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48화 (148/218)

거울 속 미인(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유하는 떨고 있고 나는 영문을 몰라 당황한 가운데, 남자가 수리점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곳에 마치 제 집처럼 들어오더니 작업 선반 옆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이 집의 안주인은 손님대접을 할 줄 모르나?”

초대라도 받아서 온 것 같은 태도였다. 내 뒤에서 유하가 움칫 굳었다가 휙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산신의 말을 들은 후로도, 나는 유하가 요괴라고 머리로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감해 본 적이 없었다. 놀랄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 말고 그녀는 인간과 다른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요기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러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요괴라고 하기에는 인간에 더 가까운 기운을 풍겼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인간이 아닌 증거를 확실히 보였다.

등 뒤에서 선명한 요기가 느껴졌다 싶은 순간 그녀는 작업 선반 앞에 있었다. 인간의 동체시력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계단을 뛰어넘어 선반 앞에 도착한 그녀의 두 손에는 ‘무수한 가지’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돋아나 있었다. 그 돋아난 것들이 순식간에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다 돌아오거나 작업장 여기저기에 뻗었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내 눈은 알아보았다.

가지들의 움직이는 속도는 실로 빛과 같아서 나도 잔상만을 봤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돋아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돌아와 사라졌다. 그러나 뻗어나갔을 때 비어있던 가지는 돌아올 때 뭔가를 하나씩 감고 있었다. 술이 든 호리병이라든가, 수저, 접시, 작은 잔, 그런 것들이었다.

가지는 그것들을 작업 선반 위에 내려놓으며 사라져서, 만일 여기에 보통 사람이 있었다면 텅 비어있던 선반에 갑자지 음식이 차려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럴 듯한 술상을 차려놓은 유하가 굳은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겁을 먹은 것도 같고 경계하는 것도 같은 한편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남자는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건드려 보더니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을 본 유하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보태졌다.

“찬이 모두 식었지 않은가. 이것은 비렁뱅이에게 내주는 밥상인고?”

남자가 불평했다. 지금 반찬투정 하는 거? 반찬은 냉장고에서 나왔으니 차가운 게 당연하잖아. 아니 잠깐. 그게 문제가 아니라 유하는 왜 저런 놈에게 술상을 대접하는 거야. 그리고 저 뻔뻔한 남자는 도대체…

“찬은 볼품없으나 술은 다섯째 하늘에서도 보기 드문 명주일 것입니다. 허락하신다면 미천한 것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공손하나 서늘한 목소리가 출입문 쪽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모른다. 거기에는 백은호가 서 있었다. 남자가 백은호를 힐끗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빨리도 왔구나, 여우.”

저 남자는 백은호도 알고 있다. 내게 말을 걸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나도 아는 것 같고.

남자가 한 잔 따라보라는 듯 술잔을 들었다. 백은호는 재빨리 다가가서 밀봉된 하얀 백자 술병의 마개를 뗐다. 술병 입구에서 주향이 새어나오자 남자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맑은 술이 퐁퐁 흘러나와 잔에 담기니 누그러졌던 남자의 얼굴은 이제 부드러워졌다.

그가 술을 한 모금 넘기는 것을 보고 딱딱하던 유하의 얼굴이 겨우 펴졌다. 그녀는 굳었던 어깨를 늘어뜨리고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안심한 기색이었다.

“과연 좋군. 인계에도 이런 술이 있었나.”

유람이라도 나온 것 같은 한가로운 그에게 짜증이 나는 건 나뿐인가. 누가 알려주길 기다릴 것도 없이 뭐하는 인간인지 직접 말하라고 쏘아붙이려는데 남자가 나를 힐끗 보았다.

유하를 두렵게 만들고, 백은호를 한달음에 달려오게 만들고, 그리고 내게는 정신 나간 차림의 도깨비 같은 남자라 생각하게 만들었으면서도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발가벗겨진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샅샅이 훑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잠깐 내 왼쪽 가슴에 머물렀다.

시선이 움직였을 뿐인데 유하가 오싹 떨고 백은호는 인간의 모습인데도 털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공무(公務)가 아니니 경계는 그쯤 해두어라. 사신첩(死神牒)도 없이 인간의 몸으로 오지 않았느냐.”

남자가 그들에게 불평하듯 말했다. 공무? 사신첩?

“송구하나 천왕께서는 공무가 아니면 양이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압니다.”

백은호가 공손한 태도로 딱 잘라 말했다. 천왕? 양이천?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싶은 순간, 그제야 남자의 정체를 나는 알아차렸다. 양이천왕이다. 산신인 무진으로부터 들었던 다섯째 하늘의 주인. 명부의 주인이자 죽은 자들의 왕. 그리고 아란 어미의 다섯째이자 내게는 셋째 형인, 매년 겨울이면 나를 데려가기 위해 왔다가 혼 대신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는 바로 그다.

뒤늦게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자 술잔 너머로 희롱하듯 구르던 까만 눈동자가 휘어진 눈꺼풀에 가려졌다. 그가 웃었다.

“그렇지. 그래서 이렇게 복잡하고 귀찮은 짓을 일부러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명색이 천왕인 내가 하급 사자에게나 시키는 순력을 돌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직접 한 발씩 걸어왔다. 못난 막내 동생 때문에 말이야.”

“공무가 아니라면서 해명에게는 무슨 볼일이죠?”

아직 두려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으면서도 유하가 그에게 물었다. 남자, 양이천왕은 질문한 그녀 대신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다.”

바라보면서 말한다. 낮은 목소리였다. 끌어당겨 꽉 조이는 듯이 느껴졌다. 뭐가 두 번째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다시 말했다.

“요괴의 심장이 너를 거부하지 않은 것은 말이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 나 자신의 이해력인지 심장의 도움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말한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두근거리는 내 것이 아닌 심장을 의식했다.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았다면, 이전에는 쭉 거부했었다는 말이다. 심장이 나를 거부했다면 그때는 어떻게 살았던 거지? 심장이 없이.

그리고 이번과 함께 거부하지 않았다던 첫 번째는 언제였을까.

“첫 번째는 꽤나, 시끄러운 일을 벌였다고 했지.”

내 마음을 읽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열두째 하늘을 관장하는 천왕인 주제에 자신의 하늘을 스스로 찢어버릴 뻔한 네 녀석의 소식을 나중에야 들었다. 신령들이 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쉬쉬한 덕분이지. 흥. 주인을 빼닮은 무모한 것들이로고.”

이것도 들어본 이야기다. 무진이 말했던 12년 전의 그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소하듯이 말했으나, 양이천왕이라는 남자는 한 편으로 즐거운 표정이었다. 본심을 알 수 없었다. 내 형이라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건 둘째 치고 겉도 속도 적응이 안 된다.

그는 스스로 한 잔 가득 술을 따르더니 그것을 단숨에 마시고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 형님이 직접, 네가 다시 멍청한 짓을 하기 전에 와준 거다. 순력을 도는 사자는 인계에 큰 화가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신계에 알리고 막을 의무가 있으니 임시로 순력 사자의 직을 수행하고 있는 내가 너를 감시해주겠다는 말이다.”

감시는 몰래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고로, 당분간 이 집에 신세를 좀 지마.”

그가 태연히 말했다.

예? 잠깐! 뭐?

난데없는 말에 나는 물론 유하도 백은호도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왜 이 집에? 저승사자들은 출장비 안 줘요? 모텔 잡을 돈도 없어요? 아니 돈이 없어도 그렇지 감시 대상자의 집에 당당하게 빌붙어 살겠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이 집에 남는 방 없거든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쓸데없이 남의 생기나 뽑아먹는 요괴 하나가 들어와서 내 방도 나눠 쓰고 있다고.

“방은 내드릴 수 없어요.”

그러나 내가 반대하기도 전에 유하가 말했다. 임시로 하급 사신의 일을 하고 있다지만 저승 세계의 왕을 상대로, 긴장한 얼굴이기는 해도 단호한 태도였다. 요괴에게 거절당하고 화내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양이천왕은 의외로 덤덤한 낯이었다.

“옥상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지낼 수 있도록 손을 볼게요.”

뭐? 저승사자를 옥상에? 반대하고 싶어서 유하에게 눈짓을 했지만 그녀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거 좋군. 하늘에서 큰 형님이 나를 내려다보시고, 지붕에서 나는 너희를 내려다보렷다.”

양이천왕이 껄껄 웃었다.

일은 그렇게 결정되어 버렸다.

건물 주인인 내 의견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채로 내 건물 옥상에 웬 괴상한 차림을 한 저승사자가 나를 감시할 목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유하는 당장 목재와 천막 같은 것을 사들여 와서는 몇 시간 동안 옥상에서 뚝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마도 양이천왕이 머물 곳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다섯째 하늘의 왕이라는 남자는 수리점 안을 제 집처럼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특히 창고에서는 이 물건 저 물건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며 열렬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면 수리점에 들어올 때 전단지를 잔뜩 모아 쥐고 있던 거나 괴상한 옷차림이나…아니, 그쪽 세상에는 이런 물건 없어요?

나는 도무지 안심할 수 없는 그의 뒤를 따라 다니며 혹시 도깨비들을 겁주지는 않는지 창고의 물건을 슬쩍하는 건 아닌지 감시했다. 원래 반대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감시받는 입장일 텐데.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반가워해야 할지 귀찮아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생겼다. 손님이 온 것이다.

대학생인가 싶은 젊은 남자였다. 출입문을 열고 조심조심 들어오더니 머뭇거리며 안을 둘러보았다. 창고 입구에서 양이천왕을 감시하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한다. 손님이 왔으니 할 수 없이 상대하러 가는데 어느새 양이천왕이 창고에서 나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그를 본 젊은 손님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나는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예. 나도 그 기분 알아요.

저래 뵈도 해치지는 않으니까 안심하라는 뜻으로 웃으며 손짓을 하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손님이 울상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나를 올려다보는 애처로운 눈 안에 제발 무사히만 보내달라는 애원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해치지 않는다니까.

“맡기실 물건이…?”

내가 묻자 그는 허둥거리며 가방 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작은 손거울이었다. 손잡이조차 없는 그냥 동그란 모양의 거울이다. 손거울 치고 두툼한 테두리는 옻칠한 나무였는데 금색 당초무늬가 상감되어 고급스럽게 보였다. 깨끗하니 흠도 없고 내 모습도 잘 비치는 것 같다.

그러나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손님은 뒷면을 가리켰다. 잘못된 부분은 앞이 아닌 모양이었다. 거울을 뒤집자 뒤는 앞면보다 훨씬 화려했다. 당초무늬 테두리 안에 여러 색의 보석을 모자이크처럼 박아놓았다. 산호며 옥이며 자수정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중앙에 박힌 커다란 호박이었다. 거의 달걀만한 크기다.

그런데 크기도 크기이고 색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호박 안에 뭔가 있었다. 호박이 만들어지는 과정상, 그 안에는 벌레라든가 나뭇잎 같은 것이 들어가기도 한다지만…그렇기는 한데 이건…아무래도…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호박 안에 들어있는 것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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