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64화 (164/218)

요술객(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방법을 모르니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보고, 생각해 보고, 보고, 지치고, 보고, 짜증내고.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그것도 유리 상자 안에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그러니까 유리 상자를 받은 이후 사흘째 나는 오페라글라스를 썼다 내려놓았다 하며 마을을 감시 아닌 감시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시간을 맞춰 기다린 덕분에 마당에 글자가 생기는 순간을 포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이 좀 괴상했다.

새벽이 되자 초가집의 하나뿐인 방문이 열리더니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닫혔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댓돌 옆에 기대어 놓았던 대빗자루가 돌연 혼자서 허공에 둥실 떠올라 마당으로 가기 시작했다.

저거 혹시 도깨비인가? 멍하니 보고 있는데 빗자루는 좌우로 움직이며 마당에 쓰여 있는 글자를 싹싹 지우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손에 들고서 빗자루질 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아, 그렇다면 혹시 민치현이 아닐까.

치파오 처녀가 설명한 대로라면 이쪽의 사람들은 저쪽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유리 상자 속의 사람들이 보이는 지금의 상태라면 이쪽에서 건너간 사람은 눈에 안 보일지도 모른다.

빗자루는 과연 글자를 다 지우고 나자 위아래가 뒤집어져서, 이번에는 손잡이 쪽으로 마당을 긁으며 커다란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부수지 말라는 의미의 한자를 적어놓은 다음 빗자루는 다시 댓돌 옆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는 모양이 보이지 않으니 민치현이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뭐 그래도 여기까지는 문제랄 것 없었다. 어제도 그제도 일어났던 일이 다시 생긴 셈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제도 그제도 없었던 일이 생겨버렸다. 마을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던 사내아이들이 오늘은 대나무 뿌리로 만든 활을 들고 다니며 사냥하는 흉내를 내더니 마을에서 점점 멀어져 민치현의 오두막에까지 도착한 것이다.

본래 그의 오두막은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렇다고 높은 산 위라든가 깊은 계곡인 것은 아니지만 울창한 대숲과 낮은 언덕으로 둘러싸듯 가려진 곳이고 근처에 밭도 뭣도 없어서 어지간해서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안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토끼나 꿩 따위를 쫓아 사냥 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그런 것을 가릴 리가 없다. 이리 우르르 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다 저절로 초가집 앞까지 와버린 것이다. 그 중 한 아이가 담 너머를 기웃거리다가 다른 아이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가 낮은 대나무 울타리 너머로 마당에 패인 글자를 넘겨다보았다. 녀석들이 자기들끼리 뭐라 속닥거리더니 이윽고 일제히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마을로 간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뭔가를 알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는 어른 몇 명이서 일을 하다 말고 아이들을 따라 민치현의 초가집으로 향해 갔다. 그들도 아이들처럼 마당을 구경하더니 마을로 갔고, 잠시 후에는 그 무리에 노인 두 명이 더 보태어져서 다시 초가집을 찾았다.

노인들은 아이들이나 다른 어른들처럼 그곳에 오래 있지 않았다. 담장 너머를 얼핏 넘겨다 보기만 한 다음 서둘러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이 흩어져 이 집 저 집과 이 밭 저 밭을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정오를 조금 넘긴 한낮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일을 멈추고 어디론가 모여들었다. 두 노인 중 한 명의 집이었다. 아마도 집안의 가장쯤 되는 사내들은 거의 모두 불려온 것 같았다. 댓돌 주변에 크고 작은 신발짝이 나물 말리는 것처럼 널려 있었다. 그 신발들은 한참 후에야 다시 주인의 발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집에서 나와 도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이들은 다시 몰려서 놀러 다니고 노인들은 집안에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흐트러졌던 마을의 일상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 있다 노인의 집에서 나온 한 젊은이가 외출복을 입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젊은이는 서둘러 걷고 있었다. 금세 마을을 빠져나가 밭 사이로 난 길을 걷고 비탈진 언덕배기를 넘더니 점점 유리 상자의 가장자리로 가다 마침내는 유리벽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물론, 상자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젊은이가 유리 상자로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것이었다.

어디로 간 걸까. 지켜본지 사흘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후로는 다른 때와 비슷한 순서를 따라 시간이 흘렀다. 저녁이 되고, 밥 짓는 연기가 마을을 자욱하게 덮었다. 상자 밖으로 사라졌던 젊은이는 그제야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지 한 사람을 더 데리고 있었다.

같이 온 사람을 오페라글라스로 가까이서 보니 40대 후반쯤이나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수염을 기른 것이나 옷차림이나 유리 상자 속의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지만 갖고 있는 짐이 좀 특이했다.

천으로 감싼 다음 동아줄로 잘 묶은 등짐을 하나 지고, 허리춤에는 뭐에 쓰는지 모를 작은 호리병을 대여섯 개나 대롱대롱 매달고 있었다. 게다가 왼쪽 옆구리 아래로는 길이가 꽤 긴 칼도 하나 보였다.

그런데 그는 유리 상자 안에 들어오더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곳을 구경하는 것도 같고 뭔가를 찾는 것도 같았다. 사방을 돌아보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확실히 이쪽을, 그들을 보는 나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나도 모르게 오페라글라스가 들린 손이 움찔 떨었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는 아주 잠깐 이쪽을 힐끗 올려다보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정말로 우연일까? 뭐 하는 사람이지? 그런데 뭔지는 몰라도 민치현의 초가집과 관련되었을 일인 것 같은데 칼 든 사람이 불려왔다는 말이지.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들은 노인의 집으로 가더니 거기에서 잠시 집주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젊은이와 칼 든 남자는 집을 나와 민치현의 초가집으로 갔다. 젊은이는 초가집 근처까지 안내한 다음 손을 들어 집을 가리키고는 슬금슬금 그곳에서 멀어졌다.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칼 든 남자는 천천히 초가집으로 다가갔다. 느긋한 걸음이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신중히 발을 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초가집의 마당에 들어서기 전에 갑자기 멈추었다.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니다. 마치 뭔가에 부딪친 것처럼 움칫 선 것이다.

칼 든 남자는 초가집 앞에서 등짐을 내려놓더니 묶어놓았던 것을 풀기 시작했다. 줄을 풀고 둘러싸고 있던 천을 벗겨내자 안에서 상자 하나가 나왔다. 색으로 봐서는 쇠로 만든 것 같은데 표면에 뭔지 알 수 없는 작은 글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너무 작아 오페라글라스로도 안 보였다.

남자가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는데 칼의 모양이 특이했다. 검신 양쪽으로 마치 나뭇가지처럼 삐죽삐죽 칼날이 돋아나 있었다. 칠지도 같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상자에 겨누며 남자는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는 그 모양은 주문이라도 외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앞에서, 상자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서 나중에는 아예 상자가 들썩들썩, 춤을 출 지경이었다. 저러다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구 움직이던 상자에서 갑자기 흰 연기 같은 것이 확 퍼져 나왔다. 남자의 주변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이윽고 천천히 연기가 걷히고 나자 거기에는 남자 외에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괴상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저걸 짐승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크기는 남자와 거의 비슷했지만 우선 머리가 둘이었다. 그 두 개의 머리도 얼굴은 사람의 이목구비를 닮았으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붉고 형형하게 빛났으며 정수리에는 뾰족한 뿔이 길게 돋아나 있었다.

얼굴도 사람을 닮았을 뿐, 뭉개진 것처럼 일그러진 코나 늘려놓은 반죽처럼 축 처진 입술이나 시커먼 피부가 결코 호감을 얻을만한 외양이 아니었다.

두 발로 서 있지만 허리는 구부정하게 숙이고, 두껍고 긴 팔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길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남자의 손짓을 보고 훌쩍 움직일 때는 잠시 행적을 놓칠 정도로 움직임이 재빨랐다. 게다가 짙은 색의 피부는 어둠 속에서 감쪽같이 그 모습을 숨겼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그 괴상한 것은 점점 초가집에 다가가더니 툇마루 밑에서 잠시 웅크리고 일그러진 코를 이리저리 갖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 녀석의 긴 팔이 슬며시 마루 위로 올라갔다. 다음에는 한 발이 걸쳐졌다 싶은 순간, 그 어두운 몸은 갑자기 벼락처럼 방문을 부수며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뿔 달린 녀석은 몸이 어두웠고 민치현이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컴컴한 방 안에서 이따금 뭔가 번득이거나 벽에서 흙가루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요한 가운데 벌어지는 싸움에 칼을 든 남자가 뛰어들었다. 그가 마루 앞까지 달려가더니 칼을 휘둘렀다. 무엇을 상대로 베거나 치려고 한다기보다, 허공에 뭔가를 그리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한 순간 빛이 번쩍, 초가집의 전면을 하얗게 물들이더니 남자가 소매를 휘두르며 뭔가를 집어던졌다.

던져진 것이 부서진 문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방에 뛰어들었던 뿔 달린 녀석이 느릿느릿 밖으로 나왔다. 두꺼운 손에 호리병이 하나 들려있었다.

남자는 호리병을 건네받더니 칼을 들어 집 앞에 풀어놓은 상자를 가리켰다. 뿔 달린 것이 느릿느릿 걸어 상자로 가더니 성인 남성과 같은 크기의 몸이 마치 빨려드는 것처럼 그 안으로 사라졌다.

칼 든 남자는 상자를 원래대로 갈무리한 다음 그곳을 떠나 마을로 돌아갔다.

그가 노인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봤지만 그 후에는 집에 별다른 기미가 없었다. 이미 밤이니 거기에서 유숙한 다음 내일 떠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남자는 초가집에서 도대체 뭘 한 거지?

짐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부려 집안에서 날뛰게 만든 것은 알겠는데 목적은 뭐였지? 혹시 민치현이 목적이었을까?

저 마을의 사람들 입장에서 민치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면서 마당에 의미를 모를 글자를 써놓는 괴행을 저지르는 ‘어떤 것’이다. 그런 것이 마을 가까이에 있다면 보통 어떻게 하는가…

아 설마. 도사 같은 거라도 불러서 민치현을 퇴치해 버린 거야?

아니, 잠깐. 정말로 그런 걸지 모르겠는데. 가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저 칼 든 남자가 민치현을 퇴치한 거라면 그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성불되어 버리는 건가? 아니면 어딘가로 쫓겨나나? 그것도 아니면 봉인되는 건가? 보통 요괴를 퇴치하면 어떻게 되지?

보통은…죽이거나 가둔다.

옛날이야기들을 기준으로 하면 죽이는 경우가 월등히 많지만 아니 아니,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아까 도사인지 뭔지 모를 칼 든 남자가 호리병을 집어던졌잖아. 어쩌면 그 안에 봉인했을지도 몰라.

이쯤 되면 더 난감해지는 게, 저 도사 같은 남자는 분명 마을을 떠날 테고 그러면 유리 상자로 볼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버린다는 거지.

자아, 이제는 미적거릴 틈이 없다. 어떻게든 저곳으로 가야 했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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