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44화 (144/218)

이매탈(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작업장으로 돌아간 나는 이매탈을 작업 선반에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이게 버섯 요괴란 말이지.

태생이 그렇다면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는 것만으로도 타격을 받지 않을까. 말하자면 살짝 데쳐진 것이다. 그러면 이 요괴는 화상을 입은 셈인데 가면을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려면 화상을 치료해줘야 하는 건가.

하지만 요괴를 어떻게 치료하지? 버섯에게 화상 연고를 발라주거나 드레싱을 해주거나 할 수는 없잖아. 뭐 겉모습은 어디까지나 탈 모양이고.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물품 출납서를 확인해 보았으나 이런 저런 식물형 요괴들이 보여도 버섯은 없다. 버섯이라면 불에 굽거나 뜨거운 물에 데쳐서 요리하는 정보야 인터넷에 넘쳐나겠지만 치료하는 정보는…

뭐 하나 건진 것 없이 작업장 안을 빙빙 돌며 고민하던 나는 결국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다. 몸으로 때우는 거다.

이 요괴는 인간으로부터 양분을 흡수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단 먹여보자고. 굶기면서 치료할 필요도 없을 테고 어쨌든 뭔가 먹으면 배고픈 상태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나는 탈을 들어 얼굴에 가져갔다.

푸슬푸슬 메마른 탈의 표면이 볼에 닿았다. 나무껍질 냄새 같기도 하고 흙냄새 같기도 한 묘한 향기가 풍겨왔다. 그 냄새가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가 조금 더 깊이 들이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폐를 최대한으로 부풀리며 숨을 들이쉬었다. 기분 좋은 향기가 몸 안에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냄새였다. 언제까지나 맡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아니, 냄새를 맡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손안에 넣고 싶다.

나는 팔을 뻗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향기의 근원을 끌어당겼다.

조금 힘을 주어 당겼을 뿐이지만 부드럽고 나긋한 몸이 가볍게 품에 안겼다. 저항 없이 내 가슴에 기대어 있는 몸을 두 팔로 감아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손 안에 가득 잡히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과 끓어오르는 듯한 쾌락이 심장을 쳤다.

“아침이에요, 해명.”

품에 안긴 유하가 나무라듯이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아침이면 어때. 누가 볼 것도 아니고.”

대꾸하면서, 팔에서 벗어나려는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새들이 본다고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창문의 롤스크린이 완전히 말려 올라가 있어 벽 한 면을 차지하는 넓은 유리창 너머로 바깥이 환히 보였다. 길 건너편 나무에 조르르 앉아서 이쪽을 쳐다보는 참새들은 물론 바람이 흔들릴 때마다 유리창 가까이로 흔들흔들 다가왔다 사라지는 목신도 있었다.

[도령이 애기씨를 답싹 안더니 확 쓰러뜨려놓고는…]

[에구머니, 에구머니.]

참새들은 나무 아래의 도둑고양이에게 내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계하고 있는 것 같다. 너희들 남의 사생활을 그렇게 막 퍼뜨려도 되는 거야? 그런데 참새들 수다야 어차피 동물들 밖에 못 들을 테고.

“궁금하면 보라지 뭐.”

몸을 굴려서 안고 있던 그녀 위로 올라가자 창밖에서 참새들이 날개를 파닥거렸다.

“해명! 뭐하는 거예요.”

밑에 깔린 유하가 나직이 외쳤다.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밤에 하던 걸 아침에도 해보려고.”

내 말에 귀까지 빨개지며 유하가 뭐라고 항의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막 소리를 내려던, 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입술을 질리도록 맛보았다.

[글쎄 남세스럽게 애기씨 위로 올라가서 몸을 꽉 누르고는 입술을 빨고 핥고…]

[에구머니, 에구머니.]

조금 전 생각은 틀린 것 같다. 보던지 소문을 내던지 상관은 없는데 내가 하는 짓을 내 귀로 듣고 있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니네.

내 손짓에 롤스크린이 좌르륵 펼쳐져 창문을 가리자 바르작거리던 유하가 비로소 얌전해졌다. 그러나 나무라며 웃는 그녀도, 부끄러워하는 그녀도, 붉어진 얼굴을 조금 찡그리고 있는 지금의 그녀도, 한 점 의심할 필요 없이 나를 사랑한다. 이것은 절대로 질리거나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포기할 수 없는 행복…’

언젠가 들은 말이라고 문득 생각했다. 뭐였지? 최근이었는데.

그러나 그 생각은 바람처럼 머릿속을 스쳐갔을 뿐이다. 내 주의는 금세 유하에게 되돌아가, 이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그녀를 희롱하는 데 정신을 빼앗겼다.

롤스크린을 뚫고 들어온 햇빛으로 환한 방에서, 우리는 서로를 탐닉하며 아침을 보냈다.

달콤한 고단함으로 긴 아침이었다. 몇 번이나 폭풍 같은 순간을 겪고, 둘 다 흠뻑 젖은 채로 쓰러져버렸다. 내 팔을 베고 누운 유하로부터 좋은 냄새가 났다. 나무껍질 같기도 하고 흙냄새 같기도 한…

숨을 더 깊이 들이쉬어서 그 냄새를 몸 안에 가득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좀 더 진하게…

“해명.”

그러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냄새가 사라졌다.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내 방 침대도 유하도…아니, 유하는 여기에 있었다. 다만 내 옆에 팔을 베고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똑바로 서 있었다.

그녀에게 언제 옷을 입은 거냐고 물을 뻔했다. 정말로 다행이지만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탈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막 벌어진 입을 간신히 닫을 수 있었다.

정신이 들었어도 그녀에게 대답할 정신머리는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여기는 분명 내 방이 아닌 작업장이다. 작업 선반 앞 의자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유하가 들고 있는 탈…저걸 썼었지. 겨우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탈을 쓰자 뭔가 묘한 냄새가 났었다. 그 냄새를 맡으면서부터 잘못된 것 같다. 내가 정말 내 방에 있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 방에서 있었던 일은…

거기에 생각이 닿자 얼굴이 화끈해졌다.

“괜찮아요? 열이 있는 것 같아요.”

나를 내려다보며 유하가 물었다.

“없어! 별로. 전혀. 아니…좀 그런가. 약간…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방에서 좀 쉴게.”

횡설수설하며 벌떡 일어나서 내 방으로 도망치듯 갔다. 물론 그녀가 알았을 리는 없지만 그런 상상을 했다니. 그것도 현실로 느낄 만큼 리얼하게! 도저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도망가다 말고 도로 작업장으로 달려가서 아직 그녀가 들고 있던 탈을 재빨리 낚아챘다.

“이거 좀 위험한 요괴 같으니까 손대지 마.”

방으로 간 나는 이매탈을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이 탈이 위험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어떻게 이런 가면을 한 시간만 쓰고 벗을 수가 있지? 직접 경험해 보니 이건 좋은 꿈 정도가 아니었다. 현실과 구분이 안 될 정도의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가면을 써본 시각으로부터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지난 것 같다. 꿈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데 가면을 벗어야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나만 해도 두 시간 동안이나 철석같이 현실이라고 믿으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확실히, 손님의 말 그대로였다. 환상일 뿐이지만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유하가 나를 사랑한다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던 순간이나, 그녀를 안고 있을 때 느꼈던 지극한 쾌락과 충족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환상은 환상. 꿈은 꿈.

제어할 수 없는 환상은 분명 위험하다. 영감 도깨비도 충고했었다. 이매탈을 고칠 수 있는가는 일단 미뤄두고, 이 탈을 계속 사용해도 정말 괜찮은지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요괴에 대해 잘 아는 녀석이 영감 도깨비 말고도 하나 더 있었지. 나는 수백 년을 산 여우 요괴와 동업하는 몸이잖아.

백은호는 신호가 꽤 울린 다음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에게 가면역에 대해서 묻자 나른한 목소리에 약간 생기가 돌았다.

“가면역 말입니까? 예전에는 꽤 흔한 요괴였습니다만 요즘에는 보기 드물지요. 자연이 파괴되었다거나 요괴의 수가 점점 줄고 있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인간이 천적이라서요.”

인간이 가면역의 천적이라고? 오히려 그 반대 아니야? 가면역은 인간을 양분으로 삼고 있다며.

“엄밀히 말하면 가면역을 이용해먹는 인간들…이 천적이겠지만요. 그 요괴는 인간으로부터 양분을 흡수하는 대신 그들이 소원하는 환상을 직접 겪게 해줍니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서 환락가에 꽤나 비싼 값으로 잘 팔리고 있지요. 가면역을 주로 채집하고 다니는 도사나 심마니도 있습니다.”

그런 거였어?

“가면역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인간이 없으면 가면역은 버섯의 모양이 되어 땅에서라도 양분을 흡수하겠지만 그것은 거의 연명하는 수준일 뿐이라서요. 가면역은 마음껏 양분을 흡수하고 인간은 쾌락을 얻고. 드물게 인간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요괴입니다.”

그리고 중간에서 돈은 다른 사람이 벌고….

“그런데 위험하지 않아? 조금 전에 사용해 봤는데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생생했어. 난 정말 현실인줄 알았다고.”

“아아, 사람에 따라 환상에 너무 깊이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뭐 드문 예입니다만.”

내가 그 드문 예인 것 같은데?

“그러나 어차피 가면역은 주로 업소용입니다. 개인이 갖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말하다 말고 백은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생각해낸 눈치였다. 그가 조금 뜸을 들였다가 내게 물었다.

“혹시 가면역을 맡긴 사람 이름이 뭡니까.”

손님의 이름을 알려주자 백은호는 묘한 질문을 했다.

“그 손님은 어떻던가요. 병든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까?”

“별로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데. 왜?”

“가면역을 너무 자주 오래 가까이 하면 병을 앓게 됩니다.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병이 옮지요. 의사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 사용에 조심하라고 경고했었습니다.”

“뭐야, 설마 그 탈을 판 사람이 너였어?”

놀란 내가 묻자 백은호는 태연히 “예.”라고 대답했다.

“왜 그랬어? 잘못 사용하면 본인이나 주변 사람까지 병에 걸릴 수도 있는 요괴인데. 게다가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어쩌려고?”

“그거야 제가 알 바 아니지요. 필요한 것은 모두 알려줬습니다. 그런데도 사고 싶어 한 책임은 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뻔뻔하다싶을 정도로 차갑게 말한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요괴는 이래서 요괴인가 싶어 약간 정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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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빵 외전 - 내 팔자야.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사신청(死神廳) 잡무 처리반의 직원 이만술이 이제 슬슬 식당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태양이 딱 하늘 한가운데에 도착한 바로 그즈음이었다. 어젯밤 늦게 들어갔다고 바가지 긁히고 아침밥도 못 얻어먹은 채로 나온 데다 말린 과일로 대충 때운 뱃속이 꼬이는 것처럼 고파왔던 것이다. 밥 먹자, 밥.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 때를 놓치면 되겠냐.

그가 처리하던 서류를 밀쳐놓고 막 일어서려는 순간 누군가의 그림자가 책상위로 드리워졌다. 꼭 이럴 때 와서 밥도 못 먹게 하는 것들이 있어요. 이만술은 인상을 쓰며 그림자의 주인을 휙 올려다봤다. 그리고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버렸다.

‘또 너냐.’

겉모습은 야무지게 생긴 처녀였다. 사신청 직원들의 고유 복장은 검은 옷에 검은 비녀, 검은 버선, 검은 신발인데 이 여자는 좀 문제가 있었다.

행동이 거친지 조심성이 없는지 옷이 찢어지거나 하면 그 위에 예쁜 색 천을 큼지막하게 올려서 발로 한 것 같은 바느질로 꿰매 놓았다. 그런 자리가 대여섯 개는 되어서 얼핏 보면 장식용 아플리케라도 한 것 같았다.

막상 입은 옷은 공식 복장이니까 규칙위반이라고 할 수도 없고, 까마귀 무리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오색조처럼 보여 사신청에서 항상 눈에 띄었다.

그녀가 인세인 열두째 하늘에서 여기, 다섯째 하늘로 온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게다가 오자마자 사신청에 불려와 양이천왕을 배알하게 되지 않나, 생전에 뭘 하던 여자인지 몰라도 여러 가지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구석이 많았다.

“무, 무슨 일인가?”

또 트집 잡힐라. 이만술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하여간 저 여자는 뭐라고 말만 하면 따지고 드니까 말이야. 처음 왔을 때는 무식하니 쥐뿔도 몰라서 낙하산 취급하며 무시했는데 반년쯤 장서실에 들어가 책속에 파묻혀 있다 나오자 어찌나 아는 게 많아졌던지. 게다가 자신을 볼 때마다 어조사가 어쩌니 부사가 어쩌니 하면서 못 알아들을 말만 하는 걸 보니 예전에 무시한 거 복수당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이 책의 번역 때문에 부탁이 있어요.”

그녀가 내놓은 것은 최근 백 년 사이 양이천에 온 사람들의 기억을 모아 주제별로 편집한 것 중 하나였다. 그녀에게 맡겨진 일은 이 책과 기억들을 비교해 잘못 편집된 부분이나 거짓된 기억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뭔데?”

“제게 온 것은 마지막의 한권뿐이어서 맥락이 잘 짚이지 않습니다. 괜찮다면 앞 권의 해석이나 원본을 보고 싶어요.”

“다른 책들? 어디 보자…”

잠시 서류를 뒤적거리던 이만술은 곧 찾던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맡긴 모양인데? 사흘 전에 맡겼고, 아직 안 왔구만.”

“누구입니까?”

“정인백이라고 적혀있구만. 숙소는 장터 지나서 여관들 모여 있는 골목이라는군. 여관이름이…아, 여기 있다. 연화장.”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곧 돌아서는 여자를 힐끗 보며 이만술은 그녀를 불러 세워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장터 뒷골목에는 값싼 여관이 모여 있었고 그런 곳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칼부림이 무섭지 않은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대낮이라고 해도 젊은 여자 혼자 지나다닐만한 곳은 확실히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부르려던 이만술은 최근 두세 달 사이에 그녀와 말을 섞을 때마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괴로웠던 기억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절대로 저 여자가 장터 뒷골목에서 불한당이라도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말 섞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뭐 여기에서 하루 이틀 지낸 것도 아닌데 장터 뒷골목이 험하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겠지. 모르면 말고. 내가 저 여자 보호자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 신경써줄 필요 있냐?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입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간 이만술은 평소 자주 가던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사신청에서 장터로 향하는 길가에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식당 근처에서 이만술은 저 멀리 눈에 익은 여자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큰 길을 벗어나 장터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뭐 별일 있으려고? 기껏해야 지나가는 여자 희롱해서 울리는 놈이나 만나겠지. 좀 재수 없으면 지갑 털어가는 놈이거나. 그런데 저 여자는 꼬장꼬장하니 입만 살아서 분명 바락바락 대들면서 따질 텐데 그러다 한두 대 맞을지도 몰라. 잘못 맞고 쓰러지기라도 하는 거 아닐까? 아니 그 전에 놀라서 심장마비라도 걸릴지 몰라. 글만 보는 사람 중엔 약해 빠진 것들이 많잖아.

저런 골목길에 쓰러져 있으면 누가 쉽게 도와주지도 않을 텐데 그러다 덜컥 죽기라도 하면 분명 원혼이 되어서 나를 찾아올 거야. 밤마다 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내 귀에다 대고 언어구조 일반이론이나 인류언어학 같은 걸 강의할지도 몰라. 아니면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읊어대면서 책을 내놓지 않으면 저주하겠다든지…

이만술은 여기가 양이천이고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다 혼일 뿐이라는 걸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크아악!”

이만술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내가 미쳤지. 한마디만 해주면 됐을 텐데.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굿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이제라도 뒤쫓아 가면 되잖아.

이만술은 달리기 시작했다. 대로를 벗어날 때쯤엔 운동부족에 체지방과다인 몸이 모든 땀구멍에서 지방과 수분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폐는 수년 만에 최대치까지 부풀어 올랐고 갑작스러운 운동량을 감당하지 못한 심장이 방아소리를 내며 덜컹거렸다. 이러다 내가 먼저 심장마비로 쓰러질라 싶은 이만술이 헐떡거리며 걸음을 늦췄다. 다행이 그는 쓰러지기 전에 여자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막 장터를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멈추라고 소리 지르기에 그의 폐는 너무 지쳐 있었다. 터덜터덜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이만술의 발이 멈칫했다. 그녀의 앞에 누군가 서있었다.

아무렇게나 입은 꼬락서니 하며 불량함이 뚝뚝 흐르는 얼굴이며 보란 듯이 허리에 매달고 있는 묵직한 도를 보아하니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평범한 남자는 절대로 아니었다. 여자를 향해 “어디 가? 아가씨. 내가 데려다 줘?”라며 친한 척하고 있다. 아니 네놈이 데려다 줄법한 곳이라면 분명 색주가나 아편굴이겠지.

당장 그녀를 불러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이만술이 입을 떼려는 순간 또 한명이 그녀의 뒤로 나타났다. 아니 하나가 더 있다. 총 세 명이었다. 차림새며 인상은 셋 다 거기서 거기인데다 하나는 얼굴에 크게 가로지른 흉측한 흉터까지 있다. 여자를 부르려던 이만술의 입이 쩍 달라붙었다. 여기서 사신청 직원 237년 인생 종칠 일 있냐.

남자들은 여자를 둘러싸고 히죽거리고 있었다. 이게 웬 잘 차려진 밥상이냐. 오늘 내 생일이야? 뭐 이런 표정이 분명했다. 경비병. 경비병. 아니 이것들은 월급 제 때 받아가면서 필요할 땐 없어요. 이만술은 사방을 둘러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이 한산하고 음울한 골목길에 사람이라곤 없었고 건물 안에서 누군가 내다보다가도 시비에 휘말릴까 두려운지 창문을 탁 닫아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소리라도 질러야 할까? 아니면 경비병을 찾아 뛰어갔다 올까. 이만술은 심하게 갈등했다.

“뭐예요, 이거 놔요!”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남자 중 하나가 붙잡은 것이다.

“어이쿠, 무례했습니까? 여길 잡으면 안 되는 거였구만. 그럼 여긴?”

여자의 손목을 놓은 남자가 키들거리며 그녀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낮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딱 - !

“악!”

경쾌한 타격음과 남자의 외마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여자를 희롱하던 남자가 이마를 감싸 쥐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나머지 두 남자는 일행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오자 인상이 험악해졌다.

“어떤 새끼야?!”

대번에 무기를 빼들며 남자들이 외쳤다. 누군가 보이기만 하면 달려가서 도륙내고 말 것 같은 흉흉한 얼굴이었다.

“시끄럽군.”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쪽이다. 2층의 반쯤 열린 창가에서 검은 그림자가 어릿거렸다. 밖은 환하고 건물 안은 어두우니 정확히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는 젊은 남자였다. 창가에 걸터앉아 무릎에 책을 기대어 놓고 있다. 까만 머리카락에 가려져 관자놀이 아래쪽만 드러난 얼굴은 어두운 건물 안에서도 하얗게 두드러졌다.

큰 소리를 낸 것도, 낮은 목소리로 위협한 것도 아니었다. 투덜거리는 것처럼 던진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실린 서늘한 기운은 잘 벼린 칼의 푸르스름한 날과 같이 섬뜩하다. 듣는 순간 오싹해지는 예리함.

“누…누구냐?”

남자들의 목소리가 움츠러들고 있었다. 뒷골목 인생이라면 더욱 잘 구분한다. 상대할 수 있는 사람과 상대해서는 안 될 사람을. 실수하는 순간 끝이니까.

“책 읽는데 방해된다.”

책장을 넘기며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다친 남자의 발밑에서 뒹구는 검은색 서진(書鎭)을 발견했다. 쇠로 만든 짧은 막대 모양의, 책장이나 종이가 날려가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이다. 본래가 던져서 뭔가를 맞추는 용도로는 쓰기 힘든 것이다.

“감히 우리 일을 방해…”

남자 중 하나가 눈을 치켜뜨며 건물 안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옆에 있던 사람이 붙잡았다.

“형님, 저놈…”

그리고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말을 들은 남자가 새삼 2층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메마른 머리카락 사이로 남자의 흰 얼굴이 드러났다 감추어졌다. 머리카락과 똑같이 까만 눈썹, 그 아래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

남자들은 눈짓을 교환해 의견을 나누더니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젠장, 가자고.”

“계집, 너. 재수 좋았다.”

남자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안심한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골목 사이에 몸을 숨기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만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혼령 치울 일은 안 생기는구나. 이제야말로 저 골치 아픈 여자를 어서 데리고 나가야겠다며 그가 나서려는 순간 2층 창문에서 검은 그림자가 휙 뛰어내렸다. 그녀를 구해준 장본인이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왔던 길로 돌아가 호위병이라도 하나 데리고 다시 오는 게 좋다. 이미 겪어서 알겠지만.”

그녀의 감사인사는 못 들었다는 듯이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는 바닥에서 뒹구는 서진을 주워 흙먼지를 털고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돌아섰다.

“괜찮으시다면 호위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이곳에 있다는 연화장을 찾고 있습니다.”

“거기라면 찾을 것도 없군. 바로 여기다.”

남자가 턱짓으로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건물을 가리켰다.

그제야 여자가 그의 손에 들린 책을 알아보았는지 환히 웃었다.

“정인백님이군요. 사신청의 최순례라고 합니다.”

웃으며 말하는 여자와 고개를 기울이며 듣던 남자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근처 건물 뒤편에 숨어있던 이만술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정말 안심이군. 그리고 그 순간 들었다.

꼬르르륵 ~

“헛! 시, 시간이…!”

밖을 내다보자 이미 태양은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점심시간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바, 밥때를 놓치다니…”

이만술은 울고 싶었다.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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