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66화 (166/218)

요술객(7)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부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아시겠지요? 반드시 몸에 지니고, 찢어지거나 더럽혀지면 안 됩니다.”

환은 나와 백은호에게 부적을 한 장씩 나눠주고 자신도 한 장을 접어 소매 안에 넣었다.

백은호는 부적을 받더니 그것을 한 손으로 담배 말듯 돌돌 말아서 귀 안에 넣는 기술을 선보였다. 귀에 넣었어? 마술이냐? 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녀석이 무슨 일 있느냐는 표정으로 태연히 나를 쳐다보았다.

“준비 되셨습니까? 이제 이동합니다.”

유리 상자 앞에 물이 든 그릇 하나와 불을 붙인 초, 돌멩이 하나를 놓고 상자에는 부적 몇 장을 붙이는 걸로 준비를 끝낸 환이 우리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닌데, 그래도 정말 환이야말로 준비는 이 정도로 충분한 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이상한 곳으로 가는 일인데?

어쩐지 못미더웠지만 백은호가 팔짱을 끼고 “그런 거 일일이 말해줄 필요 없다.”며 툴툴거리는 걸 보니 괜찮은 것도 같았다. 환은 우리를 번갈아 본 다음 고개를 끄덕이고 부적을 들고 있던 오른손을 허공에서 툭 뿌리쳤다. 그의 손끝에서 노란 불길이 확 올라왔다. 부적에 불이 붙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돌연 눈앞이 밝아졌다.

조리개가 지나치게 열린 채로 찍힌 사진처럼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백은호 쪽을 향하자 거의 탈색되어 얼굴만 겨우 구분되는 것이 보였다.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귀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얕보는 듯한 시선이 내게 잠깐 닿았는데 그걸로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과 함께 귀도 먹먹해진 것 같고 심장이 꽉 눌린 것처럼 답답해졌던 기억도 있는데 어쨌든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이 캄캄했다. 어딘지 모를 곳에 나는 엉거주춤 서 있었다.

“몸은 제대로 도착한 것 같은데, 정신 쪽은 어떻습니까.”

얄밉게 물어보는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조금 짜증이 나려고 하는 걸 보니 정신도 제대로 도착한 모양이다.

“이럴 때는 그냥 괜찮으냐고 묻는 거거든.”

내 말을 듣고 백은호가 “그냥 괜찮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이제 뭐 짜증나려던 것도 사라진다. 내가 저 여우 요괴에게 뭘 바라겠어.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람. 슬슬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흙바닥이며 주변의 나무며 별들이 하얗게 빛나는 남청색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좀 더 익숙해지자 나무들 사이로 허벅지쯤에나 닿을 높이의 야트막한 대나무 울타리와 그 너머의 마당, 그리고 방문이 부서진 초가집 한 채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이다. 민치현이 머물었던 초가집.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보다 먼저 초가집으로 가서 방안까지 살피고 돌아온 백은호가 말했다.

“도사의 냄새가 조금 남아있을 뿐 뭔가 수작을 부린 흔적도 없고요. 다만…재미있는 것이 다녀간 것 같군요.”

이 요괴가 재미있다고 하면 보통 별로 재미없고 기분 나쁘고 위험한 거던데.

“그게 뭔데?”

내 물음에 백은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이름이 없으니 뭐라고 한 마디로 말할 길이 없습니다만, 도령이 말한 괴물의 정체를 알 것 같습니다. 마을로 가기 전에 잠시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번쩍 사라져버렸다. 사람처럼 보여서 방심하다가도 이럴 때는 확실히 요괴라는 것이 실감난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백은호는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녀석의 한 손에서 뭔가 매달려 흔들흔들, 걸을 때마다 서로 부딪힌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손가락 사이에서 늘어져 있는 가늘고 긴 실 모양의 꼬리나 그 끝의 통통하고 작은 몸집을 보면…

“쥐야?”

너 그런 위험한 병원균 매체를 맨손으로 들고 다녀도 되냐? 유행성 출혈열이라든가 페스트라든가 흑사병이 무섭지 않냐고? 아, 그런데 여우는 쥐도 잡아먹지. 마을에 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더니 식사였어? 커피와 비스킷이면 된다며.

백은호는 쥐 두 마리를 달랑달랑 들고서 초가집의 부엌에 들어가면서 나더러는 부서진 문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문짝 파편에 성냥도 없이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쥐를 던져 넣었다. 불은 순식간에 쥐의 털을 태우고 작은 몸을 바짝 익혔다.

“뭐 하는 거야?”

인간들 사이에서 살더니 생식은 안 하게 된 거냐고 묻기엔 전혀 배고픈 얼굴이 아니다. 백은호는 불 속에서 잘 구워진 쥐고기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배 안 고파.”

“배가 고파져도 드시지 마십시오. 이건 도령이 봤다는 머리 두 개인 녀석에게 먹일 음식입니다.”

배가 고파져도 이건 안 먹어!

어쨌든 그 괴물을 만나면 먹이라는 말에 싫지만 갖고 있어야 했다. 근처에서 호박잎을 따다 쥐고기를 돌돌 말아 놓았다. 가방이라도 가져올 걸. 랜턴도. 만일을 대비해서 핸드폰도…아, 그건 소용없나.

캄캄한 길을 별빛에 의지해 걷고 있자니 수리점에 두고 온 현대문명의 이기들이 아쉬워진다. 그러나 내 약간 앞에서 걷고 있는 백은호는 불편하기커녕 평소보다 기분 좋아 보였다. 몸 안에서 휘도는 생기와 요기가 어찌나 발랄한지 내게는 안 보이는 얼굴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쪽 사람들에게 우리가 안 보인다고 해도, 소리는 어때?”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문득 생각나서 백은호에게 물었다. 이제 곧 마을로 들어서면 유리 상자에서 보던 그 사람들은 내 눈에 안 보일 터다. 그쪽에서도 우리는 그림자나 바람처럼 느껴질 테지.

“이런 밤이라면 들릴지도 모르지요. 소리뿐 아니라 모습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영안이 밝은 사람이라면 확실히 볼 테고요.”

예를 들어 괴물을 상자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칼 든 남자 같은?

“하지만 반면에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니까요. 유리 상자로 보던 것은 잊어버리십시오. 그것은 거울에 비친 이편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여기에 직접 온 이상, 거울과 비교할 수 없는 도령의 눈이 스스로 보게 두십시오.”

무심한 듯 말하는 백은호의 조용한 목소리는 묘하게 익숙한 데가 있었다. 녀석과의 사이에 있을 리 없는 좋은 기억이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볼 수 있는 사람이 흔치는 않을 테지만 어쨌든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요. 우리의 목적은 도령이 본 괴물의 주인입니다. 그 자를 마을 밖으로 유인한 다음 제압하고 치현을 데려가면 되겠지요.”

너 엄청 쉽게 말하는데, 우선 민치현이 살아있는지조차 나는 모르겠다.

“죽었다면 환이 우리를 여기로 보냈을 리가 없습니다. 그 정도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도사를 믿고 여기까지 올 리가 없잖습니까.”

내 말에 백은호가 귀찮은 듯 대꾸했다. 그 도사에 대해서는 말만 하면 투덜거리는 주제에 꽤나 믿고 있나 보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새 마을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인가가 가까우니 입을 다물고 조용히 걸었지만 마을 역시 우리만큼 조용해서 기분이 묘했다.

집마다 불이 켜져 있고 아직 저녁을 지은 연기의 냄새가 공기 안에 남아있었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지만 집집마다 개가 한두 마리씩 마당 안에 있다가 우리가 지나가면 컹컹 짖어댔다.

그러면 방문이 열리고 연기처럼 희끄무레한 것이 흔들거리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때로는 분명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었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면 저쪽에서는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이는데 무시하고 그냥 가고 있으면 “잘못 봤나…”하는 중얼거림이 들려오곤 했다.

아아…귀신이 되는 기분이란 이런 건가. 내 쪽에서는 저 사람들이 귀신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 양쪽 길가의 집안에서 개란 개들은 모두 짖어대고, 그 소리를 들은 먼 집의 개들도 짖기 시작하자 잠시 후 온 동네가 개 짖는 소리로 요란해졌다. 말없이 조용히 가도 이래서는 의미가 없다.

그것뿐이면 좋겠는데, 어쩐지 백은호도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왜 그래?”

개 짖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긴장하는 태도가 역력해서 물어보자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말하기 무섭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눈썹을 꿈틀거리며 표정이 굳었다.

앞장서서 가던 백은호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유리 상자를 며칠 동안이나 눈 아프게 보아 온 덕분에 지금 위치가 어디쯤인지는 대략 알 수 있었다. 목적지인 노인의 집까지는 아직 좀 더 가야 했다. 하지만 백은호가 멈추니 나도 따라 걸음을 멈췄다.

“치현이 머물던 곳까지 가는 길은 물론 아시겠지요?”

아무 것도 없는 앞을 빤히 바라보며 백은호가 물었다.

그야 마을의 지리는 정확히 알고 있고, 또 방금 걸어온 길도 방향도 기억하고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묻는 거야?

“제가 신호하면 거기로 가십시오. 달리셔야 할 겁니다. 상대가 꽤 빠르니까요.”

뭐? 뭐? 잠깐 지금 무슨…

“제가 드린 고기, 제대로 사용하십시오. 지금입니다.”

뭐?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백은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서부터 뭔가 확 뛰쳐나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볼 수도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두 개, 시커먼 피부와 두껍고 긴 팔.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추하고 괴상한 외모의 어떤 것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백은호가 뭐라고 했었지? 달려야 할 거라고?

꼼짝 않고 서 있는 여우 요괴를 힐끗 보았지만 달려오는 괴물을 가로막거나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심지어 괴물도 백은호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곧장 나를 향해 뛰고 있다.

“젠장!”

백은호 이 자식! 설명은 제대로 해 줘야 할 거 아냐? 아니면 미리 뭐라도 알려주든가! 준비라도 하게 해 주든지!

그러나 지금은 불평할 기운까지 모아서 달려야 할 때다. 두 팔을 열심히 흔들며 나는 캄캄한 마을 속을 필사적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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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객(8)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사람이 급하면 초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더니. 나 좀 급했던 것 같다.

등 뒤에서 머리가 두 개인 괴물이 그것도 꽤 빠른 속도로 쫓아온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뒷덜미가 뻣뻣해진 것도 잠시, 어느새 나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바람처럼, 내 몸은 마을 안의 낮은 울타리와 초가지붕들을 훌쩍 뛰어 넘어 허공을 가로질렀다.

꿈속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사방은 어둡고 뒤에서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쫓아오고 나는 거짓말처럼 하늘을 날고 있었다. 뭐 잠깐이기는 하지만.

날듯이 떠올랐던 몸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다가도 발에 뭔가 닿는 대로 박차고 오르면 다시 훌쩍 허공으로 되돌아갔다. 몸이 가벼워진 것은 아닌데 발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놀랄 만큼 높이 뛰어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 이거 호랑이 선생님 집에 갔을 때랑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민치현의 초가집을 향해 곧장 이동하는 동안, 땅에서는 머리 둘인 괴물이 어둠을 타고 나를 뒤쫓았다. 내 쪽은 직선으로 가고 있지만 괴물 쪽은 길을 따라 가거나 언덕을 돌아가거나 하고 있어 조금씩 거리가 벌어진다. 벌어졌다고 해봐야 20미터 정도겠지만 어쨌든 몇 발이라도 먼저 민치현의 집에 닿은 나는 그때까지 한 손에 꽉 쥐고 있던 쥐고기의 호박잎 포장을 서둘러 풀어헤쳤다.

이것이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에게 줄 고기라고 백은호가 말했었지? 케르베로스에게 주는 빵 같은 건가? 이걸 먹이면 얌전해지나?

쥐를 구운 것이라고 생각하니 꺼림칙했던 것도 저 앞에서부터 뭔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바람에 재가 날리듯 사라져버렸다. 나는 호박잎 안의 쥐고기를 달려드는 시커먼 것을 향해 휙 던졌다. 날아간 것은 퍽 소리를 내며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에 부딪쳤다. 달려들던 녀석이 비틀거리며 한쪽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라…맞아버렸나. 먹이라고 했는데. 던지면 그냥 받아먹을 줄 알았는데. 뭐 저렇게 운동신경이 둔해.

녀석의 얼굴에 맞고 튀어나온 쥐고기는 땅 위에 뒹굴고 있었다. 얻어맞은 쪽의 머리가 손 안에서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는 동안 멀쩡한 쪽 머리가 붉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화난 것 같다.

“아니, 난 먹을 걸 주려고 한 건데….”

그런데 좀 세게 던졌어. 그럴 수도 있지 뭘 화내고 그러냐. 그보다 고기가 발밑에 있네? 안 먹니? 맛있을 텐데. 쥐고기 직화구이…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두 개의 머리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어두운 몸이 휙 움직인다 싶은 순간 눈앞에서 사라졌다.

없어. 아니. 안 보여. 가뜩이나 캄캄한데 피부색도 짙고, 움직임이 빠른데다 소리조차 없다. 녀석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목덜미 쪽으로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쳤다. 몸을 낮추며 허리를 비틀어 다리를 뒤로 뻗은 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퍽 소리를 내며 발에 뭔가 부딪쳐 튕겨나갔다. 아니 튕겨나갔다기보다 저쪽에서 몸을 틀어 피한 것에 가까웠다. 덕분에 발길질은 스치기만 했고 나는 다시 녀석의 행적을 잃었다.

눈에 보이지도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어쩐지 기운도 잘 읽히지 않았다. 아니, 실은 너무 잘 읽히는 것이 문제랄까. 이곳은 도대체가 내가 살던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생기와 기운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나무도 풀도 동물도 바람과 공기도, 땅이나 허공에나 어디에도 생기가 충만했다. 더욱이 어두운 밤이라 숲에서 몰려나온 하찮은 요괴들이 여기저기 나돌아 다녔고 인가가 가까운데도 숲 안으로는 차갑고 습한 기운이 안개처럼 서려 있었다.

여기는 뭐 요괴들 살라고 특화된 지역인가. 마음속으로 불평하는 참인데 오른편에서 휙 달려드는 그림자가 보였다. 피하지 않았다.

75kg의 몸을 거의 10미터 높이로 띄워버리는 자신의 근력을 믿고, 이쪽으로 날아오는 어두운 몸 한 가운데를 정확히 노려 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것과 부딪친 충격이 신발 바닥에서 다리로 쩡 하니 퍼졌다. 찌르르한 고통이 허리까지 올라왔다.

괜히 했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아무래도 충격은 나보다 상대편이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달려든 속도에 더해 내 발차기를 제대로 맞은 녀석이 그대로 나가떨어지더니 꿈틀꿈틀 할 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나면 곤란했다. 녀석을 찬 오른쪽 다리가 아직 저릿저릿 아팠다. 제발 일어나지 말라고 빌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이리 다가오는 희끗한 것이 보였다. 이 상태에서 하나 더 오면 난감할 터였지만, 다행이 다가온 것은 백은호였다.

훌쩍 날듯이 나타난 여우 요괴의 손에는 남자 하나가 뒷덜미를 잡힌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괴물을 상자에 넣고 다니던 그 칼 든 남자다. 지금은 칼이고 뭐고 없었지만.

백은호는 나와 땅에서 꿈틀거리는 괴물을 번갈아 보더니 눈썹을 모았다.

“제가 드린 고기는 왜 버리신 겁니까?”

내가 버리려고 한 게 아니고, 먹으라고 던져줬는데 그게 입으로 안 들어가고 얼굴에 맞았다고 하자 백은호는 비웃는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모를 묘한 표정이 되었다.

저기요. 내가 한심한 게 아니고, 줘도 못 받아먹는 쟤가 둔한 거 아냐? 그리고 어쨌든 잡았으니까 됐잖아.

“어쨌든 제압했으니 됐습니다.”

한숨을 쉬며 백은호가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인데 한숨과 함께 들으니까 기분이 나쁘다.

백은호는 쓰러진 남자의 허리춤에서 몇 개나 되는 호리병들을 떼어내더니 하나씩 귓가에 가져가서 흔들어 본 다음 신중하게 소리를 가늠했다.

“그렇게 하면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있어?”

호리병을 거의 다 흔들어 보는데 내 귀에는 어느 것도 소리가 안 들려서 물었다.

“호리병 안에서 실컷 구르면 뭔가 소리를 낼 수밖에 없겠지요.”

백은호가 태연히 대꾸했다. 뭐냐, 지금. 그러니까 막 흔들어서 괴롭힌 다음 신음소리라든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서 구분하겠다는 거야?

“그냥 다 열어버리면 되잖아.”

“안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요. 이 중 두 개는 짐승이 변한 요괴인 것 같습니다만, 갇혀 있던 것을 꺼내 놓으면 아마 보이는 대로 공격하려고 들 겁니다.”

그것도 그렇긴 한데.

“이것입니다.”

호리병을 귀에 대고 있던 백은호가 하나를 지목해서 내밀었다.

정말?

호리병은 마개 위에 부적을 덮고 그것을 다시 붉은 실로 동여매어 놓고 있었다. 실을 풀고 부적을 뗀 다음 마개를 뽑아내자 호리병 안에서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흰 연기가 확 풍겨 나왔다. 그러나 연기는 금세 뭉치더니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 끙끙댔다. 머리가 허옇게 샌 노인이었다.

“아이고오, 내 허리. 팔 다리 어깨야. 어느 못 되먹은 요괴가 늙은이가 들어있는 호리병을 라면 스프 흔들듯 흔들어 대는지. 사지가 다 부러져서 남은 평생 기어 다닐 뻔했네.”

오, 할아버지. 라면 좀 끓여 보셨네요. 아니, 그게 아니고…

“괜찮으세요?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내 팔에 매달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보면 모르나? 호리병 안에서 어찌나 굴러다녔는지 내 온몸이 그냥 아주…”

아주 멀쩡하게 보이셔요. 몸 안에서 기운이 움직이는 것도 활발하고 생기발랄하고.

“…아주 지저분해졌잖나. 이 먼지 묻은 거 좀 보게.”

그건 짜장 같은데요. 호리병 안에서 식사하셨어요?

“쓸데없이 상대해주지 마십시오, 도령. 물건을 찾았으니 돌아가도록 하지요. 환에게 신호하겠습니다.”

백은호가 차갑게 말했다. 야야, 일이긴 하지만 할아버지더러 물건이라니 그건 좀 실례잖아.

“잠깐, 잠깐 좀 기다리게.”

돌아가겠다는 말에 할아버지가 손을 저으며 백은호를 만류했다. 그리고는 노인답지 않게 재빠른 동작으로 바닥에 흩어져 있는 호리병들을 주워 모았다.

“그걸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백은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가져갈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호리병의 입구를 봉하고 있던 실과 부적을 떼어버리고 마개를 퐁퐁 뽑아낸 것이다. 할아버지가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가 확 솟구치더니 이내 뭉쳐서 살아 움직이는 짐승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호리병에서 나온 짐승들은 우리를 보자 으르렁거렸으나, 할아버지가 휙 던져주는 뭔가를 받아먹더니 조용해졌다.

호리병에서는 짐승 말고도 그냥 연기인 채로 흔들흔들 하는 뭔가가 하나, 도깨비로 보이는 것이 하나, 한 눈에도 여우 요괴 같은 여자가 하나 나왔다.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서 제 갈 길로 떠나갔다.

호리병을 모두 열어 안에 있던 것들을 보내준 다음, 할아버지는 다시 쓰러져 있는 머리 두 개의 괴물 근처에서 까맣게 구워진 쥐고기를 주웠다.

“이런 것을 먹이면 저 놈이 죽게 되지 않나.”

백은호를 바라보며 노인이 탓하듯 말했다. 여우 요괴는 귀찮다는 얼굴로 노인을 외면했다.

응? 그런 거였어? 먹으면 얌전해지는 게 아니라 아예 죽이는 거야? 야, 백은호?

“먹이를 잘 주면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얌전한 놈이지. 저 도사도 요괴를 모으는 취미만 아니면 괜찮은 사람 같은데. 어쨌거나 덕분에 일이 더 쉬워졌네.”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쉬워지셨는데요? 잠깐, 할아버지. 그러고 보니 잡혀간 건…

“저 정도의 도사가 그렇게 쉽게 잡혀갈 리가 없잖습니까.”

백은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너도 알고 있었어?

“여기 오기 전에는 허깨비라도 대신 보내고 초가집 안에 숨어있나 생각했습니다만 의외로 직접 호리병 안에 들어갔더군요. 도사의 집에까지 따라갈 생각이라도 했던 겁니까?”

백은호의 차가운 물음에 노인은 손을 저었다.

“내가 수백 년 산 요괴도 아니고 늙은 몸으로 무슨 그런 모험까지 하겠나. 그냥 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호리병이나 열어주자고 잡혀갔던 거지. 그런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귀인들이 오셔서 도와주시네 그려.”

그리고는 껄껄 웃으신다.

할아버지, 제가요. 할아버지 잡혀갔다고 생각해서 백은호에게 싫은 소리 들어가며 사정해가지고 여기까지 온 거거든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고! 그리고 애초에 이곳으로 온 이유는 뭔데요? 응?

어쩐지 억울해서 따져 묻자 노인, 민치현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소영이가 많이 걱정하던가?”

소영이가 누군데요?

“내 손녀 말일세. 자네들을 여기로 보낸 게 분명 소영이일 텐데?”

아, 치파오 처녀 이름이 소영이구나.

“걱정했으니까 우리를 보낸 거잖아요. 손녀에게는 말도 없이 여기는 정말 왜 오신 거죠?”

노인은 겸연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웃어도 소용없어요, 할아버지! 이유를 대시라고! 내가 할아버지 때문에 구운 쥐고기를 들고 다니질 않았나 머리 두 개인 괴물에게 쫓기질 않나. 걱정하고 마음 졸인 건 또 얼마야. 억울해서라도 들어야겠어!

“뭐 여기까지 왔으니 이미 내 속임수는 들통이 난 거겠지? 실은 그것 때문에 온 걸세.”

노인이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손녀 아이에게 요술객의 기술이라며 보여준 유리 상자가 실은 이쪽 세계를 반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감추고 싶었단 말일세.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이 집 사는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고 있더란 말이야. 모형이 병이 들 수는 없는 법이라, 잠시 전시를 멈추고 병이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네. 그런데 낫는 것이 아니더군. 오히려 점점 퍼져서 같은 집안사람들 뿐 아니라 마을 안의 다른 사람들까지 앓기 시작하는 걸 보고 그게 평범한 병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

전염병이라는 거였다. 이대로 두면 마을 사람들 중 죽거나 앓아눕는 사람이 많아질 테고 그러면 유리 상자 안의 세상이 모형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민치현은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 왔지. 와서 사람들이 낫게 몰래 도왔다네. 그런데 좀 급하게 와서 말이야. 돌아갈 방법을 찾는데 시간이 걸리지 뭔가. 혼자 찾아가려면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고. 그동안 소영이가 나 때문에 걱정하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고. 그래서 메시지를 남겼네만, 소영이는…결국 알게 된 건가?”

유리 상자 안 세계의 비밀을 손녀가 알게 되었는지 묻는다. 물론 알겠지. 다 이야기해 버렸으니까. 게다가 단양의 남굴 속 사람들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다름 아닌 소영이였다.

“이야기 해 줬으니까요. 그게 맞다면 만불산과는 비교가 안 되는 굉장한 업적이라고 하던걸요.”

내 말에 노인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껄껄 웃어버렸다.

“아아 그 녀석 참. 그 아버지에 그 딸 아니랄까봐. 그렇구만. 내가 그 아이를 애 취급하고 있었구만.”

기뻐하는 건지 서운해 하는 건지 모를 복잡한 얼굴로 그는 웃었다.

“이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민치현의 이야기 따위는 조금도 관심 없는 얼굴로 기다려주고 있던 백은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 여우 요괴가 정말로 짜증내기 전에 돌아가야겠다.

백은호의 신호를 받은 환은 우리를 땅 위의 세상으로 불러들였다. 땅 속 세계라고 해도 하늘도 땅도 나무도 뭐 하나 다를 게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람처럼 보이는 곳으로 되돌아오니 어쩐지 안심이 된다.

민치현은 연락을 받고 온 손녀와 함께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손녀가 잔금을 치르러 한 번 더 수리점에 왔지만 어쩐지 유하가 나를 부르지 않아서 돌아간 후에야 알게 되었다.

뭐, 돈은 제대로 받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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