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61화 (161/218)

요술객(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만불산(萬佛山)이라는 거, 들어보셨어요?”

유리 상자를 내려다보며 치파오 처녀가 물었다. 만불산? 그거 경주 근처에 있는 산 이름 아냐? 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눈치 채고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치파오 처녀도 대답은 기대 안 했는지 금세 말을 이었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신라시대 경덕왕이 당나라 대종(代宗)에게 선물하려고 만들게 했다는 산의 모형이죠. 모형이라지만 3미터 높이였으니까 꽤 큰 셈인데 온갖 나무며 화초며 기암괴석에 물줄기며 어찌나 정교하고 섬세하던지 얼핏 봐서는 실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해요.”

뭐 그 정도 모형이야 요즘 기술이면 가능하니까 놀라울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만불산이라는 걸 만든 때가 신라시대이니 신기한 거겠지.

“만불산에는 수없이 많은 불상과 암자와 누각, 전당 같은 건물도 만들었는데 그것 역시 진짜와 다를 바 없다고 하죠. 하지만 정말로 특별한 것은 그 섬세함이나 정교함이 아니에요. 진짜는 말예요, 제비나 참새 같은 새들과 나비나 벌 같은 곤충까지 만들었다는 거예요. 게다가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였거든요.”

말하며 그녀는 유리 상자의 윗부분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 밑에서 유리 상자 속의 작은 아이가 강아지와 함께 뛰어다녔다.

“그 만불산, 삼국유사에는 왕의 명령을 받은 신라의 기술자들이 만들었다고 적혀 있지만 말예요, 사실 그것을 만든 사람은 관오란 이름의 요술객이지요.”

요술객이 뭐야?

“기술사(奇術師)라고도 하고, 마술사(魔術師)라고도 불리죠. 바로 우리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던 거예요.”

신라시대 마술사들은 모형도 만들고 그랬나 보다.

“그럼 이건?”

유리 상자를 가리키며 묻자 치파오 처녀는 붉은 입술을 당기며 웃었다.

“이걸 만든 사람은 제 할아버지예요. 요술객 치현. 사람들 사이에서는 민치현이란 이름의 마술사로 알려져 있지만요.”

“민치현 마술사? 진짜요?”

치파오 처녀의 말에 반응을 보인 유일한 한 명은 나비 요괴 꼬맹이였다.

“유명한 사람이야?”

꼬맹이에게 묻자 녀석이 팔을 파닥거렸다.

“완전 유명해. 천재에다 못하는 마술이 없고 멋지고 서울에 전용 공연장도 있는데 한 번 열릴 때마다 표가 없어서 못 구할 정도로 인기가 있고 그리고…”

얘는 생후 3개월의 요괴인 주제에 뭐 이렇게 아는 게 많아? 너 혹시 나 없을 때 내 방에서 인터넷만 하는 거 아니냐?

“제 의뢰는 바로 그 할아버지예요.”

녀석이 열렬한 태도로 계속 설명하고 싶어 했지만 치파오 처녀가 재빨리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자신이 만든 세상에 갇혀버린 할아버지를 꺼내와 주세요.”

음? 뭘 고쳐달라는 게 아니고 사람을 데려와 달라는 건가? 아니, 손녀가 요괴니까 할아버지도 요괴인 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세상이라면 이 유리 상자 안에 있다는 말인가?”

“바로 그래요.”

내 질문에 그녀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럼 상자를 열고 나오게 하면 되는 거 아냐? 그게 어려우면 아예 유리를 깨버리든가.”

내가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을 했는데 그 순간 치파오 처녀는 몰상식하고 어이없는 말을 들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하면 할아버지의 대작인 이 모형이 망가지게 되잖아요. 완성되는 순간 이 안의 공간은 물과 공기는 물론 빛과 기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봉인된다고요. 조금이라도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려요.”

그런데 네 할아버지는 들어가셨다며.

내가 지적하자 치파오 처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저도 그걸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가 어떻게 저 안으로 들어가셨는지…. 이것을 만들고 나서 어린애처럼 기뻐하시면서 시간만 나면 들여다보곤 하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가 사라지셨어요. 전에도 알리지 않고 며칠씩 외출하시는 일이 있어서 이번에도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몇 달이 되어도 소식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날 저것을 발견했어요.”

치파오 처녀가 손끝으로 유리 상자 안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작은 초가집이었다. 지붕에는 박 넝쿨, 마당을 대나무 울타리로 둥글게 둘러싼 소박한 집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마당에 뭔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问问道士(도사에게 묻다)

마당의 땅을 파서 적어 놓은 글자인 것 같다.

“제가 처음 본 날에는 ‘부수지 마라’고 적혀 있었어요. 다음날에는 오늘 본 글자가, 그리고 다음날에는 ‘나 여기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죠. 이 세 문장을 하루에 하나씩 번갈아가며 계속 쓰고 계셔요.”

“할아버지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거야? 목소리가 안 들리면 필담으로라도?”

“말했잖아요. 저 안으로는 빛도 기운도 들어가지 못해요. 우리는 유리 상자 안이 잘 보이지만 저 안에 있으면 아마 우리가 있는 이 위쪽은 파란 하늘 정도로밖에 안 보일 거예요. 우리를 볼 수 없으니까 할아버지도 같은 메시지를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종의 SOS 같은 건가.

“그래서 할아버지 말씀대로 도사에게 물어보았는데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있다고 했어요. 다만…아까도 말했다시피,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저 세계는 지극히 정교한 방식으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작은 우주이니까요. 그래서 들어갈 방법은 찾았으되 들어가지는 못하는 채로 곤란해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참 곤란하기는 한데. 그런데 솔직히 나는 도사도 아니고 마술사도 아니잖아. 막혀있는 상자 안에 들어가는 건 마술사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

“혹시 다른 마술사들에게도 물어봤어?”

내 질문에 치파오 처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 방면에서 할아버지를 능가할 요술객은 없어요. 그리고 만일 있다 해도 어떻게 할아버지의 작품을 다른 사람이 멋대로 손대도록 할 수 있겠어요. 설령 그 사람이 할아버지를 꺼내 올 수 있다고 해도 같은 요술객으로써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요. 이건 할아버지의 명예가 달린 일이기도 해요. 이 일은 나를 포함해서 네 명밖에 모르고 있어요. 스탭들에게도 비밀이라고요.”

그런데 손을 댈 수 없다면 어떻게 할아버지를 꺼내 오라는 거야.

“그래서 도령에게 의뢰를 하는 거예요. 도령은 요술객이 아니니 할아버지의 명예가 손상될 일도 없고, 듣기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괴사를 해결해 왔다니 이 일에 적임이죠.”

뭐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좀 유능했던 것 같기는 해. 그런데 유능했던 건 기억 저편의 일이고 지금의 나는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는 평범한 수리점 사장인데요.

“해주실 거죠? 제 할아버지를, 데려와 주실 거죠?”

치파오 처녀가 은근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니, 그보다 내 손은 왜 잡는 거야? 그리고 좀 떨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하면서 서리가 맺힐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이 상자를 수리점으로 가져다놓으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것 같고…. 일단 나는 오래 나와 있을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치파오 처녀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니 할 수 없이 내가 조금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어머, 고마워요. 스탭들에게 수리점에 갖다 놓으라고 할게요.”

할아버지의 귀한 작품이라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그녀가 승낙했다.

그녀의 말대로 유리 상자는 한 시간 뒤 수리점에 배달되었다. 공연장을 나온 뒤 곧장 돌아온 나는 어쩐지 유하가 밥을 안 줘서 그때까지 저녁도 못 먹고 있었다.

세 명의 남자가 천을 뒤집어씌운 유리 상자를 가져다 작업장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들이 떠나자 나는 마술사가 숨어있는 상자를 드러내는 기분으로 천을 벗겨냈다. 마술쇼였다면 유리 상자 안은 텅 비어있고 창고나 계단 쪽에서 마술사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타나야 하겠지만…

나는 마술사가 아니니 그런 일은 없었다.

트럭 안에서 본 그대로의 모형이 유리 상자 안에 있었다. 둥근 언덕, 낮은 산. 산과 산 사이를 휘돌아 흐르는 작은 냇물이며 그 양편의 논과 밭.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 있었고 집과 집 사이를 닭을 쫓으며 달려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유리 상자 안의 사람이라는 건 그 크기가 기껏해야 해바라기 씨앗 정도? 그러니까 머리와 사지만 겨우 구분될 정도로 작아서 얼굴의 표정조차 안 보일 정도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유리 상자 안에서 놀랄 정도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밭을 매거나 냇가에서 멱을 감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 과일을 따거나 하는데 어색한 데가 전혀 없었다. 마치 높은 산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정말로 이것이 만들어놓은 모형에 불과한 건가? 혹시 진짜 사람이 들어있는 건 아냐? 이를 테면 콩알만큼 조그만 사람이라든가….

나도 모르게 유리에 코를 박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쪽에서 내가 안 보이는 것은 정말로 다행이었다. 만일 보였다면, 돼지코를 만들며 내려다보는 눌린 찐빵 같은 얼굴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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