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미인(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둘째 형님이 주신 거야. 이것을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고 신선처럼 살 수 있대.”
그것은 대추알 크기의 환(丸)이었다. 진주빛을 띠었고 꽃향기가 났다. 나는 훔친 보석을 선물하는 기분으로 그것을 내밀었다.
환을 받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땋아서 틀어 올린 머리에 밀화비녀를 꽂았던 거나, 청회색 저고리에 자주빛 치마를 입었던 것이 떠오르는데 표정은 기억에 없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둘째 형이 준 환은, 분명 내가 아는 선단의 모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색으로 영롱하게 빛나지도 않았고, 속이 탁 트이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묘한 향기가 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형에게 직접 받은 그것을 나는 그녀에게 먹여야 했다.
- 걱정 마라, 명아. 막내야. 형이 알아서 해주마. 나를 믿어라.
그가 무엇을 어떻게 알아서 했는지 나는 모른다. 모르면 죄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나를 사랑하는 형을 믿었다. 그리고 환을 먹은 그녀는 정말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이 되었다.
그런 몸이 되는 대신 흐린 날밖에 외출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녀는 약간 아쉬워할 뿐 선선히 받아들였다. 맑은 날이 그리워지면 위장천에 만들어진 정원으로 놀러 가면 될 뿐이었다. 바깥세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모양으로 꾸며놓고 그림자일 뿐이지만 사람처럼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 놀았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였다. 스무 살 처녀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아름답게 웃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마음속의 가책이나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겨울이 되면 그녀는 잠들었다가 봄이나 되어야 깨어났지만 그 몇 달의 이별이 주는 고통은 오히려 달콤했다.
그러나 끝은 찾아왔다.
금지된 곳에 들어가 선단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그 일에 관련된 모든 이들이 이목천왕의 엄정한 눈앞에서 심판을 받았다.
직접 선단을 훔친 아란 어미의 일곱째, 그러니까 나의 넷째 누이는 자신이 관장하던 신들의 감옥에 도리어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세상을 어지럽혔던 괴물과 악귀와 어리석은 선인들과 함께 죄수가 된 것이다.
그녀를 도운 다섯째, 나의 셋째 형은 명부의 왕으로서 가지고 있던 권리를 제한당하고 근신을 명령받았다. 그는 여전히 다섯째 하늘의 천왕이었지만 다른 하늘의 일에 다시는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방관했던 나 역시 셋째 형과 비슷한 처벌이 내려졌다. 인간의 몸 안에서 근신하며 열두째 하늘을 벗어나지 말 것.
선단을 먹은 장본인인 그녀는 존재하면 안 되는 존재에게 내려지는 벌, 이목천왕의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먼지가 되리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문을 우리에게 전달한 이가 넷째, 나의 둘째 형이었다.
모든 일의 배후이면서 어느 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던 영리한 그는 이목천왕의 심판을 비켜났다. 그는 내게 맏형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책을 알려주었다.
“그녀와 네 심장을 바꾸어라. 그러면 그녀는 햇빛 아래에서도 이목천왕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되고, 너는 그 심장 덕분에 인간의 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거다.”
허락되지 않은 자의 심장을 가진 채로 내가 밖에 나가면 이 몸은 이목천왕의 눈앞에서 먼지가 되고, 거기에 갇혀 있던 천왕으로서의 나는 풀려나게 된다. 그것이 둘째 형의 사특한 지혜였다. 나는 한 번 더 그의 말대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적이 달랐다. 내 바람은 그녀가 이목천왕의 심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뿐이었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열두째, 해명도령인 나는 인간의 몸이 되자 성장하기 시작했다. 변하기 전의 그녀처럼,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어제와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수천 년 동안 수없이 지켜보았으면서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 변화를 스스로 겪게 되었다. 그리고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사랑의 기쁨을 누렸다.
스물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
저승 차사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내가 인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을 때, 아마도 그때였다. 내 안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가 부서진 것은.
그리고 심장의 비명을 들으면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고 나서 생각한다. 이 소리는 어째서 늘 잠이 싹 달아나버릴 정도로 나를 번쩍 깨어나게 만드는 걸까 라고.
그러나 곧 그 생각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기억을 잃은 내게 질문은 수없이 많았다. 잠에서 깨어 잠깐 드는 그 생각은 답을 모르는 수많은 질문 중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는 질문 말고도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 있었다.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드레스 룸 안이었다.
저기라면 옷 밖에 없지만 또 모르겠다. 최근에는 귀찮은 녀석 하나가 저곳에 한동안 있었으니까. 녀석이 다시 무슨 사고라도 치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과연 문을 열자 날개 같은 것이 팔락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런데 나비 날개치고는 소리가 꽤…웅장한데. 무슨 비둘기 정도의 날개가 파닥거리는 것 같잖아? 이상하게 여기며 불을 켜자 거기에는 나비 요괴가 아니라 부채 요괴가 있었다.
부채 도깨비? 아닌데. 이쪽도 창고의 부채 도깨비처럼 합죽선이기는 하지만 선면의 그림이 달랐다. 부채 도깨비는 난초 그림이 프린팅 되어 있었고 이것은…
아무래도 프린트가 아니라 먹을 적신 붓으로 선면에 직접 썼으리라 생각되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있을 뿐이다.
서래(西來). 서쪽에서 오다?
이 부채가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여기까지 들어오려면 수리점 문에 내 방 문, 드레스 룸의 문까지 거쳐야 하는데 부채에게 손이 있을 리도 없고. 게다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파닥거리며 움직이는데 딱히 요기가 느껴지는 것은 또 아니었다.
아무런 기운도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약하지만 묘한 느낌이, 아직까지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요기도 생기도 아닌 어떤 기운이 있기는 했다. 굳이 따지자면…권호다. 소설가의 저택에서 만난 그 도사가 나비를 만들어낸다거나 할 때 느꼈던 기운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이 부채는 도사의 도술로 움직이는 걸까?
부채는 창고의 부채 도깨비처럼 허공을 날아다니지는 못하고 바닥에서 퍼덕거리며 날갯짓 하듯 선면을 펄럭이고 있었다. 집어 들자 더는 움직이지 않고 손 안에서 얌전히 접힌다.
부채 자체는 대나무를 깎아 살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붙인 평범한 것이었다. 오래 썼는지 손잡이 부분이 반질반질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부채를 들고 방을 나섰다. 도깨비들에게 물어보면 뭐라도 알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손 안의 부채가 다시 요동하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잡고 있으니 좌우로 흔들리는 선면의 움직임에 바람이 확확 일어났다.
마침 날씨도 슬슬 더워지니까 선풍기 대신 좋기는 한데, 이건 대체 왜 이래? 그때 출입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그런데 약간 묘했다. 아니, 약간은 아닌 것 같다. 일단 겉모습이 그랬다.
거의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귀신처럼 늘어뜨린 것이나, 여름이 다 되어 가는 날씨에 롱코트를 걸치고 있는 것은 취향이니 존중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머리에 꽃을 꽂고 있어. 게다가 손에는 온갖 전단지를 모아서 쥐고 있어.
처음 본 순간 도깨비인가 생각했다가 이내 요괴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괴는 아닌데 인간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느낌이다. 저런 꼴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녔다면 분명 제정신은 아닐 것 같은데 정신 장애인인가? 그런데 막상 시선이 마주치자 의외로 멀쩡하다고 느끼게 된다.
꼴 치고는 또렷하니 살아있는 눈이 나를 쓱 보더니 이윽고 가늘게 휘어졌다. 웃음기를 머금은 눈을 하고서,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런, 이런. 누이들이 보면 울겠는걸. 우리 막내가 이제는 막내가 아니게 되어버리지 않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남자는…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기도 하지만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가슴 속에서 심장이, 움찔 놀랄 정도로 죄어드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시선이 내 뒤로 옮겨갔다. 그의 눈매가 나를 보던 때와 달리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소리도 없이 유하가 거기에 서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나타난 것보다도 문 앞의 남자를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파리할 정도로 창백해진 것에 나는 놀랐다.
쓰러져버릴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그녀의 손이 부축하고 있는 내 팔을 꽉 잡았다. 순간 놀라서 쳐다볼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어째서 지금…어떻게 여기…”
유하가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야? 뭐야? 무슨 일이야?
무엇보다 그녀가 걱정되어서 나는 유하의 앞을 가로막으며 남자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뭐야?”
빚쟁이. 옛날 애인. 스토커. 좋아, 폭력적인 전남편 정도까지는 이해해 주겠다.
그러나 남자는 대답 대신 묘한 시선으로 나와 유하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등 뒤에서 유하가 움찔거리며 떠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이 상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놀라거나 당황하는 일도 거의 없고 무서워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그녀를 떨게 만드는 저 작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유하가 아는 사람인 것 같지만 지금 상황에서 따져 물어볼 수도 없고.
게다가 사람인 주제에 요괴인 유하가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도사 같은 건가? 그러고 보니 내 손의 부채는 여전히 무섭게 펄럭이고 있다.
내가 부채를 내려다보자 남자의 눈길도 동시에 부채에 닿았다. 바로 그때 갑자기 전원이 꺼진 것처럼 부채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어쩐지 찾기가 힘들더라니 선인들이 쓸데없는 짓을 했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뭐냐고. 둘 중 누구나, 아니면 다른 아무라도 좋으니까 알아듣게 말 좀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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