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객(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잘도 이런 것을 가지고 사기를 쳤군요.”
유리 상자를 본 백은호의 첫마디였다.
전화를 걸자 내가 부르면 아무 때나 달려갈 만큼 한가한 줄 아냐는 둥 아직 아침도 안 먹었다는 둥 불평을 해댔지만 내 사정이 급하다 보니 그런 말을 들어도 짜증은커녕 안달이 나서 어찌나 다정하게 부탁했던지, 녀석은 내 말을 기껏 듣고도 문득 목소리를 바꾸더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고 새삼스럽게 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설명했잖아! 민치현이 죽었는지 봉인되었는지 모를 판이라서 당장 땅 속 세상으로 가봐야 한다고!
어쨌든 백은호는 아침 식사를 미루고 와준 것이 분명했다. 전화를 끊고 15분 만에 수리점 앞 도로에 차를 세워놓고 들어와서 당연하다는 듯이 “아침은 커피와 비스킷 정도면 충분합니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곧장 유리 상자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잠시 훑어본 다음 열다섯 자만에 민치현을 사기꾼으로 만들었다.
“만불산인가 그런 것보다 이런 걸 만드는 기술이 더 대단한 거 아냐?”
치파오 처녀의 말을 떠올리고 내가 민치현을 편들어 말하자 백은호는 잘생긴 얼굴에 비웃는 것도 감탄하는 것도 같은 웃음을 띠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라면야, 그런 셈입니다.”
그러니까 백은호도 그 점에서는 인정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곧 얕보는 듯한 얼굴로 상자로부터 돌아섰다.
“그래서 저 상자가 보여주는 땅 속 세계로 가실 작정이시란 말이군요.”
“최대한 빨리 가야 해. 1시간쯤 전에 이상한 괴물을 부리는 사람에게 잡힌 것 같으니까. 아직 마을을 나간 것 같지는 않은데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하니 저곳의 날이 밝기 전에, 즉…이곳의 시간으로는 어두워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백은호, 방법이 있어?”
당연히 있겠지? 잘난 체하고 있는 너라면.
“도술은 제 전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하가 내놓은 커피잔을 집어 들며 백은호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런 거라면 도사에게 시킬 일입니다.”
못한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있다.
“어떤 도사? 아는 사람 있어? 다른 건 됐고 최대한 빨리 부를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사는 도사로…”
“터무니없는 말씀을 당연한 것처럼 하시니 어디서부터 가르쳐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백은호가 한숨 쉬듯 말했다. 또 저런다. 뭘 모르면 그냥 가르쳐 달란 말이다. 한숨 쉬지 마. 한심하다는 표정 짓지 마. 대화하다 말고 전화 걸지 마.
“백은호다. 지금쯤은 다리가 풀렸겠지? ……착각하는 체 비꼬지 마. 네 안부에는 관심 없다. 아, 네 안사람이라면 다르지. ……그러셔? 이쪽도 딱히 필요한 건 아니다만. ……네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전해드리지. …누구인지 왜 가르쳐줘야 하지?”
뭐야, 저 녀석. 전화를 하더니 갑자기 이상해졌어. 통화상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백은호를 유치하게 만들었어.
갑자기 중딩스러워진 여우요괴는 통화 상대와 잠시 투닥거리더니 유리 상자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한 다음 지금 바로 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이 전화를 탁 끊어버린 그가 짜증 섞인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저기요. 방금 통화 누구 부른 거야?
“우리가 갈 곳은 알려진 바 없고 지표 삼을 곳도 없는 미지의 땅입니다. 그런 곳에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오는 일이지요.”
입만 적실 정도로 커피를 마신 백은호가 갑자기 설교 모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갈 때는 마음대로 갈 수 있지만 올 때는 다릅니다. 그러니 우리를 보내기도 하고 불러들이기도 해야 할 도사는 아무나 데려와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이 되어도 약속을 지켜 우리를 불러들일 수 있을 만큼 좋은 실력과 신의를 갖추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아 그래. 가까운 데 사는 도사 아무나 데려오라고 한 게 잘못이네요. 그냥 간단히 말해주면 안 될까? 그런데 너 방금 우리라고 했냐?
“너도 갈 거야?”
내 질문에 백은호가 날렵하게 뻗은 눈썹을 찡그렸다.
“도령 혼자 보낸 다음 며칠 후에 다시 찾으러 가는 것은 몇 배나 귀찮은 일이니까요. 하긴 그때 가면 보수는 받을 수 있겠습니다만.”
오히려 그편이 나은가?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백은호가 중얼거렸다.
야, 지금 뭘 계산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나 혼자 가면 못 돌아오고 헤매고 있다가 네가 데리러 와줘야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데. 응?
“그런데 아까 그 통화는 뭐였어? 오라고 한 사람은 네가 말한 실력 있고 신의 있는 도사야?”
내 질문에 백은호의 표정이 묘하게 복잡해졌다가 이내 조금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불의로 모은 힘은 쓰지 않는다 어쩐다 하고 있어서 약해빠진 상태입니다만 어쨌든 기술은 따를 자가 없는 도사입니다. 늦어도 한 시간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와아. 저 잘난 체하는 여우요괴에게 이런 평가를 받고 있다니. 누군지 몰라도 정말 뛰어난 도사인가 본데. 음, 설마 요괴인가?
백은호에게 묻자 어쩐지 그의 얼굴에 서려있던 심술이 조금 더 짙어졌다.
“실력 있는 요괴가 ‘약해빠질’ 수는 없지요.”
어쩐지 유감과 조소와 질투…같은 것이 섞인 목소리였다.
기술은 좋은데 약해빠졌다는 도사는 정말로 한 시간 뒤 수리점에 나타났다. 유리 상자 앞에서 안절부절 하고 있던 나는 출입문이 열리기 전부터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참이었다. 뚜벅 뚜벅, 한 걸음 한 걸음을 정확하게 내딛는 것 같은 발소리가 느리게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3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키가 훌쩍 크고 마른 몸에 개량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개량 한복이라고 해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흔해 빠진 디자인은 아니다. 좀 더 고풍스러우면서 편한 차림이었다. 그 옷차림이 단순히 외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가 걷는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뚜벅뚜벅, 한 발씩 천천히 걷는 모습이 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목각인형이 걷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그의 마르고 혈색 없는 얼굴은 어쩐지 나무껍질처럼 보였다. 심지어 나뭇잎 모양의 귀걸이는 진짜 이파리처럼 생생하게……야! 나비!
언제부터 작업장에 내려와 있었는지 날개를 꺼내 날아다니던 나비 요괴 꼬맹이가 남자의 귀걸이를 휙 낚아채서 입에 넣어버린 것이다. 넌 나뭇잎 닮은 거면 뭐든 먹는 거냐?
그러나 녀석이 아삭아삭 씹는 소리를 듣고 알았다. 저건 장신구가 아니라 진짜 나뭇잎이다. 남자의 귀에 나뭇잎이 돋아나 있어?! 나비, 너! 언제 저 남자 귀를 물었던 거야? 아닌데? 그런 적 없는데?
“도령께선 재미있는 아이를 키우고 계시는군요.”
남자가 웃으며 나비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딱히 키우고 싶어서 키우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지도 않지만 어쨌든 미안했다. 저 나비 요괴 꼬맹이에게 남의 몸에 난 걸 함부로 따먹지 말라고 가르쳐야겠어.
그나저나 사람의 몸에서 나뭇잎이 돋아나다니. 백은호는 분명 요괴가 아니라고 했는데? 게다가 말하는 걸로 봐서 나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한 시간이나 걸렸잖아. 차로 30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를 두 배로 늘려서 오는 게 도사의 축지법인가? 환. 아, 규한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유리 상자 옆에서 백은호가 남자를 보자마자 비꼬듯 말했다. 제 입으로 한 시간쯤 걸릴 거라고 해놓고 한 시간 걸렸는데 투덜대다니 백은호 오늘 좀 이상해.
“자네의 반갑다는 인사는 매번 달라서 들을 때마다 재미있군. 나도 반갑네, 섭. 이름이야 아무렇게나 부르게나.”
남자가 태연히 응수했다. 그는 다시 뚜벅뚜벅 걸어서 유리 상자 앞으로 갔다. 상자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과연, 치현의 술법은 여기까지 왔군.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지, 고집스럽다고 해야 할지.”
그가 유리 상자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민치현과 아는 사이인가요?”
내가 묻자 남자, 환이라고도 규한이라고도 불리는 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실력 좋은 요술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보다 도사에 가깝지요. 그의 도술은 정심하다 할 수 없으나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현묘하여 선인이 되지 않은 인간의 몸으로 이런 경지에까지 닿을 수 있나 두려울 정도이지요.”
인간? 민치현이? 손녀가 요괴인데?
“모르셨습니까? 하긴, 요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신기한 사람이기는 합니다. 요괴에 대해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요. 그가 양자로 삼은 남자도 요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양자는 운 없게도 태령의 도사와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부인과 함께 변을 당했지요. 어린 딸을 하나 두었는데 치현은 그 아이를 매우 귀애하였답니다.”
그 아이가 치파오 처녀로구나.
“부모님에게 생긴 일로 손녀는 도사를 두려워하게 되어서, 치현은 그 때문에 요술객이 되었던 겁니다. 손녀를 즐겁게 해주려고 만들어 낸 것들이 나중에는 그의 기술이 되었지요.”
환이 손을 뻗어 유리 상자의 표면을 천천히 쓸었다. 그의 손바닥이 유리에 닿을듯 말듯 지나갈 때마다 투명한 유리 표면에 뿌연 것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어? 뭐가 있었어.
“보셨습니까?”
환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뿌옇게 흐려진 유리 표면에 그려진 문자라고도 그림이라고도 할 수 없는 괴상한 문양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 괴상한 문양은 낯설지 않게 익숙한 것이, 분명 보통이라면 샛노란 괴황지에 연지 같은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었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부적을 보이지 않게…”
“예. 이런 방법으로 도술을 감추며 요술객의 기술인 것처럼 속인 거겠지요, 치현은. 도사를 두려워 한 손녀 앞에서 도술을 보일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런 그가 어째서 소중한 손녀를 두고 저 땅 속 세계로 가버린 걸까.
“그것을 알려면 우선 구해야 합니다.”
환이 웃으며 품속에서 몇 장의 부적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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