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미인(9)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움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다. 방에서 뛰쳐나가 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어디론가 재빨리 숨었다기에는 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선생에게 돌아가서 부축하는 체하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있다. 백발의 노인이 조금 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거울 안의 그를 쏘아보자 저쪽에서도 나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움직일 기색이 없어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등 뒤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다시 거울을 보자 여전히 노인은 그 자리에 있었다.
방에서 나가 거울에 비친 그 자리에 다가가자 아까는 놀라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음기가 서늘하니 살갗을 간질였다. 바로 앞에 뭔가 있었다. 집중해서 보니까 눈앞의 공간을 왜곡하며 뭔가 희미하게 어릿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대화가 가능할까?
“이 집의 주인인가?”
그렇게 물었지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층 거실의 난초가 시들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걸로 봐서 여기에는 이런 눈에도 안 보이는 이상한 요괴 말고 살아있는 누군가가 있을 터였다.
앞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늘한 음기가 어릿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왔다가 슬그머니 다시 물러난다. 건드려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 기운은 계단을 따라 점점 멀어졌다. 도망치는 거야?
기운을 따라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일층에 닿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밖에서라면 웬만큼 멀어져도 감지할 수 있었을 텐데 이곳은 귀찮게도 감각이 엉망이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선생이나 데리고 어서 나가야겠다.
이층으로 돌아가서 아직도 기절한 채로 꼼짝 않고 있는 선생을 들쳐 업고 내려갔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향해 가면서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은 다음에야 떠올랐다.
이 집에 들어올 때 나는 문을 제대로 닫아두지 않았었다. 그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데,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오면서 소리 내어 문을 꼭 닫을 필요는 없잖아. 금방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도망갈 때를 대비해서 밀기만 하면 곧 열리도록 슬쩍 열어두는 의미도 있고. 그런데 지금 현관문은 잘 닫혀져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거실 안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아, 망했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그거였다. 일부러 헛기침 소리를 내며 기다려주는 걸 보니 저쪽은 적어도 나를 도둑이나 강도 취급 할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아냐. 도둑이나 강도라도 상관없는 건지도….
소리가 난 쪽을 힐끗 돌아보자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뭔가를 주섬주섬 펼치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옆모습이지만 풍채 좋고, 머리카락이 허옇게 샜지만 나이가 들었다기보다 세월이 견고히 쌓였다는 느낌이 드는, 어딘지 위엄이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그가 탁자 위에 펼쳐놓은 것은 접이식 바둑판이었다. 바둑알이 든 통을 양쪽에 놓고 잠시 벗어두었던 돋보기안경을 쓴 다음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냥 가려고?”
노인이 묻는다. 그냥 가도 되나요?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왕 왔는데 바쁘지 않으면 노인네 바둑 상대나 좀 해주게. 그 젊은이는 좀 있다 깨어날 게야.”
말하면서 바둑알이 든 통의 뚜껑을 열어놓았다.
할아버지는 집에 몰래 들어온 사람과 바둑 두는 취미가 있으신가요. 그런데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가야 한다고 말하면 그 사람들도 불러오라고 하실 것 같고. 그렇다고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는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신선놀음인 바둑판을 앞에 놓고 시간을 보낼 수도 없고.
“저기, 나중에 다시 와도 될까요? 지금은 아무래도 좀…”
그러라는 대답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지.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신발도 안 벗고 돌아다닌 불법침입자가 또 올 테니 그만 가보겠습니다 하는데 승낙할 리가…
“그럼 그러게. 올 때 신선한 고기나 한 근 사 오게. 돈은 내가 줌세.”
그럴 리가 없는데 선선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정말 가요? 진짜?
노인의 눈치를 보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데 정말로 방해하는 기색은 없다.
약간 허둥거리며 수호 녀석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더니 모란은 이미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를 보자 “도움도 못 되고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라며 무릎을 꿇고 사과하려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너 그러다 늙어서 무릎 때문에 고생한다.
거울 선생의 상태도 그렇고 해서 우리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수리점으로 돌아갔다. 생각해 보니 거의 하루 만에 돌아온 셈인데 유하는 나를 보고 나직이 한숨만 쉴 뿐 뭐라고 나무라지 않았다.
유하는 선생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에게 먹을 거며 마실 것을 내놓고 수호와는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모란에게도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나한테는 시선도 잘 안 맞추면서 아이들한테는 친절하구나. 그러고 보면 나비 요괴한테도 그렇고.
어쩐지 서운하다.
서운한 감정을 아이들 간식 뺏어먹는 걸로 달래는데 거울 선생이 겨우 깨어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를 보고 놀라는 선생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자 잔뜩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그게…거기로 가면 선미를 기절하게 만든 장본인을 만날 수 있다고 거울 속의 그 아이가 말해서…그냥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아보기만 하려고 갔다가…”
선미란 기절해서 아직 병원에 있다는 그 학생인가 보다. 그런데 알아보려고만 할 생각으로 갔다가 남의 집 담은 왜 넘어요?
“집안에 아무도 없다고 해서…”
이 분이 큰 일 날 분이네. 아이들이 아니라 선생님이 더 무모하잖아.
“그래서 집안에 사진 같은 거라도 있으면 그것만 얼른 찍어서 나오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사진이 없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뒤로 기절해서 내가 데리고 나왔다고 알려주자 선생의 얼굴이 굳었다. 거기에 모습이 안 보이는 유령 같은 노인네와 풍채 좋은 웬 할아버지도 있더라고 알려주자 더욱 창백해졌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나한테는 한마디도 않던 거울 속 요괴가 이 선생님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다.
“요괴가, 여학생한테 붙어있었다고 하셨잖습니까. 생긴 것도 그렇고. 그래서 혹시 여학생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주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여학생들이 좋아할만한 아기자기한 물건이라든가 화장품이라든가 남자 스타의 사진이라든가 그런 걸 보여주며 말을 걸었더니 아이돌 사진에서 넘어왔다는 거다. 공략 루트가 잘못되었던 거구나 나는….
과연 선생님인가 하고 감탄하는데 모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겉모습만 보고 속아서 무슨 말이든 믿고, 대책도 없이 호랑이 굴에 들어가고, 게다가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잘못을 한 사람의 집일지라도 남의 집에 함부로 침입하다니 무모하고 어리석지 않습니까. 거울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큰 일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저기, 그거 나한테도 다 해당되는 말 같은데…?
모란은 선생을 향해 나무랐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뒤늦게 깨달았는지 “앗! 도령께서 그렇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생각 없이 혀를 놀린 저를 나무라주십시오.”라며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아 제발 좀….
“그보다 너, 아까 그 집 앞에서 왜 그렇게 무서워했던 거야? 깜짝 놀랬어.”
모란을 일으켜놓고 물었다. 지금은 사람의 모습인 토끼 요괴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가까이 갔을 때 그곳에서 결계 밖에 남아있는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 냄새에 제가 기억하는 어떤 분이 생각나서, 그리고 그분에게 생각이 닿자 집 안에 누가 있는지 알게 되고, 그러자 너무 무서워서 못난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 누가 대체 누군데?
모란은 내 질문에 붉어졌던 볼이 다시 하얗게 변하면서도 겨우 대답했다.
“그 냄새는 호랑이입니다. 분명히, 호랑이의 냄새였어요.”
호랑이? 그러니까 집 안에 호랑이가 있다는 말인가? 도시 한 복판의 주택가에? 이 나라에서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멸종해 버린 그 호랑이가?
모란의 대답이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그곳을 나설 때 만났던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그때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영감 도깨비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호랑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정말로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뭐야. 호랑이는 산에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요즘 세상에 호랑이가 살만한 산 같은 건 남아있지도 않지만.
하지만 상대가 호랑이고 보면, 토끼 요괴인 모란이 그렇게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학교에서 기절 사고가 자꾸만 생겨서 그 원인을 따라가다 보니 어쩐지 호랑이 굴이 나와 버렸네.
“너 학교에 있을 때는 호랑이 냄새를 못 맡았던 거냐?”
모란에게 묻자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학교에는 아무 냄새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잠시 생각해본 다음 소녀가 말을 이었다.
“학교에 이상할 정도로 요괴나 혼령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데 딱히 결계의 흔적도 없었던 걸 생각하면, 거기는 혹시 원래부터 호랑이의 영역이었던 게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요괴나 혼들이 쉽게 다가오지 않은 게 설명이 되어서요.”
호랑이가 학교를 제 영역으로 삼아서 뭘 하게? 어…설마 학생들을 잡아먹기 위한…그러니까 일종의 외양간 같은…설마. 그 학교에서 누가 죽은 적은 없다고 했잖아.
“어쨌든 뭐, 가서 물어볼 수밖에 없겠네.”
호랑이굴로 돌아가겠다는 내 말에 모란이 펄쩍 뛰었다.
“혼자서는 안 되십니다. 아까는 제가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미처 말리지도 못했지만 상대는 호랑이란 말입니다. 게다가 인간들 사이에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오래 묵은 호랑이입니다. 애초에 호랑이란 교활하고 포악한데다 아무 생각 없는 무뢰한이라서 말이 통하지도 않고…”
어쩐지 호랑이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다, 너? 그런데 나는 대책 없고 무모해서 말이야. 다른 방법이 떠오르질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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