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54화 (154/218)

거울 속 미인(8)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선생님이 남의 집 담을 넘었네. 착한 학생은 저런 거 보고 배우지 말아요.

그런데 지금부터 나는 불법침입 현장을 보고도 신고는커녕 그 집 담 밑에서 수상쩍게 기웃거려야 할 상황이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더니 도령 혼자 고생하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모란이 펄쩍 뛰었다. 그런데 네가 따라오면 수호 녀석도 올 거란 말이다. 그렇다고 실랑이 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었다. 방금 선생이 들어간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애들 데리고 이래도 되는 건가 싶지만 일단 무슨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하고 집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단서가 생겼다고 약간 흥분했는지 모란과 수호 녀석이 나를 앞질러 달려갔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모란이 달려가던 반대편으로 튕겨 나왔다. 탁구공처럼 튀어나오는 것을 반사적으로 받았다. 어어 그런데, 정말 탁구공처럼 하얗고…심지어 작아?

탁구공 크기라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전까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모란이 지금은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큼 작은 짐승이 되어 있었다. 둥근 몸에 흰 털, 붉은 눈, 뭉툭한 꼬리, 무엇보다 정체를 증명하는 분명한 증거인 길고 뾰족한 귀.

모란은 하얀 토끼가 되어서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너 토끼요괴였냐?

“누나! 왜 그래요?”

수호 녀석이 놀란 얼굴로 되돌아와서 토끼에게 물었다. 변신한 것에는 안 놀라는 걸 보니 녀석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토끼가 된 모란이 달달 떨면서 내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말 대신 갓난아기의 낑낑대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털가죽 안에서 작은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뛰고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힐끗 올려다 본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저곳에서 뭔가 나왔다거나 움직인 기척은 없었다. 모란도 집 가까이 갔을 뿐 저기에 닿은 적은 없다.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심하게 무서워하는 모란을 간신히 떼어서 수호에게 넘겨주고 둘을 멀리 물러나게 했다. 모란이 겁에 질린 것을 보고 수호 녀석도 순순히 내 말을 들었다. 녀석들이 꽤 멀어지고 나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적한 동네다. 지나가는 사람도 안 보이고, 누가 창문 열어놓고 담배 피우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가볍게 너덧 발 뛰어 집 쪽으로 달려간 다음 담장 아래에서 힘껏 바닥을 찼다. 어, 어? 어엇! 너무 힘껏 찼나?!

내 몸이 예상을 뛰어 넘는 높이까지 떠올랐다. 담장이 아니라 지붕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잠깐! 이렇게까지 올라올 필요는…

당황해서 공중에 떠오른 채로 주변을 돌아보자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이쪽을 보는 수호 녀석의 얼굴이 조그맣게 보였다. 다행히 다른 사람은 안 보인다.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간 몸이 최고점을 찍고 중력에 끌려 도로 내려갔다. 담장이 아니라 정말로 지붕을 뛰어넘은 다음 반대편 담장 위로 떨어지는 것을 간신히 비켜 집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담벼락에 좀 긁히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을 뿐이다.

불법침입에 있어서는 거울 선생만도 못한 셈이다.

뭐 이렇게 된 마당에 어쩔 수 없잖아. 선생이나 찾아내서 얼른 나가는 수밖에.

꽤 시끄러운 소리를 냈을 텐데도 집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빈집인가? 그랬으면 좋겠다.

집은 주인이 잘 돌보지 않는지 담 밑으로 잡초가 무성했다. 건물 자체도 꽤 오래 되어서 금이 간 곳 안에는 흙먼지가 끼고 벽 아래쪽으로는 이끼에 낙엽, 그것을 밀어내며 새롭게 난 풀들이 뱀 나올까 무서울 정도로 잘 자라고 있었다.

마당은 깨끗했지만 정돈되었다기 보다는 아예 누가 지나다니지 않아 건드리거나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어서라는 편이 맞을 것 같다. 현관으로 가보자 문이 열렸다가 덜 닫힌 것이 보였다. 거울 선생이 들어간 흔적일지도 모른다.

어…그런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담을 넘어 선생이 들어온 것을 봤는데 집안에서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들어왔다가 안 보이는 반대쪽으로 도로 나간 건가? 아니 그럴 바에는 애초에 뭣 땜에 남의 집 담을 넘는데. 아냐 잠깐. 이건 좀 이상한 것 같다.

이 집 뿐만이 아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무리 집중해 보아도 다른 기운이나 사람들의 생기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집이 빈집일 수도 있고 선생이 어디론가 가버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집이 아니라 다른 집에서라도 뭔가 기운이 느껴져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그것이 없었다. 마치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 안의 모든 공간에서 생명체나 영기나 신령 같은 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이 집 안은 물론 밖에도 신목이 붙어있을 법한 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거기에 위아래로 이웃집이 한두 채가 아닌데 저 많은 집들이 모두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내가 기운을 제대로 못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

멀쩡하던 모란이 갑자기 도망쳐서 두려워하는 것도 그렇고, 내 감각이 어쩐지 이상해진 것도 그렇고 뭔가 위험한 장소에 들어온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머릿속으로 긴장한 것과 달리 내 심장은 빨라지지도 않고 오히려 움직임이 가벼워졌다. 그 가벼운 걸음으로 나는 현관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야아, 나 의외로 대담한 인간이었구나.

자신에 대해 넉 달 남짓밖에 모르니까 뜻밖의 발견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지도 않고 작전상 후퇴라거나 몸을 사린다거나 도움을 요청한다거나 할 생각도 없이 적진으로 진격이라니. 잠깐, 이건 대담한 게 아니라 무모한 건가.

그러나 지금은 자체평가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고. 나는 어느새 현관문 앞에 서서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었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을 살짝 당기자 소리도 없이 열렸다. 안은 컴컴하다. 창문도 별로 크지 않은데 두꺼운 커튼을 두 겹이나 쳐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집안에서 나는 냄새가 특이했다.

뭐지. 가구 냄새는 아니고, 개털 냄새 비슷한 것 같은데.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음식 냄새나 체취가 있을 테고 오래 집을 비웠다면 가구 냄새가 나야 할 텐데 이건 둘 다 아니었다. 게다가 공기는 어딘지 눅눅하면서 온기가 있고…

컴컴하고 넓은 거실은 소파와 티브이, 책장, 그리고 난이라든가 꽃이 핀 작은 화분들이 한 켠에 몇 개 모여 있었다. 화분의 꽃들이 싱싱한 걸 보면 누군가 돌보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미닫이 문 너머에 주방, 거실 좌우에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씩 있고 현관 맞은편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조금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라든가 유행이 30년쯤은 지난 것 같은 천장 장식을 보니 여기에 사는 사람은 적어도 70대 이상일지 모르겠다.

일단 들어오기는 했는데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온 사람의 죄책감과 긴장감으로 나는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집안은 조용하고, 기운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고…그러나 그때,

“으아아악!”

위층이었다. 누군가 놀라서 쉰 것 같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뒤이어 뭔가 우당탕 넘어지고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은 것과 동시에 나는 계단을 향해 뛰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젊은 남자의 비명소리였다. 그렇다면 선생일지도 모른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자 다섯 평 남짓의 공간과 방문 두 개가 보였다. 그 중 하나가 열려 있었다. 선생은 보이지 않는다.

열린 문 앞으로 가서 안을 훑어보았지만 창고로 쓰는 것 같은 작은 방이었다. 서랍장 하나와 그 위에 첩첩이 쌓아놓은 이불 몇 개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문이 닫혀있는 방이다. 뭐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긴장한 채 문을 열었다.

서재처럼 꾸며놓은 방 안에 거울 선생이 나동그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기절한 것 같았다. 대충 살펴보았지만 상처는 없다. 맞아서 쓰러진 것 같지는 않고, 딱히 몸에서 안 좋은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고, 있다면 뭔가 서늘한…음기라고 하는 그런 것이 조금 느껴질 뿐이다.

선생은 기절한 와중에도 두 손으로 거울을 꼭 붙잡고 있었다. 호박 속의 요괴를 보고 있었는지 뒷면이 가슴 쪽을 향한 채다. 선생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건 바로 그 요괴 소녀일지도 몰랐다. 대화가 통할지는 몰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는 봐야 하겠기에 거울을 뒤집어보려는데 얼마나 꽉 쥐고 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어보는 것은 미루고 일단은 선생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야 할 것 같다. 누가 사는 집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어물쩡대다 주인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쓰러진 선생을 부축해서 업으려고 하는데 꽉 쥐고 있던 거울 앞면에 뭔가 번뜩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선생을 부축하다 말고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거울에는 내 어깨와 그 뒤편의 광경이 반사되어 있었다. 열린 문, 그 바깥의 공간에 서서 이쪽을 노려보는 백발의 남자가 거울 안에 자그맣게, 그러나 선명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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