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67화 (167/218)

약속(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눈을 떴을 때, 어쩐지 몸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공에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캄캄한 걸로 보니 아직 아침도 아니다. 잠에서 덜 깼다고 생각하며 옆으로 돌아눕는데 캄캄한 가운데 코앞에 멍청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내 침대에 누가 있어?

“왁!”

놀라서 튕겨나듯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너무 물러났는지 내 몸은 침대를 떠나 아예 아래층 바닥까지 떨어져버렸다. 7미터쯤 날아서 떨어진 것 같은데 하나도 안 아픈 건 일단 접어두고.

누구야? 뭐야? 어째서 내 1인용 침대에 여자도 아니고 사내자식이 누워있는데?

계단을 올라 다시 침대가 있는 위층으로 갔더니 내 침대를 제 것인 양 차지하고 있는 그 녀석은 침대 뿐 아니라 옷까지 내 것으로 입고 있었다. 그런데 심지어 옷이 딱 맞아. 그러고 보면 키도 나랑 비슷하고 뒤통수도 왠지 닮은 것 같고 얼굴도……얼굴도 같아?

가까이서 내려다보자 과연 나와 똑같다.

잠든 얼굴이란 묘하게 무표정해서 평소의 자신과 다른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낯설지만 확실히 내가 맞는 것 같았다.

아니 잠깐. 이 녀석이 나라면 나는 뭐야?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내가 녀석을 꽤 높은 위쪽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과 계단을 오를 때 뛰거나 걸은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듯이 이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텅 비어서 손도 발도 보이지 않고 좌우로 고개를 돌려도 어깨가 보일법한 각도에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애초에 고개를 돌린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돌리려면 적어도 머리와 목은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눈을 사팔뜨기처럼 아래로 모아 보아도 코가 보이지 않는다.

머리조차 없다는 거야?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어떻게 내가 되어서 나 같이 생긴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지?

요괴나 혼령도 볼 수 있는 나다. 내 몸에서 혼만 빠져나온 상태라 해도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이건 혼도 아니고 기운도 아니고 그냥 생각 자체만 둥둥 떠 있는 거랄까. 그런데 그게 말이 돼?

당황한 채로 허둥거리다 문득 어제, 환이 돌아가기 전 내게 했던 경고가 생각났다.

- 도술은 어느 것이나 그렇지만 인과율로 인한 응보를 감당해야 합니다. 본래 술자는 그것을 약화시키거나 피하기 위한 준비기간을 둡니다만, 오늘은 그런 여유가 없었습니다. 대단치는 않겠으나 도령에게도 사소한 문제가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게 사소한 거야? 몸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채로 정신머리만 공중에 붕 떠 있는 게? 설마 이 상태로 계속 가는 건 아니겠지? 아, 어쩌면 몸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으로 조심히 몸에 다가가서 안으로 들어가 보려 했으나, 도대체 내가 아니, 내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몸 안에 들어가든 어쩌든 하지. 그 전에 생각이라는 게 몸과 따로 놀 수 있는 건가?

어떻게든 몸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 또 실패. 결국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아아, 모르겠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 보고, 그때 가서도 변화가 없으면…변화가 없으면…어쩐다?

생각이라는 건 말 그대로 생각. 도대체 남이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운처럼 느끼지조차 못하는 거잖아. 그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채로 난 그냥 생각만 둥둥 떠다니고 내 몸은 생각 없이 살게 되는 건가? 뭔가 오싹하네.

게다가 더 오싹한 것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나 자신의 몸이다.

아주 천천히 배가 부풀었다 꺼지는 것을 보면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무표정한 얼굴로 꼼짝 않고 누워있는 내 모습이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차라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자고 있나보다 하겠는데 나잖아 저건.

자신의 자는 모습 같은 것을 볼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내가 내 앞에서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으로 누워있는 건 정말이지 괴상했다. 그 괴상한 기분에 견디지 못하고 방에서 나갔다. 날이 샐 때까지 돌아다니다 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이동하는 것만은 자유로웠다. 아니, 오히려 몸이 있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어디든 이동해 버린다. 거리의 멀고 짧은 것은 아무 관계없었다. 생각과 거의 동시에 원하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게다가 몸이 없는 상태인 나는 벽이나 물건이 가로막고 있어도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라면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순간 나는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바깥, 수리점 앞 냇가의 산책로에 이동해 있었던 것이다.

우아아…이거. 의외로 멋진데.

더 먼 곳도 될까? 하는 생각으로 호랑이 선생님이 근무했던 중학교를 생각하자 순식간에 번쩍, 그것으로 이동했다. 전에 본 그대로 어두컴컴하고 왠지 음침한 학교 건물이 눈앞에 있었다. 그럼 더 먼 곳도?

내가 가본 가장 먼 곳이라면 본래는 이무기였던 소설가의 저택 정도일까? 차로 세 시간쯤 달려서 도착했으니까.

그곳의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곧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울창한 숲과 중세식의 요새처럼 생긴 건물이 어둠 속에 까만 실루엣을 그리며 서 있었다.

나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뭔가 너무 대단하잖아. 잠깐. 이게 꿈이라면 더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를테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다시 번쩍 이동해서 어디선가 본 듯한 나무 밑에 서 있었다. 가지를 울창하게 뻗은 거대한 계수나무였다. 어디선가 기분 좋은 향기가 솔솔 풍겨오고, 하늘에는 엄청나게 큰 달이 아니…지구가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와…나 정말 달에 왔어. 그리고 달나라에는 정말로 토끼가 살았다.

멀리서 약초가 든 바구니를 안고 가던 토끼 한 마리가 나를 보더니 커다랗고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았다. 토끼라기에는 사람처럼 저고리와 바지도 갖춰 입고 앞발을 손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달나라에서 선단을 만든다는 그 토끼인가.

그러나 나를 보던 토끼는 이내 관심 없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타박타박 걸어가서 바구니에 든 약초를 돌절구 안에 넣고 빻기 시작했다. 저 토끼는 내가 별로 안 신기한가보다. 나보다는 약초에 더 관심이 많은 토끼였다.

바지저고리 차림의 토끼가 약초를 빻는 동안 한쪽에서는 여자 옷차림의 토끼가 약초를 말리느라 정신없었다. 일중독 토끼부부인가. 어찌나 열심히 일하는지 말도 걸기 어려웠다.

나는 달에서 펄쩍 뛰어 멀리 파랗게 보이는 지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구름 때문에 내가 살던 곳이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귀찮다고 생각한 순간 하얀 베일처럼 두르고 있던 구름이 확 흩어져 사라졌다. 오, 보인다. 덕분에 금세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와 늘 길을 걸으며 봤던 거리며 건물들을 높은 곳에서 유유히 날며 구경할 수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캄캄한 시각에도, 거리는 결코 한적하지 않았다.

언젠가 밤중에 길을 걸으면 본 것처럼, 어둠을 타고 바깥으로 나온 혼들이 물을 따라 흐느적흐느적 걷는 것이 보였다.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떠돌다가 자신을 잃어버린, 그래서 한없이 헤매는 부유령들이었다.

저런 혼이라면 저승사자들이 데려가야 하는 거 아냐? 형님이고 형님 부하들이고 일을 제대로 안 해요. 좋아. 꿈이니까 기분이다. 내가 좀 도와드리지.

흐느적거리며 걷는 혼들에게 다섯째 하늘로 이어지는 문을 열어주었다. 생각만 하니까 만들어지는데?

덕분에 천변이 좀 정리된 것 같다 싶으니까 이번에는 어디선가 높고 날카로운 짐승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후다닥 달리는 소리와 함께 비쩍 마른 고양이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녀석은 나를 보더니 등을 곧추세우며 천천히 그늘 속으로 숨었다.

마른 고양이가 튀어나왔던 어둠 속에서 역시 털이 지저분한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아아, 길고양이들이 영역다툼이라도 하고 있었나 보네. 그나저나 도망간 녀석 꽤 배고파 보였는데. 꿈이지만 불쌍하니까…

녀석이 숨은 쪽을 보며 생각을 하자 생각한 그대로의 광경이 펼쳐졌다. 동그랗고 예쁜 그릇 안에 고양이 사료가 산처럼 쌓인 채로 나타난 것이다.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다가가서 냄새를 맡는 것이 보였다.

저런 상상도 이뤄지는 걸 보니 내가 제대로 꿈을 꾸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기왕 꿈꾸는 김에 도시 안의 모든 고양이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생각난 김에 고양이뿐 아니라 개와 근처의 야생동물들도 돌봐주고 눈에 띄는 원귀들도 저승으로 보내버리고 병에 걸린 아이들도 낫게 해주고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다 슬슬 달이 사라지고 날이 밝으려고 하니 거리에는 이제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다. 새벽부터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기를 맑게 정화시키고 기운을 북돋아주고 지저분한 쓰레기들을 모두 치워버려서 깨끗하게 만들어놓았다.

“오늘따라 공기가 좋네. 그래서 그런가 피곤하지도 않고.”

“그렇지? 하늘도 이상하게 맑아. 저렇게 파란 거 처음 봐.”

새벽부터 등교하는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허공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오늘은 공부도 잘 될 거다. 내가 그러라고 빌어줬거든.

빌어주는 김에 운전하는 사람들은 사고 없기를, 일하는 사람들은 피곤하지 않기를, 싸운 사람들은 화해하고 걱정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결의 실마리가 생기고 바라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꿈속의 하루일뿐이라도 오늘만은 누구든 어디에 있든 단 하나도 후회할 일이 없는 하루가 되기를, 나는 빌었다.

터무니없는 바람이라도 괜찮았다.

그리고 내 방으로 돌아가자 어쩐지 끌어당기는 것처럼 내 의식이 몸을 향해 이끌리는 것을 느꼈다.

“어…….”

눈을 뜨니 천장이 보였다.

잠에서 깼나? 그래도 혹시나 하고 일어나 내 몸을 내려다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기분 좋은 꿈을 꿔서 그런지 몸도 가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험상궂은 얼굴이 확 들이닥쳤다.

“윽! 노, 놀랐잖아요!”

그 귀신같은 긴 머리 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그리고 꽃은 왜 꽂고 다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그러나 오늘은 이상한 옷차림이나 머리에 꽂은 꽃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양이천왕은 내 집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다정하거나 온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인상이었지만 차가운 얼굴을 하고 큰 키로 위에서 내려다보자 죄도 없는데 심장이 쫄아들었다.

“왜요오…?”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역팔자로 솟구쳐 있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요? 몰라서 묻는 거냐?”

몰라서 묻는 건데요.

“네놈 세상의 규칙을 멋대로 뒤집어놓은 것으로 부족해서 내 땅에까지 간섭을 한 주제에 왜요 라고?”

목소리에 물리력이 있었다면 양이천왕의 목소리는 나를 잘근잘근 썰어서 헤진 걸레조각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말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나를 이 사이에 넣어 씹어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뭘…어쨌는데…요?”

목소리가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으득 하고 어금니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우아…저 분 진짜 화난 것 같은데. 양이천왕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톱을 세웠다 모았다 하며 꿈틀거렸다. 그러나 결국 화를 터뜨리지는 않고 그가 말했다.

“뭘 했는지 네 눈으로 확인해라.”

말하며 손짓하자 2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뭔가 계단을 지나서 작업장으로 날아왔다. 날아온 다음 작업 선반에 턱 하니 안착한 그것은 다름 아닌 내 방의 티브이였다. 양이천왕의 손짓에 전원코드까지 저절로 꽂히더니 티브이 화면이 번쩍 켜졌다. 그리고 아나운서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어제 제주도에서 전남 해안에 걸쳐 있던 구름이 갑자기 사라지는 놀라운 기상 변화가 있었다는 뉴스를 전해주었다.

아, 그거 내가 꿈 속에서 귀찮다고 생각하니까 없어지던데요.

일기예보가 어긋나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든가 오늘 이 지역 미세먼지 농도는 제로에 가깝다든가 하는 말도 있었다.

꿈속에서 공기가 맑아지라고 했던…것 같은…데요.

다음으로는 지난 밤 도시 안의 길고양이를 위한 사료를 어떤 단체가 대규모로 비밀리에, 기습적으로 제공한 덕분에 여기저기에서 빈 밥그릇이 수천 개나 수거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건 꿈…인줄 알았는데…?

저기, 그럼 그거 다 꿈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내가 한 거야? 그게 다 현실이었어? 달나라 갔던 것도? 귀신들 돌려보낸 것도? 고양이들 먹인 것도? 그 뒤의 일들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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