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누리 없는 장사(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단단히 작정하고 한 말이었다. 무슨 대답을 들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유하로부터 내가 석 달씩이나 잠들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저게 농담인지 진지한 거짓말인지 헷갈렸지만 소설가의 저택에 갔을 때 확실히 느꼈다. 내 주변에는 인간의 상식에서 십 리 쯤은 떨어져 사는 것 같은 존재로 가득했다. 도깨비도 구미호도 손님들이 가져오는 것들도 모두 그랬다.
그러니 그런 것들 한가운데에 있는 내가 정상적인 인간일 리 없다. 해가 떴어도 해가 졌어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구름이 낀 흐린 날에만 겨우 외출할 수 있는 것부터가 틀려먹었다. 정상인가는 문제도 아니고 아예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대리석 타일이 뜯겨져 나가 어지러운 작업장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바로 내가 한 일이었다. 요괴의 거미줄을 뜯어내며 바닥을 저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나는…”
나는 도대체 뭐지?
두려운 질문이 입술을 우물우물 비집고 나오는 순간 산신이 뭔가를 척, 눈앞에 내놓았다. 작고 네모난 종이였다. 코팅 되어 빳빳한 종이 안에 ‘카페 에코’란 글자와 고양이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었다.
앞면에 전화 번호, 뒷면에 간단한 약도가 있는 작은 종잇조각이란 말할 것도 없이 명함이다.
“이틀 후에는 비가 올 예정이라고 하니 들러주십시오. 도령에게는 공짜로 한 잔, 대접해 드릴 테니까요. 양육비도 그때 갚도록 하지요.”
말하자면 외상이라는 거였다.
산신은 선영이 몰고 나온 애벌레들에게 가서 손을 내밀었다. 꼬물꼬물 다가온 애벌레들은 산신의 손에 닿자 진짜 애벌레처럼 조그맣게 변해서 손가락을 타고 기어올랐다. 수십 마리의 애벌레들을 팔에 촘촘하게 올려놓고 무진의 산군은 수리점을 떠났다. 선영이 개선장군처럼 으스대며 묶인 거미들을 끌고 뒤를 따랐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도 잠시 동안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내 방을 차지하고서 하루 종일 부스럭대고 낑낑거리고 울어대던 녀석들이 사라지자 세상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적응이 안 된다. 애벌레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었던 지난 열흘이 꿈처럼 느껴졌다.
엉망진창이 된 작업장 바닥이 그 며칠과 요괴의 공격과 산신의 방문이 모두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웠다.
하지만 그 사이 정들었나. 꼬물꼬물 기어 다니던 초록색의 그 녀석들이 이제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서운하다. 2층으로 가서 이제 다시 내 차지가 될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녀석들이 남겨놓은 일거리를 보자 갑자기 서운했던 것이 단번에 사라졌다.
방안에는 애벌레들이 벗어놓은 허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산신이 데려가 줘서 다행이야. 이런 걸 세 번이나 더 치우기는 싫어.
다행히 유하가 와서 청소를 도와준 덕분에 내 방은 금세 깨끗해졌다.
그리고 이틀 동안, 나는 자다 벌떡 일어나서 누가 우는 소리를 내나 귀를 기울이거나 시계를 보고 밥 먹일 시간이 지났다는 걸 깨닫고 놀라거나 습관적으로 빗자루와 쓰레기통을 들고 방을 청소하러 올라오거나 하며 보냈다.
24시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던 녀석들은 이제 떠나버렸지만 열흘 동안 몸에 익은 습관들은 함께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유하도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지나가는 말로 “갑자기 조용하니 이상하네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참 조용했다.
밤이 되면 창고만 한정으로 도깨비들 덕분에 떠들썩하지만 낮에는 그야말로 적막하다. 조금 시끄러운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떤 시끄러운 것들 일흔여덟 마리 때문에 고생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런 미묘한 이틀을 보낸 뒤에 산신의 말처럼 과연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몇 번이나 만지작거려서 가장자리가 조금 구겨진 명함을 들고 나는 산신이 운영한다는 카페 에코로 갔다.
그곳은 도립공원 입구에 한적하니 자리 잡은 작은 찻집이었다.
외관은 뭐라고 해야 할까. 식혜나 막걸리나 대추차 같은 것을 팔게 생긴 건물이었다. 초가지붕에 흙벽에 완자무늬 창살이 들어있는 유리창에, 문 옆에는 청사초롱이 걸려 있고 창문 아래 놓인 절구에서 금붕어가 놀았다.
딱 전통 찻집인데 통나무를 잘라 만든 간판에 카페 에코라고 당당하게 새겨놓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과연 커피를 팔기는 하는데 메뉴는 아메리카노와 카페 라떼로 끝. 나머지는 생강차, 석류차, 대추차에 국화를 비롯한 온갖 꽃차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찻집의 밖에는 찻집이 아니라 꽃집인가 싶을 정도로 많은 꽃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어서 오십시오.”
낯익은 얼굴이 다가왔다. 흔한 카페 종업원 복장의 선영이었다. 안온한 조명 속에서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어딘지 요사한 빛을 띠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 손님들은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차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있다. 이제 보니 카페 안의 손님들은 연령차가 있으나 죄다 여자였다.
미모로 손님을 끄는 역할인가, 쟤는.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앞장서서 나를 안내했다. 사장님이란 역시 무진의 산군을 가리키는 말이겠지? 이끄는 대로 갔더니 안쪽의 작은 방에서 과연 산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 전에 봤을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서 그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가 청자 주전자에서 붉은 빛이 도는 걸쭉한 것을 대접 같은 잔에 따르더니 내 앞에 놓았다.
“약속드린 차입니다.”
죽처럼 보이는데 차라고 우기니 일단 마셔보았다. 한 모금 입에 넣자 익숙한 향이 퍼졌다.
“대추차잖아.”
대추를 우린 다음 거르지 않고 대추속까지 함께 갈아 넣어 걸쭉해진 차였다.
“여기 오시면 늘 그것을 주문하셔서 여쭙지 않고 준비했습니다. 아직도 입에 맞으십니까?”
그가 물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이 죽 같은 대추차가 나는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공짜 차 한 잔 때문이 아니다.
반쯤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 나는 어느 모로도 인간과 구분이 안 되는 젊은 산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 그러려고 애쓰는 중이지만 내 표정이 꽤 굳어있을지도 몰랐다. 나를 마주보며 산신은 온화하게 웃었다.
“말씀하신 양육비는, 그러면 어떻게 드리면 될까요?”
내가 할 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질문하려고 생각하자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나는 뭐지?”
더 두려워지기 전에 질문을 뱉어내 버렸다. 말하고 나서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이미 입 밖에 내놓은 다음이다.
“그야 해명도령이지요.”
별로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산신이 대답했다. 해맑은 표정이었다. 일흔여덟 마리 애벌레의 양육비 및 숙박비를 아주 날로 먹으려고 한다?
“그런 것을 묻는 게 아니잖아.”
내가 뭘 궁금해 하는지 이 산신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알 것이다. 수리점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여기에 온 후로도 같은 생각을 했다. 기억을 잃기 전에 나는 몇 번이나 여기 왔던 것이다. 유하나 백은호 만큼은 아닌지 몰라도 그 역시 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말에 산신은 시선을 떨어뜨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뭘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재촉하지도 못하고 나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한참을 생각한 끝에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씀을 드려도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어쩐지 원망 받을 것 같군요.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도령이 묻는 것은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겠으나 지금으로부터 일흔일곱 해 안에 있었던 일만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양육과 숙박에 대해 제가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비용입니다.”
손님이 마음대로 비용을 정하는 거야?
하지만 그의 제의에 나도 딱히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몇 가지 안 된다.
“나는 인간이야?”
말 돌릴 필요도 없이 대놓고 물었다.
“인간이지요.”
산신은 선선히 대답했다.
“높은 곳에서 상처도 없이 뛰어내리고 요괴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 몸은 인간이나, 몸 안에 깃든 신령한 존재 때문에 그렇답니다.”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해준다. 너무 태연히 말해서 나는 잠시 그가 한 말이 대단치 않은 거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그의 대답을 곱씹다가 문득 깨달았다. 신령한 존재? 나한테 뭐가 깃들어 있다는 거지? 무슨 신령 같은 거라도?
“그 존재가 뭔데?”
이번에도 곧 대답해줄 줄로 알았으나 산신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망설였다. 잠깐이었다. 그는 곧 고개를 들었다.
“열두 번째 하늘을 다스리는 천왕이자 아란 어미의 막내아들인 심장천왕 해명도령입니다.”
뭔가 듣도 보도 못한데다 알아듣지도 못할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선영도 그런 말을 했었다. 수리점에 왔을 때 그곳을 천왕의 거처라고 불렀었지. 그 천왕이라는 게 뭐냐고 물었지만 산신은 어깨를 으쓱 모으며 대답을 거절했다.
“일흔일곱 해 안에 직접 보고 들은 것만 이야기하겠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런 옛날이야기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 나이는 서른도 안 되었다. 일흔일곱 해까지 거슬러 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 70년 전에 나는 뭐하고 있었는데?”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절의 일을 물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왕산 용추폭포 근처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대답을 들었다.
“뭐야, 그거. 설마 전생 이야기야?”
“아닙니다, 도령.”
산신의 대답은 짧았다. 묻는 것에만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짧아도 확실히 이상한 말이었다. 전생이 아니면 현생이라는 건데, 70년 전에도 살아있었다면 지금 내 나이가 몇 살이라는 거야?
“내 나이가 몇 살이지?”
떠오른 것을 곧장 물었다. 산신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일흔일곱 해 안에서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77살은 넘었다는 걸까? 그게 말이 돼? 아니…잠깐. 내 안에는 뭔지 복잡해 보이는 신령한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했다. 그 이상한 것 때문에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 오래 젊음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게 된 것도 오래 전의 일인가? 아니면 77년 안?”
머릿속의 생각을 고르며 그에게 물었다.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산신 쪽에서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의 표정이 확실히 변하는 것이 보였다. 이내 온화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으나 내 질문에 당황했던 것이 분명했다.
“12년 전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대답하는 그의 미묘한 표정을 보고 나는 다음 질문으로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게 되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젊은 산신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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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누리 없는 장사(7)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두려운 것을 떠올린 사람의 표정이었다.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산신에게도 두려울 정도의 일이었다는 걸까. 그는 조금 굳어진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부드럽지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시작된 일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겠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것은 도령이 어떤 요괴를 위해 뭔가를 하려고 했고 그 때문에 이곳, 열두 번째 하늘이 어그러질 수도 있을 정도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정도입니다.”
뭐…?
“그것을 막기 위해 남쪽의 모든 산신들이 모였고 거기에 저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늦지 않아서 막을 수 있었으나 지금도 다시 떠올리기는 싫은 기억이군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열두 번째 하늘이 어그러진다는 게 무슨 소리야, 대체.”
“말 그대로입니다. 삼계 십이천의 열두 하늘 가운데 하나인 인계 심장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의미이지요.”
말도 안 된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세상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거지. 세상은 고사하고 요괴의 거미줄 정도로도 꼼짝 못하는 나다.
“내가 그런 걸…”
반박하려고 했으나, 그 전에 생각했다. 분명 인간에게 섬김을 받고 있을 이 산신은 처음부터 내게 존대하며 어디까지나 공손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가 예의바르게 대하는 대상은 나인가 아니면 내 안에 깃들어 있다는 신령한 존재인가.
만일 그 존재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해서 뭔가 터무니없는 일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하지만 그렇다면 12년 전에 하늘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는 그 일은 내가 아니라 내게 깃들어 있는 그 존재가 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산신은…
어쩌면 나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착각이라고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와 버려서 나는 스스로 물으면서도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천왕이라는 게 나한테서 떨어질 수는 있는 거야?”
내 질문에 젊은 산신이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복잡한 표정을 지었을 때 이미 대답은 알 수 있었다.
“불가능하겠지요. 천왕은 곧 도령 자신이니까요.”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조금도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라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어버렸다.
“아아, 그러니까 나는 원래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을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진 그런 거였다는 말이네.”
말하자면 전설 속에서 이따금 등장하는, 신선이나 천계의 신이 인간 세계로 유배되어 사람의 몸을 하고서 태어나는 그런 경우라고 봐야 하는 걸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 현실감이 없는 것과 별개로 납득은 된다.
어쨌든 나는 유배된 주제에 또 다시 사고를 쳐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처리를 산신들이 했다니 기억은 없지만 미안해지네.
“그런데 나는 왜 그걸 기억 못하는 거지? 아니 그 전에, 어째서 기억을 잃게 되는 거지? 그런 대단하신 몸이라면서.”
“도령은 분명 십이천왕으로서 이 세계를 관장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몸 안에 갇혀 힘을 거의 사용할 수 없으며 그 육신은 인간으로서 양이천왕의 권세 아래에 놓였으니 명부에 적힌 수명을 다하면 다섯째 하늘로 가서 환생을 기다림이 마땅했지요. 허나…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신을 속이고 양이천왕의 규율을 어기고 있기에, 도령은 이곳에 남아있는 대신 기억을 뺏기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 대신 기억을 압수당한다는 거였다. 그거…남는 장사네. 확실히 기억이 없으니 불편한 것은 많지만 죽지 않는 대가라면야.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실감이 나지 않으실 테지만, 도령에게도 편한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온화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산신이 말했다.
그의 말에 그제야, 나는 내가 그의 말을 남 이야기처럼 듣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말대로다. 조금도 실감나지 않는다. 당장 산신만 해도 동화 속에서나 나올 존재인데 거기에 무슨 천왕이니 열두 번째 하늘이니. 그런 걸 듣자마자 진심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 상대가 산신이니까 믿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감은 둘째 치고, 이쯤에서 가장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12년 전 남쪽의 산신들이 모두 모여서 해결해야 했을 정도로 큰 사고를 쳤던 그때, 내가 뭔가를 해주려고 했던 그 요괴는 누구일까.
지금 당장 떠오르는 요괴라면 백은호와 도깨비들뿐인데.
그것을 산신에게 묻자 그의 온화한 얼굴에 난처한 미소가 떠올랐다. 말하기 싫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속했던 것이다. 산신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천천히 말했다.
“도령, 그분은 지금 도령과 함께 계십니다. 말씀드릴 수 있는 일흔일곱 해 내내, 함께 계셨지요.”
지금 나와 함께 있으며 이전에도 내내…
“귀수산…? 아니면 도깨비야?”
내 마음 속에는 다른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질문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산신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도령은 그분의 심장을 품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 하시는군요.”
그리고서 그는 자신의 차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말하지 않았지만 더는 그에게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채로 나는 그곳을 나왔다. 유하, 그녀가 요괴라고. 내가 천왕 어쩌고 하는 말만큼이나 실감이 안 났다. 그러나 백은호도 소설가의 저택에서 본래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유하가 요괴였다면, 그녀의 본모습은 어떤 걸까.
찻집을 나오기 전에 산신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일흔일곱 해 안에 일어난 일만 말해줄 수 있다는 거야? 그것도 이유가 있나?”
별로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내 물음에 산신은 익숙해진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일흔일곱 마리의 양육비였으니까요. 도령.”
뭐…? 애벌레는 일흔여덟 마리였다고.
산신에게 그렇게 말했으나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뿐이었다.
설마.
수리점으로 돌아오자 유하는 마침 작업장 바닥을 수리하느라 바빴다. 밀가루 반죽 같은 압착 시멘트를 개어서 바닥에 바르고 무거운 대리석 타일을 하나씩 맞춰 붙이는 손길이 능숙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보통 손님들이 가져오는 선풍기나 전기밥솥 같은 것도 능숙하게 고치고 시간이 나면 수를 놓기도 하고 재봉틀로 옷을 고쳤다. 집안일은 완벽할 정도로 해내는데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인이기까지 하니까 요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우렁 각시 같은 걸까.
나는 12년 전에 그녀를 위해서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이 세상을 어그러지게 만들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내가 잠시 멍하니 서있자 유하가 땀도 나지 않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티 하나 없이 하얀 그녀의 얼굴은 과연 비현실적이다. 사람이 이렇게나 점 하나 없이 깨끗하고 갓난아이처럼 말간 피부를 20대까지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왜요?”
묻는 목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내가 말없이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명이 필요했다.
“시멘트 묻었네.”
대답하며 그녀의 볼을 쓸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손에 닿은 볼이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보송보송해서, 거짓말하고서라도 만져보고 싶게 만든 그녀가 잘못이라고 나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마음속으로 댔다.
유하는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바닥 수리를 계속했다.
“옷은 밖으로 꺼내 놓았으니까 당분간 드레스 룸에 들어가지 말아요.”
계단을 올라가는 내게 유하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려다보자 압착시멘트를 칠하며 그녀가 조금 웃었다.
“방이 필요한 이가 있어서 며칠 동안 빌려줬어요.”
뭐? 누구? 그리고 왜 내 방에?
질문과 동시에 대답이 떠올랐다. 설마,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내 방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어느새 감쪽같이 고쳐져 있었다. 금이 간 벽에 새로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한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드레스 룸의 문을 열어보자 과연 거기에 있었다. 드레스 룸을 잠시 임대한 녹색의 방 임자가.
그러나 주름지고 말랑말랑 했던 녀석의 몸은 지금 갑옷처럼 딱딱한 껍질에 감싸였다. 드레스 룸의 벽에 세로로 달라붙은 채, 녀석은 번데기가 되어 있었다.
산신의 말대로, 돌아간 애벌레는 일흔일곱 마리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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