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69화 (169/218)

약속(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그럼, 나와 결혼해 줘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공주와 왕자가 결혼하는 게 다음 순서니까……뭐?

누구랑 뭘 해?

유하가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꾸…꿈이니까…?”

간신히 대답하자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서가 아니에요. 꿈에서 나가면, 그때 나와 결혼해 줘요.”

나가면? 그때? 밖에서? 결혼을?

귀로 들었지만 머리가 이해 못하는 단어들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잠깐, 이봐. 그게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내용이야?

“도, 동화처럼…?”

반쯤 멍청해진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였다. 눈을 깜박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문득 웃었다.

“그러네요. 동화처럼.”

하지만 꿈이 아닌 바깥에서,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그 전에 나는 12월이 되면 다시 기억을 뺏기고 이전의 일 같은 건 잊어버린다고. 영원이 문제가 아니라 몇 개월이면 끝날 걸.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문득 번졌던 미소가 아련하게 남은 채로 그녀는 내게 물었다.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었다.

땅 밑의 세상과 땅 위의 세상을 뒤바꾸어 버리면, 땅 속 세상이 본래 우리의 세상이었던 것처럼 살면 정말로 그것이 가능했다. 이목천왕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얼마든지……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있었다.

어떻게 했었지?

나는 내 안의 심장에게 물었다. 내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유하의 심장은 12년 전 내가 한 일도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했지? 내게 알려줘. 기억을 보여줘.

가슴 속에서 심장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지며 단단하게 굳었다. 거부하고 있다. 안 돼. 알려줘. 기억을 줘. 모든 것을 다 알아야겠어. 찾아내겠어. 웅크려 거부하는 심장을 열어젖히고 나는 감춰진 기억들을 쏟아냈다. 기억이, 기억들이, 와르르 밀려나왔다.

질식할 것 같은 무게의 기억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실타래처럼 똬리 튼 시간을 따라 끝없이 쏟아졌다.

그 안에 파묻힐 것 같은 와중에도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들을 헤치며 원하는 것을 찾았다. 내 힘과 기억을 돌려받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해명.”

작은 목소리가 심장을 두드리듯이 울렸다. 내 심장은 내 가슴 속에 없을 텐데…그런데 두근 두근 하고,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웠다.

“해명. 해명. 해명.”

귀 바로 옆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속삭였다. 내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려 있는 유하의 모습이 겨우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목덜미에 바짝 붙어있는 볼이 움직이며 부대끼는 것이 느껴졌다.

“듣고 있어.”

대답할 때까지 계속해서 부를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유하가 숨을 들이쉬고는 목에 두른 팔에 좀 더 힘을 줬다. 내게 꼭 붙은 몸이 조금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 좀처럼 떨어지지도 얼굴을 보이지도 않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내게 보이기 싫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목을 휘감은 팔은 뼈처럼 딱딱해져서 인간 이상의 힘으로 내 몸을 조였다. 목덜미에 닿은 뺨이 거칠고 메마르다. 머리카락이 잔뿌리처럼 굵고 부스스해지고 팔에서 몸에서 조그만 가지들이 돋아나려고 했다.

요괴의 심장을 내게 준 그녀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을 때 그녀는 인간의 모습이지만, 마음이 흔들리면 요괴의 모습으로 변했다. 요괴의 몸에 인간의 심장을 갖고 있는 대가였다.

티 하나 없이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도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메마른 얼굴도 나는 똑같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유하는 요괴의 모습을 내게 보이기 싫어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모습도, 몸을 옷처럼 가리면서 돋아난 덩굴들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걷는 모습도, 가늘고 긴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도 똑같이 사랑스럽다고 말했지만 어떻게 해도 그녀는 알아주지 않았다.

반쯤 나무가 되어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녀는 끔찍이 싫어했다.

바르르 떨고 있는 딱딱한 몸을 가만히 감싸 안자, 팔 안에서 그녀는 천천히 부드럽고 따뜻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내가 잠시 기억 속을 헤매는 동안, 몸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무서워했구나, 너는. 다시 12년 전과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할까 봐. 아니 정말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유하의 기억 속에서 또 하나의 나는, 인간의 몸으로 보낸 십 수 년 만큼 내가 성장했을 거라고 말했었지만 정말일까? 사실 내가 보낸 시간들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만 할 뿐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배우지도 자라지도 못한 채로 한 자리에서 맴도는 것이다.

조금도 변하지 못하고.

“너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아.”

어쩌면 유하는, 그것을 나 자신보다도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얼마나 멋대로인지 알아. 너는 내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그런 나와 결혼해 줄 거냐?”

유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비비적거리며 목덜미를 간질였다.

“바보구나.”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하기로 했다.

함께 꿈에서 나간 다음, 아무래도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도깨비들에게 알렸더니 어쩐지 잔치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도령이 혼례를? 경사로구만!”

“어머나, 정말이오? 언제 말이오?”

딱히 정하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렇게 대답하자 여자 도깨비들 사이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납채는? 연길은? 납폐는 어쩔 셈이오?”

“혼례 같은 막중대사를 아무렇게나 치를 셈은 아니겠지요?”

“시간이 충분치 않으면 준비가 소홀하게 되지 않소.”

사실 아무 생각 없었던 나는 약간 당황했다. 여자 도깨비들이 이럴 줄 알았다며 도무지 남자들이란 세심한 구석이 없어서 여자 마음도 모른다느니 신부가 될 유하만 고생이라느니 잔소리를 하면서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리고 유하의 옆에 우르르 몰려가서는 이제 곧 새신부가 될 테니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며 피부에 좋은 열매나 약초며 혼례식 때 입을 옷 같은 걸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졸지에 혼자 떨어진 나는 남자 도깨비들이 뭔가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여자 도깨비들 말대로 남자들이란 세심한 구석이 없어서 “도령, 잘 됐수.”라든가 “이제 얼마 있으면 도령이 아니라 서방일세.” 같은 소리나 하며 껄껄 웃었다.

도깨비 말고 남자라면 백은호 뿐인데, 여우 요괴는 결혼하게 되었다는 내 말에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는 태도로 축의금은 통장으로 보내겠다고 대꾸했다.

요괴에게 뭘 바란 게 잘못이지. 좀 정상적인 의논상대가 필요했다. 요괴 말고 사람으로, 그것도 결혼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아직 정리되지 않아 뒤죽박죽인 상태의 기억 속에서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아보려니까 한 명이 나오기는 했다. 작년 초가을쯤에 찾아왔던 손님이었다.

그때는 결혼을 앞둔 젊은이였지만 지금쯤은 결혼을 하고 유부남이 되었겠지. 게다가 결혼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남자 쪽에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지만 신부는 인어였던 것이다. 인어와 결혼한 서넙도 총각…아니 이제는 총각이 아니구나. 아무튼 그 친구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가 맡겼던 물건인 산호 가락지를 수리해준 뒤로 딱히 연락이 오갔던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싱싱한 전복을 택배로 보내주곤 했다. 가끔 전복 사이에는 인어인 부인이 넣었을 것 같은 진주가 들어있기도 했다.

전화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이런 일로 연락해도 되나 싶었지만 내 황폐한 인간관계에 이보다 나은 의논 상대는 찾기 힘들 것 같으니…

그러나 뜻밖에도 서넙도 총각은 반갑게 내 전화를 받았다.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펄쩍 뛰며 좋아하는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정말 잘됐습니다. 축하합니다. 우리 명화도 알면 좋아할 겁니다. 청첩장은 언제 보내줄 겁니까? 그야 저도 당연히 가야죠. 양식장 일이요? 괜찮아요. 부모님도 계시고. 그리고 사장님 결혼식이라는데 당연히 제가 축하드리러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누구 덕분에 우리 명화랑 결혼하게 되었는데요.”

이 남자는 아직도 우리 명화인가.

변함없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진 기분으로 나도 모르게 그와 오랫동안 통화하게 되었다. 서넙도 남자는 소소한 주변 이야기를 했다가 결혼 이야기로 돌아갔다가 ‘우리 명화’ 이야기에 잠시 열을 올렸다가 하며 끝날 것 같지 않은 대화를 이어갔다.

“…라고 해도 어찌나 열심인지. 물질 할 때 보면 해녀가 따로 없어요. 전복 고르는 거나 따는 실력이 아주 귀신같다니까요. 결혼한 뒤로 양식장도 잘 되고 있어서 부모님들이 복덩이가 들어왔다고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수영할 때는 물고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그야 부인은 인어이니까요. 여전히 이 남자는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참, 그런데 우리는 결혼식 전날에 미리 가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너무 빠듯하면 우리 명화가 힘들어 해서요. 안 그래도 요새 배가 좀 나와…예? 아뇨. 살 찐 게 아닙니다. 하하하…아이를 가졌어요. 올 겨울에 낳는답니다. 그런데 쌍둥이거든요. 그것도…놀라지 마십시오. 전 듣고 깜짝 놀라서 초음파 사진 보기 전에는 못 믿었어요. 쌍둥이도 보통 쌍둥이가 아니라 일곱 쌍둥이에요. 어디서 들어보셨습니까? 일곱 쌍둥이요. 기네스북에 올라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그는 자랑스럽게 말하고 껄껄 웃었다.

기네스북에 오른 최다 쌍둥이는 아홉 명이네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일곱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부인의 핑계를 대며 그의 축하는 마음만 받기로 했다. 하객의 대부분이 요괴일 것 같은 내 결혼식에 그가 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행복해 보이는 그와 그 후로도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하라는 유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힐끗 보니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수다를 떨고 있었던 것 같다.

정작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안 한 것 같은데,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행복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 행복이 전염되는 건지 모른다.

영감 도깨비가 길일을 택하고, 잔소리 심한 여자 도깨비들이 나나 유하 대신 준비를 도맡아서 그로부터 열흘 후에 우리는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날 새벽부터 도깨비들이 작업장을 치우고 초례청을 준비하는 동안 유하는 여자 도깨비들에게 둘러싸여 혼례복을 입었다.

하객들은 정오가 가까워지자 수리점 안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문으로 들어온 손님도 있고 벽을 통과해 들어온 손님도 있었으며 어디선가 번쩍 나타난 손님도 있었다. 하객들 대부분이 요괴인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몇 안 되는 인간 하객 중에도 평범한 사람은 수호 녀석 일행과 박선생 정도일까.

사모관대 차림으로 서서 손님들을 맞고 있자니 작업장 안을 채우는 하객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이 시간에는 물건의 모습으로 잠들어 있을 도깨비들이 어기적거리며 들어와 왜 하필 대낮부터 결혼식이냐고 불평을 하다가 호랑이 선생님이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자 후다닥 한쪽 구석으로 몰려갔다.

손님 가운데 몇 안 되는 인간 중 하나인 수호 녀석은 수민이와 노앵설을 데리고 왔다. 노앵설은 오자마자 선반으로 기어 올라가서 가장 위 칸을 차지했다. 높은 데로 올라가는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물론 환과 규희 부부도 왔는데 둘 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요괴들로부터 인간 취급은 받지 못했다. 하긴 내 생각에도 환은 아직 몸에서 나뭇잎이 돋아나는 게 나무 요괴 같고, 규희는 조금만 방심하면 보는 사람의 넋을 놓게 만드는 길상과니까.

손님들의 발밑에서는 요 앞 개울의 용신이 구불구불 기어 다녔고 구석진 곳으로는 도마뱀이라든가 쥐라든가 작은 요괴들이 밟히지 않으려고 벽에 붙어 다녔다. 반면 산신들, 성황신, 가택신 같은 신령들은 위쪽의 허공에 느긋이 떠서 서로 인사를 나누거나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했다.

그 사이로 푸르스름하니 뭔가 나부끼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려고 하자 어디론가 사라진다.

카페 에코의 종업원들도 가게 문을 닫고 찾아와 줬다. 그들만이라면 좋았을 텐데 일흔일곱 마리의 애벌레들까지 몰고 오는 바람에 작업장 안은 바닥과 허공뿐 아니라 벽까지 꽉 차고 말았다. 애벌레들의 방문에 좋아한 건 나비 요괴뿐이었다.

백은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정오가 거의 되어서야 찾아왔다가 무진을 보자 매우 겸손하고 얌전해졌다. 저 오래 묵은 여우요괴도 산신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손님들은 그 후로도 계속 밀려들었다. 사람들이었다면 곤란했겠지만 대부분 요괴나 신령이어서 자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례가 거행되었다.

활옷을 입은 유하가 수모들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올 때는 하객들 사이로 나직한 탄성이 물결쳤다. 시늉으로만 살짝 들어 올린 한삼에 턱이 조금 가려졌을 뿐, 신부의 얼굴은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신부 기다리다 신랑 목 빠질라.”

천천히 걷는 신부에게 도깨비 하나가 농을 던지자 하객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준비한 시간에 비해 예식은 오히려 짧았다. 장모의 역할을 대신한 물레 도깨비에게 나무 기러기를 드리는 전안례.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마주 서서 절하는 교배례. 술을 나눠 마시는 근배례까지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근배례가 끝나고 하객에게 인사를 할 때, 나는 이 짧은 예식이 이 자리의 하객들은 물론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분명히 선언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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