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미인(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양이천왕은 기분 좋은 얼굴로 창고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곳을 구경하느라 잠시 팽개쳐 두었던 전단지 뭉치를 도로 주워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꼴이 요상해서 그렇지 전단지를 한 장 한 장 검토하는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만 보면 연구 논문이라도 읽고 있는 줄 알겠다.
도대체 양이천의 천왕이라는 분이 마트의 세일 전단지나 아웃 도어 광고지 앞에서 진지해질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어쨌든 정황상 내 형님이라 생각되는 저 분은 일단 무시하자. 나를 감시하러 왔다는데 당장 무슨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고 아무 거나 쥐어주면 혼자서도 잘 노는 것 같고.
그보다 호박 속 미소녀 요괴를 해결하는 게 먼저다.
저 남자에게 거울 뒷면과 대화하는 내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2층의 내 방으로 갔지만 항상 유하를 따라다니던 나비 요괴 녀석이 웬일인지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유하 기분 안 좋아.”
나비 요괴가 툴툴대듯 말했다. 유하가 일하느라 바빠서 상대를 안 해주니까 삐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도 일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나비 요괴를 밖으로 쫓아냈다. 나비 요괴라고 해도 겉모습은 어린애라, 녀석이 나가기 싫다고 앙앙거리자 어쩐지 일 핑계로 아들과 놀아주지 않는 아버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잠깐. 왜 멀쩡한 총각인 내가 벌써부터 육아에 소홀한 가장의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거야? 저 요괴를 빨리 내보내야 해…. 가뜩이나 문제 많은 내 인생이 쟤 때문에 더 꼬이는 것 같아.
남들 물건이 아니라 내 인생부터 수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 인생을 가엾게 여겨서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주면 안 될까?”
호박 속의 요괴 소녀에게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총각의 몸으로 요괴 꼬마를 양육하는 호구 인생의 고단함을 어필해 보았으나, 소녀라 그런 마음 따위 모른다는 듯 무시해버렸다. 그래. 너도 나중에 딱 너 닮은 딸 요괴를 키워봐라, 임마.
말도 걸어보고, 거울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호박을 톡톡 건드려서 주의를 끌어도 보았으나 요괴 소녀는 노란 보석 안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저 새침하고 천연스러운 태도는 어딘가 도깨비들을 닮은 데가 있었다.
지금은 가끔 피리를 불어준다거나 밤에 놀고 있으면 찾아가서 구경한다거나 하며 제법 가깝게 지내고 있지만 처음에 도깨비들은 물건의 모양으로 꼼짝 않고서 곁눈질로만 나를 슬금슬금 쳐다보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거울에 깃들어 있는 신령한 기운 때문에 잘 구분할 수 없어도, 조금씩 새어나오는 요기가 도깨비와 비슷한 데가 있고.
하지만 이렇게 작은 도깨비도 있나? 그리고 얘가 도깨비라면 본체는 뭐야? 호박?
하지만 이 녀석이 도깨비라면 구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나는 작업장으로 뛰어가서 냉장고에 있는 메밀묵을 한 접시 가져왔다. 도깨비라면 절대로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것을 거울 앞에 내려놓자 과연 지금까지 나를 소 닭 보듯 하던 녀석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이쪽을 향했다.
호오, 효과가 있네. 정말 도깨비인가.
이제야 약점을 잡았다고 좋아했으나, 메밀묵 접시를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외면했다. 메밀묵을 무시했어? 도깨비인줄 알고 이제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보석 안에 들어 있어서 냄새가 안 나나? 아냐. 보기만 해도 알 텐데. 배가 안 고픈가? 혹시나 하고 냉장고에서 나물이며 술이며 고기며 가져와 다시 한 번 거울 앞에 늘어놓았으나 메밀묵 때와 마찬가지로 잠깐 그것을 훑어본 다음 소녀 요괴는 다시 무시해버렸다. 술은 좀 오랫동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긴 했으나 어쩐지 미성년자에게 비행을 가르치는 것 같아 내가 치워버렸다.
어쨌든 먹을 것에 안 넘어온다는 말이지. 도깨비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상당히 비슷한 기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리 저리 을러보고 달래보고 했으나 소득이 없자 나는 결국 치트키를 썼다. 어쩐지 뭐든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백은호에게 이 요상한 호박 속 미소녀에 대해 물어본 것이다.
양이천왕이 수리점에 왔을 때 부르지 않아도 갑자기 나타났던 백은호는 나타났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말을 걸어볼 기회도 없던 참이었다. 통화하는 김에 녀석이 수리점에 온 이유도 물어봐야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백은호는 수리점에 왔던 이유 같은 건 대충 넘겨버리고 곧장 호박 속 미소녀 요괴 이야기를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것은 이매입니다. 이매망량이라 한데 몰아서 부르고 있으나 따지면 그렇다는 것일 뿐, 부르기 나름입니다. 사실 호칭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매망량? 그건 도깨비를 가리키는 말 아니었어? 쟨 도깨비 아니던데?
메밀묵이며 음식들을 가져다 놓고 시험해봤던 이야기를 백은호에게 들려주자 그가 전화기 너머에서 피식 웃었다.
“도깨비라는 것도 본래 도령의 창고 안에 있는 그런 종류의 것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음허(陰虛)의 기운과 목석(木石)의 정기가 변화하여 이루어진,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요 이승과 저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 정도전이 사이매문(謝魑鬽文)에 남긴 말입니다만 그만큼 넓은 범위의 존재를 포함합니다. 혼도 신도 귀도 아닌 모든 존재를 도깨비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뭐? 그런 거였어?
“하지만 애초에 말했다시피 호칭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매망량의 하나라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이름이 붙고 나면 전혀 다른 요괴 취급을 받게 되지요. 도령이 보신 것은 사람의 그림자에 붙어 변화된 이매 같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여럿 전해집니다만 각자 상황이 다르니 예로 삼을 것은 못됩니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이매가 인간에게 홀린 것입니다.”
그 반대가 아니고? 요괴가 사람에게 홀린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는데.
“사람에게 홀려 인간이 되고 싶어 한 여우가 그처럼 많았는데 들어본 적도 없다니요. 인간에게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요괴는 많았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야 더욱 많았겠습니다만….”
어딘지 조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백은호가 대꾸했다. 그러나 금세 평소의 태도로 바뀌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매가 호박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갇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거울을 직접 보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 수호부로 쓰이고 있다면 요괴에게는 편한 곳이 아니겠지요. 수호부라고 해도 종류가 여러 가지라 위험을 비켜나게 하는 것이 있고 위험으로부터 숨기는 것도 있으며 위험 자체를 물리치는 것도 있습니다. 마지막의 경우라면 거울이 이매를 위험하다고 생각해 봉인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 그럼 어떻게 빼내는데?
“거울을 부수면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백은호가 쉽게 대답했다.
아니 내가, 수리점 사장이거든요. 고치는 사람이지 부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부술 수 없다면 그냥 두는 수밖에요. 어차피 그 상태로 해는 끼치지 못할 겁니다.”
“거울 속에 계속 있으면 이매는 어떻게 되는데?”
“거울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국은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흩어지겠지요.”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표현했지만 이매의 입장에서는 죽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입니다만…”
백은호가 문득 말했다.
“그 이매의 모습이 깨어나지 못한 학생과 닮았다고 하니 이매가 홀려 있던 사람이 바로 그 학생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이매가 입을 연다면, 학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야 할머니의 선물인 거울을 깨서라도 알고 싶을 정도로 궁금한 일은 아니겠지만요 라고, 백은호는 심술궂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난감하네.’
소녀 요괴가 뒹굴뒹굴하고 있는 거울을 보며 나는 갈등했다.
백은호의 얄미운 말이 사실 전혀 틀린 것도 아닌 게, 이 거울은 자체만으로도 고가의 값을 받을 수 있는 훌륭한 물건인데다 수호부를 겸하고 있어 만일 판다면 집 한 채 살 돈은 나올 만했다.
거기다 손님인 남자의 입장에서는 부모 대신 키워주신 할머니가 남긴 소중한 선물이다. 또 자신 역시 심리적으로 거울에게 의지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부숴야 한다면 쉽게 동의할 리가 없다. 요괴의 생사는 그에게 아무 관계 없을 테고 기절해 있는 학생의 경우도 며칠 안에 깨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혹은 못 깨어난다고 해서 그에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외면하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아…’
가슴 속에서, 내 것 아닌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 심장은 거울의 주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나와 상관없이, 홀로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심장을 품고 있는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내 것이 아닌 느낌과 기억이 감정의 혈관에 물감처럼 풀렸다. 나는 몸 안을 도는 낯선 감정에 오싹했다. 그것은 내 몸을 서늘하게 식혔다가 이윽고 뒤섞였다. 내 것이 아니었지만 내 것이 되었다. 아니, 실은 본래 내 것이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아니지만 이 심장이 기억하고 있는 나다.
“응…그럼, 어떻게든 해 볼까.”
거울을 집어 손위에서 빙글 돌리며 나는 중얼거렸다.
내 연락을 받은 손님은 전화를 끊고 30분 쯤 지나자 수리점에 도착했다. 거울 안의 요괴를 빼낼 방법을 찾았다는 말만 듣고 반갑게 달려온 그였지만, 막상 이야기를 듣고 나자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부, 부숴야 한다고요?”
“예. 요괴가 나올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고, 또 요괴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 상태로는 무리니까요.”
손님은 복잡한 심정이 섞인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굳이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하는 그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물어 뜯겨 빨갛게 부푼 손끝이 내 쪽으로 확 달려들었다.
그는 내 손에 있던 거울을 빼앗는 것처럼 낚아채더니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저, 저는…”
말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는지 더듬거리다가 그는 거울을 꽉 쥐고 수리점을 뛰쳐나갔다.
뭐,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고가의 물건이고 할머니의 유품인 셈이니까. 부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심각하게 고민하던 걸 보면 전처럼 그것을 수호부로 가지고 다니지는 못할 것 같다. 분명 학생의 안위를 거울의 가치와 저울질 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 테니까. 차라리 팔아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며칠 있다 백은호를 보내서 교섭해 보면 적당한 값을 찾을 수 있겠지. 사 온 다음 내가 직접 부수면 되는 거야.
유하에게 가서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 묻자 그녀는 어느 정도 필요한지 되물었다.
“음…집 한 채 살 정도?”
“나비를 보내려는 거예요?”
유하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오, 그런 방법도 있었잖아. 그래. 분가 시키는 거다! 그런데 집 살 돈은 있는 거야?
유하는 뭔지 마뜩찮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더니 통장 몇 개를 가져와서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나비와 함께 형님인지 양이천왕인지도 보내버릴 수 있겠어. 형님이 서너 분 더 와도 괜찮을 정도로 통장 잔고가 넉넉했다.
“정말 돈은 갑자기 왜 필요한 거예요?”
통장을 돌려주자 유하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거울에 대해 대강 이야기 해주니 그녀는 듣고 있다가 물었다.
“하지만 거울을 사기 전에 또 학교에서 사고가 생기면 어떡하죠?”
그게 문제긴 했다. 그런데 당분간 날씨가 흐릴 기미도 없어서 나로서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기도나 하는 수밖에.
“맑은 동안은 나갈 수가 없으니 말이야.”
아쉽게 중얼거렸다. 나는 천왕인지 뭔지 꽤 대단한 존재라면서 구름을 부르거나 비가 오게 할 줄은 모르나? 그러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잖아. 음, 작업장에서 전단지를 공부하는 또 다른 천왕에게 한 번 부탁해 볼까?
“나갈 방법이 있어요.”
유하가 말했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뭐?”
그녀는 망설이는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윽고 나를 향해 다시 말했다.
“나갈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약속해 줘요. 학교의 일만 해결하면 곧 돌아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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