 기억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듣기도 전에 눈을 떴다.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웠던 것이다. 뭔가 소란하고 요란하고 몹시 거슬리는 소리가 잠시도 끊어지지 않고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글쎄 옆집 고양이가 달려 나와서…]

[아니라니까. 다섯째가 노란 부리고 넷째가 검정박이였어.]

[…라는 말도 있는데 누가 그걸 알겠어. 바로 위에서 본 것도 아니고.]

[아, 그 머리에 보라색 점 있는 비둘기 그 양반? 어제 뭐를 잘못 주워 먹었는지 날아가면서 흰 똥을 쭉쭉…]

뭐지, 이 상황…. 이 동네 아줌마들이 전부다 우리 집 옥상에 모여서 수다 떨기 대회라도 하시나. 시끄러워. 엄청 시끄러워. 너무 시끄러운데 어쩐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하나하나 다 들려. 게다가 거기에 새소리까지 마구 뒤섞여 있어. 덕분에 세 배로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머리를 감싸 쥐며 밖으로 나갔지만 내가 나갈 수 있는 밖이라야 계단 아니면 작업장 정도인데 두 곳 모두 여느 때와 다름없이 텅 비어 있었다. 소리는 더 바깥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옥상.

옥상도 바깥이라 나갈 수는 없고 계단 아래에서 짜증난 얼굴로 서성이고 있으려니 유하가 자신의 집에서 나왔다.

“도대체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누가 저렇게 모여서 떠드는 건데?”

옥상을 가리키며 묻자 유하는 태연히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목소리와 함께 울리던 새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간밤엔 편하셨나요? 공기가 차갑지는 않았는지.”

묻는 유하의 목소리에 답하여

“별 말씀을 하십니다. 제 거처라야 본래 어둡고 침침한 굴 속인 것을. 이렇게 편안한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제 집보다도 편하게 밤을 보냈습니다.”

선영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잠시 주거니 받거니 잡담을 나누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나는 계단 밑에서 왔다 갔다 하며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요괴 마음에 안 들어. 처음부터 별로였고 갈수록 별로야.

그래도 산신의 전령인데다 노란 보석들을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나. 불평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기다리는데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비둘기다.

녀석은 들어오더니 제집 마냥 계단을 뛰어다니며 바닥에 뭐 흘린 거 없나 요리조리 살피고 다녔다.

“훠이. 여긴 먹을 것 없으니까 나가서 찾아.”

비둘기에게 손짓해서 쫓아내려고 했으나

“맛있는 냄새. 맛있는 냄새.”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금 비둘기가 말한 건가? 한 번 더 말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비둘기 녀석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총총 뛰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가만, 그러고 보니 아까 들은 대화 내용은 어딘지 사람의 대화라기보다…새들의 대화였다. 지금은 더 이상 안 들리지만 날갯짓 소리는 꽤 들리고 있었다. 소리만으로는 한두 마리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옥상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유하가 잡담을 마치고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그녀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유하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근처의 새들이 모여 있는 거예요. 새들이 선영님을 따르거든요. 좀 시끄럽지만 여러 가지 소식도 전해주고 감시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어쩔 수 없네요.”

요괴는 역시 요괴라는 걸까. 새들을 부릴 수 있다는 거네.

하긴 새들은 날아다니니까 높은 곳에서 멀리 내려다볼 수도 있고 요괴가 오는 걸 감시하기도 편할 것 같다. 시끄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소리에서 멀어지려고 1층의 작업장으로 내려갔으나 새소리는 안 들려도 대화 소리만은 계속해서 들렸다. 어쩐지 귀로 듣는다기보다는 몸 안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려오는 소리였다. 신경 쓰다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시끄러웠다. 애써 무시하면서 창고로 간 나는 우선 노란 보석들을 확인할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이른 시각이라 작업장도 어둡고 창고 안은 더 어두웠다. 불을 켜려고 스위치가 있는 벽을 더듬는데 뭔가 물컹한 것이 손에 잡혔다. 물컹하고 부드럽고 피부 같은 표면에 약간 돌기가 있는데 그 표면에 주름이 잡혔다 펴지…

“왁!”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난 순간 머리 위에서 뭔가가 툭 떨어져 신발 위에 철썩 부딪쳤다. 내려다보자 작은 오이 정도 크기의 뭔가가 늘어났다 줄어들며 열심히 내 신발에서 내려가고 있었다. 내려가더니 자기와 똑같이 생긴 것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부지런히 다시 기어갔다.

“어어…어…”

나는 그것들을 보고 갑자기 말을 잃었다.

내 창고에 초록색의 애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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