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객(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모처럼 날씨가 흐렸다. 일기예보 그대로, 점심 무렵부터 롤 스크린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 눈에 띄게 약해지더니 이윽고 어두컴컴하다 싶을 정도로 변했다. 슬쩍 밖을 내다보자 과연 하늘이 두꺼운 솜을 깔아놓은 것처럼 푹신하게 하얗다.
요새 가뭄인가 싶을 정도로 맑은 날만 계속되어 오랜만에 만나는 흐린 날이었다. 어디 보자. 오후는 구름, 비는 새벽에 내린다고 하니 외출하기 좋은 날씨인 셈이다. 약간 들떠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유하가 내 방에 찾아왔다.
“해명씨, 혹시 오늘 오후에 특별한 계획이 있나요?”
그녀로서는 드물게 사근사근히 묻고 있어서, 계획이 있어도 바꾸면 됩니다 아냐 애초에 그런 거 없어요 무계획이 인생인 나한테 무슨 계획씩이나 뭔데? 뭔데? 그건 왜 묻는 건데? 라고 체신없이 읊을 뻔했다가 간신히 나불대려는 입을 봉했다.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곤란한가요?”
내가 가벼운 입을 단속하는 동안 대답하기를 기다리던 유하가 한 번 더 물었다.
“아니, 없어. 하나도 안 곤란해. 어디 갈까? 멀어? 아니 멀어도 상관없고 멀면 멀수록 더 좋은데.”
다행히 배 타고 섬 같은 데 가도 좋다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는데 유하가 조금 웃는 걸 보니 나 웃겼나?
“먼 곳은 아니에요. 6시에 나갈 테니까 준비해 둬요.”
어디를 갈 생각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다. 6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때에 그녀와 함께 외출이다.
나갈 때 입을 옷을 골라놓고 창밖을 수시로 내다보며 비가 오지 않는지 바람이 강해지지 않는지 확인했다. 우산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고 바람 때문에 추워지면 두꺼운 겉옷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저녁은 밖에서 먹는 건가? 6시에 외출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일까. 어디에 가는 걸까. 그냥 장보러 가는데 같이 가달라는 걸지도 몰라. 아냐. 뭘 도와달라는 거였으면 그렇게 말했겠지. 멀지 않은 곳이라는데 이 근처에 저녁 무렵에 갈만한 곳이 있나? 식당 말고? 유하가 오늘 저녁 만들기 귀찮은가?
별로 도움도 안 되는 머리로 열심히 생각해봐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마침내 6시가 되자 이미 옷 갈아입고 머리 빗고 신발 신고 기다리고 있던 나는 큰 바늘이 12에 딱 도착하는 순간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유하는 출입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아색 원피스 위에 분홍색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소녀처럼 사랑스러워서 잠깐 두근거렸다가 그녀의 한 손에 붙어 있는 이물질을 보자 갑자기 눈앞이 선명해졌다. 뭐냐, 저 조그만 짐 덩어리는.
나비 요괴 꼬마가 나를 보며 혀를 내밀고 있었다. 뭐야? 저 꼬맹이랑 같이 가는 거였어?
“요 앞 학생공원에서 오늘 마술쇼가 있다고 해서요. 나비가 가보고 싶대요.”
요괴 꼬맹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가주는 건 그렇다 치고 나는 왜 데려가는데? 마술쇼 따위…마술? 그러니까 모자에서 새도 꺼내고 지팡이에서 막 꽃을 피우고 카드도 맞추고 하는 그 마술쇼인가요? 가고 싶어요.
유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이물질이 전혀 마음에 안 들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술이라고 하잖아. 마술.
티브이가 아니라 눈앞에서 마술사가 보여주는 쇼를 구경할 수 있다니 안 갈 수는 없었다.
수리점에서 그리 멀지 않아 이따금 가는 공원이 평소와 달리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입구에는 풍선으로 아치도 만들어졌고 공연장을 알려주는 깃발이 바람에 팔락였다. 뭐 기왕 온 거니까 꼬맹이 때문에 기분 망칠 필요 없잖아. 나는 즐기기로 했다.
부채꼴 모양의 작은 공연장은 아직 준비도 다 안 되었는데 사람들이 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뒷자리나 겨우 비어있어서 거기 앉을까 했지만 꼬맹이가 재빨리 달려가더니 앞쪽에서 빈자리 두 개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유하! 유하! 여기 자리 있어.”
이봐, 나는? 나는요?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더는 빈 의자가 없다. 유하가 나더러 앞에 앉으라고 양보해줬지만 설마 저 꼬맹이와 나란히 앉아 있을까보냐. 쿨하게 거절하고 뒷자리에 홀로 앉는 수밖에.
잠시 후 공연장의 준비가 끝나고 붉은 색 치파오를 섹시하게 입은 묘령의 처녀가 나와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자가 마술사를 소개하고 박수를 유도하는 동안 대부분의 남자들은 마술사가 아니라 그녀의 S라인과 잘 빠진 다리에 박수를 보내는 것 같았다.
마술사는 전통적인 검은색 연미복에 실크햇 차림으로 나와서 배우처럼 멋들어지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흔히 봤음직한 마술, 모자에서 새를 꺼낸다거나 손 안에서 끝없이 스카프를 뽑아낸다거나 하며 쇼를 시작했다.
많이 보던 마술이라고 해서 재미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둘기가 퍼드득 날아가거나 빈손에서 꽃송이가 끝없이 피어나는 모양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 확실히 신기한 거니까. 특히 아이들은 마술사가 뭔가를 꺼낼 때마다 환호하면서 박수를 치고 같이 온 부모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점은 나비 요괴 꼬맹이도 하나 다를 바 없었다. 마술사가 어디선가 카드를 꺼내 허공에 뿌리거나 손가락을 튕겨 지팡이 색을 변하게 만든다거나 하면 입을 벌리고 보다가 열심히 박수를 쳤다. 무슨 요괴가 저런 것에 감탄하는 거야. 본인은 나비 날개를 달고 다니면서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고 멀쩡한 사람의 손에서 나뭇잎이 돋아나게도 하면서.
50분가량 진행된 쇼의 마지막은 탈출마술이었다.
세워 놓은 관처럼 보이는 상자 안으로 수갑을 차고 온 몸을 사슬로 친친 감은 치파오 처녀가 들어갔다. 마술사는 상자를 닫고 흉기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자물쇠를 채웠다. 그걸로 부족해서 상자를 다시 한 번 쇠사슬로 몇 번이나 감은 다음 다시 자물쇠를 채웠다.
마술사가 상자 위에 검은 천을 덮고 요상한 주문으로 관객의 시선을 돌리는 동안 나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자 뒤쪽을 덮은 천의 끝이 약간 들렸다가 거기에서 뭔가 조그만 게 나오는 것이었다.
‘쥐…?’
달걀만한 크기의 통통한 생쥐였다. 그것이 굵은 전선 사이를 조르르 달려서 조명기구 사이로 숨었다. 그런데 그 쥐가 보통 쥐는 아니었던 거다.
“쥐 요괴잖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작은 몸에서 퍼져 나오는 요기를 분명히 읽은 것이다. 쥐 요괴는 조명기구 사이를 지나 공연장 아래로 내려가더니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서 관객석 뒤편으로 갔다. 그리고 모든 관객들이 마술사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뒤편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한 다음 미리 준비해 둔 긴 외투를 걸쳐 치파오를 가렸다.
그때 마술사는 빈 상자를 열어 보이며 관객들의 탄성과 박수를 받던 중이었다. 치파오 처녀는 관객석 뒤편에 서 있다가 마술사의 손짓에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보는 순간 외투를 확 벗어 던졌다.
붉은 치파오가 조명 속에서 화사하게 반짝이자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치파오 처녀는 허리를 흔들며 천천히 걸어 공연장으로 돌아갔다. 마술사는 그녀와 함께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와아, 요괴가 쥐로 둔갑해서 상자에서 빠져나가다니 이걸 사기라고 해야 하나 마술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냥 차라리 쥐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더 효과가 좋지 않을까. 엄청나게 신기할 텐데.
탈출 마술을 마지막으로 공연은 끝났다. 나비 요괴 꼬마는 완전히 만족해서 배부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마술은 그렇다 치고 저 탈출 마술도 재밌었던 건가? 이 꼬맹이는.
“유하, 유하. 아까 봤어? 빨간옷 입은 누나가 쥐로 변했다?”
아아…그게 재미있었구나. 넌 요괴 주제에 다른 요괴 봤다고 신기해하지 말란 말이다.
하나둘 자리를 떠나는 관객들과 함께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거나 아니면 식당이라도 가서 저녁을 먹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유하는 객석 아래쪽 공연장을 향해 걸어갔다. 뒷정리를 하는 스텝들 사이에서 치파오 처녀가 유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유하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낸 다음 그녀는 나와 나비 요괴를 번갈아보며 말을 걸었다.
“공연은 재미있었나요? 이곳 일정은 원래 없던 거라 좀 급하게 준비해서 부족한 게 많았을 거예요.”
나비 요괴가 고개를 홱홱 저으며 재미있었다느니 비둘기가 날아갈 때는 좀 무서웠다느니 누나 정말 예뻐요 같은 말들을 쏟아놓았다. 치파오 처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해명 도령은 어땠나요?”
그녀가 나를 보며 물었다. 이 여자가 나를 아네?
“도령에게도 재미있던가요?”
물으면서 조금 더 다가오는 바람에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훅 풍겨오는 화장품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면 이런 눈속임 마술보다는 더 어른스러운 놀이를 좋아하시나요?”
손끝으로 제 붉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화장한 얼굴인데 입술을 만져도 손에 립스틱이 안 묻어. 신기하네.
“저희에게 맡길 물건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때 유하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말하는데 어쩐지 날카롭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치파오 처녀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어머, 맞아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우리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스텝들의 차와 함께 공연도구를 싣기 위한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치파오 처녀는 트럭 안으로 들어가 조명을 켜더니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안은 좁은 통로 양편에 여러 가지 도구들로 꽉 차 있었다.
치파오 처녀는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서 상자를 덮어놓은 듯한 넓은 천을 치웠다. 거기에는 트럭의 짐칸 너비에 거의 꼭 맞을 정도의 유리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유리 상자 안에는 어딘가의 모형을 만들어 넣은 것 같았다. 산과 들, 작은 집과 논밭 같은 것이 진짜처럼 섬세했다.
심지어 그 안의 사람은 진짜처럼 움직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